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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아침 식사는 숙소의 1층에 있는 로비에서 진행됐다. 오늘은 제1구역의 숙소에서 지내고 있는 유니세프 소속 미국 대학생 봉사단체의 배려로 각종 채소 토핑이 속속 올라간 햄버거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한국에서 보내온 밥과 국 김치가 평상시의 식단이었다면 오늘은 특별식인 셈이었다.
병원 식구들이 한 테이블에 모두 앉았다. 난민캠프 병원이라 해봐야 ‘국경없는 의사회 한국지부’에 소속된 한국인 의사 5명과 간호사 2명이 전부였다. 조촐한 테이블 위에 햄버거만 넘쳐났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한수가 커다란 버거 하나를 입 안 가득 베어 물며 세연을 쳐다봤다. “인 선생. 의국에 꼬마손님 한 명 있더라?”
“네. 죄송해요, 선생님. 부득이하게 며칠 간 자릴 좀 빌릴게요.”
세연이 죄송한 낯빛을 하고 웃자 옆에 앉은 마취과 전문의 은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 수에 비해 병실이 턱없이 부족하니 큰일이에요. 이제 곧 우기가 닥칠 텐데 전염병이라도 발병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이대로라면 이번 여름엔 5구역까지 환자 텐트를 쳐야하게 생겼어.”
쉰세 살의 한수는 이제 체력이 달린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이마에 주름살을 새겼다. 그러면서도 버거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케첩이 발갛게 묻어나온 입가를 혀끝으로 스윽 핥으며 누군가를 찾는 듯한 눈길로 테이블을 휘 둘러본다.
“그런데 팀장은 어딜 간 거야? 어이! 마진경! 마진경!”
이번 의사 팀 팀장인 진경이 보이지 않자 한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연 역시 진경을 찾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삼시 세끼를 챙겨 먹기 위해 산다는 산부인과 담당인 진경이 끼니를 거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진경이 모습을 나타냈다. 얼굴엔 홍조가 가득한 상태였다.
“네. 마 팀장 왔습니다. 고함 좀 그만 지르시구요, 김한수 쌤.”
“버거 좀 드세요. 마진경 선생님.”
세연이 진경의 몫의 버거 접시를 쑥 내밀자, 고맙다는 대답을 짧게 날린 진경이 버거를 집어 들며 고개를 들었다.
“버거 먹기 전에 다들 주목 좀 해주세요. 공지사항이 있어요.”
진경의 한 마디에 일동이 모두 그녀에게로 주목했다. 진경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후 다시 입을 뗐다.
“지지난주에 한 번 지나가는 투로 슬쩍 언급해드린 적 있었죠? 한국 DBS방송국에서 우릴 취재하고 싶어 한다구요.”
“흐음. 또 그 문제야? 다들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결론나지 않았어?”
마뜩찮은 얼굴로 대답한 한수를, 진경이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근데 방금 지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촬영에 협조를 해야 할 것 같대요. 담당 피디가 아주 유능한 사람이고 2년 전에 만든 다큐 프로그램 시청률도 대박이었대요. 무슨 남극 탐사 어쩌고 하는 거라던데.”
“어머나! 저 그 다큐 재미있게 봤어요.”
은선이 들뜬 얼굴로 손을 번쩍 들었다. 정말로 보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은선은 지금 방송출연이라는 자체에 흥분한 것이다.
“아무튼 그 팀이 다시 뭉쳐서 기획한 거래요. 실력 있는 피디가 나서주면 오히려 시청효과가 좋아져서 홍보도 될 거고, 여기 실태를 알리는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훨씬 수월하지 않겠어요?”
“전 찬성이요!”
예상대로 은선이 가장 먼저 찬성의 한 표를 던졌고, 뒤이어 다해와 동일 그리고 은철과 한수까지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경은 만족스럽게 그들을 둘러보다가 마지막 세연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세연에게, 진경은 무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 선생은?”
“촬영은 찬성이에요. 하지만 전 빠질게요.”
세연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닿았다. 진경도 다른 의사들도 얼마쯤 세연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어서 아침의 테이블은 한동안 고요 속을 내달렸다. 세연은 얼마쯤 멋쩍은 표정이 돼선 버거를 한 입 물곤 헤헤, 웃어보였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 이쯤에서 얼른 식사를 마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억지로 버거를 입에 쑥쑥 밀어 넣은 세연은 접시를 치우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햇빛을 차단시키기 위해 처마 끝에 널어놓은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매만지며 병원 앞마당을 응시했다. 그곳엔 환자와 보호자들의 빨래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환자의 아이들 내지 보호자의 아이들이 놀이터 삼아 뛰어놀고 있었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에 미안해졌다. 그러나 촬영이라니. 방송용 카메라가 하루 종일 자신을 담아낸다고 생각하니 덥고 텁텁한 계절과는 달리 등줄기가 먼저 오싹해졌다.
“인 선생.”
그렇게 자책과 갈등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식사를 끝낸 진경이 나왔다. 6개월 전 함께 이곳으로 날아오면서 어느새 진경에겐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겼다. 언니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진경은, 세연이 눈을 보여주는 유일한 상대였다.
“네. 식사 다 하셨어요?”
“뭐 대충.”
“마 선생님 입에서 대충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제 대답이 충격이긴 하셨나 봐요.”
세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녀의 얼굴표정을 이해한 진경이 차분하게 설득에 나섰다.
“인 선생. 정말 안 되겠어? 이건 방송 촬영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7명이 서로 돕고 의리를 다지는 과정도 있다고 생각해. 솔직히 이 병원에서 제일 고생하는 장본인이 인 선생인데, 영화로 치자면 주인공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런 인 선생이 촬영에서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돼.”
“또 띄워주신다. 선생님 자꾸 그렇게 저 띄워주시면 전 정말 뭐가 된 것처럼 거만해져요. 버릇 나쁘게 들이지 마세요.”
“눈 때문에 그래?”
진경이 정곡을 찔러오자 세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웃기만 했다. 부인하지도 뚜렷하게 긍정하지도 않은 채 입술만 달싹이다 겨우 대답을 끌어낸다.
“네. 맞아요. 사람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도망 온 건데 아예 대한민국 국민들 앞에 다 드러내라니요. 못해요. 아니, 안 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싫어요.”
진경은 세연의 완강한 태도에 머리만 긁적거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가려진 세연의 눈. 그것은 바로 오드 아이(odd eye)였던 것이다. 왼쪽 눈동자는 정상인들처럼 검은색이지만 오른쪽 눈동자는 바다처럼 파란 색을 가졌다. 게다가 조막만한 얼굴과 투명하리만치 흰 피부, 선명한 이목구비에 머리색까지 갈색이어서 처음 본 사람은 십중팔구 혼혈인으로 인식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세연에겐 선명한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함께 일을 해 본 결과 성격마저 탁월하게 좋아, 진경의 마음에 꼭 드는 동료였다. 가끔 세연이 먼 곳을 응시하며 짓곤 하는 우울한 표정을 보면, 모르긴 해도 저 눈동자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일이 많을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의사 중 한 명을 촬영에서 빼달라는 요청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진경은 고민에 잠겼다. 다음 주면 서울에서 촬영 팀이 도착할 텐데. 이럴 때면 팀장이라는 직책이 더없이 부담스럽게만 여겨졌다. 진경은 걱정 말라는 듯 세연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이게 다예요?”
민권은 촬영 팀 강식이 가져온 의사 명단 리스트를 보며 물었다. 의사 5명에 간호사 2명이라. 의외로 단출한 규모가 내심 염려됐지만 이심전심인지 민권의 속내를 꿰뚫어 본 강식이 용기를 불어넣는다.
“응. 의사 수가 좀 적지? 우리가 부지런히 뛰어야 그림이 나오겠어.”
“일반외과 한 명에 정형외과 두 명, 산부인과 한 명, 마취과 한 명 그리고 통역사 한 명이라. 촬영하기엔 외과나 정형외과가 수월할 것 같군. 이쪽이 스토리나 서스펜스가 더 나올 거고.”
“그렇지? 우리가 산부인과를 취재할 순 없을 테니까.”
“간호사 쪽도 잘만 건드리면 테마가 무궁무진하겠어.”
“듣자 하니 간호사들은 쌍콤이들이라던데 아…… 나의 이 메마른 가슴에도 이제 한 줄 희망이 보이려나.”
마흔 살의 노총각 강식의 얼굴이 알찬 희망과 염원이 담긴 미소로 잔잔히 접혀갔고, 민권의 낯빛은 그 반대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강식은 매번 촬영 때마다 현장에서 크고 작은 스캔들을 일으키는 요주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재작년 다큐 촬영현장에선 현지 여자 통역사와 몰래 데이트를 하다 걸렸고, 작년에 있었던 제주도 여행코스 탐구 촬영 땐 제주DBS 직원에게 추파를 던지다 민권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대체 저 산적처럼 생긴 강식의 어디에 여자들이 혹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파란만장한 스캔들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박강식이라는 인간을 이번 촬영 팀에 합류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찬성하는 민권과 반대하는 본부장 사이에 설전이 오갔지만, 결국 본부장도 민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강식이 행실은 가볍지만 스킬과 커리어에 있어선 방송국 내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니 민권의 입장에선 강식은 뜨거운 감자인 셈이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형, 잡음 내지 마. 중간에 한국으로 돌려보내버릴 테니까.”
민권의 단호한 경고에 제 발 저려 움찔한 강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슨 잡음을 낸다 그래?”
“몰라서 물어?”
“야! 이제 와서 말이지만 걔들 다 너한테 먼저 들이댔던 애들이야. 네가 눈썹하나 깜빡 안 하고 철벽치니까 나한테 선회한 거지. 솔직히 걔들 입장에선 우리가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워 보이는 존재였겠냐? 걔들 입장도 이해해야 돼. 난 휴머니즘을 발휘했을 뿐이라구.”
“그걸 말이라고!”
빠직. 민권이 야멸치게 쏘아보자, 강식은 일부러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우선 내일 현장에 도착해서 스케치부터 뽑죠. 며칠 동안은 관망만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민권이 엄하게 말하며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이번엔 민권보다 더 목소리를 낮게 깐 강식이 그를 불러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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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는 숙소의 1층에 있는 로비에서 진행됐다. 오늘은 제1구역의 숙소에서 지내고 있는 유니세프 소속 미국 대학생 봉사단체의 배려로 각종 채소 토핑이 속속 올라간 햄버거가 푸짐하게 차려졌다. 한국에서 보내온 밥과 국 김치가 평상시의 식단이었다면 오늘은 특별식인 셈이었다.
병원 식구들이 한 테이블에 모두 앉았다. 난민캠프 병원이라 해봐야 ‘국경없는 의사회 한국지부’에 소속된 한국인 의사 5명과 간호사 2명이 전부였다. 조촐한 테이블 위에 햄버거만 넘쳐났다. 정형외과 전문의인 한수가 커다란 버거 하나를 입 안 가득 베어 물며 세연을 쳐다봤다. “인 선생. 의국에 꼬마손님 한 명 있더라?”
“네. 죄송해요, 선생님. 부득이하게 며칠 간 자릴 좀 빌릴게요.”
세연이 죄송한 낯빛을 하고 웃자 옆에 앉은 마취과 전문의 은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환자 수에 비해 병실이 턱없이 부족하니 큰일이에요. 이제 곧 우기가 닥칠 텐데 전염병이라도 발병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이대로라면 이번 여름엔 5구역까지 환자 텐트를 쳐야하게 생겼어.”
쉰세 살의 한수는 이제 체력이 달린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세상 다 산 노인처럼 이마에 주름살을 새겼다. 그러면서도 버거를 와그작와그작 씹어 먹는 속도는 무시무시하게 빨랐다. 케첩이 발갛게 묻어나온 입가를 혀끝으로 스윽 핥으며 누군가를 찾는 듯한 눈길로 테이블을 휘 둘러본다.
“그런데 팀장은 어딜 간 거야? 어이! 마진경! 마진경!”
이번 의사 팀 팀장인 진경이 보이지 않자 한수가 목소리를 높였다. 세연 역시 진경을 찾기 위해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삼시 세끼를 챙겨 먹기 위해 산다는 산부인과 담당인 진경이 끼니를 거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모두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아해했다. 그러자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진경이 모습을 나타냈다. 얼굴엔 홍조가 가득한 상태였다.
“네. 마 팀장 왔습니다. 고함 좀 그만 지르시구요, 김한수 쌤.”
“버거 좀 드세요. 마진경 선생님.”
세연이 진경의 몫의 버거 접시를 쑥 내밀자, 고맙다는 대답을 짧게 날린 진경이 버거를 집어 들며 고개를 들었다.
“버거 먹기 전에 다들 주목 좀 해주세요. 공지사항이 있어요.”
진경의 한 마디에 일동이 모두 그녀에게로 주목했다. 진경은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한 후 다시 입을 뗐다.
“지지난주에 한 번 지나가는 투로 슬쩍 언급해드린 적 있었죠? 한국 DBS방송국에서 우릴 취재하고 싶어 한다구요.”
“흐음. 또 그 문제야? 다들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결론나지 않았어?”
마뜩찮은 얼굴로 대답한 한수를, 진경이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죠. 근데 방금 지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촬영에 협조를 해야 할 것 같대요. 담당 피디가 아주 유능한 사람이고 2년 전에 만든 다큐 프로그램 시청률도 대박이었대요. 무슨 남극 탐사 어쩌고 하는 거라던데.”
“어머나! 저 그 다큐 재미있게 봤어요.”
은선이 들뜬 얼굴로 손을 번쩍 들었다. 정말로 보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은선은 지금 방송출연이라는 자체에 흥분한 것이다.
“아무튼 그 팀이 다시 뭉쳐서 기획한 거래요. 실력 있는 피디가 나서주면 오히려 시청효과가 좋아져서 홍보도 될 거고, 여기 실태를 알리는 것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훨씬 수월하지 않겠어요?”
“전 찬성이요!”
예상대로 은선이 가장 먼저 찬성의 한 표를 던졌고, 뒤이어 다해와 동일 그리고 은철과 한수까지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경은 만족스럽게 그들을 둘러보다가 마지막 세연의 얼굴에 시선을 두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세연에게, 진경은 무척 조심스럽게 물었다.
“인 선생은?”
“촬영은 찬성이에요. 하지만 전 빠질게요.”
세연의 대답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닿았다. 진경도 다른 의사들도 얼마쯤 세연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표정이어서 아침의 테이블은 한동안 고요 속을 내달렸다. 세연은 얼마쯤 멋쩍은 표정이 돼선 버거를 한 입 물곤 헤헤, 웃어보였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아 이쯤에서 얼른 식사를 마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억지로 버거를 입에 쑥쑥 밀어 넣은 세연은 접시를 치우자마자 밖으로 나왔다. 햇빛을 차단시키기 위해 처마 끝에 널어놓은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매만지며 병원 앞마당을 응시했다. 그곳엔 환자와 보호자들의 빨래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환자의 아이들 내지 보호자의 아이들이 놀이터 삼아 뛰어놀고 있었다.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에 미안해졌다. 그러나 촬영이라니. 방송용 카메라가 하루 종일 자신을 담아낸다고 생각하니 덥고 텁텁한 계절과는 달리 등줄기가 먼저 오싹해졌다.
“인 선생.”
그렇게 자책과 갈등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식사를 끝낸 진경이 나왔다. 6개월 전 함께 이곳으로 날아오면서 어느새 진경에겐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겼다. 언니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진경은, 세연이 눈을 보여주는 유일한 상대였다.
“네. 식사 다 하셨어요?”
“뭐 대충.”
“마 선생님 입에서 대충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제 대답이 충격이긴 하셨나 봐요.”
세연은 시선을 내리깐 채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그녀의 얼굴표정을 이해한 진경이 차분하게 설득에 나섰다.
“인 선생. 정말 안 되겠어? 이건 방송 촬영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7명이 서로 돕고 의리를 다지는 과정도 있다고 생각해. 솔직히 이 병원에서 제일 고생하는 장본인이 인 선생인데, 영화로 치자면 주인공이나 다를 바 없는데 그런 인 선생이 촬영에서 빠진다는 건 말이 안 돼.”
“또 띄워주신다. 선생님 자꾸 그렇게 저 띄워주시면 전 정말 뭐가 된 것처럼 거만해져요. 버릇 나쁘게 들이지 마세요.”
“눈 때문에 그래?”
진경이 정곡을 찔러오자 세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웃기만 했다. 부인하지도 뚜렷하게 긍정하지도 않은 채 입술만 달싹이다 겨우 대답을 끌어낸다.
“네. 맞아요. 사람들을 피해서 여기까지 도망 온 건데 아예 대한민국 국민들 앞에 다 드러내라니요. 못해요. 아니, 안 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싫어요.”
진경은 세연의 완강한 태도에 머리만 긁적거렸다. 선글라스 너머로 가려진 세연의 눈. 그것은 바로 오드 아이(odd eye)였던 것이다. 왼쪽 눈동자는 정상인들처럼 검은색이지만 오른쪽 눈동자는 바다처럼 파란 색을 가졌다. 게다가 조막만한 얼굴과 투명하리만치 흰 피부, 선명한 이목구비에 머리색까지 갈색이어서 처음 본 사람은 십중팔구 혼혈인으로 인식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세연에겐 선명한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함께 일을 해 본 결과 성격마저 탁월하게 좋아, 진경의 마음에 꼭 드는 동료였다. 가끔 세연이 먼 곳을 응시하며 짓곤 하는 우울한 표정을 보면, 모르긴 해도 저 눈동자 때문에 상처를 받은 일이 많을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의사 중 한 명을 촬영에서 빼달라는 요청을 어떤 식으로 해야 하나.
진경은 고민에 잠겼다. 다음 주면 서울에서 촬영 팀이 도착할 텐데. 이럴 때면 팀장이라는 직책이 더없이 부담스럽게만 여겨졌다. 진경은 걱정 말라는 듯 세연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지금으로선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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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예요?”
민권은 촬영 팀 강식이 가져온 의사 명단 리스트를 보며 물었다. 의사 5명에 간호사 2명이라. 의외로 단출한 규모가 내심 염려됐지만 이심전심인지 민권의 속내를 꿰뚫어 본 강식이 용기를 불어넣는다.
“응. 의사 수가 좀 적지? 우리가 부지런히 뛰어야 그림이 나오겠어.”
“일반외과 한 명에 정형외과 두 명, 산부인과 한 명, 마취과 한 명 그리고 통역사 한 명이라. 촬영하기엔 외과나 정형외과가 수월할 것 같군. 이쪽이 스토리나 서스펜스가 더 나올 거고.”
“그렇지? 우리가 산부인과를 취재할 순 없을 테니까.”
“간호사 쪽도 잘만 건드리면 테마가 무궁무진하겠어.”
“듣자 하니 간호사들은 쌍콤이들이라던데 아…… 나의 이 메마른 가슴에도 이제 한 줄 희망이 보이려나.”
마흔 살의 노총각 강식의 얼굴이 알찬 희망과 염원이 담긴 미소로 잔잔히 접혀갔고, 민권의 낯빛은 그 반대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강식은 매번 촬영 때마다 현장에서 크고 작은 스캔들을 일으키는 요주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재작년 다큐 촬영현장에선 현지 여자 통역사와 몰래 데이트를 하다 걸렸고, 작년에 있었던 제주도 여행코스 탐구 촬영 땐 제주DBS 직원에게 추파를 던지다 민권에게 뒷덜미를 잡혔다.
대체 저 산적처럼 생긴 강식의 어디에 여자들이 혹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파란만장한 스캔들 역사를 보유하고 있는 박강식이라는 인간을 이번 촬영 팀에 합류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찬성하는 민권과 반대하는 본부장 사이에 설전이 오갔지만, 결국 본부장도 민권의 손을 들어주었다. 강식이 행실은 가볍지만 스킬과 커리어에 있어선 방송국 내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니 민권의 입장에선 강식은 뜨거운 감자인 셈이었다.
“미리 경고하는데 형, 잡음 내지 마. 중간에 한국으로 돌려보내버릴 테니까.”
민권의 단호한 경고에 제 발 저려 움찔한 강식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무슨 잡음을 낸다 그래?”
“몰라서 물어?”
“야! 이제 와서 말이지만 걔들 다 너한테 먼저 들이댔던 애들이야. 네가 눈썹하나 깜빡 안 하고 철벽치니까 나한테 선회한 거지. 솔직히 걔들 입장에선 우리가 얼마나 신선하고 새로워 보이는 존재였겠냐? 걔들 입장도 이해해야 돼. 난 휴머니즘을 발휘했을 뿐이라구.”
“그걸 말이라고!”
빠직. 민권이 야멸치게 쏘아보자, 강식은 일부러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우선 내일 현장에 도착해서 스케치부터 뽑죠. 며칠 동안은 관망만 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민권이 엄하게 말하며 회의실을 나가려는데, 이번엔 민권보다 더 목소리를 낮게 깐 강식이 그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