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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캄보디아. 시엠립(Siem Reap). 톤레샵 3구역 난민캠프.



“인 선생님! 인 선생님!”

잠결이었다. 문이 황급히 열리는 소리와 그녀를 다급히 부르는 목소리가 연달아 세연의 무의식을 깨웠다. 피곤에 지친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간호사 다해가 숨을 헐떡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세연은 진창인 상체를 가까스로 일으켰다.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이 들었었는지 새벽 2시까지 이어진 두 건의 수술이 끝난 후의 자세 그대로였다.

“어…… 네. 다해 씨. 무슨 일이에요?”

“스통이라는 아이요. 열이 심해요.”

불현듯 맨 정신이 찾아와 세연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비비고 탁상시계를 보니 새벽 4시 30분이었다. 세연은 청진기를 목에 걸고 서둘러 의국을 나섰다. 복도를 지나는데 질이 좋지 않은 나무 바닥이 연신 삐걱댄다. 세연은 옆에서 열심히 따라 걷고 있는 다해에게 물었다.

“몇 도예요?”

“39.5도요.”

“언제부터였죠?”

“20분 정도 된 것 같아요. 계속 무전기로 연락했었는데 받질 않으셔서.”

“미안해요. 잠이 깊게 들었었나 봐요.”

걸음의 속도가 빨라졌다. 스통이라는 아이는 다섯 살로 어제 폐렴 증상으로 응급실에서 와 진료를 받고 있었다. 오늘 하루 경과를 지켜보고 열이 내리면 퇴원조치를 하려 했었는데, 다시 열이 올랐다면 모든 검사를 새롭게 시작해야 했다. 응급실에 들어선 세연은 침상도 모자라 바닥까지 점령하고 있는 환자들을 요리조리 피해 스통에게 다가갔다.

전염성 폐렴이었기에 스통의 침상 옆에 파티션을 설치하여 격리시킨 상태였지만, 싸구려 나무를 대충 이어 붙인 이 파티션이 얼마나 큰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였다. 청진기를 스통의 가슴에 댄 세연은 빈맥(頻脈) 증상을 발견했다. 어제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땐 없었던 증세였으니 몇 시간 만에 악화된 것이다. 문제는 스통의 증상이 전형적인 전염성이라 응급실 환자 전체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세연은 고개를 돌려 다해를 쳐다봤다.

“상태가 악화된 것 같아요. 다른 곳으로 격리시켜야 할 것 같은데 좋은 장소가 없을까요?”

“글쎄요. 병실이며 복도마다 환자로 넘쳐나는데. 엊그제는 5구역 캠프에서도 환자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병원이 난장판이잖아요, 선생님.”

다해의 말은 옳았다. 제 10구역까지 있는 대형 난민캠프를 겨우 의사 4명과 간호사 2명이 담당하고 있는 셈이니, 작은 이 병원은 병실뿐만 아니라 복도나 늘 만원이었다. 경우에 따라 격리시켜야 할 환자들을 위한 입원실도 현재 꽉 찬 상태였던 것이다. 생각에 잠기던 세연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다.

“어쩔 수 없네요. 의국으로 옮기죠.”

“네? 의국으로요?”

다해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세연으로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의 휴식 공간인 의국마저 입원실로 사용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이해와 납득을 요하는 건 차후의 문제였다.

“선생님들한테 사정을 설명해야죠. 사흘 정도면 돼요. 이대로 두면 응급실 환자들이 모두 폐렴 증상을 보일 거예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안티피린 20mg 투여하시고 혈액검사 한 번 더 부탁해요.”

“네.”

세연은 열로 달아올라 연신 뜨거운 호흡을 고르고 있는 스통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괜찮아 질 거야, 스통. 주사 잘 맞고 약 잘 먹으면 돼. 알았지?]

세연은 스통이 알아듣지도 못 할 영어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다섯 살이지만 한국의 세 살짜리 아이만 한 몸집이다. 기아에 허덕이는 삶이 아이의 성장마저 멈추게 한 것이다. 스통 뿐만 아니라 이곳 난민캠프의 아이들이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캠프 주변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곳 아이들에겐 어쩌면 병도 사치일 수도 있었다.

스통을 의국으로 옮기고 약을 투여하고 피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세연은 스통의 열이 조금씩 내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고비는 넘겼지만 언제 또다시 위기가 닥쳐올지 몰라 우선 의국에 그대로 두기로 하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3층짜리 병원건물 밖은 어느새 어슴푸레 새벽의 여명이 내려앉고 있었다. 멀리 톤레샵 호수 건너편에서 일렁이고 있는 파란 빛이 눈부시다. 새벽이지만 30도를 웃도는 기온에 벌써부터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세연은 늘 아침이 시작될 때마다 하는 기도를 내심으로 읊었다.

어깨와 등 근육이 뻐근했다. 목을 좌우로 돌리고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세연은 가운 주머니에 든 선글라스를 꺼내어 코에 걸쳤다. 그러자 사위가 어둑하게 변한다. 그렇게 어둑해진 톤레샵 호수를 잠시 바라보고 서 있는데 뒤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커피 잔을 든 다해와 은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다해가 내민 커피 잔을 세연은 고맙다는 짧은 멘트와 함께 건네받았다. 방금 일어나 숙소를 나왔는지 은선의 얼굴에는 아직 잠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서울에 있는 명신병원 소속 간호사들이며, 국경없는 의사회 한국지부에서 낸 모집공고문을 보고 자원하여 이곳 캄보디아로 온 지 두 달째였다.

“선생님. 의국에 아이가 있던데요?”

숙소에서 나오자마자 의국에 들렀는지 은선이 다소 못마땅한 어투로 물었다. 평소에도 도대체 어떻게 간호사가 됐을까, 하는 의구심을 마구마구 일으키게 하는 존재라 가장 먼저 불만을 터뜨릴 거라고 짐작은 하고 있었다. 세연은 잔을 머금으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응. 미안해요. 오늘 내일만 격리시켜야 해서.”

“그럼 우린 어디서 쉬어요? 식당에서 쉬어야 하나?”

은선이 입술을 삐죽대자 옆에 있던 다해가 당황하여 세연을 두둔했다.

“식당이 더 시원하고 좋잖아. 물도 가끔 마실 수 있고. 무전기도 잘 터지고.”

“그래도 의국에서 쉬어야지 그나마 쉬는 것 같은데 말이에요. 어쩔 수 없죠, 뭐.”

씁쓸하게 입맛을 다신 은선은 주머니에서 조그만 손거울을 꺼내더니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그러다 오늘 아침의 비주얼이 별로 마음에 차지 않는지 연신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우. 다해 씨, 나 눈 퉁퉁 붓지 않았어? 어젯밤에 김한수 쌤이 라면 같이 먹자하시기에 딱 한 젓가락만 먹었는데도 이래. 쌍꺼풀 없어진 것 좀 봐. 이래서 6시 이후론 아무것도 안 먹는데 어젠 대체 무슨 귀신이 씌었던 거야.”

은선의 호들갑스러운 불평에 세연과 다해는 서로 마주보며 피식 웃었다. 은선의 공주병 증상이 아무래도 나날이 심각해지는 듯했다. 보다 못한 다해가 은선을 두둔했다.

“여전히 예뻐, 은선 씨.”

“그래? 그럼 호수를 배경으로 인생 샷 한 번 남겨봐?”

손거울을 도로 주머니에 넣은 은선이 이번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호수를 등지고 서더니 폰 카메라를 자신의 얼굴에 들이댄다. 가장 좋은 각도를 찾느라 은선의 이마에는 벌써 땀이 흥건했다. 그런 은선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던 세연이 입을 연다.

“은선 씨는 어떻게 간호사가 된 거예요?”

그러자 은선이 질문의 뉘앙스가 왜 그러냐는 투로 그녀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공부해서요.”

“아, 그렇구나. 상식적인 건데 내가 깜빡했어요. 은선 씨는 미인대회에 나가면 딱인 얼굴이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저 어렸을 때부터 우리 엄마가 미인대회를 목표로 전략적으로 키웠어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슈퍼모델이 되고 싶었거든요.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물도 제대로 못 마셨어요. 탄수화물은 아예 안 먹었구요.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외모로만 평생 먹고 살 수 있겠어요? 전 외면 못지않게 내면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간호대에 들어갔고 열심히 공부했죠.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여자만이 최고의 남자를 만날 수 있죠.”

턱을 치켜든 채 말하는 표정이 무척이나 도도하다. 세연과 다해는 은선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또다시 키득거렸다.

“전 이만 눈에 얼음찜질 좀 하러 가야겠어요. 이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부기네요. 나중에 식사시간에 봬요.”

한참 동안 적당한 각도를 찾으며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려대던 은선이 낙담하며 부리나케 숙소로 되돌아갔다. 아무래도 부은 눈두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은선이 뛰어가는 모습을 한참 동안 쳐다보던 다해가 속삭여왔다.

“선생님. 은선 씨가 왜 여기로 온 줄 모르세요?”

“왜 왔대요? 도대체가 매치가 안 되잖아. 은선 씨랑 이곳 난민캠프랑은.”

“결혼할 때 남자들한테 높은 점수를 따기 위해서래요.”

“높은 점수?”

“봉사 다녀온 간호사라는 커리어가 있으면 남자들이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이거죠.”

세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시선을 은선에게로 돌렸다. 이미 숙소 안으로 사라지고 없는 그 자리를 쳐다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대단한 노력이네. 저걸 어떻게 이겨? 최고의 남자들이 앞 다투어 들이대겠어.”

“에이. 인 선생님이야말로 여기 남자들 인기를 독차지 하고 계시잖아요. 어제도 5구역에서 온 남자 세 명이 인 선생님 얼굴 보러 왔던데요?”

“그게 얼굴을 보려는 거겠어?”

세연은 어제 낮의 일을 떠올리며 착잡하게 대답했다. 병원 안을 기웃거리며 자신을 훔쳐보던 남자들. 캄보디아인인지, 아니면 난민캠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베트남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연신 그녀를 쳐다보면서 저들끼리 웃고 있었다. 다해는 세연의 뛰어난 외모 때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세연의 표정에 멈칫한 다해는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멋쩍어졌다. 아직 환하지 않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이유를 잘 알면서도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실언을 하다니. 하지만 다해는 세연이 지닌 매력이 진심으로 아쉬웠다. 이렇게 묻힐 게 아닌데 말이다.

“자, 오늘 하루도 또 힘차게 달려 봐요.”

세연이 선글라스 너머 눈을 가늘게 뜨고 웃어 보이자 다해도 고개를 끄덕였다. 톤레샵 호수 뒤에서 어느새 환한 태양빛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