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나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지원 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조금 전에 지원 씨가 한 말이 맞는다면, 지원 씨에게도 내가 결코 잊힌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VIP 전용 단독 침구실 침대에 걸터앉은 정민은 지원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동안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거침없이 던졌다. 하지만 지원은 침착하게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침 케이스를 열어 적당한 사이즈의 침을 골라내고 은빛 스테인리스 통의 뚜껑을 열어 알코올 솜 몇 장을 덜어 냈다. 그런 뒤 정민에게 침대에 누워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정민은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셔츠 소매 좀 올리세요. 가능한 많이.”
“아픈 곳은 어깨인데, 그럼 셔츠를 벗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한 정민은 지원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짓자 살짝 당황했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지원에게 전달되었다. 지원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정민의 모습이 귀여워 엷게 웃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30대 남자가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똑같이 어깨가 아픈 환자를 만나도, 침을 놓는 방법은 한의사마다 제각각이에요. 물론 어깨에 직접 침을 놓는 한의사들도 많겠지만 저는 제 방식대로 가요. 손가락이랑 팔, 발이랑 다리에 몇 대 놓을 거예요. 아, 목에도 두 대 정도 더 들어가지만 굳이 셔츠를 벗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정민이 뭐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지원은 아무렇지 않게 정민의 바지를 살짝 걷어 올리고는 몇 군데에 알코올 솜을 문질렀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정민의 발등과 다리를 살짝살짝 눌러 가며 적당한 혈 자리를 찾았다.
“섭섭하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푸시업을 200번 했거든요. 셔츠 벗으라고 할 줄 알고. 영화 때문에 한참 몸을 키워 놔서 요즘 좀 봐 줄 만한데.”
침을 놓던 지원이 픽 웃자 숨결이 정민의 다리에 미세하게 닿았다. 침이 살을 파고드는 따끔함보다 지원의 숨결이 주는 자극이 더 강했다.
“어깨 아픈 사람이 푸시업을 했다니 참 신선하네요. 물리치료 선생님은 셔츠를 벗고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으라고 하실지도 몰라요. 그때 마음껏 자랑하세요. 참고로 그 선생님은 40대 남자분이에요.”
“아, 뭐야.”
짧은 푸념을 흘린 정민은 집중해서 침을 놓는 지원을 눈을 내리뜨고 지켜보았다. 양쪽 귀 뒤로 넘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길이의 긴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다.
깨끗한 손톱을 가진 긴 손가락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살면서 고생이라고는 전혀 안 한 것처럼 희고 고운 손이었다. 지원의 오른손 검지가 엄지 끝에서 튕겨 나오며 침관 끝을 두드리자 침이 정민의 살을 뿌리 삼아 곧게 섰다.
“원래 이렇게 침이 안 아픈가요? 아프다고 해도 남자다워 보이려고 참았겠지만, 진짜 안 아프네요.”
“아프지 않게 놓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요. 잠깐만요. 목 쪽은 좀 아파요.”
지원의 손길이 정민의 얼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내 목 근처가 두어 번 따끔해졌다.
“손이 왜 이래요?”
정민의 손에 침을 놓으려던 지원이 요란하게 놀라며 그의 손을 살폈다. 지원이 놀란 이유를 잘 아는 정민은 부끄러움에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아는 한 가장 고운 손을 가진 여자 앞에 내어놓기엔 손이 너무 거칠어진 탓이었다.
“아, 영화 때문에 검술을 배웠거든요. 검을 손에 익히느라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생기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아마 서서히 괜찮아질 겁니다.”
정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데, 지원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매끈한 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한민국 최고 배우라는 수식어는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닌가 보네요. 도대체 어느 정도로 검을 휘둘러야 손이 이 지경이 되나요? 무지 아팠을 텐데.”
“손은 굳은살이 박이니 점점 감각이 무뎌져서 크게 아픈 것도 몰랐는데, 말에서 갑자기 툭 떨어졌을 때는 일주일 동안 온몸의 뼈마디가 다 아팠어요. 그때 지원 씨를 찾아왔다면 덜 아팠을까요?”
자신이 대꾸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지원은 정민의 말을 흘려듣고 손바닥과 손목에 침을 놓을 뿐이었다.
정민은 지원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웃어 주었던 바르셀로나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를 함께 보냈다. 그랬던 여자가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함께한 시간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 참 무던히도 여자를 찾기 위해 애썼다.
아는 거라고는 그녀의 캐리어 네임 택에서 봤던 ‘한지원’이라는 이름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추가적으로 알아낸 사는 곳이 서울이라는 정보뿐이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여자는 처음부터 작정을 한 것처럼 자신의 신상에 대해 철저하게 감췄다. 그렇게 사라질 것을 미리 예견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도 사이즈가 전혀 다른 톱니바퀴가 딱딱 들어맞으며 잘 굴러가는 모양처럼, 여자와의 대화는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몇 가지 이상하다 여겼던 부분들도 그냥 그렇게 흘려 넘기고 말았다.
그 하루의 끝에 여자를 안았다. 자신의 품에서 잠든 여자의 등을 다독이며 설렘에 얼마나 뒤척였는지. 쉽게 잠 못 이룬 만큼, 뒤늦게 닫힌 정민의 눈꺼풀은 아주 무거웠다. 결국 그게 문제였다. 여자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하고 숙면을 한 것. 정민은 두고두고 그 순간을 후회했었다.
그렇게 떠난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 생각하니, 심장이 평소보다 급하게 펌프질을 했다. 혹시나 꿈이 아닐까 싶어 깊은 한숨 끝에 눈을 번쩍 뜬 정민은, 여전히 지원이 자신의 곁에 있음을 확인했다.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좀 주무세요. 20분 정도 뒤에 물리치료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침을 제거해 주고, 물리치료도 잘해 주실 거예요. 한 달 정도 꾸준히 치료받으면 많이 좋아질 것 같아요.”
침을 다 놓은 지원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정민이 몸을 움찔 떨었다. 몸 군데군데 놓인 침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만요!”
정민의 목소리에 지원이 몸을 돌렸다.
“나 잠들면, 또 사라지려고 그래요?”
“하아.”
지원은 기가 막혀서 그저 웃고 말았다. 눈앞의 남자가 자꾸만 자신의 감정을 조종했다.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고, 즐겁게 해 주기도 했고, 또 민망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꾸만 입이 말랐다. 지원은 혀끝으로 안쪽 입술을 적셨다.
“약속해요.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한지원 씨 여기서 못 나가요. 계속 내 옆에 있으라고 할 겁니다.”
“아니, 차정민 씨가 무슨 힘이 있어서요? 지금 차정민 씨는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을 텐데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와, 이 여자 진짜 지능적이네.”
하지만 정민의 눈에 보이는 지원의 눈이 말했다. 더 이상 물러서거나 피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나와 다를까 봐서요.’
조금 전 진료실에서 지원이 했던 말이 정민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박혔다. 그 말은 지원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쭉 자신을 생각해 왔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적어도 서로의 마음이 같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정민을 안심하게 했다. 그래도 여전히 지원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지원이 다시 사라질까 봐 자꾸 겁이 났다.
“「Before Sunrise」는 정말 영화일 뿐이었어요. 나는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처럼 그렇게 지원 씨와 헤어질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그런데 지원 씨가 모든 걸 정말 그 영화처럼 만들어 버렸어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두 사람은 9년 뒤에 재회했는데, 우리는 2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까.”
“정민 씨가 「Before Sunrise」를 찍는 것 같다고 말하긴 했었죠.”
“그건 우리의 시작이 그랬으니까 비유하느라 나온 말이었지 그 결말을 따르자는 말이 아니었어요. 왜 우리 만남을 영화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찍어 내려 한 거죠?”
“목소리 더 낮춰요.”
지원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대화를 듣게 될까 봐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민과 함께한 짧은 만남은 평생을 두고 떠올릴 만큼 아름다웠다. 살면서 봐 왔던 그 어떤 로맨틱 영화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달콤함이 가득 차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럴수록 두려웠다. 그 순간에서 억지로 밀려나게 될까 봐. 그래서 먼저 문을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억울해요. 나 정말 가벼운 남자 아닌데. 당신에게 그저 하룻밤 함께 잔 남자로 남아 있잖아요. 나는 정말 지원 씨가 좋아서 그렇게 안았던 거였고, 지원 씨 또한 진심이라 생각했는데.”
‘원나잇’이라는 표현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던 정민은, 가능한 말을 순화해서 하느라 애를 먹었다. 혹시라도 자신과의 대화가 지원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나중에 다시 만나 단둘이 있을 때 해도 되는 이야기였지만, 지원이 또 달아날까 봐 조급해져서인지 말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애써 돌려서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귀까지 빨개진 지원의 모습이 정민의 마음에 죄책감을 남겼다. 역시, 나중에 말할걸. 조금 더 가까워진 다음에 해도 되는 말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그래서 퇴근이 언제죠? 저녁 같이 먹읍시다. 나는 오늘 스케줄 없어요.”
“미안해요. 오늘 야간 진료가 있는 날이라 10시는 되어야 끝나요. 저녁을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럼 10시에 만나서 술 마시면 되겠네요. 저녁 먹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술 마시기엔 좋은 시간이니까. 한지원 씨가 술을 좀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어물쩍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고요.”
지원은 정민의 결연한 표정을 읽었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찾기 위해 2년간 공을 들였다는 남자에게 또 상처를 주는 것도 더는 못 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와의 재회를 무시할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서 도망쳐 왔지만, 지원 또한 단 한 순간도 차정민이라는 남자를 머릿속에서 밀어 내지 못했다. 짧은 시간, 참 깊게도 그에게 빠진 듯했다.
혹시라도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연애 기사라도 접하게 될까 봐, 차정민이라는 이름을 검색조차 하지 못한 지원이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서 차정민이라는 이름이 보일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곤 했었다. 다 의미 없다 간주했고, 그의 손을 먼저 놓은 건 자신이었지만, 그건 상처받기 싫은 약자가 보인 몸부림에 가까웠다.
“대답 안 하죠? 자꾸 그러면 2년 전 일, 지금 큰 소리로 한번 소리쳐 봐요? 나 발성 수업 열심히 들어서 전달력이 굉장히 좋은데. 괜히 배우 하는 줄 압니까?”
정민의 눈에는 악의 없는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정민은 지원에게 피해가 될 만한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배우가 아니라 협박범이 하는 행동이죠. 2년이라는 시간이 차정민 씨에게는 어떻게 지나간 건가요? 그때 그 젠틀했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거죠?”
“내가 너무 젠틀해서 하룻밤 동안 정을 듬뿍 주고 그렇게 떠난 거 아니었던가? 그래서 결심했어요. 좀 무례해 보기로. 한지원 씨를 또 놓치는 멍청한 짓은 두 번 다시 안 할 거거든요. 그러려면 나쁜 남자 되는 것쯤이야 뭐가 대수입니까?”
역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정민이 들었다는 발성 수업이 큰 힘을 발휘했다. 대단하게 힘주어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그의 목소리가 지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애인이 있다는 거짓말 할 거면, 그거 고이 넣어 둬요. 없다는 거 확인했으니까.”
“그걸 차정민 씨가 어떻게 알아요?”
“명성한의원, 그다음부터는 참 쉬웠어요. 우연히 명성한의원 원장 중 하나가 김태준 선배 친구인 걸 알았고, 곧바로 태준 선배한테 전화해서 부탁했죠. 내 인생을 흔들어 놓고 사라진 여자가 하나 있는데, 드디어 찾았으니 좀 알아봐 달라고.”
지원은 짧은 숨을 탁 뱉어 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지원을 찾아내기까지가 어려웠을 뿐, 한번 물꼬가 트이니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명성한의원의 최고 원장 권명성의 아들이자 한의원 원장 중 한 명인 권선빈은 지원의 한의대 선배이자 직장 동료였다. 그가 한국의 톱 배우 김태준과 여러모로 가까운 사이라는 건, 한의원 사람들 모두가 잘 알았다.
“그래서 뭘 얼마나 알아냈나요?”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어린 서른 살이라는 것. 뛰어난 매선침 시술 능력자로 강남 사모님들 사이에 소문이 쫙 퍼졌다는 것. 수요일과 금요일은 매선침 시술만 하는데 예약이 석 달 뒤까지 꽉 차 있다는 것. 명성한의원에서 일한 지는 3년이 됐고, 그전에는 청명한의원에서 2년 일했다면서요? 거기도 유명한 곳이던데. 어쨌건 지금은 명성한의원에 있지만, 다른 한의원에서 꾸준히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는 것.”
차정민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지원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도대체가 이 남자는 왜 자꾸만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걸까? 그런데 밉지가 않았다. 아니, 정말 못 견디게 좋아질 것 같아 겁이 날 지경이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또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억지로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써도 자꾸만 볼이 떨려 왔다.
“아, 환자들이랑 주변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고 해도 냉정하게 거절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면요?”
“그래도 한 번 찾아오긴 했을 겁니다.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적극적으로 시간을 내 달라는 말은 못 했겠죠.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른길이 아니면 발을 들여놓지 않으니까.”
지원은 누워 있는 정민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지원도 알았다. 그는 가급적 착하게, 공손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정민과 5분만 대화를 나누어 본다면 그 누구라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정민을 의심하고 믿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던 건가?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는 여자였다면, 감히 건들지 못했을 겁니다.”
솔직한 정민의 말에 지원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나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지원 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조금 전에 지원 씨가 한 말이 맞는다면, 지원 씨에게도 내가 결코 잊힌 사람은 아니었을 텐데.”
VIP 전용 단독 침구실 침대에 걸터앉은 정민은 지원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동안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거침없이 던졌다. 하지만 지원은 침착하게 자신의 일을 할 뿐이었다. 침 케이스를 열어 적당한 사이즈의 침을 골라내고 은빛 스테인리스 통의 뚜껑을 열어 알코올 솜 몇 장을 덜어 냈다. 그런 뒤 정민에게 침대에 누워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정민은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셔츠 소매 좀 올리세요. 가능한 많이.”
“아픈 곳은 어깨인데, 그럼 셔츠를 벗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지극히 당연한 질문을 했다고 생각한 정민은 지원이 소리 없는 웃음을 짓자 살짝 당황했다. 그 감정은 고스란히 지원에게 전달되었다. 지원은 당혹감을 숨기지 못하는 정민의 모습이 귀여워 엷게 웃었다.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30대 남자가 귀여워 보일 수도 있다는 게 어처구니없긴 했지만.
“똑같이 어깨가 아픈 환자를 만나도, 침을 놓는 방법은 한의사마다 제각각이에요. 물론 어깨에 직접 침을 놓는 한의사들도 많겠지만 저는 제 방식대로 가요. 손가락이랑 팔, 발이랑 다리에 몇 대 놓을 거예요. 아, 목에도 두 대 정도 더 들어가지만 굳이 셔츠를 벗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정민이 뭐라 더 말을 하기도 전에, 지원은 아무렇지 않게 정민의 바지를 살짝 걷어 올리고는 몇 군데에 알코올 솜을 문질렀다. 그리고 손가락 끝으로 정민의 발등과 다리를 살짝살짝 눌러 가며 적당한 혈 자리를 찾았다.
“섭섭하네. 오늘 여기 오기 전에 푸시업을 200번 했거든요. 셔츠 벗으라고 할 줄 알고. 영화 때문에 한참 몸을 키워 놔서 요즘 좀 봐 줄 만한데.”
침을 놓던 지원이 픽 웃자 숨결이 정민의 다리에 미세하게 닿았다. 침이 살을 파고드는 따끔함보다 지원의 숨결이 주는 자극이 더 강했다.
“어깨 아픈 사람이 푸시업을 했다니 참 신선하네요. 물리치료 선생님은 셔츠를 벗고 다른 티셔츠로 갈아입으라고 하실지도 몰라요. 그때 마음껏 자랑하세요. 참고로 그 선생님은 40대 남자분이에요.”
“아, 뭐야.”
짧은 푸념을 흘린 정민은 집중해서 침을 놓는 지원을 눈을 내리뜨고 지켜보았다. 양쪽 귀 뒤로 넘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길이의 긴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다.
깨끗한 손톱을 가진 긴 손가락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살면서 고생이라고는 전혀 안 한 것처럼 희고 고운 손이었다. 지원의 오른손 검지가 엄지 끝에서 튕겨 나오며 침관 끝을 두드리자 침이 정민의 살을 뿌리 삼아 곧게 섰다.
“원래 이렇게 침이 안 아픈가요? 아프다고 해도 남자다워 보이려고 참았겠지만, 진짜 안 아프네요.”
“아프지 않게 놓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요. 잠깐만요. 목 쪽은 좀 아파요.”
지원의 손길이 정민의 얼굴 앞을 스쳐 지나갔다. 이내 목 근처가 두어 번 따끔해졌다.
“손이 왜 이래요?”
정민의 손에 침을 놓으려던 지원이 요란하게 놀라며 그의 손을 살폈다. 지원이 놀란 이유를 잘 아는 정민은 부끄러움에 주먹을 쥐었다. 자신이 아는 한 가장 고운 손을 가진 여자 앞에 내어놓기엔 손이 너무 거칠어진 탓이었다.
“아, 영화 때문에 검술을 배웠거든요. 검을 손에 익히느라 물집이 잡히고, 굳은살이 생기기를 반복하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아마 서서히 괜찮아질 겁니다.”
정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는데, 지원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매끈한 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대한민국 최고 배우라는 수식어는 아무나 가지는 게 아닌가 보네요. 도대체 어느 정도로 검을 휘둘러야 손이 이 지경이 되나요? 무지 아팠을 텐데.”
“손은 굳은살이 박이니 점점 감각이 무뎌져서 크게 아픈 것도 몰랐는데, 말에서 갑자기 툭 떨어졌을 때는 일주일 동안 온몸의 뼈마디가 다 아팠어요. 그때 지원 씨를 찾아왔다면 덜 아팠을까요?”
자신이 대꾸할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지원은 정민의 말을 흘려듣고 손바닥과 손목에 침을 놓을 뿐이었다.
정민은 지원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웃어 주었던 바르셀로나에서의 기억을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한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고,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를 함께 보냈다. 그랬던 여자가 신기루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함께한 시간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기 위해, 2년이라는 시간, 참 무던히도 여자를 찾기 위해 애썼다.
아는 거라고는 그녀의 캐리어 네임 택에서 봤던 ‘한지원’이라는 이름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추가적으로 알아낸 사는 곳이 서울이라는 정보뿐이었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여자는 처음부터 작정을 한 것처럼 자신의 신상에 대해 철저하게 감췄다. 그렇게 사라질 것을 미리 예견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도 사이즈가 전혀 다른 톱니바퀴가 딱딱 들어맞으며 잘 굴러가는 모양처럼, 여자와의 대화는 쉼 없이 이어지고 있었고 몇 가지 이상하다 여겼던 부분들도 그냥 그렇게 흘려 넘기고 말았다.
그 하루의 끝에 여자를 안았다. 자신의 품에서 잠든 여자의 등을 다독이며 설렘에 얼마나 뒤척였는지. 쉽게 잠 못 이룬 만큼, 뒤늦게 닫힌 정민의 눈꺼풀은 아주 무거웠다. 결국 그게 문제였다. 여자가 자신의 곁을 떠나는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하고 숙면을 한 것. 정민은 두고두고 그 순간을 후회했었다.
그렇게 떠난 여자가 자신의 눈앞에 있다 생각하니, 심장이 평소보다 급하게 펌프질을 했다. 혹시나 꿈이 아닐까 싶어 깊은 한숨 끝에 눈을 번쩍 뜬 정민은, 여전히 지원이 자신의 곁에 있음을 확인했다. 안도의 웃음이 나왔다.
“좀 주무세요. 20분 정도 뒤에 물리치료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침을 제거해 주고, 물리치료도 잘해 주실 거예요. 한 달 정도 꾸준히 치료받으면 많이 좋아질 것 같아요.”
침을 다 놓은 지원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정민이 몸을 움찔 떨었다. 몸 군데군데 놓인 침 때문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깐만요!”
정민의 목소리에 지원이 몸을 돌렸다.
“나 잠들면, 또 사라지려고 그래요?”
“하아.”
지원은 기가 막혀서 그저 웃고 말았다. 눈앞의 남자가 자꾸만 자신의 감정을 조종했다.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고, 즐겁게 해 주기도 했고, 또 민망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꾸만 입이 말랐다. 지원은 혀끝으로 안쪽 입술을 적셨다.
“약속해요.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으면 한지원 씨 여기서 못 나가요. 계속 내 옆에 있으라고 할 겁니다.”
“아니, 차정민 씨가 무슨 힘이 있어서요? 지금 차정민 씨는 쉽게 몸을 움직일 수 없을 텐데요. 내가 그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와, 이 여자 진짜 지능적이네.”
하지만 정민의 눈에 보이는 지원의 눈이 말했다. 더 이상 물러서거나 피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나와 다를까 봐서요.’
조금 전 진료실에서 지원이 했던 말이 정민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박혔다. 그 말은 지원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쭉 자신을 생각해 왔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적어도 서로의 마음이 같은 곳에 있다는 사실이 정민을 안심하게 했다. 그래도 여전히 지원에게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그리고 지원이 다시 사라질까 봐 자꾸 겁이 났다.
“「Before Sunrise」는 정말 영화일 뿐이었어요. 나는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처럼 그렇게 지원 씨와 헤어질 마음이 전혀 없었거든. 그런데 지원 씨가 모든 걸 정말 그 영화처럼 만들어 버렸어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두 사람은 9년 뒤에 재회했는데, 우리는 2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까.”
“정민 씨가 「Before Sunrise」를 찍는 것 같다고 말하긴 했었죠.”
“그건 우리의 시작이 그랬으니까 비유하느라 나온 말이었지 그 결말을 따르자는 말이 아니었어요. 왜 우리 만남을 영화와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이 찍어 내려 한 거죠?”
“목소리 더 낮춰요.”
지원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대화를 듣게 될까 봐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다시 생각해도 정민과 함께한 짧은 만남은 평생을 두고 떠올릴 만큼 아름다웠다. 살면서 봐 왔던 그 어떤 로맨틱 영화도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달콤함이 가득 차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럴수록 두려웠다. 그 순간에서 억지로 밀려나게 될까 봐. 그래서 먼저 문을 박차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억울해요. 나 정말 가벼운 남자 아닌데. 당신에게 그저 하룻밤 함께 잔 남자로 남아 있잖아요. 나는 정말 지원 씨가 좋아서 그렇게 안았던 거였고, 지원 씨 또한 진심이라 생각했는데.”
‘원나잇’이라는 표현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던 정민은, 가능한 말을 순화해서 하느라 애를 먹었다. 혹시라도 자신과의 대화가 지원에게 피해를 주게 될까 봐, 최대한 목소리를 낮췄다. 나중에 다시 만나 단둘이 있을 때 해도 되는 이야기였지만, 지원이 또 달아날까 봐 조급해져서인지 말이 쉴 새 없이 나왔다.
애써 돌려서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귀까지 빨개진 지원의 모습이 정민의 마음에 죄책감을 남겼다. 역시, 나중에 말할걸. 조금 더 가까워진 다음에 해도 되는 말이었는데,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그래서 퇴근이 언제죠? 저녁 같이 먹읍시다. 나는 오늘 스케줄 없어요.”
“미안해요. 오늘 야간 진료가 있는 날이라 10시는 되어야 끝나요. 저녁을 먹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럼 10시에 만나서 술 마시면 되겠네요. 저녁 먹기엔 늦은 시간이지만 술 마시기엔 좋은 시간이니까. 한지원 씨가 술을 좀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 어물쩍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고요.”
지원은 정민의 결연한 표정을 읽었고,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다. 자신을 찾기 위해 2년간 공을 들였다는 남자에게 또 상처를 주는 것도 더는 못 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와의 재회를 무시할 자신이 없었다. 그에게서 도망쳐 왔지만, 지원 또한 단 한 순간도 차정민이라는 남자를 머릿속에서 밀어 내지 못했다. 짧은 시간, 참 깊게도 그에게 빠진 듯했다.
혹시라도 그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연애 기사라도 접하게 될까 봐, 차정민이라는 이름을 검색조차 하지 못한 지원이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서 차정민이라는 이름이 보일 때마다 가슴이 쿵 내려앉곤 했었다. 다 의미 없다 간주했고, 그의 손을 먼저 놓은 건 자신이었지만, 그건 상처받기 싫은 약자가 보인 몸부림에 가까웠다.
“대답 안 하죠? 자꾸 그러면 2년 전 일, 지금 큰 소리로 한번 소리쳐 봐요? 나 발성 수업 열심히 들어서 전달력이 굉장히 좋은데. 괜히 배우 하는 줄 압니까?”
정민의 눈에는 악의 없는 장난기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정민은 지원에게 피해가 될 만한 행동은 조금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배우가 아니라 협박범이 하는 행동이죠. 2년이라는 시간이 차정민 씨에게는 어떻게 지나간 건가요? 그때 그 젠틀했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거죠?”
“내가 너무 젠틀해서 하룻밤 동안 정을 듬뿍 주고 그렇게 떠난 거 아니었던가? 그래서 결심했어요. 좀 무례해 보기로. 한지원 씨를 또 놓치는 멍청한 짓은 두 번 다시 안 할 거거든요. 그러려면 나쁜 남자 되는 것쯤이야 뭐가 대수입니까?”
역시,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정민이 들었다는 발성 수업이 큰 힘을 발휘했다. 대단하게 힘주어 말하는 것 같지 않은데도, 그의 목소리가 지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혹시라도 애인이 있다는 거짓말 할 거면, 그거 고이 넣어 둬요. 없다는 거 확인했으니까.”
“그걸 차정민 씨가 어떻게 알아요?”
“명성한의원, 그다음부터는 참 쉬웠어요. 우연히 명성한의원 원장 중 하나가 김태준 선배 친구인 걸 알았고, 곧바로 태준 선배한테 전화해서 부탁했죠. 내 인생을 흔들어 놓고 사라진 여자가 하나 있는데, 드디어 찾았으니 좀 알아봐 달라고.”
지원은 짧은 숨을 탁 뱉어 냈다. 그의 말대로 그가 지원을 찾아내기까지가 어려웠을 뿐, 한번 물꼬가 트이니 그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명성한의원의 최고 원장 권명성의 아들이자 한의원 원장 중 한 명인 권선빈은 지원의 한의대 선배이자 직장 동료였다. 그가 한국의 톱 배우 김태준과 여러모로 가까운 사이라는 건, 한의원 사람들 모두가 잘 알았다.
“그래서 뭘 얼마나 알아냈나요?”
“나이는 나보다 세 살 어린 서른 살이라는 것. 뛰어난 매선침 시술 능력자로 강남 사모님들 사이에 소문이 쫙 퍼졌다는 것. 수요일과 금요일은 매선침 시술만 하는데 예약이 석 달 뒤까지 꽉 차 있다는 것. 명성한의원에서 일한 지는 3년이 됐고, 그전에는 청명한의원에서 2년 일했다면서요? 거기도 유명한 곳이던데. 어쨌건 지금은 명성한의원에 있지만, 다른 한의원에서 꾸준히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다는 것.”
차정민이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이 지원의 마음을 간지럽혔다. 도대체가 이 남자는 왜 자꾸만 사람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걸까? 그런데 밉지가 않았다. 아니, 정말 못 견디게 좋아질 것 같아 겁이 날 지경이었다. 평소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또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억지로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으며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써도 자꾸만 볼이 떨려 왔다.
“아, 환자들이랑 주변 사람들이 대단한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고 해도 냉정하게 거절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만약 내가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면요?”
“그래도 한 번 찾아오긴 했을 겁니다.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요. 물론 이렇게 적극적으로 시간을 내 달라는 말은 못 했겠죠.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바른길이 아니면 발을 들여놓지 않으니까.”
지원은 누워 있는 정민을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지원도 알았다. 그는 가급적 착하게, 공손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건 정민과 5분만 대화를 나누어 본다면 그 누구라도 곧바로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왜 자신은 정민을 의심하고 믿지 못했던 걸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던 건가?
“다른 사람과 행복하게 지내는 여자였다면, 감히 건들지 못했을 겁니다.”
솔직한 정민의 말에 지원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