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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여기서 선배를 볼 줄은 몰랐어요.”

주문을 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채아는 그에게 다시 먼저 말을 걸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게. 내 이름은 기억해?”

“그럼요! 조한새! 그럼, 선배는요? 제 이름 기억하세요?”

“은채아.”

한새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어쩐지 조금은 가슴이 떨렸다. 이건 전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진 그의 탓이라 생각하며 채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거예요?”

영은과 한새가 아는 사이였나. 채아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주문했던 스테이크가 나왔고, 잠시 두 사람의 대화는 멈췄다. 한새가 웨이터에게 인사를 하기에 채아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일단 먹고 대화를 할 생각인지 한새는 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영은과 한새가 아는 사이였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고민을 하며 채아는 나이프를 집었다. 어디서부터 자를지 대어 보다가 콩콩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한새가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고 있었다. 여전히 빛나는 그의 외모에, 저런 잘생긴 사람과 아는 사이여서 이제는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어라, 왜…….”

“이런 거, 잘 못했잖아.”

“아, 아우. 그런 걸 기억하다니.”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한새가 접시를 바꾸는 것을 바라보다, 채아는 그가 썰어 준 스테이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 입에 쏙 들어가게 알맞은 크기로 조각을 내 주었다.

예전, 대학에 다닐 때 한새와 레스토랑에 딱 한 번 왔었고, 그 밖에는 돈가스를 먹었었다. 매번 힘겹게 조각을 내서 언제부터인지 한새가 꼭 제 것을 썰어 주었었다. 벌써 4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잘 먹겠습니다. 참, 이거 영은이가 사는 건가요?”

한새는 아니라며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럼 역시 반반씩 내는 거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맛있겠다고 말을 하려던 찰나, 그에게서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내가 내는 건데.”

당연하다는 듯이 해 오는 대답에, 채아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 모습에 짧게 소리를 내서 웃은 한새가 채아의 입에 스테이크 한 조각을 넣었다.

“입에 파리 들어가겠다. 얼른 먹자.”

“아…… 제가 귀가 좀 안 좋아져서. 늙은 것 같아요.”

암. 스물여덟 살이면 늙었지. 늙어도 한참 늙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우물거리는데 이어서 들려오는 말에 결국 씹던 것을 멈추고 한새를 바라보았다.

“아니, 맞게 들었어. 그나저나, 은채아. 네가 늙었으면 계란 한 판 진작 완성한 나는 뭐가 돼?”

“어, 그게…… 아, 아하하.”

오랜만에 만난 선배가 왜 밥을 사 주는지 마음 한쪽에서 의문이 들었다. 그저 얻어먹기는 미안했다. 채아는 그저 웃음으로 마무리를 했다.

잠시 조용한 가운데 식사가 이어졌다. 말없이 한새가 썰어 준 스테이크를 입으로 집어넣던 채아는 테이블 아래에서 제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찌르르 아픈 것을 보니 현실인 모양이다. 분명 약속은 친구 영은과 했는데 약속 장소에서 마주한 것은 5년 만에 보는 선배의 얼굴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을 해야만 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자세한 전말을 영은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왠지 핸드폰을 만지는 것은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식사가 끝난 뒤에 물으면 실컷 물을 수 있을 것 같아 얼른 먹기로 했다. 조금 먹는 속도를 붙이는 채아를, 한새는 가만히 바라보다 피식 웃었다.

그렇게 묘한 분위기 속에 식사가 끝나자마자 채아는 고개를 바로 하고 한새를 바라보았다. 채아보다 조금 먼저 접시를 비운 한새가 기다렸다는 듯 눈을 마주해 왔다.

“이제 대답해 주세요.”

“무엇을?”

“전 분명 제 친구랑 약속했는데 선배가 여기에 있는 이유요.”

“저런. 채아는 내가 안 반가운 것 같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저렇게 말하니 할 말을 잃은 채아가 한새를 바라보다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게…….”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딱히 없었을뿐더러 즉석으로 대답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약한 채아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때, 한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밝고 명쾌한 웃음소리에, 고개를 든 채아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미안, 미안. 이제 그만 놀릴게.”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놀리기예요?”

“오랜만인데도 여전히 귀엽네, 은채아.”

한새는 습관적으로 내뱉는 말들이 있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기도 했다. 채아에게는 귀엽다, 라는 말을 자주 했다. 처음에는 채아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나? 하고 착각할 정도로.

그러나 한새와 지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아, 이 사람은 귀엽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입에 달고 사는구나. 그래도 다른 사람에게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것은 은채아 전용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듣는다고 다시 심장이 두근거렸다. 난리 법석을 피우는 심장을 모른 척하며 채아가 말을 이었다.

“선배는 여전히 빛나네요.”

“응? 내가?”

“네. 선배 외모가.”

처음에만 어색했지만,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분위기가 풀리자 다시 대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동아리에 처음 들어갔을 때, 선후배 관계를 돈독히 다지기 위해 했던 마니또가 생각났다. 선배들은 후배들 이름을, 후배들은 선배들 이름을 뽑았다.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으며 도와주는 것이 마니또의 법칙 같은 것이었다. 그때 채아가 뽑은 선배는 한새였다. 그리고 훗날 알고 보니 한새가 뽑은 마니또도 채아였다.

“오늘, 일 쉬는 날이라던데…… 맞니?”

“아, 맞아요.”

“그럼 일단 나가자.”

그래서 두 사람은 동아리 안에서 커플로 불렸다. 운명의 만남이니 뭐니, 그런 농담도 걸려 왔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사귄 적은 없었다. 그것이 동아리 내 불가사의였다.

“근데 진짜 선배가 점심 사는 거예요?”

“은채아, 의심하는 버릇 또 나왔네.”

“아니, 그게 아니라…….”

오랜만에 본 선배라서 그런지 얻어먹기가 미안했다. 점점 미안해지는 채아의 표정을 본 한새가 피식 웃으며 계산대 앞에 선 채아를 뒤로 밀어 냈다.

“사람 무안하게 하지 말고.”

“네? 아, 네에…….”

채아는 말끝을 늘이며 뒤로 물러섰다. 계산을 하는 한새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채아가 조용히 웃었다. 변함이 없는 그의 모습에 그저 웃음이 나왔다. 가끔 바쁠 때마다 떠올랐던 것이 한새였다. 그렇기에 변함이 없는 그의 모습에 더욱더 반가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채아는 한새가 계산을 하는 사이,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서 영은에게 카톡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그러자 영은은 그저 답장으로 키읔만 가득 써서 보내 왔다. 빨리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몇 번을 보내도 영은이 보내는 답장은 같았다.

“줘 봐.”

“어떤 거…… 아, 핸드폰이요?”

어느새 다가온 한새가 손을 내밀었다. 일단 달라고 했으니 한새의 손에 핸드폰을 올려놓은 채아가 물었다.

“그런데 왜요?”

“여전하네, 은채아. 주고 나서 물어보면 어떻게 해.”

민망해진 채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저도 변한 것이 없나 보다.

“이거, 내 번호다.”

“아. 얼른 저장할게요.”

대학 시절, 두 사람은 서로의 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자주 만나는 날이 많다 보니 핸드폰으로 연락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자취방이 한 다리 건너였기 때문에 연락하지 않아도 금세 만나곤 했다.

“뭐로 저장했어?”

한새가 묻기에, 왠지 모르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뒤로 숨기려고 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왠지 민망해 채아는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미 얼굴이 빨갛게 익었을 것이다. 두 뺨을 매만져 보기도 했다.

채아가 저장한 이름은 ‘선배’였다.

“재미 없는 은채아.”

투덜거리듯이 말하는 한새를 향해 고개를 휙 든 채아가 그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어디, 선배는 뭐라고 저장을 했는지 보죠!”

그리고 확인을 하자마자 채아는 가던 걸음을 뚝 멈췄다. 그가 저를 저장한 이름은 ‘우리 채아’였으니까.

잠시 눈을 깜빡이던 채아의 얼굴이 이내 붉게 확 타올랐다. 그런 채아의 모습이 귀엽다 생각한 한새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채아의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멍하니 액정을 바라보니, 선배 앞에 ‘우리’란 단어가 붙어 있었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어?”

“…….”

“채아야?”

“……어, 아! 카페, 카페요.”

“식후엔 카라멜 마끼아또, 이거지?”

“그것도 기억하시네요.”

애써 핸드폰 이름 사건을 기억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휙휙 저으며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런 그녀의 질문에, 한새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해 주었다.

“잊을 리가.”

묘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말이었다. 마치 문장 앞에 수식어가 떨어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걸 내가’라는 달콤한 수식어가.

이번에도 채아는 애써 모른 척, 구석으로 두근거림을 밀어 넣으며 그의 옆에 섰다.

“근데, 선배. 끝까지 말 안 해 주실 거예요?”

“뭐가?”

“원래부터 영은이 알고 있었어요?”

그러자 의외로 한새의 대답은 간단하게 떨어졌다.

“아니.”

아주 단호한 그 말에, 눈을 깜빡이던 채아가 고개를 확 돌렸다. 그러나 한새는 여전히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채아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요?”

“채아야.”

“네.”

“그거 말고 다른 건 안 궁금하니?”

오로지 그것만 궁금했기에 채아는 그의 질문에 난감했지만 다른 것도 궁금하다 대답을 했다. 그런데 거짓말이 티가 났는지 한새는 그저 즐겁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럼, 다른 거 뭐?”

또다시 이어지는 질문에, 채아는 머리를 굴리다 마침 카페를 발견해서 한새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카페다! 얼른 들어가요. 아, 커피 마시고 싶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자리를 잡아 한새를 앉히고서 채아는 가방을 급히 뒤적였다. 지갑을 꺼낸 채아가 곧장 커피를 주문하러 갔다. 그녀의 뻣뻣한 뒷모습에, 화제를 돌리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키득거리며 웃던 한새는 채아가 앉으려던 자리와 제 자리를 바꿨다.

커피를 주문하러 간 채아는 잠시 메뉴판 앞에서 고민을 했다. 선배가 무엇을 마시더라. 아, 단것을 싫어하지. 그래서 아메리카노만 고집했던 것이 떠올랐다. 혹은, 가끔은 에스프레소. 에스프레소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마셨으므로 오늘은 아메리카노였다.

“카라멜 마끼아또 한 잔하고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아, 둘 다 차가운 걸로 주세요.”

저와는 입맛이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단것을 좋아했으니까.

주문을 한 후, 진동벨을 받아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자리가 바뀐 것을 발견했다. 한새가 비켜 준 등받이 있는 쪽으로 가서 앉으며 채아는 웃어 버렸다.

“못 살아. 여전히 젠틀맨이네요.”

“원래 레이디는 등받이 의자에 앉혀야 된다고 했어.”

“누가요?”

“……강지호가.”

“아. 바람둥이 지호 선배.”

지호는 한새와 가장 친하다고 소문이 난 선배였다. 불쑥 동아리 면접 때, 그에게 질문을 받았던 일이 떠올랐다. 지호가 능글맞은 말 몇 마디로 긴장을 풀어 주어 채아는 무사히 면접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건 안 궁금해?”

갑자기 물어 오는 질문에, 잠깐 말문이 막혔지만 그녀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선배, 여자 친구! 그래, 맞아요. 애인 없어요? 애인.”

그러자 한새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가 금방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잘못 봤나 싶었던 채아는 두 눈을 비비려다 애써 한 화장이 번질까 싶어서 눈만 깜빡였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왠지, 그 잘생긴 얼굴에 없다고 하면 외모가 울 것 같아서요. 아하하!”

“너는. 없어?”

“에이. 제가 먼저 질문했잖아요. 그러니까 선배가 먼저 대답해 주셔야 해요.”

맞게 본 것 같은데. 아닌가? 속으로 여러 번 질문을 하던 채아는 한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때, 한새의 입이 열렸다.

“애인은 없는데…….”

잠시 말끝을 흐리던 그가 입을 열어 말을 이었다. 마치 달콤하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드르륵.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만 깜빡이던 채아가 벌떡 일어났다. 진동벨이 울리자 반사적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에, 한새가 키득거리며 채아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눌러 도로 앉혔다.

“내가 갔다 올게.”

“아, 제가…….”

“네가 샀잖아?”

길쭉한 상체가 점점 멀어졌다. 커피를 받아 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채아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저런 잘생긴 사람에게 애인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지. 왠지 아쉬운 마음과 함께 가슴이 따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깊게 숨겨 두었던 무언가가 들썩이며 제자리를 찾으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여전하네. 단거 좋아하는 식성.”

“선배는 아직도 안 좋아하죠?”

“물론. 그런데 나중에 먹어 보고 싶은 건 있어.”

“달콤한 거요?”

“응.”

그가 눈꼬리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아찔하게만 느껴지는 그 미소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듯했다. 채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커피를 마시다 물었다.

“어떤 건데요?”

그러자 그는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갑자기 쑥 입을 다무는 그가 수상해 보였지만 별다른 것은 묻지 않았다. 개인의 취향이니 묻지 않기로 했다.

잠시 커피를 빨대로 휘젓던 채아는 고개를 들어 제 눈앞에 있는 한새를 바라보았다. 한 학년 위였던 한새는 채아보다 1년 일찍 졸업을 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 없고 연락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니 따지자면 5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