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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서장
아무리 달려도, 초원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해 중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다. 말은 투둑, 투둑 하고 땅을 찍으며 풀을 짓이겼다. 온통 초록색으로 자라난 풀과 함께 노랗고 흰 꽃잎이 뭉개져서 바람에 가없이 날렸다. 그 젖은 냄새와.
아득히 먼 흰 구름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내려 초원에 거대한 그림을 만들었다. 소녀는 몸을 들썩였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던 호흡이었다. 말은 부르릉 하고 숨을 쉬며 더 빠르게 달렸다. 시야가, 상상하면 머리가 어지러울 만치의 세계를 담고 미끄러지듯 확장했다.
말은 한참 동안 달려갔다. 기수의 신호가 없자 그 동작은 멋대로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가, 금세 눈치를 보듯 멎었다. 소녀는 손에 든 채찍을 휘두르는 대신 말고삐를 놓고 그 갈기를 쓰다듬었다. 말은 긴 목을 내려 풀을 뜯었다.
풀이 툭툭 뜯겼다. 소녀는 등을 젖히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녀의 말은 고집이 센 편이었고, 가족은 그것이 주인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로 그런지 소녀는 알지 못했지만 말과 기수의 사이에는 어떠한 종류든 합의와 조정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다.
멀리서 문득 낯선 꽃향기가 날아왔다.
코끝을 스치듯 가는 실바람이었지만 달콤한 냄새였다. 소녀는 그 향이 나는 곳으로 그저 달려서 가 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손끝이 말의 땀에 젖었다.
잠시 후 말은 한가로이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오른발로 말의 배를 툭 찼다. 그리고 허리를 살살 움직이자 말은 기수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걸음은 떠나올 때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돌아온 집은 어쩐지 어수선했다. 말을 몰고 다가온 소녀를 보고 천막에서 막 나온 어머니는 엄격한 얼굴을 했다. 소녀는 찔끔해서 얼른 말에서 내렸다.
“왜 이렇게 늦었니, 나란게렐?”
“늦긴요.”
나란게렐은 머리를 다듬었다. 낯선 양떼와 말이 있는 것은 멀리서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약간 사라졌다.
“손님이 왔나요?”
“그래. 어서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라.”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날이 금세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고 초조했다. 나란게렐은 어머니가 가리킨 대로 천막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어머니가 꺼내 놓은 듯한 좋은 옷이 곱게 펼쳐져 있었다.
따뜻한 계절인데다 낮이라 천막 안에는 불이 없었고, 때문에 어머니가 문을 닫자 천막은 어두워졌다. 나란게렐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어머니가 고른 옷을 천천히 입었다. 속옷은 아직 땀에 젖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먼 길을 간다면 그동안 다시 옷은 더러워질 것이다.
동작이 느린 것이 답답했는지 어머니는 금방 천막 문을 두드렸다. 똑똑.
“왜 이렇게 느리니? 손님 기다리신다.”
“네에.”
나란게렐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옷의 단추를 채웠다. 어머니는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는 울음과 탄식 같은 것이 억눌려 섞여 있었다.
강해 보이는 어머니라도 이럴 때는 하는 수 없다. 나란게렐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가슴이 수놓고 구슬 단 옷 아래서 크게 들썩였다.
“너 말고 다른 여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떤 애라도 너보다는 나았을 텐데.”
어머니는 나무 문의 틈으로 투덜거리듯 읊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유분방한 나란게렐이 부족을 대표해 새로 즉위한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그녀를 아는 사람 모두에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나란게렐은 어머니에게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가죽으로 원통 모양을 만들고 붉고 흰 구슬로 가장자리를 두른 모자는 이번 일을 위해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모자에 놓은 색색의 수는 부족의 결혼한 여자들 모두가 모여 솜씨를 모아 준 물건이라 색채가 화려하다. 어머니는 다시, 조금 더 낮게 읊조렸다.
“가면 말대답하지 말고. 괜히 나서지 말고, 마음대로 말 타고 나돌아다니지 말고. 소문에 궁중은 무서운 곳이라더라. 잘 먹고 잘 입겠지만, 금방 다른 사람한테 미움 받을 수도 있으니까 눈치 잘 봐서 행동해. 이제 가면 너도 결혼한 여자가 되는 거니까.”
이제 가면.
그렇다. 정말로, 알고는 있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 나란게렐은 여전한 어둠 속에서 혼자 한숨을 쉬었다.
제1장
색색의 높은 모자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삼배요!”
궁에서 후궁과 관련된 사무를 모두 관장한다는 관리의 목소리가 높이 울렸다, 백서른아홉 명의 여인 중 절반은 그 목소리가 너무 쌀쌀맞다고 생각했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관리의 목소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여인들은 각자 황궁의 위용에 놀라고, 또 자신 외에도 이 자리에 온 후궁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놀라는 중이었다. 새 황제의 후궁으로 온 여인 중 서로를 원래부터 알던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예를 치르는 중에도 서로 눈빛 교환을 하기 바빴다. 새의 깃털을 끝에 매단 일련의 모자들은 깊이 내려가 땅과 평행선을 그렸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갔다. 여인들의 옷에 달린 구슬 줄이 음악처럼 자그락거렸다.
“첫 모금이오!”
술잔을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마시는 이 풍습은 제국의 일부 부족에만 있는 것이었지만, 가례가 시작되기 전 궁중의 시녀장이 설명해 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주춤거리면서나마 일제히 술잔을 들었다. 합환주였다.
모두의 술잔이 내려가고 잠시, 관리는 북을 크게 치고 다음을 고했다.
“두 모금이오!”
여인들은 다시 술을 마셨다. 어쩌다 너무 긴장한 아가씨는 술을 한 번에 다 마셔 버리고 눈을 당황스럽게 굴렸다. 시녀장도 관리도 여인들의 작은 소요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관리는 다시 말했다.
“세 모금이오.”
거의 끝나 간다. 날이 좋아 몸이 괴롭지는 않았지만 몹시 긴장되고 피곤한 자리였기 때문에 많은 여인들이 속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심지어 저, 여인들을 모두 굽어볼 수 있는 단상 위의 두 사람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가.
여인들이 모두 술을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자 관리는 앞에서 크게 읊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후 마마께서 내리시는 말씀이니라. 도르갈 족 출신의 체체그에게는 사란체체그라는 이름을 주어 비에 봉한다. 하르굴 족 출신의 위르에게는 유르마라는 이름을 주어 비에 봉한다…….”
여인들은 설마 했지만 관리는 그대로 열세 명의 비의 이름을 읊고 곧장 빈으로 봉할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과연 황궁에서 일하는 관리의 기억력은 대단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는 아가씨가 있는가 하면 저 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아가씨도 있었다.
“……메크마르 족 출신의 나란게렐은 빈에 봉한다…….”
관리의 입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가례가 시작되기 전부터 누가 비의 봉작을 받고 누가 빈의 봉작을 받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는 움찔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지루함을 느끼고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몇 쌍의 눈은 눈에 띄게 화려한 복장의 아가씨들에게 가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눈은 슬금슬금 단상 위의 두 사람에게 향했다.
단상 위에 앉은 것은 둘 다 여자였다. 낙타털이 깔리고 훌륭한 나무 조각이 된 의자에 앉아, 두 여자는 단상 아래서 책봉받고 있는 새 후궁들을 내려다보았다. 저 오른쪽에 앉은 것이 지금의 황제를 키워 낸 모후 황태후일 것이고, 왼쪽의 젊은 여자가 제1황후인 알탄사르날일 것이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태후와 제1황후에게는 어딘가 공통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 중 일부는 아직 새로 책봉받는 빈의 이름을 외고 있는 관리나 궁중 시녀장도 공유하는 것이라, 아마도 오랫동안 궁중 생활을 한 이 특유의 것이 아닐까 하고 여러 여인은 생각했다.
드디어 관리는 마지막으로 책봉받는 빈의 이름을 말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후궁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라.”
관리는 다시 당당하고 뻣뻣한 얼굴로 명했다. 이번에 어떻게 말하는지도 이미 교육을 받았다. 여인들은 우선 위풍당당하고 거대한 깃발을 향해 일제히 절했다. 옷과 장신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바닥을 스쳤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넓은 제국의 곳곳에서 올라온 여인들이 있는 만큼 그들의 말에는 각각의 억양이 있었다. 제1황후는 자신이 통솔하게 될 후궁들을 내려다보면서도 관리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여인들이 일어나자 관리는 다음 순서로 진행했다.
“태후 마마께 인사를 올리라.”
여인들은 약간의 소요를 거쳐 황태후에게로 머리 방향을 돌렸다. 태후는 관리나 제1황후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보였다. 시녀장의 말에 따르면 후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태후였고, 고집 센 황제도 모후의 말에는 따르는 모양이었다.
“태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혼인이란 절을 많이 하는 거구나, 하고 몇몇 어린 아가씨는 괴롭게 몸을 틀었다. 관리는 마지막으로 인사할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제1황후이신 알탄사르날 님께 인사 올리라…….”
알탄사르날이라면 금빛 장미라는 의미이다. 제1황후는 꽃송이처럼 예뻤다. 제1황후는 자신을 향해 여인들이 일제히 절하자 입꼬리만을 딱딱하게 잠시 올렸다가 말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가 낳은 아들이 현재 제국의 유일한 황자였다.
“황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여인들은 이제 몸이 뻣뻣해진 기분으로 절했다. 그녀들이 일어나자 태후가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좌중은 그대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태후 마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제 인사를 마쳤으므로 이 자리에 모인 여인들은 모두 황제의 소유가 되었다. 관리는 예에 따라 말을 높이고 몸을 물렸다. 태후는 여인들이 보이는 가지각색의 눈빛에 눈을 우아하게 내리깔았다. 그녀는 진한 눈썹에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어 기세가 예리했다.
“이제 너희는 나의 며느리다. 본디 사가에서라면 새 사람을 맞이할 때에 천막에 둘러앉아 설탕과자와 양젖을 나누며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이나, 황실이 이리 커지니 그리할 수 없게 되었다. 황실의 예법은 사가와 다르니 당황할 일이 많겠지만 여기 제1황후와 시녀장의 가르침을 받아 제국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 주려무나.”
“말씀 받들겠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 여러 후궁이 당황했으나 몇 명 눈치 빠른 여인들이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곧 그들을 따라 했다. 태후는 알탄사르날에게 물었다.
“황후, 비빈이 머물 처소는 모두 준비해 두었나?”
알탄사르날이 태후를 향해 보인 미소는 아까까지의 무표정과는 달리 어느 정도 애교 있는 것이었다.
“예, 어마마마. 각 비빈을 위해서 천막을 준비하고 시비와 일꾼을 내렸습니다.”
“매주 지급할 곡식과 고기, 그리고 천은?”
“모두 명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잘했네. 이제 황제에게도 후궁이 있으니 자네의 일을 믿을 수 있는 비빈과 나누어 하게. 자네가 너무 바빠 황자의 양육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내 원하지 않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어마마마.”
매주 식량 등이 지급된다는 말에 여러 후궁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태후와 알탄사르날은 자세한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후궁 중 상당수는 궁중에서의 생활을 오랫동안 낯설게 느낄 것이다.
“듣거라. 황제는 내 아들이나 그 성정이 불같아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단지 떠돌던 부족이 아니라 제국의 이름 아래 하나로 모였으니. 새로운 제국을 위해서는 황제의 기분을 맞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국모의 덕목도 필요할 것이야. 가사와 아랫사람을 잘 돌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체통도 중요하니 마음을 쓰거라.”
“말씀 받들겠습니다.”
몇 명의 아가씨는 이쯤에서 기대에 찬 얼굴을, 몇 명은 반대로 지루해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얼굴을 했다.
태후는 몇 마디 궁중에서 조심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일어섰다. 알탄사르날도 시어머니의 뒤를 따라 그대로 자리를 떴다. 빈 단상 위에는 이 자리에 없는 황제를 대신해 독수리가 수놓인 깃발만이 펄럭였다.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 관리는 북을 한 번 크게 치고 예의 마지막을 알렸다.
서장
아무리 달려도, 초원에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한 해 중 가장 풍요로운 계절이다. 말은 투둑, 투둑 하고 땅을 찍으며 풀을 짓이겼다. 온통 초록색으로 자라난 풀과 함께 노랗고 흰 꽃잎이 뭉개져서 바람에 가없이 날렸다. 그 젖은 냄새와.
아득히 먼 흰 구름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내려 초원에 거대한 그림을 만들었다. 소녀는 몸을 들썩였다. 그녀가 어려서부터 당연한 것처럼 알고 있던 호흡이었다. 말은 부르릉 하고 숨을 쉬며 더 빠르게 달렸다. 시야가, 상상하면 머리가 어지러울 만치의 세계를 담고 미끄러지듯 확장했다.
말은 한참 동안 달려갔다. 기수의 신호가 없자 그 동작은 멋대로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졌다가, 금세 눈치를 보듯 멎었다. 소녀는 손에 든 채찍을 휘두르는 대신 말고삐를 놓고 그 갈기를 쓰다듬었다. 말은 긴 목을 내려 풀을 뜯었다.
풀이 툭툭 뜯겼다. 소녀는 등을 젖히고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녀의 말은 고집이 센 편이었고, 가족은 그것이 주인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말로 그런지 소녀는 알지 못했지만 말과 기수의 사이에는 어떠한 종류든 합의와 조정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다.
멀리서 문득 낯선 꽃향기가 날아왔다.
코끝을 스치듯 가는 실바람이었지만 달콤한 냄새였다. 소녀는 그 향이 나는 곳으로 그저 달려서 가 볼까, 하는 충동을 느꼈다. 손끝이 말의 땀에 젖었다.
잠시 후 말은 한가로이 걸음을 옮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오른발로 말의 배를 툭 찼다. 그리고 허리를 살살 움직이자 말은 기수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 걸음은 떠나올 때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돌아온 집은 어쩐지 어수선했다. 말을 몰고 다가온 소녀를 보고 천막에서 막 나온 어머니는 엄격한 얼굴을 했다. 소녀는 찔끔해서 얼른 말에서 내렸다.
“왜 이렇게 늦었니, 나란게렐?”
“늦긴요.”
나란게렐은 머리를 다듬었다. 낯선 양떼와 말이 있는 것은 멀리서도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약간 사라졌다.
“손님이 왔나요?”
“그래. 어서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라.”
어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날이 금세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기분이 이상하고 초조했다. 나란게렐은 어머니가 가리킨 대로 천막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어머니가 꺼내 놓은 듯한 좋은 옷이 곱게 펼쳐져 있었다.
따뜻한 계절인데다 낮이라 천막 안에는 불이 없었고, 때문에 어머니가 문을 닫자 천막은 어두워졌다. 나란게렐은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어머니가 고른 옷을 천천히 입었다. 속옷은 아직 땀에 젖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따질 때는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먼 길을 간다면 그동안 다시 옷은 더러워질 것이다.
동작이 느린 것이 답답했는지 어머니는 금방 천막 문을 두드렸다. 똑똑.
“왜 이렇게 느리니? 손님 기다리신다.”
“네에.”
나란게렐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옷의 단추를 채웠다. 어머니는 밖에서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는 울음과 탄식 같은 것이 억눌려 섞여 있었다.
강해 보이는 어머니라도 이럴 때는 하는 수 없다. 나란게렐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가슴이 수놓고 구슬 단 옷 아래서 크게 들썩였다.
“너 말고 다른 여자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떤 애라도 너보다는 나았을 텐데.”
어머니는 나무 문의 틈으로 투덜거리듯 읊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유분방한 나란게렐이 부족을 대표해 새로 즉위한 황제의 후궁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는 그녀를 아는 사람 모두에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나란게렐은 어머니에게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가죽으로 원통 모양을 만들고 붉고 흰 구슬로 가장자리를 두른 모자는 이번 일을 위해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모자에 놓은 색색의 수는 부족의 결혼한 여자들 모두가 모여 솜씨를 모아 준 물건이라 색채가 화려하다. 어머니는 다시, 조금 더 낮게 읊조렸다.
“가면 말대답하지 말고. 괜히 나서지 말고, 마음대로 말 타고 나돌아다니지 말고. 소문에 궁중은 무서운 곳이라더라. 잘 먹고 잘 입겠지만, 금방 다른 사람한테 미움 받을 수도 있으니까 눈치 잘 봐서 행동해. 이제 가면 너도 결혼한 여자가 되는 거니까.”
이제 가면.
그렇다. 정말로, 알고는 있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 나란게렐은 여전한 어둠 속에서 혼자 한숨을 쉬었다.
제1장
색색의 높은 모자가 천천히 기울어졌다.
“삼배요!”
궁에서 후궁과 관련된 사무를 모두 관장한다는 관리의 목소리가 높이 울렸다, 백서른아홉 명의 여인 중 절반은 그 목소리가 너무 쌀쌀맞다고 생각했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은 너무 높다고 생각했다.
관리의 목소리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는 여인들은 각자 황궁의 위용에 놀라고, 또 자신 외에도 이 자리에 온 후궁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에 놀라는 중이었다. 새 황제의 후궁으로 온 여인 중 서로를 원래부터 알던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새로운 환경에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예를 치르는 중에도 서로 눈빛 교환을 하기 바빴다. 새의 깃털을 끝에 매단 일련의 모자들은 깊이 내려가 땅과 평행선을 그렸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갔다. 여인들의 옷에 달린 구슬 줄이 음악처럼 자그락거렸다.
“첫 모금이오!”
술잔을 세 번에 걸쳐 나누어 마시는 이 풍습은 제국의 일부 부족에만 있는 것이었지만, 가례가 시작되기 전 궁중의 시녀장이 설명해 둔 바가 있었기 때문에 여인들은 주춤거리면서나마 일제히 술잔을 들었다. 합환주였다.
모두의 술잔이 내려가고 잠시, 관리는 북을 크게 치고 다음을 고했다.
“두 모금이오!”
여인들은 다시 술을 마셨다. 어쩌다 너무 긴장한 아가씨는 술을 한 번에 다 마셔 버리고 눈을 당황스럽게 굴렸다. 시녀장도 관리도 여인들의 작은 소요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관리는 다시 말했다.
“세 모금이오.”
거의 끝나 간다. 날이 좋아 몸이 괴롭지는 않았지만 몹시 긴장되고 피곤한 자리였기 때문에 많은 여인들이 속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심지어 저, 여인들을 모두 굽어볼 수 있는 단상 위의 두 사람이 얼마나 신경 쓰이는가.
여인들이 모두 술을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자 관리는 앞에서 크게 읊었다.
“황제 폐하와 황태후 마마께서 내리시는 말씀이니라. 도르갈 족 출신의 체체그에게는 사란체체그라는 이름을 주어 비에 봉한다. 하르굴 족 출신의 위르에게는 유르마라는 이름을 주어 비에 봉한다…….”
여인들은 설마 했지만 관리는 그대로 열세 명의 비의 이름을 읊고 곧장 빈으로 봉할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꼽기 시작했다. 과연 황궁에서 일하는 관리의 기억력은 대단한 거구나, 하고 생각하는 아가씨가 있는가 하면 저 명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아가씨도 있었다.
“……메크마르 족 출신의 나란게렐은 빈에 봉한다…….”
관리의 입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가례가 시작되기 전부터 누가 비의 봉작을 받고 누가 빈의 봉작을 받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여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불릴 때는 움찔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지루함을 느끼고 눈을 이리저리 돌렸다. 몇 쌍의 눈은 눈에 띄게 화려한 복장의 아가씨들에게 가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눈은 슬금슬금 단상 위의 두 사람에게 향했다.
단상 위에 앉은 것은 둘 다 여자였다. 낙타털이 깔리고 훌륭한 나무 조각이 된 의자에 앉아, 두 여자는 단상 아래서 책봉받고 있는 새 후궁들을 내려다보았다. 저 오른쪽에 앉은 것이 지금의 황제를 키워 낸 모후 황태후일 것이고, 왼쪽의 젊은 여자가 제1황후인 알탄사르날일 것이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태후와 제1황후에게는 어딘가 공통된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분위기 중 일부는 아직 새로 책봉받는 빈의 이름을 외고 있는 관리나 궁중 시녀장도 공유하는 것이라, 아마도 오랫동안 궁중 생활을 한 이 특유의 것이 아닐까 하고 여러 여인은 생각했다.
드디어 관리는 마지막으로 책봉받는 빈의 이름을 말했다. 그가 입을 다물자 후궁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황제 폐하께 인사를 올리라.”
관리는 다시 당당하고 뻣뻣한 얼굴로 명했다. 이번에 어떻게 말하는지도 이미 교육을 받았다. 여인들은 우선 위풍당당하고 거대한 깃발을 향해 일제히 절했다. 옷과 장신구가 움직이는 소리가 바닥을 스쳤다.
“황제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넓은 제국의 곳곳에서 올라온 여인들이 있는 만큼 그들의 말에는 각각의 억양이 있었다. 제1황후는 자신이 통솔하게 될 후궁들을 내려다보면서도 관리처럼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여인들이 일어나자 관리는 다음 순서로 진행했다.
“태후 마마께 인사를 올리라.”
여인들은 약간의 소요를 거쳐 황태후에게로 머리 방향을 돌렸다. 태후는 관리나 제1황후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보였다. 시녀장의 말에 따르면 후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태후였고, 고집 센 황제도 모후의 말에는 따르는 모양이었다.
“태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혼인이란 절을 많이 하는 거구나, 하고 몇몇 어린 아가씨는 괴롭게 몸을 틀었다. 관리는 마지막으로 인사할 사람의 이름을 거론했다.
“제1황후이신 알탄사르날 님께 인사 올리라…….”
알탄사르날이라면 금빛 장미라는 의미이다. 제1황후는 꽃송이처럼 예뻤다. 제1황후는 자신을 향해 여인들이 일제히 절하자 입꼬리만을 딱딱하게 잠시 올렸다가 말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녀가 낳은 아들이 현재 제국의 유일한 황자였다.
“황후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여인들은 이제 몸이 뻣뻣해진 기분으로 절했다. 그녀들이 일어나자 태후가 오른손을 살짝 들었다. 좌중은 그대로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태후 마마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이제 인사를 마쳤으므로 이 자리에 모인 여인들은 모두 황제의 소유가 되었다. 관리는 예에 따라 말을 높이고 몸을 물렸다. 태후는 여인들이 보이는 가지각색의 눈빛에 눈을 우아하게 내리깔았다. 그녀는 진한 눈썹에 강한 눈빛을 가지고 있어 기세가 예리했다.
“이제 너희는 나의 며느리다. 본디 사가에서라면 새 사람을 맞이할 때에 천막에 둘러앉아 설탕과자와 양젖을 나누며 음악을 연주해야 할 것이나, 황실이 이리 커지니 그리할 수 없게 되었다. 황실의 예법은 사가와 다르니 당황할 일이 많겠지만 여기 제1황후와 시녀장의 가르침을 받아 제국의 미래를 위해 노력해 주려무나.”
“말씀 받들겠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는 배우지 않았다. 여러 후궁이 당황했으나 몇 명 눈치 빠른 여인들이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곧 그들을 따라 했다. 태후는 알탄사르날에게 물었다.
“황후, 비빈이 머물 처소는 모두 준비해 두었나?”
알탄사르날이 태후를 향해 보인 미소는 아까까지의 무표정과는 달리 어느 정도 애교 있는 것이었다.
“예, 어마마마. 각 비빈을 위해서 천막을 준비하고 시비와 일꾼을 내렸습니다.”
“매주 지급할 곡식과 고기, 그리고 천은?”
“모두 명하신 대로 준비했습니다.”
“잘했네. 이제 황제에게도 후궁이 있으니 자네의 일을 믿을 수 있는 비빈과 나누어 하게. 자네가 너무 바빠 황자의 양육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은 내 원하지 않으니.”
“명심하겠습니다, 어마마마.”
매주 식량 등이 지급된다는 말에 여러 후궁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태후와 알탄사르날은 자세한 것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후궁 중 상당수는 궁중에서의 생활을 오랫동안 낯설게 느낄 것이다.
“듣거라. 황제는 내 아들이나 그 성정이 불같아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단지 떠돌던 부족이 아니라 제국의 이름 아래 하나로 모였으니. 새로운 제국을 위해서는 황제의 기분을 맞추는 것뿐만이 아니라 훌륭한 국모의 덕목도 필요할 것이야. 가사와 아랫사람을 잘 돌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체통도 중요하니 마음을 쓰거라.”
“말씀 받들겠습니다.”
몇 명의 아가씨는 이쯤에서 기대에 찬 얼굴을, 몇 명은 반대로 지루해서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얼굴을 했다.
태후는 몇 마디 궁중에서 조심할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일어섰다. 알탄사르날도 시어머니의 뒤를 따라 그대로 자리를 떴다. 빈 단상 위에는 이 자리에 없는 황제를 대신해 독수리가 수놓인 깃발만이 펄럭였다.
바람이 좋은 날이었다. 관리는 북을 한 번 크게 치고 예의 마지막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