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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5년 만에 보는 조한새는 그대로였다. 부드럽고 유한 분위기에, 젠틀맨이었다. 그의 별명은 젠틀한 조 선배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인기도 많은 사람. 축제 때, 장난삼아 모든 과를 통틀어서 인기투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독보적으로 한새가 1등을 거머쥐었다. 그때 상금이 20만 원이었던가. 한새가 그 돈으로 자신을 데리고 레스토랑에 갔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함께 간 레스토랑이었다.
“채아는, 애인 있어?”
그가 물어 왔다. 잠시 옛날 회상을 하던 채아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로 저으려다 놀려 주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새의 미간이 잠시 꿈틀거렸다.
“……있다고?”
“네! 당연히 있죠.”
당연히, 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채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인이라기보다는 그 관계가 될까 말까 한 사람이 있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갑인 남자였다. 채아에게 고백을 했지만 그녀는 그 고백을 거절했다.
“……그래?”
스물여덟 살이나 되었는데 제대로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기에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렇기에 굴러들어 온 복을 차면 안 되지만, 채아는 제 스스로 발로 차 버렸다.
왜냐고?
“선배도…… 좋은 사람 만나야죠.”
한새를 좋아한다. 부정하고 싶지만, 참 우습게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레스토랑 안에서 영은이 아니라 한새가 있는 것을 보고 숨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또한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었었다. 애써 잊으려던 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것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그와 서로 마니또라는 것을 알고 난 후로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었다. 처음 본 날부터 한새를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은 채아는 가까워진 사이에 기대하며 고백하려 했지만, 생각을 해 보니 그는 그녀에게만 특별한 남자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니까.
그래서 마음을 접으려 해도 채아는 무언가 하나에 빠지면 푹 빠지는 경향이 있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동경이 아닐까, 생각을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동경일 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채아, 넌 어디서 일해?”
“아, 저요? 제서 그룹 본사에서…… 일해요. 하하!”
“혹시 비서실에서 일하니?”
“아니요, 회계팀이에요. 그런데…… 기억하시네요.”
부끄럽다는 듯이 괜히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한새가 쓰게 웃었다.
“참. 선배는요?”
갑자기 고개를 드는 채아였지만 능숙하게 부드럽게 웃는 모습으로 바꾼 한새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일해.”
“에이. 재미없게.”
쭉, 남은 커피까지 다 마신 채아는 컵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우리 이제 어디 가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말을 꺼내기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침묵에 잠겨 가는 분위기를 깨고 싶었을 뿐이었다. 무안해진 채아는 그저 웃었고,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한새가 그녀를 응시하다 피식 웃었다.
“글쎄다. 어디 갈까?”
“음…….”
근처에 뭐가 있지, 채아는 생각했다. 이대로 한새와 헤어지는 것이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워서 저녁까지는 같이 먹고 싶었다. 현재 1시 30분. 빨라야 저녁을 5시 30분에 먹는다고 하면 네 시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사이에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서 갈 곳이 없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테이블 위에 고개를 기댄 채아는 그대로 시선만 올려 한새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바로 한새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쿵― 하고 심장이 가라앉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갈…… 곳이 없네요. 하하!”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곤 핸드폰으로 근처 장소를 검색해 보았다. 그때, 갑자기 한새의 큰 손이 핸드폰 액정을 가렸다. 고개를 들자,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가깝다. 그러나 그대로 굳은 채아는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영화 볼까?”
“…….”
“네가 좋아하는 액션.”
“……서, 선배는 그거 싫어하잖아요.”
“그럼, 공포 봐?”
“아니, 그것도 좀…….”
말끝을 흐리며 채아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 의자에 붙어 앉았다. 한새의 얼굴이 멀어지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방금 전 일로 인해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 큰일 날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채아가 먼저 일어났다.
“일단 지금 볼 수 있는 게 뭐 있는지 보고 결정해요. 아, 오랜만에 영화네.”
쟁반을 들고 가는 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새는 연하게, 그러나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쟁반을 두고 돌아온 채아가 제 팔을 잡아당기며 얼른 가자며 재촉하는 모습에도 여전히 웃어 주었다.
“우리, 배는 부르니까 팝콘은 먹지 마요.”
“그럼 오징어는 먹고?”
“네!”
하여튼.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새는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다.
02
“박영은, 너……!”
기어코 한새와 저녁까지 먹고, 데려다준다는 것을 말리지 못해 같이 집 앞까지 왔다. 한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인사하던 채아가 집 안으로 들어가 영은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영은은 채아의 룸메이트였다.
“헤에. 왔어?”
“헤에? 우, 웃어? 너, 너……!”
너무 황당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는 영은이 얄미워 그녀가 보던 TV를 꺼 버렸다. 그러자 집에 적막이 찾아왔고, 영은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무…… 뭐!”
괜히 무서워진 채아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겁이 났다. 한번 화가 나면 한 달 가까이 말도 섞지 않는 것이 바로 박영은이었기에.
영은은 가만히 채아를 바라보았다. 살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여서 결국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자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뺀 채아가 그녀의 앞에 털썩 앉았다. 이내 다시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진짜…… 왜 네가 안 나오고 선배가 나온 거야?”
“선배랑 많이 얘기했어?”
“아, 뭐…… 오랜만에 봤으니까. 그러고 보니, 선배…… 왜 이렇게 오랜만이지?”
“……뭐? 안 물어봤어?”
이처럼 바보 같은 일이 다 있나? 영은의 미간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러나 채아는 자신의 생각에 집중을 해서 그런지 영은을 보지 않고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완벽한 혼잣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 하는지도 안 물어봤네.”
결국 영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저런 게 다 있담? 공부는 잘하는데 공부 외에는 둔하고 눈치도 없는 채아였다.
혼자서 생각을 하는 제 친구를 바라보던 영은은, 일주일 전을 떠올렸다.
***
천문학 동아리 ‘별 보다’에 가입을 한 것은 채아만이 아니었다. 결국 마땅히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한 영은이, 친구가 가입을 했으니 저도 가입을 해도 되겠다 싶어서 들었던 것이다. 소라는 고민하다가 봉사 동아리에 가입했다.
채아의 마니또가 한새였다면, 영은의 마니또는 한새의 친구인 지호였다. 한새는 졸업을 하고 나서 외국에 갔네, 어쩌네, 그런 소문만 들리고 채아와 연락이 끊겼었다. 그러나 영은은 지호와 계속 연락이 되었고,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 같은 동아리였고 마니또였던지라 만날 때도 있었다.
근 세 달 만에 지호에게서 연락이 왔기에 영은은 그와 만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인 지호는 이제 누가 봐도 선생님 티가 제법 났다.
“바쁜데 어쩐 일이세요?”
“어허. 바빠도 후배 밥 한 끼 사 줄 여유는 있다!”
“아, 그러셔요.”
“후배. 왜 이렇게 시큰둥해? 아, 오랜만에 연락했다고 삐쳤구나?”
“삐치기는. 용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주제에.”
정곡을 찔린 지호는 그저 웃어 버리고 말았다. 시크하고 쿨하게 대답을 해 주는 영은은 대학 시절 참 재미있는 후배였다. 선배가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하는 신입생이 많은데 영은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건방진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고 적당히 장난이나 농담을 할 줄도 알았다.
오늘 지호가 그녀를 불러낸 것은, 그녀의 말대로 용건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건 50%였다. 나머지 50%는 오랜만에 이 흔치 않은 후배를 보고 싶기도 했다.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상대였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는 영은으로 인해 지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영은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려 하기에 입을 열려다, 마침 음식이 나와서 잠시 멈췄다.
음식을 훑어본 영은이 시선을 들어 지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늘은 대체 무슨 일로 불렀을까? 쓸데없는 것만 아니면 괜찮은데. 그녀의 노골적인 시선에, 결국 졌다는 듯이 웃으며 지호가 대답을 했다.
“한새. 기억하지? 조한새.”
“물론 기억하죠.”
제서대 최고 인기인이었던 조한새를 어떻게 잊으랴. 거기다 친한 친구에다가 룸메이트인 은채아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상대가 아니던가?
귀공자처럼 생겼는데, 예의도 바르고 하는 태도가 전부 부잣집 도련님인 것 같아 그의 배경에 대해 추측이 난무했었다. 끝내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음에도 분명 그럴 거라고 다들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 한새는 채아의 마니또였고, 채아도 한새의 마니또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부터 두 사람은 부쩍 친해졌다. 채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미 처음부터 한새와 친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채아는 웬만한 동기보다도 동아리 선배인 한새와 더 친하게 지냈다. 어느새 교양 과목을 최대한 겹치게 하려고 하지를 않나, 시간표도 맞추려고 하지 않나. 두 사람은 실과 바늘 같은 존재였다.
“내가 오늘 널 부른 건, 조한새 때문이야.”
둘은 이상하게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확실히 채아는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태도가 모호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런 젠틀맨. 그래도 후배들 중에서 채아와 가장 친하긴 했다.
“한새…… 선배요?”
대학 시절 내내 떼어 낼 수 없던 그 이름에 영은이 의아함을 가진 것은, 한새가 졸업을 하자마자 갑자기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가장 크게 떠도는 소문은, 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갔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 한 일주일 동안 채아는 계속해서 울었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다.
“그 인간이 왜요!”
저도 모르게 영은은 거칠게 대답을 했다. 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반응으로 인해 영은은 제 입을 가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당시 채아는 그가 어차피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한 뒤에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리워하는 게 영은의 눈에는 보였다.
그래서 영은은 제 친구를 울린 한새를 생각하면 용서를 할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5년 동안 연락도 없는, 괘씸한 놈으로 입력이 되어 있었다.
“하하. 많이 화가 났구나.”
“그럼요. 어휴. 아무튼, 한새 선배가 왜요. 어디, 뭐, 잘 먹고 잘 산대요?”
“나한테 전해 달라고 하는 말이 있어서.”
비싼 스테이크를 갈기갈기 썰어 놓던 영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한 조각을 콱 찍어 입에 넣었다. 이내 영은이 계속 말을 해 보라는 듯이 지호를 바라보았다. 조용하던 사람이 화가 나면 정말 무섭다더니, 그 짝이었다. 웃고 있지만 눈가에서는 불씨가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움찔거리던 지호는 괜히 저에게 부탁을 한 제 친구를 원망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 다 먹었는지 스테이크를 삼키는 영은의 입에 조각 하나를 다시 넣어 주면서.
“아직 한새가 뭐라고 한 말이 없어서 너에게 자세한 것을 설명 못 해 주겠는데…… 한새가, 채아 옆에 서려고 진짜 열심히 했어.”
“그게 무슨 말인데요.”
“어……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한새가 말해도 된다는 말을 안 해서. 아무튼 결론만 말을 하자면, 한새는 채아를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어.”
“에잇!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 읍!”
이번에는 조각 두 개를 영은의 입으로 집어넣으며 지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도 그게 답답해서 그놈한테 물었어. 차라리 일찍 말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냐. 그러니까 걔가 뭐라 했는지 알아?”
“뭐라 했는데요.”
두 조각을 아주 빠른 속도로 분리시켜서 삼킨 영은이 입을 열었다. 참 무서운 영은의 모습에, 지호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잘못 건드렸다간 죽을 것 같았다.
“하하! 여왕님처럼 모시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네.”
“……우웩.”
“아무튼, 그래서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만나고 싶은데 저를 쉽게 만나 줄지가 의문이라서 너한테 부탁을 하는 거래.”
“그럼 직접 저한테 말하지, 왜 선배 시키고 그런대요?”
지호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나 내심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본인을 직접 보면 뺨이 아니라 복부를 향해 주먹을 꽂아 넣을 사람이었다. 그러고서 정작 쉽게 만나게 해 주지는 않겠지. 괜히 웃기만 하던 지호는 다시 한번 말을 했다.
“그렇게 해 줄 거지?”
“근데요, 지호 선배. 만약 채아한테 지금 애인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요?”
“있어?”
“당연히 없지만요.”
그렇게 한 사람만 애타게 찾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안 그래도 회사에서 동갑내기가 고백을 했다던데, 그걸 차 버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을 리가 있냐고 하던데.”
“……아, 그 자신감. 한새 선배답네요.”
그리고 영은은 다시 한번 미간을 팍 찌푸리며 지호에게 못을 박았다.
“만약 만나게 했는데 채아 눈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했다간, 제가 한새 선배 때려 준다고 전해 주세요. 일단 내 친구 살리고 봐야 하니까.”
“응?”
“아, 선배는 몰라도 돼요.”
괘씸한 조한새라 생각이 되지만, 제 친구는 죽어도 조한새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까 이제 마음 좀 놓고 행복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틀 뒤, 영은은 한새를 직접 만나 그 이유를 들었고, 마침내 완전히 허락을 한 것이었다.
5년 만에 보는 조한새는 그대로였다. 부드럽고 유한 분위기에, 젠틀맨이었다. 그의 별명은 젠틀한 조 선배였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인기도 많은 사람. 축제 때, 장난삼아 모든 과를 통틀어서 인기투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독보적으로 한새가 1등을 거머쥐었다. 그때 상금이 20만 원이었던가. 한새가 그 돈으로 자신을 데리고 레스토랑에 갔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함께 간 레스토랑이었다.
“채아는, 애인 있어?”
그가 물어 왔다. 잠시 옛날 회상을 하던 채아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가로로 저으려다 놀려 주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새의 미간이 잠시 꿈틀거렸다.
“……있다고?”
“네! 당연히 있죠.”
당연히, 라는 단어에 다시 한번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지만 채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애인이라기보다는 그 관계가 될까 말까 한 사람이 있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동갑인 남자였다. 채아에게 고백을 했지만 그녀는 그 고백을 거절했다.
“……그래?”
스물여덟 살이나 되었는데 제대로 남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기에 늦어도 한참 늦었다. 그렇기에 굴러들어 온 복을 차면 안 되지만, 채아는 제 스스로 발로 차 버렸다.
왜냐고?
“선배도…… 좋은 사람 만나야죠.”
한새를 좋아한다. 부정하고 싶지만, 참 우습게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레스토랑 안에서 영은이 아니라 한새가 있는 것을 보고 숨이 멎어 버리는 줄 알았다. 또한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었었다. 애써 잊으려던 것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것은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그와 서로 마니또라는 것을 알고 난 후로 두 사람은 부쩍 가까워졌었다. 처음 본 날부터 한새를 좋아했다는 것을 깨달은 채아는 가까워진 사이에 기대하며 고백하려 했지만, 생각을 해 보니 그는 그녀에게만 특별한 남자가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니까.
그래서 마음을 접으려 해도 채아는 무언가 하나에 빠지면 푹 빠지는 경향이 있기에 포기할 수가 없었다. 동경이 아닐까, 생각을 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동경일 리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채아, 넌 어디서 일해?”
“아, 저요? 제서 그룹 본사에서…… 일해요. 하하!”
“혹시 비서실에서 일하니?”
“아니요, 회계팀이에요. 그런데…… 기억하시네요.”
부끄럽다는 듯이 괜히 커피를 마시는 그녀의 모습에, 한새가 쓰게 웃었다.
“참. 선배는요?”
갑자기 고개를 드는 채아였지만 능숙하게 부드럽게 웃는 모습으로 바꾼 한새가 입을 열었다.
“그냥, 일해.”
“에이. 재미없게.”
쭉, 남은 커피까지 다 마신 채아는 컵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을 꺼냈다.
“우리 이제 어디 가요?”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 말을 꺼내기에는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침묵에 잠겨 가는 분위기를 깨고 싶었을 뿐이었다. 무안해진 채아는 그저 웃었고, 마지막 한 모금의 커피를 마신 한새가 그녀를 응시하다 피식 웃었다.
“글쎄다. 어디 갈까?”
“음…….”
근처에 뭐가 있지, 채아는 생각했다. 이대로 한새와 헤어지는 것이 조금, 아니…… 많이 아쉬워서 저녁까지는 같이 먹고 싶었다. 현재 1시 30분. 빨라야 저녁을 5시 30분에 먹는다고 하면 네 시간이라는 시간이 있었다. 그사이에 무언가라도 하고 싶어서 갈 곳이 없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테이블 위에 고개를 기댄 채아는 그대로 시선만 올려 한새를 바라보았다. 계속해서 저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바로 한새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쿵― 하고 심장이 가라앉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갈…… 곳이 없네요. 하하!”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하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러곤 핸드폰으로 근처 장소를 검색해 보았다. 그때, 갑자기 한새의 큰 손이 핸드폰 액정을 가렸다. 고개를 들자,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가깝다. 그러나 그대로 굳은 채아는 뒤로 물러서지 못했다.
“영화 볼까?”
“…….”
“네가 좋아하는 액션.”
“……서, 선배는 그거 싫어하잖아요.”
“그럼, 공포 봐?”
“아니, 그것도 좀…….”
말끝을 흐리며 채아는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 의자에 붙어 앉았다. 한새의 얼굴이 멀어지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방금 전 일로 인해 등에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 큰일 날 뻔했네.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채아가 먼저 일어났다.
“일단 지금 볼 수 있는 게 뭐 있는지 보고 결정해요. 아, 오랜만에 영화네.”
쟁반을 들고 가는 채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새는 연하게, 그러나 계속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쟁반을 두고 돌아온 채아가 제 팔을 잡아당기며 얼른 가자며 재촉하는 모습에도 여전히 웃어 주었다.
“우리, 배는 부르니까 팝콘은 먹지 마요.”
“그럼 오징어는 먹고?”
“네!”
하여튼. 그렇게 중얼거리는 한새는 즐거워 보이는 표정이다.
02
“박영은, 너……!”
기어코 한새와 저녁까지 먹고, 데려다준다는 것을 말리지 못해 같이 집 앞까지 왔다. 한새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인사하던 채아가 집 안으로 들어가 영은을 향해 냅다 소리를 질렀다. 영은은 채아의 룸메이트였다.
“헤에. 왔어?”
“헤에? 우, 웃어? 너, 너……!”
너무 황당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지만 채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하는 영은이 얄미워 그녀가 보던 TV를 꺼 버렸다. 그러자 집에 적막이 찾아왔고, 영은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지는 것이 보였다.
“무…… 뭐!”
괜히 무서워진 채아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도 겁이 났다. 한번 화가 나면 한 달 가까이 말도 섞지 않는 것이 바로 박영은이었기에.
영은은 가만히 채아를 바라보았다. 살이 덜덜 떨리는 것이 보여서 결국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러자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뺀 채아가 그녀의 앞에 털썩 앉았다. 이내 다시 중얼거리듯이 입을 열었다.
“진짜…… 왜 네가 안 나오고 선배가 나온 거야?”
“선배랑 많이 얘기했어?”
“아, 뭐…… 오랜만에 봤으니까. 그러고 보니, 선배…… 왜 이렇게 오랜만이지?”
“……뭐? 안 물어봤어?”
이처럼 바보 같은 일이 다 있나? 영은의 미간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러나 채아는 자신의 생각에 집중을 해서 그런지 영은을 보지 않고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완벽한 혼잣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무슨 일 하는지도 안 물어봤네.”
결국 영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저런 게 다 있담? 공부는 잘하는데 공부 외에는 둔하고 눈치도 없는 채아였다.
혼자서 생각을 하는 제 친구를 바라보던 영은은, 일주일 전을 떠올렸다.
***
천문학 동아리 ‘별 보다’에 가입을 한 것은 채아만이 아니었다. 결국 마땅히 들어갈 곳을 찾지 못한 영은이, 친구가 가입을 했으니 저도 가입을 해도 되겠다 싶어서 들었던 것이다. 소라는 고민하다가 봉사 동아리에 가입했다.
채아의 마니또가 한새였다면, 영은의 마니또는 한새의 친구인 지호였다. 한새는 졸업을 하고 나서 외국에 갔네, 어쩌네, 그런 소문만 들리고 채아와 연락이 끊겼었다. 그러나 영은은 지호와 계속 연락이 되었고,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때 같은 동아리였고 마니또였던지라 만날 때도 있었다.
근 세 달 만에 지호에게서 연락이 왔기에 영은은 그와 만나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인 지호는 이제 누가 봐도 선생님 티가 제법 났다.
“바쁜데 어쩐 일이세요?”
“어허. 바빠도 후배 밥 한 끼 사 줄 여유는 있다!”
“아, 그러셔요.”
“후배. 왜 이렇게 시큰둥해? 아, 오랜만에 연락했다고 삐쳤구나?”
“삐치기는. 용건 있을 때만 연락하는 주제에.”
정곡을 찔린 지호는 그저 웃어 버리고 말았다. 시크하고 쿨하게 대답을 해 주는 영은은 대학 시절 참 재미있는 후배였다. 선배가 무서워서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하는 신입생이 많은데 영은은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건방진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물러설 줄도 알고 적당히 장난이나 농담을 할 줄도 알았다.
오늘 지호가 그녀를 불러낸 것은, 그녀의 말대로 용건이 있기 때문이지만 그건 50%였다. 나머지 50%는 오랜만에 이 흔치 않은 후배를 보고 싶기도 했다. 같이 있으면 심심하지 않은 상대였다.
“그래서. 용건이 뭔데요?”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는 영은으로 인해 지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영은의 눈초리가 매서워지려 하기에 입을 열려다, 마침 음식이 나와서 잠시 멈췄다.
음식을 훑어본 영은이 시선을 들어 지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오늘은 대체 무슨 일로 불렀을까? 쓸데없는 것만 아니면 괜찮은데. 그녀의 노골적인 시선에, 결국 졌다는 듯이 웃으며 지호가 대답을 했다.
“한새. 기억하지? 조한새.”
“물론 기억하죠.”
제서대 최고 인기인이었던 조한새를 어떻게 잊으랴. 거기다 친한 친구에다가 룸메이트인 은채아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상대가 아니던가?
귀공자처럼 생겼는데, 예의도 바르고 하는 태도가 전부 부잣집 도련님인 것 같아 그의 배경에 대해 추측이 난무했었다. 끝내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음에도 분명 그럴 거라고 다들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런 한새는 채아의 마니또였고, 채아도 한새의 마니또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부터 두 사람은 부쩍 친해졌다. 채아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미 처음부터 한새와 친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채아는 웬만한 동기보다도 동아리 선배인 한새와 더 친하게 지냈다. 어느새 교양 과목을 최대한 겹치게 하려고 하지를 않나, 시간표도 맞추려고 하지 않나. 두 사람은 실과 바늘 같은 존재였다.
“내가 오늘 널 부른 건, 조한새 때문이야.”
둘은 이상하게 사귀는 사이는 아니었다. 확실히 채아는 그를 좋아했지만, 그의 태도가 모호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그런 젠틀맨. 그래도 후배들 중에서 채아와 가장 친하긴 했다.
“한새…… 선배요?”
대학 시절 내내 떼어 낼 수 없던 그 이름에 영은이 의아함을 가진 것은, 한새가 졸업을 하자마자 갑자기 종적을 감췄기 때문이었다. 가장 크게 떠도는 소문은, 외국으로 유학이나 이민을 갔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 한 일주일 동안 채아는 계속해서 울었었다.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었다.
“그 인간이 왜요!”
저도 모르게 영은은 거칠게 대답을 했다. 지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의 반응으로 인해 영은은 제 입을 가리고 어색하게 웃었다.
당시 채아는 그가 어차피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다고 애써 자신을 위로한 뒤에야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아직도 그리워하는 게 영은의 눈에는 보였다.
그래서 영은은 제 친구를 울린 한새를 생각하면 용서를 할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사는지 5년 동안 연락도 없는, 괘씸한 놈으로 입력이 되어 있었다.
“하하. 많이 화가 났구나.”
“그럼요. 어휴. 아무튼, 한새 선배가 왜요. 어디, 뭐, 잘 먹고 잘 산대요?”
“나한테 전해 달라고 하는 말이 있어서.”
비싼 스테이크를 갈기갈기 썰어 놓던 영은은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한 조각을 콱 찍어 입에 넣었다. 이내 영은이 계속 말을 해 보라는 듯이 지호를 바라보았다. 조용하던 사람이 화가 나면 정말 무섭다더니, 그 짝이었다. 웃고 있지만 눈가에서는 불씨가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움찔거리던 지호는 괜히 저에게 부탁을 한 제 친구를 원망하며 겨우 입을 열었다. 언제 다 먹었는지 스테이크를 삼키는 영은의 입에 조각 하나를 다시 넣어 주면서.
“아직 한새가 뭐라고 한 말이 없어서 너에게 자세한 것을 설명 못 해 주겠는데…… 한새가, 채아 옆에 서려고 진짜 열심히 했어.”
“그게 무슨 말인데요.”
“어……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한새가 말해도 된다는 말을 안 해서. 아무튼 결론만 말을 하자면, 한새는 채아를 예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어.”
“에잇!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소용…… 읍!”
이번에는 조각 두 개를 영은의 입으로 집어넣으며 지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도 그게 답답해서 그놈한테 물었어. 차라리 일찍 말을 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냐. 그러니까 걔가 뭐라 했는지 알아?”
“뭐라 했는데요.”
두 조각을 아주 빠른 속도로 분리시켜서 삼킨 영은이 입을 열었다. 참 무서운 영은의 모습에, 지호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꼈다. 잘못 건드렸다간 죽을 것 같았다.
“하하! 여왕님처럼 모시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하네.”
“……우웩.”
“아무튼, 그래서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만나고 싶은데 저를 쉽게 만나 줄지가 의문이라서 너한테 부탁을 하는 거래.”
“그럼 직접 저한테 말하지, 왜 선배 시키고 그런대요?”
지호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나 내심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본인을 직접 보면 뺨이 아니라 복부를 향해 주먹을 꽂아 넣을 사람이었다. 그러고서 정작 쉽게 만나게 해 주지는 않겠지. 괜히 웃기만 하던 지호는 다시 한번 말을 했다.
“그렇게 해 줄 거지?”
“근데요, 지호 선배. 만약 채아한테 지금 애인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요?”
“있어?”
“당연히 없지만요.”
그렇게 한 사람만 애타게 찾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가. 안 그래도 회사에서 동갑내기가 고백을 했다던데, 그걸 차 버렸다는 소리를 들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 못 넣을 리가 있냐고 하던데.”
“……아, 그 자신감. 한새 선배답네요.”
그리고 영은은 다시 한번 미간을 팍 찌푸리며 지호에게 못을 박았다.
“만약 만나게 했는데 채아 눈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리게 했다간, 제가 한새 선배 때려 준다고 전해 주세요. 일단 내 친구 살리고 봐야 하니까.”
“응?”
“아, 선배는 몰라도 돼요.”
괘씸한 조한새라 생각이 되지만, 제 친구는 죽어도 조한새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니까 이제 마음 좀 놓고 행복하라고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틀 뒤, 영은은 한새를 직접 만나 그 이유를 들었고, 마침내 완전히 허락을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