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5화
“그런데 말이죠.”
답답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정민은 다시 지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일이 있으니 정민 씨가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충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아뇨, 알아요. 나도 그게 이상했어요. 한지원 씨가 왜 나와 함께 있기로 마음먹은 건지.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하고 같이 여행하자고 한 사람은 나지만 쉽게 수락할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외로움과 상실감에 허덕이던 때였어요. 나도 별수 없었나 봐요. 나를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에게 안겨서 위로받고 싶었던 걸 보면. 누군가의 온기가 절실하다는 내면의 소리를 차정민 씨를 통해 들은 거죠.”
지원의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퍼졌다. 와인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어요. 충동적이었다고 포장하고 싶을 만큼 차정민 씨를 좋아했어요.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깊게요. 그래서 모든 걸 차정민 씨에게 맡길 수 있었어요.”
정민의 가슴속에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온 얼굴에 뜨끈한 열기가 퍼졌다.
“좋아했었다……. 표현 별로네요. 적어도 지금은 그런 과거형은 듣고 싶지 않아요.”
정민은 티셔츠의 양쪽 소매를 걷어 올린 뒤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이젠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눈앞에서 지원을 놓치는 일은 두 번 다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단호하지만 진솔하게 모든 걸 말해야 하는 때가 왔다.
“똑바로 말하죠. 나는 한지원 씨에게 첫눈에 반한 게 맞아요. 그래서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말했던 거였고, 한국에 와서도 우리의 관계를 이어 갈 생각이었어요. 우리 사이에 2년이라는 공백이 있었지만 이제 그건 상관없어요. 이렇게 지원 씨를 다시 만났잖아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던 마음과는 다르게 정민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지원은 정민을 평소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힘을 가진 여자였다.
“2년 동안 그 어떤 여자도 쳐다보지 않고 한지원 씨만 찾았을 정도로 계속 좋아해 왔어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해요.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정민은 깍지를 풀고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지원의 손을 꼭 붙들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지원의 눈에 점차 생기가 돌았다.
“나를 좋아했다면, 한국에 와서도 내가 보고 싶었겠네요?”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단순히 하룻밤 유희로 지원 씨를 만났을까 봐 나를 찾아오기 겁이 났던 거고요.”
“맞아요.”
“그럼 그게 오해였다는 것만큼은 이제 확실히 알겠네요. 내가 얼마나 더 표현합니까? 나니까 이 정도지 보통 사람들은 어림도 없어요.”
입술을 모으고 눈을 흘기던 지원은 참았던 웃음을 소심하게 꺼내어 놓았다. 바람 소리가 가득 찬 웃음이었다.
굶주렸던 위장에 음식이 들어가니 몸이 나른해졌다. 게다가 술기운 때문인지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몽롱함이 온몸을 에워쌌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근래 들어 가장 맑았다. 눈앞의 남자가 가진 긍정적인 기운에 전염되기라도 한 걸까?
지원은 다시 한번 정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낮에 한의원에서 봤을 땐 정민의 긴 머리카락과 수염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자꾸 보다 보니 지금의 모습도 정민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진 정민이었지만,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갈색 눈동자였다. 빛을 받으면 살짝 회색빛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쌍꺼풀이 없는데도 이국적인 느낌을 뿜어내는 정민의 이미지에는 눈동자 색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로 보였다.
너무 빤히 쳐다보며 관찰한 것 같아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 정민에게 꼭 붙들린 자신의 왼손이 보였다.
“완벽한 조건이죠? 나도, 지원 씨도 만나는 사람이 없고 나는 2년 동안 지원 씨를 너무 좋아해 왔는데, 그게 나만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닌 걸 방금 확인했어요. 자, 그럼 우리 둘이 뭘 해야 하는지는 곧바로 답이 나오네요.”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의식한 듯 다부지게 어깨를 편 정민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연애해야죠. 오늘부터 1일, 그런 거. 그런데 오늘이 1일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 바르셀로나에서 1박 2일을 같이 있었잖아요. 그 만남에서 미리 2일을 썼으니까 오늘이 3일째인 걸로 해야 하나? 아니, 아예 우리 2년 연애한 걸로 할까요?”
정민의 말대로 이제 와 연애하지 않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연애라…… 차정민이라는 연예인과 하는 연애는 어떨까? 보통 사람과 하는 연애에 비해 조심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겠지. 그 모든 걸 다 감내할 수 있을까?
지원은 정민과 연애할 경우 자신에게 생길 일들에 대해 나열해 보려 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깨끗해진 머릿속도 뜨거워진 마음도 모두 정민을 원할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던가?
지원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정민은 진지하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연애를 시작한 날짜를 정하는 게 정민에게는 정말 심각한 고민거리인 모양이었다. 엉뚱한 정민의 모습이 자꾸만 지원의 입매를 유연하게 만들었다. 웃음을 참아 보려는 노력은 진즉 포기했다.
“그게 중요해요? 서른 넘은 사람들이 굳이 뭐 그런 걸 세어 가며 연애해요?”
“나이랑 연애가 무슨 상관이죠? 연애 시작할 때 설레는 건 다 똑같죠. 잠깐만요, 그럼 우리 연애하는 거죠? 지원 씨 마음을 다 들었는데도 왜 이렇게 자꾸 불안할까요? 이러다 나 집착남, 계략남 그런 거 되는 거 아닌가 몰라요. 드라마에서도 아직 못 해 본 역할인데.”
횡설수설하는 정민을 두고 지원이 먼저 일어날 채비를 했다. 이대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 밤을 꼬박 새우게 될 것만 같았다.
“늦어서 이제 그만 집에 가 봐야겠어요.”
10시가 가까워진 늦은 시간에 만난 탓에 저녁을 먹은 뒤 몇 마디를 나누고 나니 시간은 새벽 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간을 확인한 정민이 화들짝 놀랐다.
“뭐야, 뭘 했다고 벌써 1시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와인이 들어간 탓인지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였다.
“대리 불러야 하나요?”
시선을 내려 지원의 발을 확인한 정민이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굽 낮은 구두 신었으니 걸어갈래요? 집이 한의원 바로 옆이라면서요? 그럼 걸어서 20분 거리인데. 차야 내가 다시 와서 찾아도 되고, 또 내일 와도 되고요.”
뜻밖이었지만 반가웠다. 그와 함께 다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니. 하지만 그의 직업을 생각하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연예인이었고, 사람들에게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여서 좋을 게 전혀 없는 사람이니까.
“잠깐 차에 들렀다 가요. 모자랑 마스크 있으니까 그거 쓰고 가면 될 것 같아요. 평일이라서 지금 이 시간에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또 있다 해도 어두워서 잘 못 알아볼 겁니다.”
“그래도…….”
“믿어 봐요. 뭐 죄짓나요? 말했죠?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건 잘못 아니라고. 갑시다.”
정민이 앞서 룸을 빠져나갔다. 지원도 못 이기는 척 정민을 따랐다. 미리 계산을 해 둔 건지, 정민이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뒷좌석 문을 열고 모자와 마스크를 꺼내 들었다.
“모자 쓰고 마스크 해도 차정민 씨 같은데요?”
“그럼 이 정도의 잘생김이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질 거라 생각했어요?”
50미터 남짓한 골목길을 지나자 큰길이 나왔다. 정민의 말이 맞았다. 평일 새벽 1시의 거리는 한산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도 두 사람에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직도 안 믿기네요. 이렇게 한지원 씨랑 나란히 걸을 날이 다시 올 줄 몰랐는데. 춥지 않아요?”
3월 말이지만 밤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그래도 견딜 만한 한기였다. 지원이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어 목에 둘렀다.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날처럼 재킷 벗어 준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정민이 들켰다는 듯 코를 찡긋해 보였다.
“내일은, 아니지. 오늘은 뭐 해요? 지원 씨 쉬는 날인데.”
“본가에 좀 가 보려고요. 요즘 통 못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도 뵐 겸.”
“본가가 어디인데요?”
“서울이지만 한의원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니까 먼 편이죠. 출퇴근으로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1년 전에 독립했거든요. 또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고.”
“어떤 이유죠?”
정민은 무슨 사연이 있냐는 듯 걱정스럽게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어쩜 순식간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차정민이라는 배우가 인기를 얻는 이유가 납득이 갔다.
“우리 엄마 아들 때문에요. 우리 엄마 아들이 결혼을 좀 빨리했는데, 맞벌이를 하다 보니 육아에 대한 도움이 필요했나 봐요. 아내랑 아들을 데리고 본가로 들어왔어요.”
“잠깐, 우리 엄마 아들? 그럼 오빠나 남동생을 이야기하는 거겠네요.”
“네, 남동생이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같이 살고 계신 데다 나보다 어린 올케와 조카가 한집에 있다 보니 내가 먼저 불편해지더라고요. 어른들도 갑자기 잔소리가 많아졌고요. 너보다 어린애도 벌써 결혼해서 애가 있는데, 너는 뭐 하냐는 거죠. 또 좀 자유롭게 살고 싶기도 해서 독립했어요.”
“대충 이해가 가네요. 그런데 진짜 안 추워요? 눈치가 있으면 춥다고 좀 해 봐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았다. 정민은 2년 전 그날 밤과 같은 상황을 원하고 있었다. 훤히 보이는 속마음이 자꾸만 지원을 웃게 했다.
“뭐야, 나는 진지한데 왜 웃어요?”
지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찬찬히 정민을 훑어보던 지원의 눈빛이 정민의 손에서 멈췄다. 2년 전과는 다르게 손에 상처가 너무 많아서 놀랐던 침구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르겠지. 차정민이라는 배우의 근사한 모습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굳은살이 박여 아픔에 익숙해질 만큼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그토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원하고 있다. 행복하고 싶었다. 아는 거라곤 이름밖에 없는 여자를 2년간 찾아 헤맨 이 무모한 남자와 함께. 만인이 사랑하는 완벽한 남자가 오로지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을 이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자신의 손을 보고 있는 지원의 눈이 부담스러웠는지 정민이 슬쩍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했다. 지원은 손을 내밀어 정민의 손을 꼭 잡았다. 진료실에서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지원의 손을 먼저 붙들었던 정민은 놀라움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민 씨 말대로 침놓는 데만 쓰기에는 내 손이 좀 아까워서요. 이제 다른 데도 좀 써 보려고 해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정민의 두 눈동자가 지원의 가슴 한가운데 깊이 박혔다.
Episode 01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한국분이시죠?”
지원과 눈이 마주치자 옆 좌석에 앉은 정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동시에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네. 영광이네요. 스페인에서 차정민 씨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창가 좌석에 앉은 지원이 정민에게 재킷을 달라는 듯 손을 뻗었고, 정민은 눈인사를 하며 재킷을 내밀었다. 지원은 그의 재킷을 창문 옆에 박힌 옷걸이에 곱게 걸었다.
연예계에 둔감한 지원이 알 정도면 차정민은 명실공히 유명 연예인이 맞았다. 언젠가 지원이 봤던 기사에 의하면 그는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보기 드문 배우 중에 하나였다. 그가 하는 작품이라면 드라마건 영화건 일단은 큰 주목을 받았고, 흥행 결과 또한 평타 이상은 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이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를 한 번도 챙겨 본 적이 없었던 지원이었다. 그래도 정민이 나오는 광고를 가끔씩 볼 때마다 괜찮은 느낌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은 종종 가지곤 했었다.
지원은 다른 빈자리로 옮기려 했던 마음을 곧바로 접었다.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도 여러 대가 있었다. 그 많은 기차 중에, 같은 칸에서, 그것도 옆자리에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배우 차정민이 앉아 있는 우연을 먼저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바르셀로나로 가시는 건가요?”
“네. 차정민 씨도요?”
“네. 거기서 내일 오후부터 잡지 화보 촬영이 있어요. 마드리드는 가 본 적이 없어서 일정 전에 휴가 겸 들렀다가 이제 일하러 가는 거예요. 그쪽은요? 스페인에 여행 오신 겁니까? 옷차림을 보니 배낭여행 같지는 않고.”
“겸사겸사 왔어요. 어쨌거나 바르셀로나는 여행으로 가는 거예요.”
유명 연예인이니만큼 당연히 도도할 거란 생각과는 다르게, 정민은 시원시원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할 일 없이 앉아서만 간다면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을 유명한 연예인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지원을 잔뜩 설레게 했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정민은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즐거운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보통 연예인은 매니저와 함께 다니지 않나요? 아까 역에서도 한국인들이 몇 명 보이던데, 혹시라도 한국 사람들이 알아보면 어쩌시려고요.”
“하하하, 휴가까지 매니저 형이랑 다니긴 싫어요. 원래 저는 혼자 잘 다니는 편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혼자 다니면 더욱 말을 못 거는 것 같더라고요.”
“왜요, 제가 자꾸 말 걸고 있잖아요. 연예인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사생활 방해하는 한심한 사람의 표본이 된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그쪽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나예요.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요?”
서운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서운한 표정이 전혀 없었다. 그는 웃으며 앞에 꽂혀 있는 기차 안내 책자를 집어 들었다.
“커피 드실래요? 제가 아침에 늦잠을 잤어요. 기차 시간 맞추느라 호텔에서 서둘러 나왔더니 커피 한 잔이 간절하네요. 배가 고프니까 요깃거리도 있으면 좋을 것 같고요. 바로 이 앞 칸에 스낵바가 있대요.”
정민이 스낵바 사진을 가리키며 지원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 안이 한산해서인지 그는 굳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같이 갈래요? 스낵바에 무슨 커피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쪽이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사 왔는데 싫어하는 커피면 서로 난감하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안내 책자 속에서 흘깃 보았던 스낵바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지원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기차가 살짝 흔들렸고,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에 지원의 몸도 미세하게 휘청거렸다.
“어!”
고맙게도 정민이 지원의 팔을 급하게 붙들었다. 그가 잡아 주지 않았다면 높은 구두 굽 때문에 중심을 잃었을 상황이었다. 팔을 붙잡힌 지원이 움찔 놀라자, 정민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놓았다.
“고맙습니다.”
도움을 받은 지원이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정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짓으로 스낵바가 있는 앞쪽 칸을 가리키며 앞서 걸었다.
“그런데 말이죠.”
답답한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정민은 다시 지원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일이 있으니 정민 씨가 믿기 어렵겠지만, 나는 충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에요.”
“아뇨, 알아요. 나도 그게 이상했어요. 한지원 씨가 왜 나와 함께 있기로 마음먹은 건지.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하고 같이 여행하자고 한 사람은 나지만 쉽게 수락할 것 같지는 않았거든요.”
“외로움과 상실감에 허덕이던 때였어요. 나도 별수 없었나 봐요. 나를 예쁘다고 말해 주는 사람에게 안겨서 위로받고 싶었던 걸 보면. 누군가의 온기가 절실하다는 내면의 소리를 차정민 씨를 통해 들은 거죠.”
지원의 뺨에 발그레한 홍조가 퍼졌다. 와인 때문인 것 같지는 않았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그건 충동적인 결정이 아니었어요. 충동적이었다고 포장하고 싶을 만큼 차정민 씨를 좋아했어요. 짧은 시간 동안 굉장히 깊게요. 그래서 모든 걸 차정민 씨에게 맡길 수 있었어요.”
정민의 가슴속에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온 얼굴에 뜨끈한 열기가 퍼졌다.
“좋아했었다……. 표현 별로네요. 적어도 지금은 그런 과거형은 듣고 싶지 않아요.”
정민은 티셔츠의 양쪽 소매를 걷어 올린 뒤 테이블 위로 손을 올리고 깍지를 꼈다. 이젠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눈앞에서 지원을 놓치는 일은 두 번 다시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단호하지만 진솔하게 모든 걸 말해야 하는 때가 왔다.
“똑바로 말하죠. 나는 한지원 씨에게 첫눈에 반한 게 맞아요. 그래서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말했던 거였고, 한국에 와서도 우리의 관계를 이어 갈 생각이었어요. 우리 사이에 2년이라는 공백이 있었지만 이제 그건 상관없어요. 이렇게 지원 씨를 다시 만났잖아요.”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려던 마음과는 다르게 정민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지원은 정민을 평소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는 힘을 가진 여자였다.
“2년 동안 그 어떤 여자도 쳐다보지 않고 한지원 씨만 찾았을 정도로 계속 좋아해 왔어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좋아해요. 미쳤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그런데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정민은 깍지를 풀고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지원의 손을 꼭 붙들었다.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지원의 눈에 점차 생기가 돌았다.
“나를 좋아했다면, 한국에 와서도 내가 보고 싶었겠네요?”
지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단순히 하룻밤 유희로 지원 씨를 만났을까 봐 나를 찾아오기 겁이 났던 거고요.”
“맞아요.”
“그럼 그게 오해였다는 것만큼은 이제 확실히 알겠네요. 내가 얼마나 더 표현합니까? 나니까 이 정도지 보통 사람들은 어림도 없어요.”
입술을 모으고 눈을 흘기던 지원은 참았던 웃음을 소심하게 꺼내어 놓았다. 바람 소리가 가득 찬 웃음이었다.
굶주렸던 위장에 음식이 들어가니 몸이 나른해졌다. 게다가 술기운 때문인지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몽롱함이 온몸을 에워쌌다. 그럼에도 머릿속은 근래 들어 가장 맑았다. 눈앞의 남자가 가진 긍정적인 기운에 전염되기라도 한 걸까?
지원은 다시 한번 정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낮에 한의원에서 봤을 땐 정민의 긴 머리카락과 수염이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자꾸 보다 보니 지금의 모습도 정민에게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완벽한 이목구비를 가진 정민이었지만, 그의 가장 큰 매력은 갈색 눈동자였다. 빛을 받으면 살짝 회색빛이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쌍꺼풀이 없는데도 이국적인 느낌을 뿜어내는 정민의 이미지에는 눈동자 색이 지대한 영향을 끼친 걸로 보였다.
너무 빤히 쳐다보며 관찰한 것 같아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 정민에게 꼭 붙들린 자신의 왼손이 보였다.
“완벽한 조건이죠? 나도, 지원 씨도 만나는 사람이 없고 나는 2년 동안 지원 씨를 너무 좋아해 왔는데, 그게 나만의 일방적인 감정이 아닌 걸 방금 확인했어요. 자, 그럼 우리 둘이 뭘 해야 하는지는 곧바로 답이 나오네요.”
지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를 의식한 듯 다부지게 어깨를 편 정민이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연애해야죠. 오늘부터 1일, 그런 거. 그런데 오늘이 1일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 바르셀로나에서 1박 2일을 같이 있었잖아요. 그 만남에서 미리 2일을 썼으니까 오늘이 3일째인 걸로 해야 하나? 아니, 아예 우리 2년 연애한 걸로 할까요?”
정민의 말대로 이제 와 연애하지 않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연애라…… 차정민이라는 연예인과 하는 연애는 어떨까? 보통 사람과 하는 연애에 비해 조심할 것도, 신경 써야 할 것도 많겠지. 그 모든 걸 다 감내할 수 있을까?
지원은 정민과 연애할 경우 자신에게 생길 일들에 대해 나열해 보려 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깨끗해진 머릿속도 뜨거워진 마음도 모두 정민을 원할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던가?
지원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정민은 진지하게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다. 연애를 시작한 날짜를 정하는 게 정민에게는 정말 심각한 고민거리인 모양이었다. 엉뚱한 정민의 모습이 자꾸만 지원의 입매를 유연하게 만들었다. 웃음을 참아 보려는 노력은 진즉 포기했다.
“그게 중요해요? 서른 넘은 사람들이 굳이 뭐 그런 걸 세어 가며 연애해요?”
“나이랑 연애가 무슨 상관이죠? 연애 시작할 때 설레는 건 다 똑같죠. 잠깐만요, 그럼 우리 연애하는 거죠? 지원 씨 마음을 다 들었는데도 왜 이렇게 자꾸 불안할까요? 이러다 나 집착남, 계략남 그런 거 되는 거 아닌가 몰라요. 드라마에서도 아직 못 해 본 역할인데.”
횡설수설하는 정민을 두고 지원이 먼저 일어날 채비를 했다. 이대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면 밤을 꼬박 새우게 될 것만 같았다.
“늦어서 이제 그만 집에 가 봐야겠어요.”
10시가 가까워진 늦은 시간에 만난 탓에 저녁을 먹은 뒤 몇 마디를 나누고 나니 시간은 새벽 1시에 가까워져 있었다. 지원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시간을 확인한 정민이 화들짝 놀랐다.
“뭐야, 뭘 했다고 벌써 1시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와인이 들어간 탓인지 기분이 이상할 정도로 좋았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였다.
“대리 불러야 하나요?”
시선을 내려 지원의 발을 확인한 정민이 매력적인 제안을 했다.
“굽 낮은 구두 신었으니 걸어갈래요? 집이 한의원 바로 옆이라면서요? 그럼 걸어서 20분 거리인데. 차야 내가 다시 와서 찾아도 되고, 또 내일 와도 되고요.”
뜻밖이었지만 반가웠다. 그와 함께 다시 나란히 걸을 수 있다니. 하지만 그의 직업을 생각하자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연예인이었고, 사람들에게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보여서 좋을 게 전혀 없는 사람이니까.
“잠깐 차에 들렀다 가요. 모자랑 마스크 있으니까 그거 쓰고 가면 될 것 같아요. 평일이라서 지금 이 시간에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또 있다 해도 어두워서 잘 못 알아볼 겁니다.”
“그래도…….”
“믿어 봐요. 뭐 죄짓나요? 말했죠?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건 잘못 아니라고. 갑시다.”
정민이 앞서 룸을 빠져나갔다. 지원도 못 이기는 척 정민을 따랐다. 미리 계산을 해 둔 건지, 정민이 곧바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뒷좌석 문을 열고 모자와 마스크를 꺼내 들었다.
“모자 쓰고 마스크 해도 차정민 씨 같은데요?”
“그럼 이 정도의 잘생김이 모자와 마스크로 가려질 거라 생각했어요?”
50미터 남짓한 골목길을 지나자 큰길이 나왔다. 정민의 말이 맞았다. 평일 새벽 1시의 거리는 한산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도 두 사람에게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직도 안 믿기네요. 이렇게 한지원 씨랑 나란히 걸을 날이 다시 올 줄 몰랐는데. 춥지 않아요?”
3월 말이지만 밤공기는 아직 쌀쌀했다. 그래도 견딜 만한 한기였다. 지원이 가방에서 스카프를 꺼내어 목에 둘렀다.
“이제 괜찮아요. 그러니까 그날처럼 재킷 벗어 준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정민이 들켰다는 듯 코를 찡긋해 보였다.
“내일은, 아니지. 오늘은 뭐 해요? 지원 씨 쉬는 날인데.”
“본가에 좀 가 보려고요. 요즘 통 못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도 뵐 겸.”
“본가가 어디인데요?”
“서울이지만 한의원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니까 먼 편이죠. 출퇴근으로 길바닥에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서 1년 전에 독립했거든요. 또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고.”
“어떤 이유죠?”
정민은 무슨 사연이 있냐는 듯 걱정스럽게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어쩜 순식간에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차정민이라는 배우가 인기를 얻는 이유가 납득이 갔다.
“우리 엄마 아들 때문에요. 우리 엄마 아들이 결혼을 좀 빨리했는데, 맞벌이를 하다 보니 육아에 대한 도움이 필요했나 봐요. 아내랑 아들을 데리고 본가로 들어왔어요.”
“잠깐, 우리 엄마 아들? 그럼 오빠나 남동생을 이야기하는 거겠네요.”
“네, 남동생이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같이 살고 계신 데다 나보다 어린 올케와 조카가 한집에 있다 보니 내가 먼저 불편해지더라고요. 어른들도 갑자기 잔소리가 많아졌고요. 너보다 어린애도 벌써 결혼해서 애가 있는데, 너는 뭐 하냐는 거죠. 또 좀 자유롭게 살고 싶기도 해서 독립했어요.”
“대충 이해가 가네요. 그런데 진짜 안 추워요? 눈치가 있으면 춥다고 좀 해 봐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았다. 정민은 2년 전 그날 밤과 같은 상황을 원하고 있었다. 훤히 보이는 속마음이 자꾸만 지원을 웃게 했다.
“뭐야, 나는 진지한데 왜 웃어요?”
지원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찬찬히 정민을 훑어보던 지원의 눈빛이 정민의 손에서 멈췄다. 2년 전과는 다르게 손에 상처가 너무 많아서 놀랐던 침구실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람들은 모르겠지. 차정민이라는 배우의 근사한 모습이 만들어질 때까지는, 굳은살이 박여 아픔에 익숙해질 만큼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그토록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살아온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원하고 있다. 행복하고 싶었다. 아는 거라곤 이름밖에 없는 여자를 2년간 찾아 헤맨 이 무모한 남자와 함께. 만인이 사랑하는 완벽한 남자가 오로지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현실을 이제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지 않을까?
자신의 손을 보고 있는 지원의 눈이 부담스러웠는지 정민이 슬쩍 주머니에 손을 넣으려 했다. 지원은 손을 내밀어 정민의 손을 꼭 잡았다. 진료실에서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지원의 손을 먼저 붙들었던 정민은 놀라움을 그대로 드러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민 씨 말대로 침놓는 데만 쓰기에는 내 손이 좀 아까워서요. 이제 다른 데도 좀 써 보려고 해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내가 연애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는 정민의 두 눈동자가 지원의 가슴 한가운데 깊이 박혔다.
Episode 01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한국분이시죠?”
지원과 눈이 마주치자 옆 좌석에 앉은 정민이 먼저 말을 걸었다. 동시에 그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네. 영광이네요. 스페인에서 차정민 씨를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창가 좌석에 앉은 지원이 정민에게 재킷을 달라는 듯 손을 뻗었고, 정민은 눈인사를 하며 재킷을 내밀었다. 지원은 그의 재킷을 창문 옆에 박힌 옷걸이에 곱게 걸었다.
연예계에 둔감한 지원이 알 정도면 차정민은 명실공히 유명 연예인이 맞았다. 언젠가 지원이 봤던 기사에 의하면 그는 스타성과 연기력을 겸비한 보기 드문 배우 중에 하나였다. 그가 하는 작품이라면 드라마건 영화건 일단은 큰 주목을 받았고, 흥행 결과 또한 평타 이상은 쳐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민이 출연한 드라마나 영화를 한 번도 챙겨 본 적이 없었던 지원이었다. 그래도 정민이 나오는 광고를 가끔씩 볼 때마다 괜찮은 느낌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은 종종 가지곤 했었다.
지원은 다른 빈자리로 옮기려 했던 마음을 곧바로 접었다.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는 하루에도 여러 대가 있었다. 그 많은 기차 중에, 같은 칸에서, 그것도 옆자리에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배우 차정민이 앉아 있는 우연을 먼저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바르셀로나로 가시는 건가요?”
“네. 차정민 씨도요?”
“네. 거기서 내일 오후부터 잡지 화보 촬영이 있어요. 마드리드는 가 본 적이 없어서 일정 전에 휴가 겸 들렀다가 이제 일하러 가는 거예요. 그쪽은요? 스페인에 여행 오신 겁니까? 옷차림을 보니 배낭여행 같지는 않고.”
“겸사겸사 왔어요. 어쨌거나 바르셀로나는 여행으로 가는 거예요.”
유명 연예인이니만큼 당연히 도도할 거란 생각과는 다르게, 정민은 시원시원하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할 일 없이 앉아서만 간다면 지루할 수도 있는 시간을 유명한 연예인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지원을 잔뜩 설레게 했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정민은 느낌이 좋은 사람이었다. 아마 즐거운 대화를 이어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보통 연예인은 매니저와 함께 다니지 않나요? 아까 역에서도 한국인들이 몇 명 보이던데, 혹시라도 한국 사람들이 알아보면 어쩌시려고요.”
“하하하, 휴가까지 매니저 형이랑 다니긴 싫어요. 원래 저는 혼자 잘 다니는 편이기도 하고 오히려 이렇게 대놓고 혼자 다니면 더욱 말을 못 거는 것 같더라고요.”
“왜요, 제가 자꾸 말 걸고 있잖아요. 연예인에 대한 호기심을 누르지 못하고 사생활 방해하는 한심한 사람의 표본이 된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요. 그쪽에게 먼저 말을 건 사람은 나예요. 그렇게 말하면 서운한데요?”
서운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의 얼굴에는 서운한 표정이 전혀 없었다. 그는 웃으며 앞에 꽂혀 있는 기차 안내 책자를 집어 들었다.
“커피 드실래요? 제가 아침에 늦잠을 잤어요. 기차 시간 맞추느라 호텔에서 서둘러 나왔더니 커피 한 잔이 간절하네요. 배가 고프니까 요깃거리도 있으면 좋을 것 같고요. 바로 이 앞 칸에 스낵바가 있대요.”
정민이 스낵바 사진을 가리키며 지원에게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정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차 안이 한산해서인지 그는 굳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같이 갈래요? 스낵바에 무슨 커피가 있는지 모르잖아요. 그쪽이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내 마음대로 사 왔는데 싫어하는 커피면 서로 난감하니까요.”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안내 책자 속에서 흘깃 보았던 스낵바가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기도 했던 지원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기차가 살짝 흔들렸고, 전혀 예상 못 한 상황에 지원의 몸도 미세하게 휘청거렸다.
“어!”
고맙게도 정민이 지원의 팔을 급하게 붙들었다. 그가 잡아 주지 않았다면 높은 구두 굽 때문에 중심을 잃었을 상황이었다. 팔을 붙잡힌 지원이 움찔 놀라자, 정민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팔을 놓았다.
“고맙습니다.”
도움을 받은 지원이 예의를 차려 인사했다. 정민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손짓으로 스낵바가 있는 앞쪽 칸을 가리키며 앞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