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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으드드득. 이를 갈고 또 갈았다. 검푸른 비단처럼 결이 곱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냉기 서린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그렇게 나온다면 기필코 돌아가 줘야겠지.”
유홀은 낮은 천장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옥제(玉帝)를 향해 차갑게 조소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얻은 기회는 답답하고 절망적인 시작으로 또 한 번 그를 내려앉힐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야말로 옥제와 그의 측근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 바람대로 지상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어 줄 마음 따위 없었다. 거기다 이렇게 시비를 걸어온다면야 더더욱.
그런 유홀에게 작금의 가장 큰 문제는 단성이었다. 남루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색색의 비단실을 바라보며 턱을 쓰윽 문질렀다. 밤새 집중해 수를 놓던 단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무어라 말 한 마디 건네는 법도 없었다. 편안한 동시에 기분이 묘했다. 완벽한 무관심은 일찍이 겪어 본 바 없어서였을까. 유홀은 턱을 괴고 단성을 관찰하기 시작했더랬다.
뭐, 제법 봐줄만한 얼굴이었다. 희고 갸름한 작은 얼굴 안에 유난히 또렷하고 맑은 눈동자와 딱 어울리는 모양새의 콧대와 연한 복숭아 빛 입술이 적당히 예쁘장했다. 허나 그 정도야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다소 엉성하게 묶여 반도 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단성에게서 자꾸만 묘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별 시답잖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야무진 손끝에서 멈춘 시선을 억지로 돌린 유홀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한가하게 계집의 얼굴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계약을 맺을 궁리부터 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차가운 벽에 기대 생각을 정리하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고 단성은 없었다. 작은 천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깨끗한 무이포단만이 그의 어깨에 둘러져 있었다. 이까짓 얇은 천 조각 하나가 무에 그리 도움이 된다고. 비아냥거리면서도 포단은 여태 그대로 두었다.
“이상한 계집.”
미끄러져 내리는 이불자락을 추스르던 유홀은 피식 웃었다.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났을 때 느끼는 희열은 오랜만이었다. 엄지를 살짝 깨물며 미소를 흘리는 유홀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도화 상단의 수장, 윤랑의 저택은 으리으리했다. 한갓진 촌에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화려한 기와와 한껏 높인 대문 앞에서도 단성은 크게 기죽지 않고 기척을 했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자 분주한 소음이 쏟아져 나왔다. 어디서 귀한 손이라도 오시는 날인가 보다. 집안 일꾼들이 죄 나와서 앞뜰과 뒤뜰을 쓸고 닦고 버름한 문틀까지 손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잠시 바라보던 단성은 묵은 빨랫감을 이고 지고 나가는 한 무리의 여비들을 지나쳐 조용히 침모를 찾았다.
심부름 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사이, 우물 앞에 모인 계집종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들끼리 까르르 웃는 소리가 뜨거운 물로 한바탕 목간을 마친 놋그릇들처럼 반짝반짝하였다. 단성의 입가에도 살포시 미소가 스쳤다. 정말로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인지 집안 구석구석에 활력이 넘쳤다.
“침모가 보잡니다.”
어린 계집종이 불렀다. 보퉁이를 꼭 움켜쥔 단성이 아이를 따라갔다.
“아이고, 한참 전부터 기다렸던 게지. 손이 차네, 차. 어서 들어와요.”
침모가 살뜰하게 아는 체를 했다. 일전에도 몇 번 일감을 맡은 적이 있어 단성의 사정을 대강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다과와 따뜻한 차까지 내주었다.
단성이 달짝지근한 다과를 한 입 먹고 쓴 찻물로 입 안을 헹굴 때였다. 완성된 수를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피던 침모가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말 수놓는 솜씨가 일품이셔. 내 밑으로 딱 데려다 끼고 있고 싶다니까요. 허면 끼니 걱정은 하지 않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쇤네가 공연히 불경스럽게…….”
“마음 쓰지 마시게.”
단성은 옅게 미소했다. 반가의 핏줄이라도 끼니 걱정 없이 산 적이 없었다. 침모 역시 세상천지 혼자되고 곤궁하여 삯바느질을 하며 사는 처지가 안쓰러워하는 말임을 안다. 단주의 여식과 자신이 동년배라 하였으니 더욱 비교되었을 테고.
이름뿐인 양반에 얽매이지 않으려 해도 살아가는 일은 녹록치 않다. 양반도 헐벗고 허기지고 춥고 더운 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가진 것 없이, 함께 토닥이며 살 식구 하나 없이 세상에 남겨진 단성에게는 어쩌면 더 모질고 힘들었을 시간……. 하여 단성은 그저 웃었다.
“이리 곱게 수놓은 옷을 입으시면 우리 아기씨 얼마나 예쁠까. 아무리 무뚝뚝한 사내라도 사르르 녹고 말 테지요. 모진 상사병도 이제는 끝이 날랑가. 요, 요 입방정. 내 왜 이리 주접스럽게 말이 많은지. 호호호호.”
제 무례한 언사가 쉬이 넘어감에 안도한 참모가 또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단성은 역시나 미소로 대꾸하며 찻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다음 일을 기약하며 삯을 받아 나오는데 먼발치에서 단주의 여식이 보였다. 연이라 했었지. 다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모양이다. 단성은 샛노란 꽃비단 저고리와 풍성한 능환(綾紈) 치맛자락, 반짝이는 옥구슬과 능라로 머리를 치장한 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사로운 옷매무새가 아니라도 빼어난 미모와 당당한 걸음걸이 그 자체로 빛이 나는 듯했다. 입가에 감도는 고혹적이고도 도도한 미소 또한 아름다움에 윤기를 더했다.
잠시 눈이 마주치자 연은 곧 시선을 돌렸고 단성은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텅 비어버린 보퉁이를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코가 닳고 헤어져 발끝이 어슴푸레 보이는 신으로 타닥타닥 빠르게 걸었다. 단성이 바깥채에 당도했을 때였다. 침모가 미리 일러둔 것인지 아까의 어린 계집종이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솔솔 풍겨오는 냄새가 열지 않아도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단성은 거절치 않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꾸러미를 받아들고 대궐 같은 집을 나서는 길, 발갛게 익어 내리는 단풍잎이 발끝에서 굴렀다. 바삭바삭 밟아지는 그 소리가 단성을 끝없이 따라왔다.
얻어온 먹거리는 마을 입구 문배 네 들러 풀어놓았다. 원체 없는 살림에 어린 것들까지 키우느라 중년에 벌써 허리가 반은 휘어버린 문배 어멈이 눈시울 붉혀가며 고마움을 전했다. 무던한 미소로 받아준 단성은 이제 정말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문을 열던 단성의 두 눈이 크게 열렸다. 언제나 혼자였던 텅 빈 방, 그곳에서 찢어진 거죽처럼 축 늘어져 있는 유홀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 그가 있었지. 저도 모르는 사이 짧게 미소가 스쳤다.
“죽었습니까?”
“하아.”
짜증인지 귀찮음인지 모를 한숨에 단성은 내심 안도했다. 피차 다정히 굴 사이는 아니었다. 이내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 된 단성은 어지럽혀진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천계로 돌아가신다면서요.”
“응, 가야지. 가긴 갈 것인데…… 전일도 말했다시피 네 도움이 필요하다.”
“저 또한 말씀드렸을 텐데요. 전 천신과 계약을 해서 무언가를 이룰 마음이 없다고.”
그 말까지 듣고 유홀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누워 있었다고 믿겨지지 않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혹하듯 속삭거렸다.
“다시 생각해 보아라. 천계의 신이 네 뒷배가 돼준다지 않아.”
단성이 말간 눈으로 유홀을 바라보았다. 작은 방에 사람이, 아니 사람과 천신이 있으니 제법 꽉 찬다. 오랜만에…….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가장 바라는 것은 이제 가질 수 없을 테니까. 단성은 거절의 의사를 재차 밝히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단칼에?”
“예.”
여지라고는 주지 않는 확답에 유홀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날카로운 시선은 단정하고 차분한 그래서 더 밉살스러운 단성의 마른 어깨에 박혔다.
“좋다. 무욕한 인간도 드물게 있겠지. 허나 당장은 없어도 훗날 이루고픈 게 생길지도 모르지 않느냐. 직접적인 생사와 관련된 것만 아니면 뭐든 해 줄 테니……. 그게 아니라면 이 계약 네가 아닌 날 위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해 줄 테냐? 네가 계약 가능한 상태인 이상 다른 계약자가 나타날 수 없고 이 상태로는 신력을 쓸 수도 없단 말이다.”아무리 말이 길어져도 단성은 쉽사리 넘어올 것 같지 않았다. 유홀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벽에 등을 쾅 부딪쳤다.
그런 유홀을 잠시 바라보던 단성은 곡식 꾸러미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얼마 후, 쌀보다 보리, 고구마, 무청 시래기가 더 많이 섞인 밥이 가마솥에서 포근하게 김을 내었다. 단성은 작고 낡은 소반 위에 수저 두 벌을 놓는 것을 시작으로 상을 차렸다. 아침을 들기에는 많이 늦은 시각이라 그 손길이 분주했다. 단 맛이 도는 무를 넣고 끓인 된장국까지 얹어들고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유홀이 낡은 종잇조각을 팔랑이며 말했다.
“시우라는 자, 네게 소중한 사람인가? 온통 그에게 쓴 서찰인데 보내지 못했군. 계약을 한다면 이 따위는 당장이라도…….”
단성은 상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유홀에게서 서찰을 낚아챘다.
“아무리 천신이라도…….”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것인지 슬픈 것인지도 분간 가지 않았다. 흩어진 서찰을 모조리 그려 모은 단성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돌아 탁 트인 들판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고 더는 막을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허흑.”
가쁜 숨을 들이켜 참아 보았지만 봇물처럼 터져 나온 울음은 그대로 가슴을 쳤다. 단성은 차마 찢지도 못했던 서찰을 품에 안고 한참이나 울고 또 울었다.
*
어려서 역병에 부모를 잃고 몸 약한 오라비와 단둘이 세상에 남겨졌다. 수재 소리를 듣던 오라비였으나, 빼어난 학식은 유리 같은 몸에 갇혀 빛을 보지 못했고 살림은 궁핍했다. 그러나 둘이서 올곧게는 살았다. 어린 단성은 삯바느질 하고 오라비는 상단에 통문 써주는 일로 연명하였으나 마음만은 부끄럼 없이 반듯하게, 그리 살았더랬다.
무연 상단, 오라비가 일감을 받던 그곳에서 시우를 알게 됐다. 그는 애면글면 하는 삶 속에서 꾸는 설레고 보드라운 꿈이었다. 차마 손 뻗어 잡을 수조차 없는 그런 꿈 말이다. 시우는 상단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고리대금으로 부를 쌓아 양반 신분을 사들인 아비가 사람들의 피고름을 짜내어 배를 불린다는 무연의 악명은 그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반듯하고 예의 바르고 학문에 목말라 있는 젊은이일 뿐이었다.
오라비와 둘도 없는 친우가 되면서 시우는 단성의 삶 속으로도 성큼 들어왔다. 두근거리게 했고 웃게 했다. 허나 시우의 아비가 단성이나 골골 대는 그녀의 오라비, 곤궁한 집안도 모다 못마땅해 하는 것을 알았기에 언감생심 그 앞에 여인이기를 바라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끝까지 그랬어야 했는데……. 단성은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구겨진 서찰을 들고 무작정 내달렸다. 가슴이 아픈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집어 낼 재주가 없었다.
겨울의 끝자락 오라버니는 왈칵 붉은 피를 토해냈다. 괜찮다는 오라비의 말과 달리 그는 하루가 다르게 바싹 마른 고목처럼 변해갔다. 그때 처음으로 시우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말없이 단성을 안아주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길은 다정했다. 봄을 기다리지 못한 오라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시우는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언제나처럼 흐릿한 채였다. 남매로도, 연인으로도 확실한 선을 긋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다. 어느덧 열여섯이 된 단성에게서 제법 처자태가 나자 그들의 관계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소문도 커져만 갔다. 그럴수록 시우는 부친과 대립했고 괴로워하며 방황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단성은 아팠다. 우유부단하게 구는 시우를 탓하는 마음은 없었다. 상처받기 싫어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곁을 맴도는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지켜 볼 수만도 없었다. 제가 족쇄가 되어 그를 묶고 망가트릴까 두려웠다. 그들의 끝이 그렇게 추잡하고 끔찍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렵사리 마음을 정하고 달포 넘게 소식 한 줄 없는 시우를 찾아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날 거기서 작은 염원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시우와 부친이 나누는 이야기는 하나하나 비수가 되어 단성을 찔러댔다.
으드드득. 이를 갈고 또 갈았다. 검푸른 비단처럼 결이 곱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쥐어뜯다가 냉기 서린 벽에 머리를 쿵 하고 박았다.
“그렇게 나온다면 기필코 돌아가 줘야겠지.”
유홀은 낮은 천장 너머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옥제(玉帝)를 향해 차갑게 조소했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얻은 기회는 답답하고 절망적인 시작으로 또 한 번 그를 내려앉힐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그것이야말로 옥제와 그의 측근이 바라마지 않는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 바람대로 지상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어 줄 마음 따위 없었다. 거기다 이렇게 시비를 걸어온다면야 더더욱.
그런 유홀에게 작금의 가장 큰 문제는 단성이었다. 남루한 방에 어울리지 않는 색색의 비단실을 바라보며 턱을 쓰윽 문질렀다. 밤새 집중해 수를 놓던 단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눈 한 번 돌리지 않고 무어라 말 한 마디 건네는 법도 없었다. 편안한 동시에 기분이 묘했다. 완벽한 무관심은 일찍이 겪어 본 바 없어서였을까. 유홀은 턱을 괴고 단성을 관찰하기 시작했더랬다.
뭐, 제법 봐줄만한 얼굴이었다. 희고 갸름한 작은 얼굴 안에 유난히 또렷하고 맑은 눈동자와 딱 어울리는 모양새의 콧대와 연한 복숭아 빛 입술이 적당히 예쁘장했다. 허나 그 정도야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다소 엉성하게 묶여 반도 넘게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단성에게서 자꾸만 묘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별 시답잖게……. 부지런히 움직이는 야무진 손끝에서 멈춘 시선을 억지로 돌린 유홀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 한가하게 계집의 얼굴 구경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계약을 맺을 궁리부터 하는 게 옳았다.
그렇게 차가운 벽에 기대 생각을 정리하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았고 단성은 없었다. 작은 천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든 깨끗한 무이포단만이 그의 어깨에 둘러져 있었다. 이까짓 얇은 천 조각 하나가 무에 그리 도움이 된다고. 비아냥거리면서도 포단은 여태 그대로 두었다.
“이상한 계집.”
미끄러져 내리는 이불자락을 추스르던 유홀은 피식 웃었다. 만만치 않은 적수를 만났을 때 느끼는 희열은 오랜만이었다. 엄지를 살짝 깨물며 미소를 흘리는 유홀은 그 자체로 아름다워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도화 상단의 수장, 윤랑의 저택은 으리으리했다. 한갓진 촌에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화려한 기와와 한껏 높인 대문 앞에서도 단성은 크게 기죽지 않고 기척을 했다.
문지기가 문을 열어 주자 분주한 소음이 쏟아져 나왔다. 어디서 귀한 손이라도 오시는 날인가 보다. 집안 일꾼들이 죄 나와서 앞뜰과 뒤뜰을 쓸고 닦고 버름한 문틀까지 손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다. 잠시 바라보던 단성은 묵은 빨랫감을 이고 지고 나가는 한 무리의 여비들을 지나쳐 조용히 침모를 찾았다.
심부름 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사이, 우물 앞에 모인 계집종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들끼리 까르르 웃는 소리가 뜨거운 물로 한바탕 목간을 마친 놋그릇들처럼 반짝반짝하였다. 단성의 입가에도 살포시 미소가 스쳤다. 정말로 좋은 일이 있는 모양인지 집안 구석구석에 활력이 넘쳤다.
“침모가 보잡니다.”
어린 계집종이 불렀다. 보퉁이를 꼭 움켜쥔 단성이 아이를 따라갔다.
“아이고, 한참 전부터 기다렸던 게지. 손이 차네, 차. 어서 들어와요.”
침모가 살뜰하게 아는 체를 했다. 일전에도 몇 번 일감을 맡은 적이 있어 단성의 사정을 대강 아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다과와 따뜻한 차까지 내주었다.
단성이 달짝지근한 다과를 한 입 먹고 쓴 찻물로 입 안을 헹굴 때였다. 완성된 수를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피던 침모가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말 수놓는 솜씨가 일품이셔. 내 밑으로 딱 데려다 끼고 있고 싶다니까요. 허면 끼니 걱정은 하지 않을……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쇤네가 공연히 불경스럽게…….”
“마음 쓰지 마시게.”
단성은 옅게 미소했다. 반가의 핏줄이라도 끼니 걱정 없이 산 적이 없었다. 침모 역시 세상천지 혼자되고 곤궁하여 삯바느질을 하며 사는 처지가 안쓰러워하는 말임을 안다. 단주의 여식과 자신이 동년배라 하였으니 더욱 비교되었을 테고.
이름뿐인 양반에 얽매이지 않으려 해도 살아가는 일은 녹록치 않다. 양반도 헐벗고 허기지고 춥고 더운 것은 매한가지가 아닌가. 가진 것 없이, 함께 토닥이며 살 식구 하나 없이 세상에 남겨진 단성에게는 어쩌면 더 모질고 힘들었을 시간……. 하여 단성은 그저 웃었다.
“이리 곱게 수놓은 옷을 입으시면 우리 아기씨 얼마나 예쁠까. 아무리 무뚝뚝한 사내라도 사르르 녹고 말 테지요. 모진 상사병도 이제는 끝이 날랑가. 요, 요 입방정. 내 왜 이리 주접스럽게 말이 많은지. 호호호호.”
제 무례한 언사가 쉬이 넘어감에 안도한 참모가 또 주절주절 떠들어댔다. 단성은 역시나 미소로 대꾸하며 찻잔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다음 일을 기약하며 삯을 받아 나오는데 먼발치에서 단주의 여식이 보였다. 연이라 했었지. 다행히 자리를 털고 일어난 모양이다. 단성은 샛노란 꽃비단 저고리와 풍성한 능환(綾紈) 치맛자락, 반짝이는 옥구슬과 능라로 머리를 치장한 처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호사로운 옷매무새가 아니라도 빼어난 미모와 당당한 걸음걸이 그 자체로 빛이 나는 듯했다. 입가에 감도는 고혹적이고도 도도한 미소 또한 아름다움에 윤기를 더했다.
잠시 눈이 마주치자 연은 곧 시선을 돌렸고 단성은 살며시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텅 비어버린 보퉁이를 끼고 걸음을 재촉했다. 코가 닳고 헤어져 발끝이 어슴푸레 보이는 신으로 타닥타닥 빠르게 걸었다. 단성이 바깥채에 당도했을 때였다. 침모가 미리 일러둔 것인지 아까의 어린 계집종이 꾸러미 하나를 건넸다. 솔솔 풍겨오는 냄새가 열지 않아도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단성은 거절치 않고 감사 인사를 건넸다.
꾸러미를 받아들고 대궐 같은 집을 나서는 길, 발갛게 익어 내리는 단풍잎이 발끝에서 굴렀다. 바삭바삭 밟아지는 그 소리가 단성을 끝없이 따라왔다.
얻어온 먹거리는 마을 입구 문배 네 들러 풀어놓았다. 원체 없는 살림에 어린 것들까지 키우느라 중년에 벌써 허리가 반은 휘어버린 문배 어멈이 눈시울 붉혀가며 고마움을 전했다. 무던한 미소로 받아준 단성은 이제 정말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치고 피곤한 기색으로 어깨를 두드리며 문을 열던 단성의 두 눈이 크게 열렸다. 언제나 혼자였던 텅 빈 방, 그곳에서 찢어진 거죽처럼 축 늘어져 있는 유홀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 그가 있었지. 저도 모르는 사이 짧게 미소가 스쳤다.
“죽었습니까?”
“하아.”
짜증인지 귀찮음인지 모를 한숨에 단성은 내심 안도했다. 피차 다정히 굴 사이는 아니었다. 이내 평소처럼 담담한 표정이 된 단성은 어지럽혀진 이부자리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천계로 돌아가신다면서요.”
“응, 가야지. 가긴 갈 것인데…… 전일도 말했다시피 네 도움이 필요하다.”
“저 또한 말씀드렸을 텐데요. 전 천신과 계약을 해서 무언가를 이룰 마음이 없다고.”
그 말까지 듣고 유홀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방금 전까지 누워 있었다고 믿겨지지 않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유혹하듯 속삭거렸다.
“다시 생각해 보아라. 천계의 신이 네 뒷배가 돼준다지 않아.”
단성이 말간 눈으로 유홀을 바라보았다. 작은 방에 사람이, 아니 사람과 천신이 있으니 제법 꽉 찬다. 오랜만에…….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가장 바라는 것은 이제 가질 수 없을 테니까. 단성은 거절의 의사를 재차 밝히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단칼에?”
“예.”
여지라고는 주지 않는 확답에 유홀은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날카로운 시선은 단정하고 차분한 그래서 더 밉살스러운 단성의 마른 어깨에 박혔다.
“좋다. 무욕한 인간도 드물게 있겠지. 허나 당장은 없어도 훗날 이루고픈 게 생길지도 모르지 않느냐. 직접적인 생사와 관련된 것만 아니면 뭐든 해 줄 테니……. 그게 아니라면 이 계약 네가 아닌 날 위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해 줄 테냐? 네가 계약 가능한 상태인 이상 다른 계약자가 나타날 수 없고 이 상태로는 신력을 쓸 수도 없단 말이다.”아무리 말이 길어져도 단성은 쉽사리 넘어올 것 같지 않았다. 유홀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벽에 등을 쾅 부딪쳤다.
그런 유홀을 잠시 바라보던 단성은 곡식 꾸러미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얼마 후, 쌀보다 보리, 고구마, 무청 시래기가 더 많이 섞인 밥이 가마솥에서 포근하게 김을 내었다. 단성은 작고 낡은 소반 위에 수저 두 벌을 놓는 것을 시작으로 상을 차렸다. 아침을 들기에는 많이 늦은 시각이라 그 손길이 분주했다. 단 맛이 도는 무를 넣고 끓인 된장국까지 얹어들고 방문을 열었을 때였다. 유홀이 낡은 종잇조각을 팔랑이며 말했다.
“시우라는 자, 네게 소중한 사람인가? 온통 그에게 쓴 서찰인데 보내지 못했군. 계약을 한다면 이 따위는 당장이라도…….”
단성은 상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유홀에게서 서찰을 낚아챘다.
“아무리 천신이라도…….”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았다. 화가 난 것인지 슬픈 것인지도 분간 가지 않았다. 흩어진 서찰을 모조리 그려 모은 단성은 밖으로 뛰어나갔다. 커다란 은행나무를 돌아 탁 트인 들판에 다다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고 더는 막을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렸다.
“허흑.”
가쁜 숨을 들이켜 참아 보았지만 봇물처럼 터져 나온 울음은 그대로 가슴을 쳤다. 단성은 차마 찢지도 못했던 서찰을 품에 안고 한참이나 울고 또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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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역병에 부모를 잃고 몸 약한 오라비와 단둘이 세상에 남겨졌다. 수재 소리를 듣던 오라비였으나, 빼어난 학식은 유리 같은 몸에 갇혀 빛을 보지 못했고 살림은 궁핍했다. 그러나 둘이서 올곧게는 살았다. 어린 단성은 삯바느질 하고 오라비는 상단에 통문 써주는 일로 연명하였으나 마음만은 부끄럼 없이 반듯하게, 그리 살았더랬다.
무연 상단, 오라비가 일감을 받던 그곳에서 시우를 알게 됐다. 그는 애면글면 하는 삶 속에서 꾸는 설레고 보드라운 꿈이었다. 차마 손 뻗어 잡을 수조차 없는 그런 꿈 말이다. 시우는 상단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고리대금으로 부를 쌓아 양반 신분을 사들인 아비가 사람들의 피고름을 짜내어 배를 불린다는 무연의 악명은 그와는 무관한 이야기였다. 반듯하고 예의 바르고 학문에 목말라 있는 젊은이일 뿐이었다.
오라비와 둘도 없는 친우가 되면서 시우는 단성의 삶 속으로도 성큼 들어왔다. 두근거리게 했고 웃게 했다. 허나 시우의 아비가 단성이나 골골 대는 그녀의 오라비, 곤궁한 집안도 모다 못마땅해 하는 것을 알았기에 언감생심 그 앞에 여인이기를 바라지는 못했다.
그랬는데 끝까지 그랬어야 했는데……. 단성은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구겨진 서찰을 들고 무작정 내달렸다. 가슴이 아픈데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집어 낼 재주가 없었다.
겨울의 끝자락 오라버니는 왈칵 붉은 피를 토해냈다. 괜찮다는 오라비의 말과 달리 그는 하루가 다르게 바싹 마른 고목처럼 변해갔다. 그때 처음으로 시우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말없이 단성을 안아주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던 손길은 다정했다. 봄을 기다리지 못한 오라비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시우는 곁에 있어 주었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언제나처럼 흐릿한 채였다. 남매로도, 연인으로도 확실한 선을 긋지 못하고 시간만 흘려보냈다. 어느덧 열여섯이 된 단성에게서 제법 처자태가 나자 그들의 관계는 더욱 위태로워졌다. 온갖 억측이 난무하고 눈살 찌푸리게 하는 소문도 커져만 갔다. 그럴수록 시우는 부친과 대립했고 괴로워하며 방황했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단성은 아팠다. 우유부단하게 구는 시우를 탓하는 마음은 없었다. 상처받기 싫어 고백 한 번 하지 못하고 곁을 맴도는 것은 자신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고 언제까지 지켜 볼 수만도 없었다. 제가 족쇄가 되어 그를 묶고 망가트릴까 두려웠다. 그들의 끝이 그렇게 추잡하고 끔찍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어렵사리 마음을 정하고 달포 넘게 소식 한 줄 없는 시우를 찾아 그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그날 거기서 작은 염원은 산산이 부서져버렸다. 시우와 부친이 나누는 이야기는 하나하나 비수가 되어 단성을 찔러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