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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한 달의 말미를 주마. 그때까지 단성이라는 계집을 깨끗하게 정리토록 해라. 사내놈 행실에 마냥 관대한 상대가 아니다. 무척이나 아끼는 고명딸이라는 모양이니까. 그런 집안이면 그만한 눈치를 봐줘야지.]
[아버님!]
분노한 시우를 보고 사내는 한심하다는 듯 끌끌 혀를 찼다.
[이 녀석아. 네가 기방에 드나들며 단순히 오입질만 했어도 내 이리 잔소리를 늘어놓진 않았을 게다. 차라리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릴 작정을 하지 미련하기는…….]
[말씀을 삼가 해주십시오! 단성은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 마음도…….]
[시끄럽다. 그깟 가난뱅이 계집을 상대로 정말 평생을 걸기라도 할 작정이란 말이냐! 허면 나와의 연을 끊고, 지금껏 누린 부와 안락함을 모조리 버릴 각오는 되었고? 네 정녕 그 계집 하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겠느냐? 돈 한 푼 없이 쫓겨나 추위에 떨고 배곯아 가며 살 수 있겠다 싶거든 어디 한 번 멋대로 굴어보아라. 어서 해보래도!]
아비의 다그침에 시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한바탕 호통을 치던 사내는 짐짓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네가 그리 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럴 작정이었다면 네 진즉에 그리 했겠지. 그래, 너는 줄곧 망설이기만 했을 뿐이다. 계집을 놓을 마음은 없지만 모든 것을 잃을 자신 또한 없어서 말이다. 내 말이 틀렸다고는 못 할 것이다. 이제 잘라 내거라. 아무 득도 없는 계집 따위.]
시우는 깨지지 않는 침묵으로 아비의 말에 동조하였다.
[…….]
[쯧쯧, 뉘를 닮아 그 모양인지. 장사치에게는 허투루 쓸 돈과 마음 같은 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명심해라. 사랑 타령도 잠깐이지, 원…… 무튼 이것이 내 마지막 통첩이니 더는 멍청한 짓거리 말고 잘 결정하여라.]
이번에도 아무 대꾸도 못한 시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를 바라보던 사내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퍼졌다. 커다란 은행나무 뒤편에 선 단성을 발견한 것이다.
[저런, 거기 있는 줄 알았다면 말을 좀 가려서 할 것을. 무에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시우의 부친이 점잖은 척 수염을 쓸어내렸다. 단성이 온 것을 알고 부러 때와 장소를 맞춰 아들을 몰아세워 윽박지른 참이었다. 그래놓고 안타까운 듯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래, 처자 생각엔 시우가 어떻게 할 것 같나? 제 아무리 서책을 좋아한대도 근본이 장사꾼 핏줄이라 잇속은 밝은 녀석이지. 곧 결정을 내릴 테니 그때까지……. 자, 많지는 않지만 이거 받고 돌아가 기대 말고 기다리게. 이래저래 마음 다친 값이다 생각하고. ]
철컹이는 엽전 소리가 절규처럼 날카로웠다. 단성은 산산이 부서지는 마음을 붙들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눈물은 차오르는데 울지를 못했다. 길지 않은 인생 한 토막이 암전했다. 귀하고 애틋하고 수줍어야 할 기억들이 온통 뜯기고 짓이겨져 버려졌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시우를 위해 떠날 작정을 했으면서도 상처는 그래도 쓰리고 아프고 비참했다.
그러니 이 마음만은 지켜주지. 조금은 소중하게 여겨주지. 처음으로 그를 원망했다. 그러다 피식 웃어버렸다. 무슨 소용일까. 애초에 욕심 내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 단성은 결국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렸다.
엽전 꾸러미를 지나쳐 시우의 부친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화려한 저택을 빠져나가 그길로 고향을 떠났다. 없던 사람처럼 사라져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잊고 싶은 것이 많아 먹는 것도 마시고 잠드는 것도 잊었다. 꼬박 열흘을 산송장처럼 걸어 당도한 곳이 이 작은 마을이었다. 고향을 닮은, 그러나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시간은 바람처럼 불어 피투성이가 된 발을 아물게 했고, 비쩍 곯았던 마음도 조금씩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렇게 피지 못한 연정도 지독했던 상처도 흐릿해졌지만, 아직 가슴 한구석에는 통증이 남아 있었다. 이따금 견딜 수 없이 아픈 밤에는 보내지도 못할 서찰을 써내려갔다. 때로는 원망했고 아주 가끔은 그리워하고 또 어쩌다는 웃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리 살았다. 더는 아무 것도 욕심 내지 않고 무엇도 담지 않은 빈 가슴으로……. 그런데 들켜버렸다. 유홀이 찾아낸 서찰은 부끄러움이고 슬픔이고 외로움이었다. 여러 감정이 뒤엉킨 채 단성은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자 어쩐지 속이 후련해졌다.
*
문턱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밥상이 위태로웠다. 유홀은 소반을 한 구석에 조심스럽게 옮겨놓고 머쓱하게 섰다.
뭐지. 순식간에 불한당이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알 수 없는 이 갑갑증은.
서찰을 부러 본 것은 아니었다. 겹겹이 쌓인 서찰의 필체가 제법 유려하여 눈길이 갔고 시우라는 이름을 언뜻 발견했다. 가장 오래된 서찰에는 군데군데 얼룩이 있었는데 딱 봐도 눈물자국이었다. 하여 넘겨짚은 것이었다. 그저 계약에 유리할까 싶어 뱉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계집이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얼굴에 고스란히 감정을 드러내었다. 당황한 와중에도 그것이 신기하고 또 조금은 기뻤다. 그러다 까맣고 맑은 눈동자 가운데서 부풀어 오르던 눈물을 마주하였을 때는 머릿속이 텅 비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째서……. 고작 인간계집의 흐르지도 못한 눈물 따위에 가슴이 저렸을까.
어째서……. 손끝이 하얗게 되도록 종이를 힘껏 구겨 쥐고 뛰쳐나간 단성. 그녀의 마른 어깨가 가시처럼 눈에 박혔을까.
별 쓰잘머리도 없이. 유홀은 과장되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폈다. 계약자 없이 실체화를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한정적이다. 어차피 단성을 찾으러 갈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마음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폴폴 날리는 볕이나 바라보면 될 것이다. 이 따위 쓸데없는 생각 따윌랑 말고. 털썩 드러누웠으나 눈빛은 여전히 복잡했다.
단성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유홀이 눈동자만 움직여 자그맣고 차분한 얼굴을 쓱 살폈다.
“사과를 바라?”
툭 하고 내뱉는 목소리는 끔찍스러울 만큼 매혹적이었다. 단성은 기함하게 아름다운, 그러나 크게 성실해 뵈지는 않는 천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느새 사내의 요야한 눈동자에 제 모습이 그득 고여 있었다.
“종일 먹질 못했네요. 밥은 데워야겠다. 기다리세요.”
칼같이 말을 자른 단성이 일어섰다. 소반을 들고 나서는 얼굴은 그저 맑고 평온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유홀이 덥석 손목을 잡아 도로 자리에 앉혔다. 그 감촉이 부러질 듯 가늘고 사라질 듯 부드러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때문일까. 잡은 손목을 놓지 못했다.
멈칫하던 단성이 그런 유홀에게서 팔을 빼냈다.
“밥?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예상한 상실감에도 기분은 더러웠다. 유홀은 온기가 빠져나간 손바닥을 노려보다 날선 눈으로 물었다. 적반하장이 뭐, 대수라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미간까지 찌푸렸다.
“배 주려 본 적 없으시죠?”단성이 비로소 고개를 들어 유홀을 마주보았다. 그러다 현기증이 날 것처럼 까마득히 깊은 눈으로 설핏 웃었다.
“허기가 지면 그래요. 능히 버텨내던 무게가 버거워지고 잘 참아왔던 순간이 갑자기 너무 고통스러워지지요. 그래서 일단 배를 채우려는 겁니다. 어디까지가 당신의 잘못이고 어디부터가 내가 만들어 낸 괴로움인지 알아야 화를 내건 사과를 받건 할 테니까요.”
결국 두 사람은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상을 물리고 찻잔이 놓일 때까지도 일절 대화는 없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들춰본 쪽도 미리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쪽도 잘못이 없지는 않겠지요. 긴 말 않겠습니다. 대신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주십사 청하면 그리 하실 건가요?”
단성이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하얀 잔을 다반 위에 소리 나게 내린 유홀이 태연히 대꾸했다.
“아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게는 여전히 계약할 마음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계약이 가능한 상대는 지극히 드물다. 설령 네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고 해도 이 상태로 얼마 없는 신력이 바닥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계약을 하지 못하면 다시 신물 안에 잠들어야 할 테니 그때까지는 바깥 구경이나 해두는 것이지. 비참하기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마(老馬)와 다름없겠지만.”
산뜻한 포부와 달리 말투는 어둡고 칙칙했다. 단성은 끔찍하게 아름다운 천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서로의 의지가 이토록 확고하니 당분간 공존하며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하지요. 저와 붙어 있으면 신력이 조금은 채워진다고 하셨으니 계약은 하지 않아도 생각할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몇 가지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거기에는 토를 다실 수 없어요. 제 제안이 싫으시면 노마(老馬)가 되실 수밖에요.”
“음.”
만만치 않은 여자. 홀려지지도 설득 당하거나 겁박 당하지도 않는. 그런데 어쩐지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유홀은 고개를 까딱이며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아래로 당겼다. 석양이 하얀 창호지로 스며들었다. 말간 귤빛에 물든 방은 이채롭고도 따스했다. 그 빛 아래, 인연은 시작되었다.
2. 부탁
존재감 하나는 어마 무시한 사내였다. 뒹굴 거리다 벽에 머리를 부딪쳐 성질을 부려대는 순간에도 유홀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고약한 말본새가 아니라면 가끔은 넋을 놓고 쳐다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성은 등을 돌리고 앉아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성가시고 불편한 일을 자처해 버린 것은 일순의 흔들림 때문이었다. 매몰차게 거절하면 될 일이었으나 처연히 내려앉은 씁쓸함에 그만 눈길이 가고 말았다.
“한 잔 더.”
빈 잔을 내미는 유홀에게 단성은 적당히 식은 찻물을 부어주었다.
흡족한 얼굴로 차를 음미하던 유홀이 흘끔 단성을 보았다. 수다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특별히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이 드물 정도였다.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대로 또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조용한 천성이라기보다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겨졌으니까.
어떻게 하면 천신 유홀을 상대로 무심해질 수 있지? 스스로 생각해도 계면쩍은 물음이었으나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러고는 미끈하게 뻗은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심심하게 생긴 찻잔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은은한 차향이 손끝을 따라 맴돌았다. 여린 잎을 직접 뜯어 찌고 말려 갈무리해 둔 차는 참으로 훌륭했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동자가 가만히 기울었다.
“시전에 가자.”
툭하고 내뱉은 말은 명령조에 가까웠다.
“밥값은 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함께 살아도 좋다고 허락하자 유홀은 영롱한 돌덩이 하나를 던졌다. 패물에 관심 없는 단성이 보기에도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여 거절했다. 처음부터 밥값 따위를 셈할 마음이 없었다. 넉넉지는 않으나 입 하나 늘었다고 쫄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의 거절은 여전히 유효했고 확고했다. 단성은 미련 한 점 없이 유홀을 바라보았다.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지 않느냐. 이렇게 얹혀살면서 퍽이나 쌓겠다. 네 우매한 책임감으로 내 발목까지 잡지는 말아라.”
언제보아도 짜증스럽게 맑고 곧은 눈, 까맣게 밀려드는 파도에 잠식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유홀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말씀을 듣고 보니 뭔가 새로운 타협이 필요하겠군요. 가지고 계신 패물은 받지 않겠지만 대신 뭔가 하실 만한 일을 찾아 함께 해보도록 하지요.”
부드럽지만 강경한 말투였다. 유홀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원하는 바를 단숨에 꿰차는 것에 익숙한 그로서는 이만하면 엄청난 양보인 셈이었다. 그걸 이 자그마한 인간 여자가 알 리는 없겠지만. 유홀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헌데 시전에 그 모습은 좀 곤란합니다.”
“인간들의 성가신 법도를 내 모르지 않는다. 다만…….”
손가락을 뚝뚝 소리 나게 꺾는 유홀의 입술은 홀릴 듯 새빨갰다. 그가 일부러 말끝을 잘랐으나 단성은 채근해 묻지 않았다.
기묘한 허탈함에 딸려오는 낯선 수줍음, 유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근거렸다. 여기서 두근거려야 할 주체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 버릇없는 심장 따위가 감히. 거칠게 가슴 깃을 잡아당기자 느른해진 옷 사이로 선명한 쇄골과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한 달의 말미를 주마. 그때까지 단성이라는 계집을 깨끗하게 정리토록 해라. 사내놈 행실에 마냥 관대한 상대가 아니다. 무척이나 아끼는 고명딸이라는 모양이니까. 그런 집안이면 그만한 눈치를 봐줘야지.]
[아버님!]
분노한 시우를 보고 사내는 한심하다는 듯 끌끌 혀를 찼다.
[이 녀석아. 네가 기방에 드나들며 단순히 오입질만 했어도 내 이리 잔소리를 늘어놓진 않았을 게다. 차라리 적당히 가지고 놀다 버릴 작정을 하지 미련하기는…….]
[말씀을 삼가 해주십시오! 단성은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그리고 제 마음도…….]
[시끄럽다. 그깟 가난뱅이 계집을 상대로 정말 평생을 걸기라도 할 작정이란 말이냐! 허면 나와의 연을 끊고, 지금껏 누린 부와 안락함을 모조리 버릴 각오는 되었고? 네 정녕 그 계집 하나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겠느냐? 돈 한 푼 없이 쫓겨나 추위에 떨고 배곯아 가며 살 수 있겠다 싶거든 어디 한 번 멋대로 굴어보아라. 어서 해보래도!]
아비의 다그침에 시우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고 한바탕 호통을 치던 사내는 짐짓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나는 네가 그리 할 것이라 생각지 않는다. 그럴 작정이었다면 네 진즉에 그리 했겠지. 그래, 너는 줄곧 망설이기만 했을 뿐이다. 계집을 놓을 마음은 없지만 모든 것을 잃을 자신 또한 없어서 말이다. 내 말이 틀렸다고는 못 할 것이다. 이제 잘라 내거라. 아무 득도 없는 계집 따위.]
시우는 깨지지 않는 침묵으로 아비의 말에 동조하였다.
[…….]
[쯧쯧, 뉘를 닮아 그 모양인지. 장사치에게는 허투루 쓸 돈과 마음 같은 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명심해라. 사랑 타령도 잠깐이지, 원…… 무튼 이것이 내 마지막 통첩이니 더는 멍청한 짓거리 말고 잘 결정하여라.]
이번에도 아무 대꾸도 못한 시우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를 바라보던 사내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퍼졌다. 커다란 은행나무 뒤편에 선 단성을 발견한 것이다.
[저런, 거기 있는 줄 알았다면 말을 좀 가려서 할 것을. 무에 크게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시우의 부친이 점잖은 척 수염을 쓸어내렸다. 단성이 온 것을 알고 부러 때와 장소를 맞춰 아들을 몰아세워 윽박지른 참이었다. 그래놓고 안타까운 듯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래, 처자 생각엔 시우가 어떻게 할 것 같나? 제 아무리 서책을 좋아한대도 근본이 장사꾼 핏줄이라 잇속은 밝은 녀석이지. 곧 결정을 내릴 테니 그때까지……. 자, 많지는 않지만 이거 받고 돌아가 기대 말고 기다리게. 이래저래 마음 다친 값이다 생각하고. ]
철컹이는 엽전 소리가 절규처럼 날카로웠다. 단성은 산산이 부서지는 마음을 붙들고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눈물은 차오르는데 울지를 못했다. 길지 않은 인생 한 토막이 암전했다. 귀하고 애틋하고 수줍어야 할 기억들이 온통 뜯기고 짓이겨져 버려졌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시우를 위해 떠날 작정을 했으면서도 상처는 그래도 쓰리고 아프고 비참했다.
그러니 이 마음만은 지켜주지. 조금은 소중하게 여겨주지. 처음으로 그를 원망했다. 그러다 피식 웃어버렸다. 무슨 소용일까. 애초에 욕심 내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을 일, 단성은 결국 스스로에게 화살을 돌렸다.
엽전 꾸러미를 지나쳐 시우의 부친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화려한 저택을 빠져나가 그길로 고향을 떠났다. 없던 사람처럼 사라져 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잊고 싶은 것이 많아 먹는 것도 마시고 잠드는 것도 잊었다. 꼬박 열흘을 산송장처럼 걸어 당도한 곳이 이 작은 마을이었다. 고향을 닮은, 그러나 고향이 아닌 이곳에서 시간은 바람처럼 불어 피투성이가 된 발을 아물게 했고, 비쩍 곯았던 마음도 조금씩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그렇게 피지 못한 연정도 지독했던 상처도 흐릿해졌지만, 아직 가슴 한구석에는 통증이 남아 있었다. 이따금 견딜 수 없이 아픈 밤에는 보내지도 못할 서찰을 써내려갔다. 때로는 원망했고 아주 가끔은 그리워하고 또 어쩌다는 웃을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리 살았다. 더는 아무 것도 욕심 내지 않고 무엇도 담지 않은 빈 가슴으로……. 그런데 들켜버렸다. 유홀이 찾아낸 서찰은 부끄러움이고 슬픔이고 외로움이었다. 여러 감정이 뒤엉킨 채 단성은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자 어쩐지 속이 후련해졌다.
*
문턱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밥상이 위태로웠다. 유홀은 소반을 한 구석에 조심스럽게 옮겨놓고 머쓱하게 섰다.
뭐지. 순식간에 불한당이 된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알 수 없는 이 갑갑증은.
서찰을 부러 본 것은 아니었다. 겹겹이 쌓인 서찰의 필체가 제법 유려하여 눈길이 갔고 시우라는 이름을 언뜻 발견했다. 가장 오래된 서찰에는 군데군데 얼룩이 있었는데 딱 봐도 눈물자국이었다. 하여 넘겨짚은 것이었다. 그저 계약에 유리할까 싶어 뱉어본 말이었다.
그런데 계집이 처음으로 무표정하던 얼굴에 고스란히 감정을 드러내었다. 당황한 와중에도 그것이 신기하고 또 조금은 기뻤다. 그러다 까맣고 맑은 눈동자 가운데서 부풀어 오르던 눈물을 마주하였을 때는 머릿속이 텅 비며 말문이 막혀버렸다.
어째서……. 고작 인간계집의 흐르지도 못한 눈물 따위에 가슴이 저렸을까.
어째서……. 손끝이 하얗게 되도록 종이를 힘껏 구겨 쥐고 뛰쳐나간 단성. 그녀의 마른 어깨가 가시처럼 눈에 박혔을까.
별 쓰잘머리도 없이. 유홀은 과장되게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지개를 폈다. 계약자 없이 실체화를 유지할 수 있는 거리는 한정적이다. 어차피 단성을 찾으러 갈 수 없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마음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폴폴 날리는 볕이나 바라보면 될 것이다. 이 따위 쓸데없는 생각 따윌랑 말고. 털썩 드러누웠으나 눈빛은 여전히 복잡했다.
단성은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유홀이 눈동자만 움직여 자그맣고 차분한 얼굴을 쓱 살폈다.
“사과를 바라?”
툭 하고 내뱉는 목소리는 끔찍스러울 만큼 매혹적이었다. 단성은 기함하게 아름다운, 그러나 크게 성실해 뵈지는 않는 천신을 물끄러미 보았다. 어느새 사내의 요야한 눈동자에 제 모습이 그득 고여 있었다.
“종일 먹질 못했네요. 밥은 데워야겠다. 기다리세요.”
칼같이 말을 자른 단성이 일어섰다. 소반을 들고 나서는 얼굴은 그저 맑고 평온했다. 가만히 바라보기만 하던 유홀이 덥석 손목을 잡아 도로 자리에 앉혔다. 그 감촉이 부러질 듯 가늘고 사라질 듯 부드러워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때문일까. 잡은 손목을 놓지 못했다.
멈칫하던 단성이 그런 유홀에게서 팔을 빼냈다.
“밥?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예상한 상실감에도 기분은 더러웠다. 유홀은 온기가 빠져나간 손바닥을 노려보다 날선 눈으로 물었다. 적반하장이 뭐, 대수라고. 불쾌감을 감추지 않고 미간까지 찌푸렸다.
“배 주려 본 적 없으시죠?”단성이 비로소 고개를 들어 유홀을 마주보았다. 그러다 현기증이 날 것처럼 까마득히 깊은 눈으로 설핏 웃었다.
“허기가 지면 그래요. 능히 버텨내던 무게가 버거워지고 잘 참아왔던 순간이 갑자기 너무 고통스러워지지요. 그래서 일단 배를 채우려는 겁니다. 어디까지가 당신의 잘못이고 어디부터가 내가 만들어 낸 괴로움인지 알아야 화를 내건 사과를 받건 할 테니까요.”
결국 두 사람은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상을 물리고 찻잔이 놓일 때까지도 일절 대화는 없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들춰본 쪽도 미리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쪽도 잘못이 없지는 않겠지요. 긴 말 않겠습니다. 대신 이제 그만 여기서 나가주십사 청하면 그리 하실 건가요?”
단성이 차 한 모금을 마시고 먼저 입을 열었다. 하얀 잔을 다반 위에 소리 나게 내린 유홀이 태연히 대꾸했다.
“아니.”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제게는 여전히 계약할 마음이 없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계약이 가능한 상대는 지극히 드물다. 설령 네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고 해도 이 상태로 얼마 없는 신력이 바닥나기를 기다릴 것이다. 계약을 하지 못하면 다시 신물 안에 잠들어야 할 테니 그때까지는 바깥 구경이나 해두는 것이지. 비참하기로는 죽을 날을 기다리는 노마(老馬)와 다름없겠지만.”
산뜻한 포부와 달리 말투는 어둡고 칙칙했다. 단성은 끔찍하게 아름다운 천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서로의 의지가 이토록 확고하니 당분간 공존하며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하지요. 저와 붙어 있으면 신력이 조금은 채워진다고 하셨으니 계약은 하지 않아도 생각할 시간은 벌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몇 가지 조건을 붙이겠습니다. 거기에는 토를 다실 수 없어요. 제 제안이 싫으시면 노마(老馬)가 되실 수밖에요.”
“음.”
만만치 않은 여자. 홀려지지도 설득 당하거나 겁박 당하지도 않는. 그런데 어쩐지 지루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야. 유홀은 고개를 까딱이며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아래로 당겼다. 석양이 하얀 창호지로 스며들었다. 말간 귤빛에 물든 방은 이채롭고도 따스했다. 그 빛 아래, 인연은 시작되었다.
2. 부탁
존재감 하나는 어마 무시한 사내였다. 뒹굴 거리다 벽에 머리를 부딪쳐 성질을 부려대는 순간에도 유홀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고약한 말본새가 아니라면 가끔은 넋을 놓고 쳐다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성은 등을 돌리고 앉아 조용히 한숨을 삼켰다. 성가시고 불편한 일을 자처해 버린 것은 일순의 흔들림 때문이었다. 매몰차게 거절하면 될 일이었으나 처연히 내려앉은 씁쓸함에 그만 눈길이 가고 말았다.
“한 잔 더.”
빈 잔을 내미는 유홀에게 단성은 적당히 식은 찻물을 부어주었다.
흡족한 얼굴로 차를 음미하던 유홀이 흘끔 단성을 보았다. 수다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여자였다. 특별히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이 드물 정도였다.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그건 그대로 또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조용한 천성이라기보다 무관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겨졌으니까.
어떻게 하면 천신 유홀을 상대로 무심해질 수 있지? 스스로 생각해도 계면쩍은 물음이었으나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그러고는 미끈하게 뻗은 아름다운 손가락으로 심심하게 생긴 찻잔을 문지르고 또 문질렀다. 은은한 차향이 손끝을 따라 맴돌았다. 여린 잎을 직접 뜯어 찌고 말려 갈무리해 둔 차는 참으로 훌륭했다. 날카롭게 치켜뜬 눈동자가 가만히 기울었다.
“시전에 가자.”
툭하고 내뱉은 말은 명령조에 가까웠다.
“밥값은 되었다 하지 않았습니까.”
함께 살아도 좋다고 허락하자 유홀은 영롱한 돌덩이 하나를 던졌다. 패물에 관심 없는 단성이 보기에도 값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진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여 거절했다. 처음부터 밥값 따위를 셈할 마음이 없었다. 넉넉지는 않으나 입 하나 늘었다고 쫄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때의 거절은 여전히 유효했고 확고했다. 단성은 미련 한 점 없이 유홀을 바라보았다.
“공덕을 쌓아야 한다고 했지 않느냐. 이렇게 얹혀살면서 퍽이나 쌓겠다. 네 우매한 책임감으로 내 발목까지 잡지는 말아라.”
언제보아도 짜증스럽게 맑고 곧은 눈, 까맣게 밀려드는 파도에 잠식될 것 같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유홀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말씀을 듣고 보니 뭔가 새로운 타협이 필요하겠군요. 가지고 계신 패물은 받지 않겠지만 대신 뭔가 하실 만한 일을 찾아 함께 해보도록 하지요.”
부드럽지만 강경한 말투였다. 유홀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원하는 바를 단숨에 꿰차는 것에 익숙한 그로서는 이만하면 엄청난 양보인 셈이었다. 그걸 이 자그마한 인간 여자가 알 리는 없겠지만. 유홀은 삐딱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헌데 시전에 그 모습은 좀 곤란합니다.”
“인간들의 성가신 법도를 내 모르지 않는다. 다만…….”
손가락을 뚝뚝 소리 나게 꺾는 유홀의 입술은 홀릴 듯 새빨갰다. 그가 일부러 말끝을 잘랐으나 단성은 채근해 묻지 않았다.
기묘한 허탈함에 딸려오는 낯선 수줍음, 유홀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지근거렸다. 여기서 두근거려야 할 주체는 여자였다. 그런데 이 버릇없는 심장 따위가 감히. 거칠게 가슴 깃을 잡아당기자 느른해진 옷 사이로 선명한 쇄골과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