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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주문한 커피와 소시지가 들어 있는 롤빵을 들고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왔다.
“잘 마실게요.”
정민은 조심조심 커피 잔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며 커피 향이 퍼졌다.
“한지원 씨, 혹시 「Before Sunrise」라는 영화 봤습니까?”
이 남자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깜짝 놀라 정민을 쳐다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장난기가 넘치는 눈으로 싱글거렸다.
“지원 씨 캐리어에 달린 네임 택 봤어요. 한지원. 영어로 적힌 이름 내가 제대로 읽은 거 맞죠?”
“아…….”
지원이 타고 있는 칸과 스낵바가 있는 앞 칸 사이에는 큰 짐을 놓을 수 있는 짐 보관용 선반이 있었다. 정민과 앞 칸으로 가던 중 자신의 캐리어가 삐뚤게 놓인 것을 본 지원이 짐을 똑바로 정리해 놓았고, 그사이 정민이 가방 손잡이에 달린 네임 택을 본 모양이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그런데 갑자기 「Before Sunrise」는 왜……. 아, 지금 상황이랑 좀 비슷하기도 하네요.”
“그렇죠? 나는 아까부터 내내 그 생각 했거든요.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오스트리아로 갔었죠? 장소는 다르지만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거, 영화와 비슷하지 않아요? 유럽이라 더욱 그런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정민은 순식간에 빵 하나를 말끔히 먹었다. 그러곤 빵을 감싸고 있던 포장지를 구기며 ‘이제 머리가 돌아가겠네.’라는 혼잣말을 했다.
“내용을 아는 거 보니 지원 씨도 그 영화 봤다는 거네요. 언제 봤어요?”
“영화가 개봉한 당시에는 그런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대학 2학년 때였나? 무슨 영화 프로에서 소개되는 걸 보고 호기심에 다운받아서 봤죠.”
“지원 씨가 보기엔 영화가 어땠어요?”
“개인적으로는 괜찮게 봤어요. 에단 호크의 젊은 시절을 보는 재미도 괜찮았고, 내가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지만 통통한 줄리 델피도 풋풋했어요.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말을 참 잘하잖아요. 대화에 빠져들다 보니 끝나던데요?”
“나 정확하게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두 사람 첫눈에 반했어요?”
정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원 또한 그 부분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처음부터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눈빛을 주고받지 않았나요? 아무런 감정 없이는 그렇게 맞은편에 자리 잡고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었을 거예요.”
커피가 적당히 식었는지 정민이 한 모금 마셨다. 지원은 움직이는 정민의 목울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까지 자세히 볼 수 있을 만큼 연예인이 가까이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형이 사 뒀던 DVD로 봤는데, 솔직히 그냥 그랬어요. 지루해서 대충 넘겨 가며 봤어요.”
“예술성으로 극찬을 받은 영화인데, 의외네요. 연기자들은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할 거라 생각했는데. 「Before Sunrise」 같은 영화는 눈물 글썽거리면서 봐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에이, 그게 눈물 날 영화는 아니죠.”
지원의 농담 섞인 빈정거림에 정민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 영화, 주연들의 감정선을 이제 알 것 같아요.”
“네?”
유쾌했던 분위기가 어느 순간 진지하게 변했다.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정민이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꿀꺽. 그가 커피를 넘기는 소리가 조금 요란하게 들렸다.
“나, 어쩌면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한지원 씨에게요. 이게 나도 좀 어이없긴 한데, 자꾸만 심장이 뛰고 얼굴에서 열이 나네요. 뭐 이런 상황이 다 있죠?”
03 이제 연애하는 것 같네
“반갑습니다. 송아 역의 손 대역을 맡은 한지원이라고 합니다. 함께 일하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환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남자 배우들은 군대 박수를 치고 있었고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도 나왔다. 정민은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알쏭달쏭했다.
갑자기 목이 타서 생수병으로 손을 가져가며 지원을 잘 볼 수 있도록 고개를 움직였다. 검은 원피스에 베이지색 봄 코트를 걸치고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은 지원은, 누가 봐도 예쁜 여자였다. 작고 갸름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빛, 야무진 입매와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린 몸. 그것도 모자라 영특해 보이는 인상까지 갖췄다. 참 신기했다. 얼굴에 ‘한의사’라고 직업을 써 붙인 것도 아닌데, 지원의 겉모습만 보고도 직업이 의사는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로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건 2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원은 자신의 직업을 말하지 않았지만, 정민은 지원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일 거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지원의 말투와 행동에서 새어 나오는 고고한 분위기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유도했다.
지원과 정민이 재회한 그 주의 일요일, 드라마 「깊은 밤」 대본 리딩에는 자문을 도맡은 명성한의원 한의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서 서로 얼굴을 보게 될 테지만, 얼굴도 익힐 겸 미리 인사할 자리를 마련한 제작진의 배려였다.
“드라마 특성상 한의사분들의 역할이 큽니다. 어의들이 의술 장면이 현실감 있게 많이 들어갈 거니까요. 어의 역할을 맡으신 분들은 리얼한 연기를 위해 특히나 많은 도움을 받으셔야 할 겁니다. 그러니 미리 잘 보이세요. 회식 때 선생님들 술잔 비게 하지 마시고.”
「깊은 밤」 대본을 쓴 김진양 작가의 인사에 배우들이 다시 한번 한의사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명성한의원 채용 기준은 비주얼입니까? 선생님들 모두 외모가 너무 훈훈한데요.”
쭉 앉아 있던 한의사들이 자신들에게 꽂힌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정민은 잠시도 쉬지 않고 지원을 지켜봤다. 지원의 옆에는 정민의 손 대역을 맡은 권선빈이라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지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저 여자 한의사 엄청 예쁜데? 굉장히 단아하지 않아?”
정민의 옆자리에 앉은 배우 박기혁이 대본으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기혁은 정민과 동갑내기로 이번 드라마에서 왕을 보살피는 내의원 자리를 놓고 정민과 경쟁하는 정한 역할을 맡았다. 미국 교포 출신인 기혁은 종종 사석에서 따로 만날 정도로 정민과 가까운 연예인 중 한 명이었다.
“애인 있을까? 있겠지? 외모, 능력 다 되는데 설마 없겠어?”
정민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군가가 지원을 예쁘게 봐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사심이 가득 담긴 기혁의 말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사극은 촬영이 힘듭니다. 날씨에 상관없이 한복을 입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데다, 현대물에 비해 피피엘이 어렵다 보니 제작비 부분에 대한 고충도 수반되죠. 그럼에도 이렇게 드라마를 위해 모여 주신 여러분께 무척 감사드립니다.”
배우들은 이미 첫 번째 대본 리딩 때 들었던 말이지만, 한의사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김진양 작가가 한 번 더 드라마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사전 제작이라는 것도 위험 요소가 많죠. 실컷 드라마를 다 찍어 놓고도 제때 편성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는 경우가 허다해요. 그래도 저 믿고 열심히 해 주세요. 그 어느 때보다 대본에 대한 느낌이 좋으니까요. 함께 소통하면서 잘 만들어 보기로 합시다.”
모두 박수를 쳤고 김진양 작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 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자 이제 회식하러 갈까요? 첫 회식이니까 다들 친분 잘 쌓아 보시길 바랍니다.”
“예!”
배우와 스태프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회식 장소인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내내 정민은 지원을 눈으로 좇았다.
어떻게든 지원의 옆자리에 앉아야겠다는 마음에 최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움직였지만, 지원이 자리 잡은 테이블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아쉬워도 방법이 없었다. 정민은 선빈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 명성한의원 최고 원장님이시자 이번 드라마 최고 자문 위원이신 권명성 원장님께서 건배사 한 번 하시죠?”
하민근 PD의 말에 권명성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명성 원장은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침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사극 자문 제의가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본분에 충실하느라 매번 거절해 왔습니다. 그런데 「깊은 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작가님께서 조선시대 의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점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리얼리티에 많은 신경을 써 주신 대본 덕분에 한의학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원장인 제가 덥석 계약을 하는 바람에 저희 병원 한의사들이 고생을 좀 하게 된 건 미안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 믿습니다.”
카메라 감독 중 하나가 권명성 원장에게 질문을 했다.
“한의사분들이 다 젊은데, 전부 미혼이십니까?”
모두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며 웃었다. 권명성 원장 또한 소리 내어 호탕하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남자들은 모두 유부남입니다. 홍일점인 우리 한 선생만 미혼이고요.”
“오!”
아무래도 남자 스태프들의 성비가 우세했기에 저음의 환호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지원이 수줍은 듯 가볍게 주먹을 쥔 손을 입가로 가지고 갔다. 마음이 다급해진 정민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누가 물어보면 꼭 애인 있다고 할 것. 안 그러면 팬클럽 회장 소환할 예정.]
지원이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풉.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는 지원의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앞으로 6개월간의 촬영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자, 위하여!”
“위하여!”
출연진과 스태프들 모두 술잔을 비우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정민도 곁에 앉은 선빈의 잔에 술을 채웠다.
“한잔하시죠? 지난번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인사하게 되네요.”
선빈 또한 정민의 잔을 채워 주었다.
“김태준이 자리 한번 만든다더니, 요즘 바쁜가 봐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 한의원에도 다녀가셨다 하고, 또 제 손을 빌려 가신다고 하니 저도 만나 보고 싶긴 했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두 살 어린데. 태준 선배도 저 막 굴려요.”
“그건 친해지면요.”
선빈은 태준과는 달리 까칠한 느낌을 가진 사람이었다. 딱 봐도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는 유형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한의원에 찾아왔던 날 한지원이랑 술은 잘 마셨습니까?”
함께 잔을 부딪치고 술을 넘겼을 때 의외의 질문이 나왔다. 정민이 놀라 선빈을 쳐다보았다. 선빈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해 보였던 사람이 순식간에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덕분에 용기 내서 찾아갈 수 있었어요.”
“잘해 주세요. 한지원 능력 있고,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 눈에도 한지원이 괜찮긴 한가 봐요.”
선빈이 눈짓으로 지원이 앉은 쪽을 가리켰다. 선빈의 시선을 따라가니 나란히 앉아 있는 기혁과 지원이 눈에 들어왔다. 기혁이 적극적으로 지원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지원은 불편하게 웃으며 물만 마셔 댔다.
“저기, 형님이라고 해도 될까요? 아니면 권 선생님?”
“그냥 형님이라고 하세요. 그게 더 편하니까.”
“네. 그럼 형님. 지금 제 눈에만 지원 씨가 불편해 보입니까?”
선빈이 다시 지원이 앉아 있는 쪽으로 무심하게 눈을 돌렸다.
“아주 편하고 즐거워 보이는데요? 잘생긴 남자 배우가 자기 앞에서 비위를 맞추는데 그게 싫을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정민은 선빈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뭐야, 이 양반. 누가 김태준 친구 아니랄까 봐, 사람 놀리는 재주가 있었네? 종종 짓궂은 태준의 장난에 진땀을 뺀 기억이 있는 정민은, 선빈을 흘겨보며 술잔에 술을 채웠다. 부글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빈은 꿋꿋하게 웃음을 참으며 정민의 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여자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나는 누가 내 와이프 앞에서 저렇게 까불고 있으면 그 꼴 못 볼 것 같은데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저쪽으로 가 봐요. 아, 그런데 두 사람 연애 시작한 거 맞죠?”
“물론이죠.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당연히 꽉 잡았죠.”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잔을 부딪쳤다. 선빈과 지원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진지한 관심이 든든했다.
“조만간 식사 한번 꼭 대접하겠습니다. 태준 선배랑 같이 뵐게요.”
“좋죠.”
“저도 누가 지원 씨 앞에서 까부는 게 자꾸 거슬려서 말이죠. 그럼 먼저 실례 좀 하겠습니다.”
정민은 술잔을 들고 지원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미 그 테이블에는 자리가 다 차 있어 옆 테이블의 빈 의자를 직접 놓고 앉았다. 지원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민을 쳐다보았다. 정민의 착각인 건지 지원이 자신을 반기는 것 같았다.
“뭐야, 차정민. 한창 한지원 선생님이랑 즐겁게 대화 중이었는데.”
정민의 잔에 술을 채우면서도 기혁의 관심사는 오로지 지원이었다.
“그래서 진짜 애인 있다고요? 장난이죠?”
보채는 듯한 기혁의 질문에, 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있어요.”
“나 못 믿겠어요. 같이 찍은 사진 좀 보게 휴대폰 줘 봐요. 안 그러면 나 진짜 안 믿어요.”
집요하게 묻는 기혁으로 인해 지원이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주춤거렸다. 그러고 보니 연애를 한 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지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회식이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그만해. 한 선생님 정도의 능력자가 만나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지. 왜 자꾸 선생님 곤란하게 만들어?”
정민과 잔을 부딪친 기혁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 선생님은 내일 진료 때문에 술 안 드시죠?”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진료가 있으면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술도 좀 마셔 가며 친해지자고 만든 자리인데.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왜 술을 앞에 놓고 얌전히 계십니까? 어서 잔 비워요.”
술이 좀 오른 건지 기혁이 짓궂게 굴었다. 이 녀석을 한 대 칠 수도 없고. 드러내 놓고 지원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해서 애가 탔다.
“안 드신다잖아. 나랑 마셔. 앞으로 6개월 동안 같이 일할 사이인데 왜 그렇게 급하게 친해지려고 해?”
“급하게 친해지면 좋지. 오늘 진정한 내 이상형을 만났거든. 여기 한지원 선생님.”
“박기혁 취했네. 한 선생님 당황하신다.”
앞접시에 놓인 고기는 그대로 둔 채, 자꾸 물만 마시는 지원을 보니 정민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게 아닌데. 눈앞에 두고도 지켜 주지 못하는 무능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자신들의 연애를 숨겨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는 정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눈앞에서 기혁이 지원에 대한 관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한지원의 남자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주문한 커피와 소시지가 들어 있는 롤빵을 들고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왔다.
“잘 마실게요.”
정민은 조심조심 커피 잔을 덮고 있는 뚜껑을 열었다. 뜨거운 김이 올라오며 커피 향이 퍼졌다.
“한지원 씨, 혹시 「Before Sunrise」라는 영화 봤습니까?”
이 남자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지? 깜짝 놀라 정민을 쳐다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장난기가 넘치는 눈으로 싱글거렸다.
“지원 씨 캐리어에 달린 네임 택 봤어요. 한지원. 영어로 적힌 이름 내가 제대로 읽은 거 맞죠?”
“아…….”
지원이 타고 있는 칸과 스낵바가 있는 앞 칸 사이에는 큰 짐을 놓을 수 있는 짐 보관용 선반이 있었다. 정민과 앞 칸으로 가던 중 자신의 캐리어가 삐뚤게 놓인 것을 본 지원이 짐을 똑바로 정리해 놓았고, 그사이 정민이 가방 손잡이에 달린 네임 택을 본 모양이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그런데 갑자기 「Before Sunrise」는 왜……. 아, 지금 상황이랑 좀 비슷하기도 하네요.”
“그렇죠? 나는 아까부터 내내 그 생각 했거든요.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오스트리아로 갔었죠? 장소는 다르지만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거, 영화와 비슷하지 않아요? 유럽이라 더욱 그런가.”
배가 많이 고팠는지 정민은 순식간에 빵 하나를 말끔히 먹었다. 그러곤 빵을 감싸고 있던 포장지를 구기며 ‘이제 머리가 돌아가겠네.’라는 혼잣말을 했다.
“내용을 아는 거 보니 지원 씨도 그 영화 봤다는 거네요. 언제 봤어요?”
“영화가 개봉한 당시에는 그런 영화가 있는지도 몰랐어요. 대학 2학년 때였나? 무슨 영화 프로에서 소개되는 걸 보고 호기심에 다운받아서 봤죠.”
“지원 씨가 보기엔 영화가 어땠어요?”
“개인적으로는 괜찮게 봤어요. 에단 호크의 젊은 시절을 보는 재미도 괜찮았고, 내가 좋아하는 얼굴은 아니지만 통통한 줄리 델피도 풋풋했어요. 무엇보다 두 사람 모두 말을 참 잘하잖아요. 대화에 빠져들다 보니 끝나던데요?”
“나 정확하게 기억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두 사람 첫눈에 반했어요?”
정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원 또한 그 부분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반했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처음부터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눈빛을 주고받지 않았나요? 아무런 감정 없이는 그렇게 맞은편에 자리 잡고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었을 거예요.”
커피가 적당히 식었는지 정민이 한 모금 마셨다. 지원은 움직이는 정민의 목울대를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사소한 움직임 하나까지 자세히 볼 수 있을 만큼 연예인이 가까이 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나는 형이 사 뒀던 DVD로 봤는데, 솔직히 그냥 그랬어요. 지루해서 대충 넘겨 가며 봤어요.”
“예술성으로 극찬을 받은 영화인데, 의외네요. 연기자들은 굉장히 감수성이 예민할 거라 생각했는데. 「Before Sunrise」 같은 영화는 눈물 글썽거리면서 봐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에이, 그게 눈물 날 영화는 아니죠.”
지원의 농담 섞인 빈정거림에 정민이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 영화, 주연들의 감정선을 이제 알 것 같아요.”
“네?”
유쾌했던 분위기가 어느 순간 진지하게 변했다. 입을 꼭 다물고 있던 정민이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꿀꺽. 그가 커피를 넘기는 소리가 조금 요란하게 들렸다.
“나, 어쩌면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한지원 씨에게요. 이게 나도 좀 어이없긴 한데, 자꾸만 심장이 뛰고 얼굴에서 열이 나네요. 뭐 이런 상황이 다 있죠?”
03 이제 연애하는 것 같네
“반갑습니다. 송아 역의 손 대역을 맡은 한지원이라고 합니다. 함께 일하는 동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원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지만 환호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남자 배우들은 군대 박수를 치고 있었고 어디선가 휘파람 소리도 나왔다. 정민은 이 상황을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알쏭달쏭했다.
갑자기 목이 타서 생수병으로 손을 가져가며 지원을 잘 볼 수 있도록 고개를 움직였다. 검은 원피스에 베이지색 봄 코트를 걸치고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은 지원은, 누가 봐도 예쁜 여자였다. 작고 갸름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빛, 야무진 입매와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린 몸. 그것도 모자라 영특해 보이는 인상까지 갖췄다. 참 신기했다. 얼굴에 ‘한의사’라고 직업을 써 붙인 것도 아닌데, 지원의 겉모습만 보고도 직업이 의사는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로 이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그건 2년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지원은 자신의 직업을 말하지 않았지만, 정민은 지원이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일 거라고 막연하게 추측했다.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지원의 말투와 행동에서 새어 나오는 고고한 분위기가 그런 생각을 하게끔 유도했다.
지원과 정민이 재회한 그 주의 일요일, 드라마 「깊은 밤」 대본 리딩에는 자문을 도맡은 명성한의원 한의사들이 모두 참석했다. 촬영이 시작되면 현장에서 서로 얼굴을 보게 될 테지만, 얼굴도 익힐 겸 미리 인사할 자리를 마련한 제작진의 배려였다.
“드라마 특성상 한의사분들의 역할이 큽니다. 어의들이 의술 장면이 현실감 있게 많이 들어갈 거니까요. 어의 역할을 맡으신 분들은 리얼한 연기를 위해 특히나 많은 도움을 받으셔야 할 겁니다. 그러니 미리 잘 보이세요. 회식 때 선생님들 술잔 비게 하지 마시고.”
「깊은 밤」 대본을 쓴 김진양 작가의 인사에 배우들이 다시 한번 한의사들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명성한의원 채용 기준은 비주얼입니까? 선생님들 모두 외모가 너무 훈훈한데요.”
쭉 앉아 있던 한의사들이 자신들에게 꽂힌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듯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정민은 잠시도 쉬지 않고 지원을 지켜봤다. 지원의 옆에는 정민의 손 대역을 맡은 권선빈이라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지원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저 여자 한의사 엄청 예쁜데? 굉장히 단아하지 않아?”
정민의 옆자리에 앉은 배우 박기혁이 대본으로 입을 가린 채 속삭였다. 기혁은 정민과 동갑내기로 이번 드라마에서 왕을 보살피는 내의원 자리를 놓고 정민과 경쟁하는 정한 역할을 맡았다. 미국 교포 출신인 기혁은 종종 사석에서 따로 만날 정도로 정민과 가까운 연예인 중 한 명이었다.
“애인 있을까? 있겠지? 외모, 능력 다 되는데 설마 없겠어?”
정민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어 애매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누군가가 지원을 예쁘게 봐 준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지만, 사심이 가득 담긴 기혁의 말은 조금도 반갑지 않았다.
“사극은 촬영이 힘듭니다. 날씨에 상관없이 한복을 입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데다, 현대물에 비해 피피엘이 어렵다 보니 제작비 부분에 대한 고충도 수반되죠. 그럼에도 이렇게 드라마를 위해 모여 주신 여러분께 무척 감사드립니다.”
배우들은 이미 첫 번째 대본 리딩 때 들었던 말이지만, 한의사들이 모여 있어서인지 김진양 작가가 한 번 더 드라마의 취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사전 제작이라는 것도 위험 요소가 많죠. 실컷 드라마를 다 찍어 놓고도 제때 편성이 되지 않아 골머리를 썩이는 경우가 허다해요. 그래도 저 믿고 열심히 해 주세요. 그 어느 때보다 대본에 대한 느낌이 좋으니까요. 함께 소통하면서 잘 만들어 보기로 합시다.”
모두 박수를 쳤고 김진양 작가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 번 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자 이제 회식하러 갈까요? 첫 회식이니까 다들 친분 잘 쌓아 보시길 바랍니다.”
“예!”
배우와 스태프들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삼삼오오 짝을 지어 회식 장소인 삼겹살집으로 향했다. 이동하는 내내 정민은 지원을 눈으로 좇았다.
어떻게든 지원의 옆자리에 앉아야겠다는 마음에 최대한 지원을 중심으로 움직였지만, 지원이 자리 잡은 테이블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아쉬워도 방법이 없었다. 정민은 선빈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자, 명성한의원 최고 원장님이시자 이번 드라마 최고 자문 위원이신 권명성 원장님께서 건배사 한 번 하시죠?”
하민근 PD의 말에 권명성 원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명성 원장은 한국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침술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예전에도 몇 번 사극 자문 제의가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본분에 충실하느라 매번 거절해 왔습니다. 그런데 「깊은 밤」의 경우는 달랐습니다. 작가님께서 조선시대 의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점이 마음을 끌었습니다. 리얼리티에 많은 신경을 써 주신 대본 덕분에 한의학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이 생기게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원장인 제가 덥석 계약을 하는 바람에 저희 병원 한의사들이 고생을 좀 하게 된 건 미안하지만,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될 거라 믿습니다.”
카메라 감독 중 하나가 권명성 원장에게 질문을 했다.
“한의사분들이 다 젊은데, 전부 미혼이십니까?”
모두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며 웃었다. 권명성 원장 또한 소리 내어 호탕하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남자들은 모두 유부남입니다. 홍일점인 우리 한 선생만 미혼이고요.”
“오!”
아무래도 남자 스태프들의 성비가 우세했기에 저음의 환호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지원이 수줍은 듯 가볍게 주먹을 쥔 손을 입가로 가지고 갔다. 마음이 다급해진 정민은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스레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누가 물어보면 꼭 애인 있다고 할 것. 안 그러면 팬클럽 회장 소환할 예정.]
지원이 곧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풉.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참는 지원의 어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떨렸다.
“앞으로 6개월간의 촬영 기간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자, 위하여!”
“위하여!”
출연진과 스태프들 모두 술잔을 비우며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정민도 곁에 앉은 선빈의 잔에 술을 채웠다.
“한잔하시죠? 지난번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인사하게 되네요.”
선빈 또한 정민의 잔을 채워 주었다.
“김태준이 자리 한번 만든다더니, 요즘 바쁜가 봐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 한의원에도 다녀가셨다 하고, 또 제 손을 빌려 가신다고 하니 저도 만나 보고 싶긴 했습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두 살 어린데. 태준 선배도 저 막 굴려요.”
“그건 친해지면요.”
선빈은 태준과는 달리 까칠한 느낌을 가진 사람이었다. 딱 봐도 사람과 쉽게 가까워지는 유형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한의원에 찾아왔던 날 한지원이랑 술은 잘 마셨습니까?”
함께 잔을 부딪치고 술을 넘겼을 때 의외의 질문이 나왔다. 정민이 놀라 선빈을 쳐다보았다. 선빈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근엄해 보였던 사람이 순식간에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덕분에 용기 내서 찾아갈 수 있었어요.”
“잘해 주세요. 한지원 능력 있고, 괜찮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다른 사람들 눈에도 한지원이 괜찮긴 한가 봐요.”
선빈이 눈짓으로 지원이 앉은 쪽을 가리켰다. 선빈의 시선을 따라가니 나란히 앉아 있는 기혁과 지원이 눈에 들어왔다. 기혁이 적극적으로 지원에게 말을 걸고 있었고, 지원은 불편하게 웃으며 물만 마셔 댔다.
“저기, 형님이라고 해도 될까요? 아니면 권 선생님?”
“그냥 형님이라고 하세요. 그게 더 편하니까.”
“네. 그럼 형님. 지금 제 눈에만 지원 씨가 불편해 보입니까?”
선빈이 다시 지원이 앉아 있는 쪽으로 무심하게 눈을 돌렸다.
“아주 편하고 즐거워 보이는데요? 잘생긴 남자 배우가 자기 앞에서 비위를 맞추는데 그게 싫을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정민은 선빈이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뭐야, 이 양반. 누가 김태준 친구 아니랄까 봐, 사람 놀리는 재주가 있었네? 종종 짓궂은 태준의 장난에 진땀을 뺀 기억이 있는 정민은, 선빈을 흘겨보며 술잔에 술을 채웠다. 부글거리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빈은 꿋꿋하게 웃음을 참으며 정민의 잔에 술을 부어 주었다.
“여자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나는 누가 내 와이프 앞에서 저렇게 까불고 있으면 그 꼴 못 볼 것 같은데요. 나 신경 쓰지 말고 저쪽으로 가 봐요. 아, 그런데 두 사람 연애 시작한 거 맞죠?”
“물론이죠. 그렇게 도와주셨는데 당연히 꽉 잡았죠.”
두 사람은 기분 좋게 잔을 부딪쳤다. 선빈과 지원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진지한 관심이 든든했다.
“조만간 식사 한번 꼭 대접하겠습니다. 태준 선배랑 같이 뵐게요.”
“좋죠.”
“저도 누가 지원 씨 앞에서 까부는 게 자꾸 거슬려서 말이죠. 그럼 먼저 실례 좀 하겠습니다.”
정민은 술잔을 들고 지원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이미 그 테이블에는 자리가 다 차 있어 옆 테이블의 빈 의자를 직접 놓고 앉았다. 지원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정민을 쳐다보았다. 정민의 착각인 건지 지원이 자신을 반기는 것 같았다.
“뭐야, 차정민. 한창 한지원 선생님이랑 즐겁게 대화 중이었는데.”
정민의 잔에 술을 채우면서도 기혁의 관심사는 오로지 지원이었다.
“그래서 진짜 애인 있다고요? 장난이죠?”
보채는 듯한 기혁의 질문에, 지원이 고개를 저었다.
“진짜 있어요.”
“나 못 믿겠어요. 같이 찍은 사진 좀 보게 휴대폰 줘 봐요. 안 그러면 나 진짜 안 믿어요.”
집요하게 묻는 기혁으로 인해 지원이 애매한 웃음을 지으며 주춤거렸다. 그러고 보니 연애를 한 지 일주일이 지났건만 지원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회식이 끝나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 그만해. 한 선생님 정도의 능력자가 만나는 사람이 없는 게 이상하지. 왜 자꾸 선생님 곤란하게 만들어?”
정민과 잔을 부딪친 기혁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한 선생님은 내일 진료 때문에 술 안 드시죠?”
지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진료가 있으면 가급적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술도 좀 마셔 가며 친해지자고 만든 자리인데. 제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왜 술을 앞에 놓고 얌전히 계십니까? 어서 잔 비워요.”
술이 좀 오른 건지 기혁이 짓궂게 굴었다. 이 녀석을 한 대 칠 수도 없고. 드러내 놓고 지원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 답답해서 애가 탔다.
“안 드신다잖아. 나랑 마셔. 앞으로 6개월 동안 같이 일할 사이인데 왜 그렇게 급하게 친해지려고 해?”
“급하게 친해지면 좋지. 오늘 진정한 내 이상형을 만났거든. 여기 한지원 선생님.”
“박기혁 취했네. 한 선생님 당황하신다.”
앞접시에 놓인 고기는 그대로 둔 채, 자꾸 물만 마시는 지원을 보니 정민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게 아닌데. 눈앞에 두고도 지켜 주지 못하는 무능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자신들의 연애를 숨겨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는 정민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눈앞에서 기혁이 지원에 대한 관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한지원의 남자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