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3화
차정민과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너무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이상할 정도로 간호사들이 조용했다. 월요일 오전이 한가하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연예인에 대한 특혜인지 환자들을 다른 원장들에게 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야간 진료 있는 거 알고 있었어요. 홈페이지에 진료 시간도 자세히 나와 있었거든요.”
인터넷에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널려 있었다. 한의원 홈페이지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지원은, 진료실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한의원 홈페이지부터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진료가 없는 날인 것도 알고 왔어요. 기다릴 겁니다. 일 마치고 나랑 늦은 저녁 먹어요. 그 손, 침놓는 데만 쓰지 말고, 좀 더 따뜻한 데 써 봐요.”
정민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지원의 손을 가리켰다.
“네?”
“마드리드 아토차역 2번 플랫폼. 네이비색 원피스에 카멜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죠? 그리고 검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어요.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은색 캐리어는 옆에 세워 놓고. 그게 시작이었어요.”
말이 길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정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지원 씨가 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지원 씨밖에 안 보였어요. 우리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에요. 기차를 기다리던 플랫폼에서부터 나는 지원 씨만 좇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원 씨 옆자리에 앉은 건 절대로 우연 아닙니다.”
지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흩어진 기억을 억지로 맞춰 보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걸까?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정민은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순간이 생각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에서 시작된 열기는 정민의 척추를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물리치료받고 곱게 돌아갈게요. 퇴근 시간 맞춰 기다릴 겁니다. 튕기는 거, 거절하는 거 더는 그만하고 그 손으로 내 손 좀 다시 잡아 달라고요. 공부 잘한 사람이라 그런지 자꾸만 사람을 어렵게 만드네.”
❀ ❀ ❀
“밥 먹고 내 방에서 좀 볼 수 있어?”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넘어가지 않는 점심을 깨작거리던 지원에게 먼저 식사를 끝낸 권선빈 원장이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지원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선빈을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빈은 대학 때부터 좀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여자들과의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만약 업무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오픈된 장소를 택하는 게 더 권선빈다웠다.
“무슨 일인데요?”
“차정민 다녀갔다며?”
그 한마디에 지원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곧 다 먹어요. 선배 진료실로 갈게요.”
지원의 대답을 들은 선빈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간호사들을 포함한 한의원 여직원들은 차정민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역시 실물이 더 멋있더라, 연예인인데도 굉장히 싹싹하더라 하는 호평이 이어졌다.
“차정민도 결국 남자이긴 한가 봐요. 오늘 아침 예약 전화 했을 때, 다른 남자 원장님들 제치고 콕 집어서 한 원장님 진료 받겠다고 했다던데요?”
데스크의 직원 하나가 지원에게 말을 걸었지만, 지원은 그냥 웃어 보일 뿐이었다
선빈의 진료실 문을 열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지원의 귀에 들어왔다.
“앉아.”
“차정민이 대단하네요. 천하의 권선빈 선배랑 이렇게 독대를 다 해 보고.”
지원이 비꼬는 소리를 하자, 선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빈은 지원보다 다섯 살이 많은 대학 선배였다. 군대를 거쳐 2년 늦게 입학한 탓에 학번은 3년 위였다. 대학 시절 내내 선뜻 다가가기 힘들 만큼 까칠하고 냉철한 이미지였던 선빈은, 막상 함께 일해 보니 매사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성격상 많은 사담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지원은 동료들 중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 선빈이라 생각했다.
“왜 불렀어요?”
차정민이 대화의 주제가 될 거라는 걸 예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부러 선빈에게 물었다.
“내가 너한테 실수를 좀 한 것 같아서.”
“실수?”
선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을 깍지 껴서 책상 위에 얹었다.
“어제 김태준이 전화가 와서 갑자기 너에 대해 묻더라고. 너도 알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또 말을 옮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그건 잘 알아요.”
지원은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지. 권선빈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김태준이 궁금해하는 것도 아니고, 차정민이 부탁을 한 거라 하더라고. 그러니 더욱 말을 아꼈어. 궁금하면 와서 직접 물어보라고 했지.”
“지극히 선배다워요.”
지원의 말에 선빈이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김태준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더라. 2년 전에 네가 차정민의 인생을 흔들어 놓고 사라져 버렸다며? 차정민은 잠적한 너를 2년 동안 찾았고. 그러다 어제 네가 우리 한의원에서 일하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고 하던데?”
“그것도 맞아요.”
지원이 순순히 인정하자 선빈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말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느끼는 상실감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편이라서. 너한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아내가 나와 1년 정도 연애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었어. 1년 반 동안.”
선빈은 지원이 전혀 몰랐던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말했다. 지원은 자연스럽게 선빈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내가 정상적으로 사는 건 불가능했어. 속이 텅 빈 껍데기처럼 살았지. 그런데 차정민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잖아. 순간 마음이 약해진 건지, 나도 모르게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객관적인 것들 위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전화를 끊고 곧바로 후회했어.”
“그래서 내내 마음에 걸린 거죠?”
“응. 아침에 너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그러다 차정민이 오늘 한의원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혹시 나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되더라고.”
말을 마치고 꾹 다문 선빈의 입술은 다부졌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지원에게 뭔가 잘못한 게 아닌지 마음을 쓰고 있었다.
“선배가 잘못한 건 없어요. 선배가 아무 말 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 오늘 찾아왔을 거예요. 어차피 명성한의원을 알아냈으니까. 한의원 홈페이지는 친절하게 모든 걸 알려 주고 있더라고요.”
“그럼 다행이고.”
괜찮다는 지원의 말에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는지 선빈이 웃어 보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차정민을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거야? 네 행동반경에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앞뒤 없이 곧바로 물었을 법한 질문을, 선빈은 참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선빈이 궁금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지원이 대답하지 않으면 선빈은 거기서 끝낼 사람이었다. 억지로 추궁하거나 부추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더 털어놓고 싶어졌다.
“휴, 선배 기억나요? 나 여기 오고 1년 됐을 때였나? 선배가 나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학회 보낸 거.”
“당연히 기억나. 원래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너를 보냈지.”
“선배가 그랬었죠? 학회 끝나면 일주일 정도 휴가 쓰고 바르셀로나에 들렀다 오라고요.”
“맞아.”
“거기서 만났어요.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오호. 영화구나?”
지원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차정민은 플랫폼에서부터 자신을 지켜봤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민에 대한 지원의 첫 기억은, 자신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던 그 순간부터였다.
지정석이긴 했지만 유독 빈자리가 많았던 기차 안에서, 자신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는 사실이 살짝 성가셨다. 세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조금 더 편하게 여행하기 위해 남아 있는 빈자리로 옮겨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을 정한 지원이 고개를 돌렸을 때,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배우 차정민이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연예인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런 지원을 향해 차정민은 말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만났던 거예요. 그러다 헤어지게 된 거고.”
“말은 똑바로 하지? 네가 일방적으로 끊어 낸 것 같던데.”
“그게 맞겠네요.”
지원은 스스로 팔짱을 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늘 답지 않게 궁금한 게 좀 많이 생기는데.”
“또 뭐가 궁금한데요?”
“나는 네가 2년간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문성현 때문이라고 판단했거든? 그 나쁜 놈에게 크게 당해서, 사랑에 대한 덧정이 없어진 거라 혼자 생각했었어.”
모처럼 듣는 이름이었다. 문성현. 그 이름은 지원의 주변 사람들에겐 금기어였다. 모두 지원의 앞에서 그의 얘기를 꺼내는 걸 지레 조심스러워했다. 그 때문에 지원이 그의 이름을 들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요?”
“딱 그 시기였잖아. 너 학회 가기 직전에 그 일이 있지 않았나? 그래서 내가 머리도 식힐 겸 스페인으로 가라고 너에게 권했었지.”
“맞아요.”
자신도 모를 한숨이 지원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성현과의 마지막 순간은 최악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걸까? 이젠 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지원이 받은 충격은 도저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누구 때문인 거야? 문성현? 아니면 차정민?”
지원이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빈이 솔직한 마음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널 2년 동안 혼자 있게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문성현 그 쓰레기가 원인이라면 나도 살짝 화날 것 같거든.”
“나는 또 무슨 말인가 했어요.”
진지한 선빈의 얼굴을 앞에 두고 지원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기가 막힌 웃음 반, 유쾌한 웃음 반이었다. 선빈은 자신의 가까웠던 동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이후 성현을 가급적 피하는 눈치였다. 오래된 연인이 있는 성현이 다른 여자와 밤을 보냈고 그로 인해 생긴 일들에 대해 인간적으로 실망한 게 분명했다.
“네가 연애를 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니까 내 나름대로는 신경이 쓰였다고. 설마 문성현을 못 잊어서 그러나. 아니면 상처가 너무 커서 회복이 되지 않은 건가. 문성현 그놈은 잘 사는데, 너는 계속 혼자인 게 나도 못마땅했나 봐.”
“혼자 있어도 이렇게 잘 살잖아요. 나한테 진료받는 강남 사모님들이 서로 자기 며느리로 들이려고 난리인데요?”
“그럼 어서 거기 며느리 하시든가.”
선빈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 김태준 말을 듣고 보니, 스페인에 다녀온 뒤로 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기억이 나더라.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은 건 여전했는데,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어. 문성현에게 받은 충격을 조용히 억누르던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달까? 마음을 다잡은 것 같은 다부진 모습도 보였고. 난 그저 여행이 계기가 되어 네가 변했다 판단하고 넘겼는데 그 중심에 차정민이 있었던 거야?”
내가 그랬던가? 가끔은 제3자가 자신을 보는 눈이 훨씬 더 정확하다. 유독 눈썰미가 좋은 선빈이 느낀 거라면 그게 더 맞는 건지도. 지원은 천천히 기억을 되감으며 2년 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였을 자신의 모습이 어땠을지 유추해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한지원을 변하게 한 원인이 차정민이었으면 해. 한지원이 2년간 연애에 무심하게 만든 사람도 문성현이 아닌 차정민이었으면 좋겠고.”
선빈의 이야기대로 많이 달라졌을까? 차정민을 만나기 전과 후의 내 모습은. 평소와 똑같은 담박한 말투였지만 선빈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원은 어질러져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 한구석이 깨끗하게 정돈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후련했다. 그랬구나. 스페인에 다녀온 뒤로 내 모든 것들의 중심에 차정민이라는 남자가 있었구나. 어쩌면 나도 잘 알고 있었던 내 마음을 왜 애써 숨겨 왔을까.
“하하, 한동안 개그 프로 안 봐도 될 것 같아요. 한 달 치 웃을 거 선배 땜에 다 웃었네. 나 일어나도 되죠?”
굳이 선빈의 말에 대답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빈 또한 지원을 따라 일어서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래. 가 봐. 그런데 아까 차정민 와서는 별일 없었고?”
“선배, 오늘 되게 선배답지 않은 거 알아요?”
“알아. 그래도 궁금하긴 해.”
“언젠가는 만나게 될 사이였어요. 그렇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깊은 밤」 촬영장에서라도 봤겠죠. 그런데 선배는 알았어요? 주연 배우가 차정민으로 바뀐 거?”
“응. 어제 들었어. 내가 그 사람 손 대역을 하게 될 거라고. 너는 몰랐어?”
“네. 차정민이 와서 알려 줬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에 술 먹자네요. 내일 내가 쉬는 날인 것까지 다 알고 왔대요.”
“오호!”
지원은 좀처럼 보기 드문 선빈의 뿌듯한 표정을 보았다.
“만날 거지?”
“피할 이유는 없잖아요. 잘생긴 연예인이 자기랑 만나 달라는데.”
“김태준이 그러는데, 차정민 괜찮대. 싹싹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인성 하나는 된 놈이라고 하더라.”
“괜찮은 사람인 것 정도는 나도 알아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지원이 선빈의 진료실을 빠져나왔을 때, 몸속의 모든 근육들이 엉키는 것 같은 피곤함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오전 내내 과도하게 긴장했나 보다.
그때 지원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차정민입니다. 훌륭한 주치의 덕분에 어깨 움직임이 조금 나아졌어요. 그래도 여전히 아프니까 한동안은 계속 한의원에 가야 될 것 같아요.]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라고 지원이 생각하는 순간 휴대폰 화면 위로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번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죠? 내가 말했죠? 명성한의원까지가 어려웠다고. 한 다리 걸치니까 다 나오던데요?]
정민은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읽고 있는 것처럼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지원은 그가 보낸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다.
딩동.
[이름, 나이, 직장, 출신 대학, 휴대폰 번호. 이제 어지간한 건 다 아니까 절대로 도망가기 없어요! 지원 씨 퇴근 시간 전부터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까, 값비싼 국민 배우 버리는 일은 2년 전 단 한 번으로 끝내요.]
잔잔한 웃음이 큰 웃음으로 변했다. 지원은 그의 메시지를 읽으며 선빈의 진료실이 있는 7층에서 자신의 진료실이 있는 8층까지 비상구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조용한 계단에 지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차정민과 대화를 하느라 시간을 너무 쓴 것 같다는 생각이 번뜩 뇌리를 스쳤다. 이상할 정도로 간호사들이 조용했다. 월요일 오전이 한가하긴 해도, 이 정도는 아닐 텐데. 연예인에 대한 특혜인지 환자들을 다른 원장들에게 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야간 진료 있는 거 알고 있었어요. 홈페이지에 진료 시간도 자세히 나와 있었거든요.”
인터넷에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널려 있었다. 한의원 홈페이지를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지원은, 진료실에 돌아가면 가장 먼저 한의원 홈페이지부터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은 진료가 없는 날인 것도 알고 왔어요. 기다릴 겁니다. 일 마치고 나랑 늦은 저녁 먹어요. 그 손, 침놓는 데만 쓰지 말고, 좀 더 따뜻한 데 써 봐요.”
정민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지원의 손을 가리켰다.
“네?”
“마드리드 아토차역 2번 플랫폼. 네이비색 원피스에 카멜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죠? 그리고 검은 하이힐을 신고 있었어요.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은색 캐리어는 옆에 세워 놓고. 그게 시작이었어요.”
말이 길어질 거라 생각했는지 정민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지원 씨가 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지원 씨밖에 안 보였어요. 우리는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에요. 기차를 기다리던 플랫폼에서부터 나는 지원 씨만 좇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내가 지원 씨 옆자리에 앉은 건 절대로 우연 아닙니다.”
지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흩어진 기억을 억지로 맞춰 보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걸까?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자 정민은 그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순간이 생각났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얼굴에서 시작된 열기는 정민의 척추를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물리치료받고 곱게 돌아갈게요. 퇴근 시간 맞춰 기다릴 겁니다. 튕기는 거, 거절하는 거 더는 그만하고 그 손으로 내 손 좀 다시 잡아 달라고요. 공부 잘한 사람이라 그런지 자꾸만 사람을 어렵게 만드네.”
❀ ❀ ❀
“밥 먹고 내 방에서 좀 볼 수 있어?”
점심시간. 구내식당에서 넘어가지 않는 점심을 깨작거리던 지원에게 먼저 식사를 끝낸 권선빈 원장이 조용하게 말을 걸었다. 지원은 살짝 의아한 표정으로 선빈을 쳐다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빈은 대학 때부터 좀 고지식하다 싶을 정도로 여자들과의 선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다. 만약 업무 때문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오픈된 장소를 택하는 게 더 권선빈다웠다.
“무슨 일인데요?”
“차정민 다녀갔다며?”
그 한마디에 지원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곧 다 먹어요. 선배 진료실로 갈게요.”
지원의 대답을 들은 선빈이 식당을 빠져나갔다. 간호사들을 포함한 한의원 여직원들은 차정민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역시 실물이 더 멋있더라, 연예인인데도 굉장히 싹싹하더라 하는 호평이 이어졌다.
“차정민도 결국 남자이긴 한가 봐요. 오늘 아침 예약 전화 했을 때, 다른 남자 원장님들 제치고 콕 집어서 한 원장님 진료 받겠다고 했다던데요?”
데스크의 직원 하나가 지원에게 말을 걸었지만, 지원은 그냥 웃어 보일 뿐이었다
선빈의 진료실 문을 열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지원의 귀에 들어왔다.
“앉아.”
“차정민이 대단하네요. 천하의 권선빈 선배랑 이렇게 독대를 다 해 보고.”
지원이 비꼬는 소리를 하자, 선빈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선빈은 지원보다 다섯 살이 많은 대학 선배였다. 군대를 거쳐 2년 늦게 입학한 탓에 학번은 3년 위였다. 대학 시절 내내 선뜻 다가가기 힘들 만큼 까칠하고 냉철한 이미지였던 선빈은, 막상 함께 일해 보니 매사 신중하고 입이 무거운 믿음직한 사람이었다. 성격상 많은 사담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지원은 동료들 중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 선빈이라 생각했다.
“왜 불렀어요?”
차정민이 대화의 주제가 될 거라는 걸 예고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부러 선빈에게 물었다.
“내가 너한테 실수를 좀 한 것 같아서.”
“실수?”
선빈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두 손을 깍지 껴서 책상 위에 얹었다.
“어제 김태준이 전화가 와서 갑자기 너에 대해 묻더라고. 너도 알겠지만, 나는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또 말을 옮기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
“그건 잘 알아요.”
지원은 곧바로 수긍했다. 그렇지. 권선빈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김태준이 궁금해하는 것도 아니고, 차정민이 부탁을 한 거라 하더라고. 그러니 더욱 말을 아꼈어. 궁금하면 와서 직접 물어보라고 했지.”
“지극히 선배다워요.”
지원의 말에 선빈이 멋쩍게 웃었다.
“그런데 김태준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더라. 2년 전에 네가 차정민의 인생을 흔들어 놓고 사라져 버렸다며? 차정민은 잠적한 너를 2년 동안 찾았고. 그러다 어제 네가 우리 한의원에서 일하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고 하던데?”
“그것도 맞아요.”
지원이 순순히 인정하자 선빈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말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느끼는 상실감에 대해서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 편이라서. 너한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 아내가 나와 1년 정도 연애하다가 갑자기 사라진 적이 있었어. 1년 반 동안.”
선빈은 지원이 전혀 몰랐던 자신의 경험을 차분하게 말했다. 지원은 자연스럽게 선빈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 내가 정상적으로 사는 건 불가능했어. 속이 텅 빈 껍데기처럼 살았지. 그런데 차정민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잖아. 순간 마음이 약해진 건지, 나도 모르게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 객관적인 것들 위주로 이야기하긴 했지만 전화를 끊고 곧바로 후회했어.”
“그래서 내내 마음에 걸린 거죠?”
“응. 아침에 너에게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어. 그러다 차정민이 오늘 한의원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었고. 혹시 나 때문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걱정이 되더라고.”
말을 마치고 꾹 다문 선빈의 입술은 다부졌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지원에게 뭔가 잘못한 게 아닌지 마음을 쓰고 있었다.
“선배가 잘못한 건 없어요. 선배가 아무 말 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 오늘 찾아왔을 거예요. 어차피 명성한의원을 알아냈으니까. 한의원 홈페이지는 친절하게 모든 걸 알려 주고 있더라고요.”
“그럼 다행이고.”
괜찮다는 지원의 말에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는지 선빈이 웃어 보였다.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데, 차정민을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거야? 네 행동반경에 있을 사람이 아니잖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앞뒤 없이 곧바로 물었을 법한 질문을, 선빈은 참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선빈이 궁금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지원이 대답하지 않으면 선빈은 거기서 끝낼 사람이었다. 억지로 추궁하거나 부추길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니 더 털어놓고 싶어졌다.
“휴, 선배 기억나요? 나 여기 오고 1년 됐을 때였나? 선배가 나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학회 보낸 거.”
“당연히 기억나. 원래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너를 보냈지.”
“선배가 그랬었죠? 학회 끝나면 일주일 정도 휴가 쓰고 바르셀로나에 들렀다 오라고요.”
“맞아.”
“거기서 만났어요.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오호. 영화구나?”
지원은 생각에 잠겼다. 분명히 차정민은 플랫폼에서부터 자신을 지켜봤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민에 대한 지원의 첫 기억은, 자신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던 그 순간부터였다.
지정석이긴 했지만 유독 빈자리가 많았던 기차 안에서, 자신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는 사실이 살짝 성가셨다. 세 시간 남짓의 시간 동안 조금 더 편하게 여행하기 위해 남아 있는 빈자리로 옮겨 가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자리를 옮기기로 마음을 정한 지원이 고개를 돌렸을 때, 옆자리에 앉은 승객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배우 차정민이었다. 살면서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연예인을 본 것은 처음이었기에 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런 지원을 향해 차정민은 말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만났던 거예요. 그러다 헤어지게 된 거고.”
“말은 똑바로 하지? 네가 일방적으로 끊어 낸 것 같던데.”
“그게 맞겠네요.”
지원은 스스로 팔짱을 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늘 답지 않게 궁금한 게 좀 많이 생기는데.”
“또 뭐가 궁금한데요?”
“나는 네가 2년간 연애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문성현 때문이라고 판단했거든? 그 나쁜 놈에게 크게 당해서, 사랑에 대한 덧정이 없어진 거라 혼자 생각했었어.”
모처럼 듣는 이름이었다. 문성현. 그 이름은 지원의 주변 사람들에겐 금기어였다. 모두 지원의 앞에서 그의 얘기를 꺼내는 걸 지레 조심스러워했다. 그 때문에 지원이 그의 이름을 들을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요?”
“딱 그 시기였잖아. 너 학회 가기 직전에 그 일이 있지 않았나? 그래서 내가 머리도 식힐 겸 스페인으로 가라고 너에게 권했었지.”
“맞아요.”
자신도 모를 한숨이 지원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다시 생각해도 성현과의 마지막 순간은 최악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걸까? 이젠 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지원이 받은 충격은 도저히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누구 때문인 거야? 문성현? 아니면 차정민?”
지원이 질문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선빈이 솔직한 마음을 넌지시 이야기했다.
“널 2년 동안 혼자 있게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문성현 그 쓰레기가 원인이라면 나도 살짝 화날 것 같거든.”
“나는 또 무슨 말인가 했어요.”
진지한 선빈의 얼굴을 앞에 두고 지원이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기가 막힌 웃음 반, 유쾌한 웃음 반이었다. 선빈은 자신의 가까웠던 동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 이후 성현을 가급적 피하는 눈치였다. 오래된 연인이 있는 성현이 다른 여자와 밤을 보냈고 그로 인해 생긴 일들에 대해 인간적으로 실망한 게 분명했다.
“네가 연애를 할 생각조차 없어 보이니까 내 나름대로는 신경이 쓰였다고. 설마 문성현을 못 잊어서 그러나. 아니면 상처가 너무 커서 회복이 되지 않은 건가. 문성현 그놈은 잘 사는데, 너는 계속 혼자인 게 나도 못마땅했나 봐.”
“혼자 있어도 이렇게 잘 살잖아요. 나한테 진료받는 강남 사모님들이 서로 자기 며느리로 들이려고 난리인데요?”
“그럼 어서 거기 며느리 하시든가.”
선빈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어제 김태준 말을 듣고 보니, 스페인에 다녀온 뒤로 네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느꼈던 기억이 나더라. 생각에 잠겨 있는 시간이 많은 건 여전했는데,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변화가 있었어. 문성현에게 받은 충격을 조용히 억누르던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달까? 마음을 다잡은 것 같은 다부진 모습도 보였고. 난 그저 여행이 계기가 되어 네가 변했다 판단하고 넘겼는데 그 중심에 차정민이 있었던 거야?”
내가 그랬던가? 가끔은 제3자가 자신을 보는 눈이 훨씬 더 정확하다. 유독 눈썰미가 좋은 선빈이 느낀 거라면 그게 더 맞는 건지도. 지원은 천천히 기억을 되감으며 2년 전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였을 자신의 모습이 어땠을지 유추해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한지원을 변하게 한 원인이 차정민이었으면 해. 한지원이 2년간 연애에 무심하게 만든 사람도 문성현이 아닌 차정민이었으면 좋겠고.”
선빈의 이야기대로 많이 달라졌을까? 차정민을 만나기 전과 후의 내 모습은. 평소와 똑같은 담박한 말투였지만 선빈의 말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지원은 어질러져 있는지도 몰랐던 마음 한구석이 깨끗하게 정돈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속 시원하게 털어놓은 것도 없는데 가슴이 후련했다. 그랬구나. 스페인에 다녀온 뒤로 내 모든 것들의 중심에 차정민이라는 남자가 있었구나. 어쩌면 나도 잘 알고 있었던 내 마음을 왜 애써 숨겨 왔을까.
“하하, 한동안 개그 프로 안 봐도 될 것 같아요. 한 달 치 웃을 거 선배 땜에 다 웃었네. 나 일어나도 되죠?”
굳이 선빈의 말에 대답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빈 또한 지원을 따라 일어서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래. 가 봐. 그런데 아까 차정민 와서는 별일 없었고?”
“선배, 오늘 되게 선배답지 않은 거 알아요?”
“알아. 그래도 궁금하긴 해.”
“언젠가는 만나게 될 사이였어요. 그렇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깊은 밤」 촬영장에서라도 봤겠죠. 그런데 선배는 알았어요? 주연 배우가 차정민으로 바뀐 거?”
“응. 어제 들었어. 내가 그 사람 손 대역을 하게 될 거라고. 너는 몰랐어?”
“네. 차정민이 와서 알려 줬어요. 그리고 오늘 저녁에 술 먹자네요. 내일 내가 쉬는 날인 것까지 다 알고 왔대요.”
“오호!”
지원은 좀처럼 보기 드문 선빈의 뿌듯한 표정을 보았다.
“만날 거지?”
“피할 이유는 없잖아요. 잘생긴 연예인이 자기랑 만나 달라는데.”
“김태준이 그러는데, 차정민 괜찮대. 싹싹하고, 일도 열심히 하고. 인성 하나는 된 놈이라고 하더라.”
“괜찮은 사람인 것 정도는 나도 알아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지원이 선빈의 진료실을 빠져나왔을 때, 몸속의 모든 근육들이 엉키는 것 같은 피곤함이 몰려왔다. 아무래도 오전 내내 과도하게 긴장했나 보다.
그때 지원의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왔다.
[차정민입니다. 훌륭한 주치의 덕분에 어깨 움직임이 조금 나아졌어요. 그래도 여전히 아프니까 한동안은 계속 한의원에 가야 될 것 같아요.]
‘내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라고 지원이 생각하는 순간 휴대폰 화면 위로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번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죠? 내가 말했죠? 명성한의원까지가 어려웠다고. 한 다리 걸치니까 다 나오던데요?]
정민은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읽고 있는 것처럼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지원은 그가 보낸 메시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빙그레 웃었다.
딩동.
[이름, 나이, 직장, 출신 대학, 휴대폰 번호. 이제 어지간한 건 다 아니까 절대로 도망가기 없어요! 지원 씨 퇴근 시간 전부터 지하 주차장에서 기다릴 테니까, 값비싼 국민 배우 버리는 일은 2년 전 단 한 번으로 끝내요.]
잔잔한 웃음이 큰 웃음으로 변했다. 지원은 그의 메시지를 읽으며 선빈의 진료실이 있는 7층에서 자신의 진료실이 있는 8층까지 비상구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조용한 계단에 지원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