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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어이. 차 피디.”

“왜.”

“이번 아이템 말이야. 성공할 수 있을까? 솔직히 요즘 다큐 성적들 고만고만하잖아. 이제 시청자들이 느림의 미학 따윈 좋아하지도 않는다구. 2년 전 남극 다큐야 워낙 사회적으로 기후온난화가 이슈였으니까 운이 좋게 터졌던 거고.”

제 발 저리니 화제를 돌리는 건가 싶었지만 강식의 표정은 의외로 진지했다. 그의 심경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남극 다큐 이후로 강식은 주로 보도 프로그램에서 일했고, 민권은 시사프로그램을 맡으며 한동안 다른 분야에서 활동했다. 한 마디로 이번 다큐는 본부에서 심기일전하여 그들을 다시 뭉치게 만든 것이다.

그만큼 그들에게 거는 방송국의 기대가 컸고, 따라서 그에 따른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성공과 실패. 두 가지의 경우의 수를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민권은 강식의 팔을 툭 쳤다.

“운이 좋아 성공하는 일은 없어, 형. 그럴 만 했기 때문인 거지.”

“자식. 아무튼 꼭 잘난 척을 해요. 그냥 ‘그러게요.’ 한 마디만 하면 될 걸 말이야.”

강식이 밉지 않게 눈을 흘기자 민권의 입가가 그제야 미소로 늘어났다. 그러곤 곧장 본부장실로 올라가기 위해 회의실 문을 여는데 꽃다발과 함께 선물상자들이 와르르 그의 앞으로 쏟아졌다.

“차 피디님!”

“내일 떠나신다면서요!”

“어떡해요, 차 피디님! 저희 이제 출근하는 재미가 없어질 것 같아요!”

여자들의 한 맺힌 목소리가 회의실 문 앞을 수놓았다. 뒤에서 ‘저럴 줄 알았다니까.’하고 탄식하며 혀를 끌끌 차는 강식의 음성이 들려왔다. 민권은 한숨을 지은 채 울먹거리고 있는 여자들을 쭈욱 훑었다. 아나운서실, 편집실, 기자실, 심지어 총괄본부 여직원들도 가세하여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흐음.”

민권이 난감해하며 허리에 손을 척 올리자, 그중 아나운서 한 명이 불쑥 앞으로 나와 커다란 상자를 그에게 내밀었다.

“우리 DBS방송국 2백 명 미혼녀들의 열과 성을 담은 선물을 받아주세요, 차 피디님. 몸조심해서 돌아오시구요.”

“으흑흑. 석 달 이라니. 일정 좀 줄이시면 안 돼요?”

무작정 그의 품에 팍 안겨오는 선물상자를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고 있는데, 뒤에서 강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지랄들을 한다, 지랄들을 해. 어휴 난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이 꼴을 언제까지 봐야 해?”

그러더니 민권의 어깨를 스윽 밀치고 회의실을 나가버린다. 감히 민권느님의 어깨를 건드린 강식에게, 여직원들의 야속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민권의 한숨이 노골적으로 깊어졌다. 여직원들이 쳐놓은 바리게이트를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지 계산하는 눈동자가 분주하게 움직였다.



여직원들의 벽을 겨우 헤집고 본부장실로 올라온 민권은 본부장 한석과 제2라운드를 맞이해야 했다. 이번 기획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장본인인 한석은 떠나기 전날인 오늘도 내내 얼굴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던 것이다.

다큐 프로그램에 대한 회의감이 전반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가운데 굳이 큰돈과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는 입장이었다. 하여 민권 쪽에선 분주하게 촬영준비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여전히 결재서류에 한석의 사인이 들어가 있지 않은 상태였다.

“준비는 다 됐냐?”

백발이 희끗한 한석이 얼굴에 걱정의 빛을 잔뜩 올린 채 민권을 맞이했다. 소파에 풀썩 몸을 묻은 민권이 어깨를 으쓱한다.

“본부장님 사인만 떨어지면요. 어서 사인하세요.”

“왜? 언젠 내 사인 없어도 출국하면 그만이라며? 하여간 키워놨더니 이젠 머리 위에서 놀라 그래. 차기 본부장감이라 이거지?”

“그러지 말고 어서 펜 드세요. 제가 시청률로 보답해드릴 테니까.”

한석은 민권의 호언장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평소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걸로 유명해 상부의 눈엣가시였던 민권은 한석에게 있어 아끼는 후배였다. 민권이 기자였던 시절부터 챙겨왔다. 호경그룹 차남이라는 걸출한 명함을 버린 채 오로지 실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커리어를 쌓아온 녀석한테서, 이번엔 얼마쯤 조급함이 느껴진 것이다.

그래서였다. 기대와는 달리 실패로 끝날지도 모를 이번 기획에 선뜻 동조하지 못했던 것은.

“이번 거 실패하면 너 그룹으로 들어가야 되는 거지? 그래서 사활을 거는 거지?”

민권의 눈이 고요하게 일렁거렸다. 늘 핵심을 찌르는 한석이 던진 말에 민권은 대답을 섣불리 건네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인하고 부정해도 선명하게 다가오는 현실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민권이 그룹에 들어오길 바라는 아버지와 바라지 않는 형 사이에서, 민권의 계산기는 무척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 쪽이 모두가 행복하고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길인지.

“인재를 잃기 싫으시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세요. 그게 본부장님이 하실 일 아닙니까.”

“내가 널 이기는 날이 아마도 지구가 두 쪽이 나서 한 쪽이 우주로 내팽개쳐지는 날일 거다. 널 무슨 수로 이겨?”

능글맞게 웃는 민권을 한참동안 쳐다보던 한석이 마지못해 펜을 들었다. 투덜거리며 책상 위 파일을 집어오더니 표지를 넘기곤 현란한 손길로 사인을 한다. 슬쩍 시선을 들고 한석이 물었다.

“예방접종은 다들 한 거야?”

민권은 씩 웃으며 점퍼 소매를 돌돌 걷고 주사자국을 보여주었다. 한석이 ‘쯧.’소리를 내며 못마땅한 듯 사인을 마무리했다. 민권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본부장 실을 나왔다. 텅 빈 복도를 느릿하게 걷던 그는 복도 끝 창가로 다가갔다.

봄 햇빛이 만들어낸 아지랑이가 아슬아슬 대기를 수놓고 있었다. 가까운, 혹은 먼 거리에서 덮치듯 일렁거리고 있는 광경을 보자니 자신이 벌려놓은 일에 대한 부담감이 갑자기 엄습해왔다.

성공할 수 있을까.

혹은, 성공해야 할 텐데.

기대하는 마음의 저변이 결코 순수하지만은 않은 까닭이다. 이번 취재가 그룹으로 들어오라는 강수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이라는 생각이 머릿속 도처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가 회사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모두가 행복한 길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잡한 생각들로 캄보디아로 출발하기 전부터 그는 이미 지치고 있었다.

민권은 한숨을 지었다.

봄이, 여느 때와는 다르게 흐릿하고 존재감도 없이 그의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2.



인천공항에서 시엠립 공항까지 다섯 시간. 공항에서 톤레샵 호수를 지나 난민캠프까지 또 한 시간 30분. 시간이 흐를수록 캄보디아의 후텁지근한 날씨가 차츰 피부에 와 닿았다. 호수가 보이고 저 멀리 천막과 허름한 벽돌 건물로 지어올린 난민캠프가 보일 땐 민권을 비롯한 촬영 팀은 이미 한낮의 무더위로 인해 충분히 지친 상태였다.

호수의 표면에서 일고 있는 물안개는 자욱했으며 수초와 날벌레들이 우글거려 정글의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촬영을 위해 공항에서 빌린 지프자동차가 캠프 사이사이를 헤집을 때마다, 이방인을 향한 난민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얼룩과 때가 묻은 옷을 입고 차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아이들의 미소부터 시작하여, 때가 채 씻기지도 않은 빨래를 너는 아낙네들, 늙어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인들의 경계의 눈빛까지.

서행을 하며 달리는 차 안에서, 촬영 팀의 마음은 그렇게 시작부터 무거웠다. 난민 캠프 병원 건물을 지나 지프는 촬영 팀 숙소로 지정된 곳에 도착했다. 의사들의 숙소건물 옆에 있는 작은 텐트촌이었는데, 작년까지 영국 자원봉사단 팀이 머물렀다고 했다. 차에서 내린 민권은 선글라스를 낀 후 의사숙소를 힐끔 쳐다보곤 스태프를 도와 촬영 장비를 내렸다.

“아이고. 이 나이에 무슨 짓이야, 이게. 좋은 데서 탱자탱자 놀면서 일해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짬밥인데.”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강식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묵묵히 카메라를 내리던 민권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투덜거림 한 마디 당 한 끼를 굶게 될 거야, 형.”

“그러냐? 그럼 세 마디하고 하루 굶으련다. 다이어트 정돈 되겠지.”

“잘 됐네. 형 끼니로 여기 주민들한테 나누어주면 고맙다 소린 들을 수 있을 거야.”

“뭐?”

강식이 툭 쏘자, 민권이 바로 옆에서 열심히 장비를 나르고 있는 준혁과 인호를 보며 가볍게 턱짓을 했다.

“조연출이랑 장 기사도 별 투정 없이 저렇게 열심인데 가장 연장자께서 모범을 보이셔야지.”

“나한테 남자 새끼들은 절대 동기부여가 되지 못해.”

“그럼 간호사 상콤이들은?”

민권의 한 마디에 강식이 갑자기 눈을 빛냈다. 그러더니 못 이기는 척 민권을 따라 장비를 내린다. 조연출인 준혁과 카메라 기사인 인호를 따라 숙소로 열심히 나르는 강식을 보면서, 민권은 혀를 끌끌 찼다.

카메라 5대와 편집기, 녹음기 등의 장비들이 모두 옮겨지자 민권이 준혁에게 말했다.

“의사 팀 팀장 좀 만나고 올 테니까 장비 방 정리 하고 있어.”

“예. 피디님.”

“어이! 차 피디!”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강식이 부른다. 민권은 선글라스를 반쯤 내리고 그에게 시선을 던졌다.

“왜 불러?”

“간 김에 간호사 상콤이들 잘 있는지 한 번 봐. 오빠가 곧 찾아간다고 전해라.”

“저 한량.”

민권이 한심스럽게 쳐다보자,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준혁이 민권의 등을 얼른 떠다밀었다.

“강식이 형 신경 끄시고 어서 가보세요, 피디님.”

“다녀와서 곧장 회의 할 테니까 장비 방에 다들 모여 있어.”

“넵.”

민권은 준혁의 배웅을 받으며 자갈을 모아둔 작은 밭 건너편에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반소매 티셔츠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선글라스가 얹힌 콧잔등 역시 땀방울이 띄엄띄엄 맺혔다. 가는 도중 흘깃 본 의사 숙소의 외벽은 균열과 곰팡이가 심상치 않게 드리워져 있었다. 병을 고치는 게 아니라 도로 얻어가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건물의 관리 상태가 엉망이었다.

먼지가 폴폴 날 정도로 거칠고 메마른 땅을 저벅저벅 밟으며 도착한 병원에서, 민권은 선글라스를 벗고 아이며 어른들로 뒤엉겨 있는 병원 앞마당을 조심스럽게 응시했다. 깔개를 깔고 바닥에서 자는 사람들이며, 그 옆에서 엉엉 울고 있는 어린 아이들. 모두 보호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제 한 몸 뉠 곳이 없어 그렇게 불편한 모습으로 머물고 있었다.

그들을 휘 둘러보던 민권은 병원 입구에 시선을 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