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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Chapter 1
어둠이 짙게 깔린 회의실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상무를 비롯하여 PPT 자료를 발표한 직원까지 살얼음판 위를 맨발로 걷는 것 같은 기분에 서로의 눈치만 살피느라 급급했다.
“대표님 표정이 영, 안 좋은데? 유 상무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야……. 기획안을 신경질적으로 넘기고 있는 저 모습 봐 봐……. 아마도 눈치를 채신 거 같은데…….”
“큰일이군…….”
모두를 긴장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던 도운이 신경질적으로 기획안을 휙휙 넘겨 보던 손을 멈췄다. 고요한 회의실 안, 이곳저곳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조심성 없이 들려왔다.
“혹시나 싶어서 몇 번이고 읽어 봤는데, 이번 기획안이 작년 기획안하고 별반 다를 게 없네요?”
백화점 30주년을 기념하여 다가오는 가을 시즌에 진행하게 될 이벤트와 재작년에 창립한 복합 쇼핑몰의 콘셉트 기획 발표 중 도운의 마음에 드는 건, 놀라울 정도로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아, 바뀐 게 있긴 하네요. 글씨체.”
“…….”
콕 집어서 비꼬는 도운의 목소리에 모두들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작년 자료 찾아서 글씨체만 바꿔 PPT 자료 새로 준비하시느라 애먹으셨을 텐데, 제가 박수라도 쳐 드리는 게 맞겠죠?”
도운이 억지스럽게 박수를 두어 번 치더니, 굳은 얼굴로 다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회의실이 어두워서 그런지, 그는 흡사 저승사자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매번 똑같은 거 재탕하고 반복하시라고 하루도 안 밀리고 그 날짜에 맞춰 꼬박꼬박 월급 넣어 드리는 거 아닙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월급 안 올려 드리고, 매번 똑같은 월급 재탕해서 드리게 되면 들 기분 말입니다.”
“…….”
“요즘 애들 말로, 뭣 같지 않겠습니까?”
짙고 정갈한 눈썹, 베일 듯한 콧날, 굴곡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형, 붉고 도톰한 입술을 지닌, 한마디로 저렇게 반듯하게 생긴 얼굴의 남자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언이었다. 모두 찍소리도 못 하고 그저 죄인처럼 고개만 푹 수그릴 뿐이었다.
그때, 유 상무가 염치없는 웃음을 얼굴 가득 지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내 놓았다.
“기획안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키고 일반인들이 저희 기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공모전을 통해…….”
“결국, 네 회사 잘되려면 네 지갑을 열어라?”
도망가려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잔인하게 자신의 말을 잘라 내 버린 도운의 말에 유 상무는 그대로 입만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 맞으시죠? 유 상무님.”
“아,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유 상무님께서는 회사, 왜 출근하세요?”
책상 위로 손을 겹친 도운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보려는 모양인지, 유 상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였다.
“설마, 점심 드시고 싶어 출근하시는 건 아니실 테고, 비서들이 타 주는 커피 마시고 싶어서 하시는 것도 아니실 테고, 저희 회사에서 제공해 드린 고급 차로 드라이브하고 싶어서 하시는 것도 아니실 테고. 대체, 왜 출근하세요?”
“그거야, 일을 하기 위해서죠. 대표님.”
“그렇죠. 일을 하기 위해서 출근하시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대표님.”
“그럼, 일을 하셔야죠.”
“…….”
“대표 지갑 열 궁리만 하지 마시고, 고객님들 지갑 열게 할 궁리를 하라는 뜻입니다. 제가 유 상무님 지갑을 빵빵하게 채워 드리면, 유 상무님도 제 지갑을 빵빵하게 채워 줘야 하는 게 맞는 이치 아닌가요?”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그의 논리 정연한 말에 유 상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두를 향한 불똥이 제게만 튄 것 같아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말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업무 보기도 힘든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공모전을 열어라? 사원들 사기 충족시키는 건, 공모전을 열어서 서로 경쟁시키는 게 아니죠. 상무님들께서, 이사님들께서, 부장님과 팀장님과 실장님들께서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야근을 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데.”
여태, 부하 직원에게 제 일을 미루고 일찍 퇴근했던 상사들이 뜨끔하여 괜한 헛기침을 해 보였다.
“상무라는 직책을 가진 여러분께 야근이라니. 제 의견이 참, 한심해 보이시죠?”
“아, 아닙니다! 대표님.”
유 상무를 더불어 직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직원이 손을 거세게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획안은, 팀장님의 직책을 기준으로 상사분들께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부하 직원을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의 의견대로,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모두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다시 회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다음 주 ‘월요일’이라는 말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펼쳤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다음 주 월요일이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 야근을 하라는 것은 둘째 치고 주말까지 반납하여 일하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았다. 독한 인간이라 속으로 연신 욕들을 해 댔다.
“알겠습니다. 오늘도 회의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표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대표님.”
하지만 누구도 불평불만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운을 예의 바르게 배웅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도운은 답답한 마음에 꽉 조여 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사들을 비롯하여 직책을 지니고 있는 모든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돈은 돈대로 받아 가면서 뭐 하나 제대로 완벽하게 일을 진행하는 꼴을 못 봤다. 자신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아 가는 부하 직원에게 미루기만 할 뿐…….
도운은 아무리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양손에 잡다 못해 입에 물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끼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2년간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여 일한 적도 있었다.
그때 느낀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상사들은 일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기획안을 제대로 못 만들어 올 경우,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16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도운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던 비서 성훈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가 생각보다 늦게 끝나셨네요.”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낮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표실로 들어가려는 도운을 성훈이 얼른 막아 세웠다.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를.”
“혹시, 까먹으신 건 아니죠?”
“…….”
도운의 눈동자가 잠시 허허로운 공중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곧 휘둥그레져서는 앞에 서 있는 성훈의 얼굴 위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은 일흔다섯 번째 생신을 맞이하신 김 회장님과 난다 긴다 하는 기업들의 고위직을 맡은 측근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런, 젠장! 당장 나가서 차 대기시켜!”
가장 중요한 건, 김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말이다.
* * *
“후유…….”
태영은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도 온몸에 무겁게 내려앉은 긴장감이 도통 달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학 졸업 후의 첫 면접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너무 지나치게 긴장을 하는 자신이 한없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 되겠다!”
태영은 웬만하면 먹지 않으려고 했던 청심환을 꺼내 입에 쏙, 집어넣고 야무지게 씹어 먹었다. 혹시 모르니 가져가 보라는 엄마의 말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아, 왜 이렇게 덥지!’
쓴 청심환을 다 먹고 나자, 이번에는 지나치게 몸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영은 손부채질을 하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냈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태영의 옷차림은 뜨거운 광선이 쏟아지는 이 한여름 날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름용이라 해도 손목까지 덮는 검은색 정장 재킷에 발목까지 오는 정장 바지는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있는 것같이 괴롭기만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목선이 훤히 다 드러나는 짧은 커트 머리가 전부였다.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 오게 된 회사는 규모가 큰 복합 쇼핑몰의 보안 요원이었다. 센터 대부분이 계약직이거나 아르바이트로 채용하는 것과 달리 이 회사는 정직원을 채용 중이었고, 복리 후생이 꽤 좋았다.
경호학과 출신으로서 취업에 한계가 있는 터라, 태영에겐 더없이 꼭 잡고 싶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떨지 말자. 떨지 마!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런 쿠크다스같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새가슴으로 어떻게 경찰이 될 생각을 했는지. 태영은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의 꿈이 어이없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태영은 양쪽으로 입가를 살짝 들어 올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있자니, 미소 짓는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이라며 좋아하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
생각만 하면 코끝이 시큰해지고 목울대가 눈물로 차오를 만큼 그리운 이름. 아빠.
태영은 주책없게 붉어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더 짙고 깊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빠, 잘 지켜봐 줘. 아빠가 그토록 사랑했던 딸, 꼭! 면접에 합격해서 아빠가 엄청나게 사랑했던 엄마, 행복하게 해 줄게.’
태영의 결의를 가득 채운 지하철은 어두운 터널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 * *
창밖을 주시하던 도운의 유난히 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매섭게 백미러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야?”
회사에서 출발한 차는 얼마 가지 않아 도로 한가운데에 망부석처럼 멈춰 버렸고 도통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표님.”
성훈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운이 붉고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물며 굵은 핏줄이 선연한 손목에 차 있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미치겠네…….”
약속 시간까지 고작, 20분 남짓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늦게 도착할까, 의심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촉박했다.
도운은 짜증 섞인 한숨을 거칠게 토해 내며 눈을 지그시 감고 애써 화를 삼켰다.
문득, 재작년에 오늘과 마찬가지로 급하게 소집된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약속 장소로 가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얼마나 바쁘셨으면, 다 늙어 빠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 생신을 다 깜빡하셨겠습니까? 다― 이해해 드려야죠. 제가 다― 이해해야죠. 아이고. 지금까지 살아서 일하시는 피곤한 아드님 더 피곤하게 해 드린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도운을 불효자 만든 것으로도 부족해서 정확하게 두 달가량 도운을 유령 취급 했고―급기야는 화장실에 도운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꺼 버리는 등― 도운의 생일에 어머니와 함께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홀라당 해외여행을 가 버리신 아버지였다.
아무리 존경하기를 이를 데 없고 하늘 같은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유치함과 민망함이었다.
그 생각에 치를 떨고 있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달갑지 않은,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훅, 하고 몰려들었다.
#Chapter 1
어둠이 짙게 깔린 회의실 안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상무를 비롯하여 PPT 자료를 발표한 직원까지 살얼음판 위를 맨발로 걷는 것 같은 기분에 서로의 눈치만 살피느라 급급했다.
“대표님 표정이 영, 안 좋은데? 유 상무는 어떻게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야……. 기획안을 신경질적으로 넘기고 있는 저 모습 봐 봐……. 아마도 눈치를 채신 거 같은데…….”
“큰일이군…….”
모두를 긴장의 구렁텅이로 빠트렸던 도운이 신경질적으로 기획안을 휙휙 넘겨 보던 손을 멈췄다. 고요한 회의실 안, 이곳저곳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조심성 없이 들려왔다.
“혹시나 싶어서 몇 번이고 읽어 봤는데, 이번 기획안이 작년 기획안하고 별반 다를 게 없네요?”
백화점 30주년을 기념하여 다가오는 가을 시즌에 진행하게 될 이벤트와 재작년에 창립한 복합 쇼핑몰의 콘셉트 기획 발표 중 도운의 마음에 드는 건, 놀라울 정도로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아, 바뀐 게 있긴 하네요. 글씨체.”
“…….”
콕 집어서 비꼬는 도운의 목소리에 모두들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작년 자료 찾아서 글씨체만 바꿔 PPT 자료 새로 준비하시느라 애먹으셨을 텐데, 제가 박수라도 쳐 드리는 게 맞겠죠?”
도운이 억지스럽게 박수를 두어 번 치더니, 굳은 얼굴로 다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회의실이 어두워서 그런지, 그는 흡사 저승사자와도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매번 똑같은 거 재탕하고 반복하시라고 하루도 안 밀리고 그 날짜에 맞춰 꼬박꼬박 월급 넣어 드리는 거 아닙니다. 처지를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떠시겠습니까? 제가 월급 안 올려 드리고, 매번 똑같은 월급 재탕해서 드리게 되면 들 기분 말입니다.”
“…….”
“요즘 애들 말로, 뭣 같지 않겠습니까?”
짙고 정갈한 눈썹, 베일 듯한 콧날, 굴곡 하나 없는 매끈한 얼굴형, 붉고 도톰한 입술을 지닌, 한마디로 저렇게 반듯하게 생긴 얼굴의 남자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폭언이었다. 모두 찍소리도 못 하고 그저 죄인처럼 고개만 푹 수그릴 뿐이었다.
그때, 유 상무가 염치없는 웃음을 얼굴 가득 지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내 놓았다.
“기획안이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키고 일반인들이 저희 기업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공모전을 통해…….”
“결국, 네 회사 잘되려면 네 지갑을 열어라?”
도망가려는 도마뱀의 꼬리처럼 잔인하게 자신의 말을 잘라 내 버린 도운의 말에 유 상무는 그대로 입만 헤―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 맞으시죠? 유 상무님.”
“아,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유 상무님께서는 회사, 왜 출근하세요?”
책상 위로 손을 겹친 도운이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질문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해 보려는 모양인지, 유 상무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정신없이 움직였다.
“설마, 점심 드시고 싶어 출근하시는 건 아니실 테고, 비서들이 타 주는 커피 마시고 싶어서 하시는 것도 아니실 테고, 저희 회사에서 제공해 드린 고급 차로 드라이브하고 싶어서 하시는 것도 아니실 테고. 대체, 왜 출근하세요?”
“그거야, 일을 하기 위해서죠. 대표님.”
“그렇죠. 일을 하기 위해서 출근하시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대표님.”
“그럼, 일을 하셔야죠.”
“…….”
“대표 지갑 열 궁리만 하지 마시고, 고객님들 지갑 열게 할 궁리를 하라는 뜻입니다. 제가 유 상무님 지갑을 빵빵하게 채워 드리면, 유 상무님도 제 지갑을 빵빵하게 채워 줘야 하는 게 맞는 이치 아닌가요?”
어디 하나 흠잡을 곳 없는 그의 논리 정연한 말에 유 상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모두를 향한 불똥이 제게만 튄 것 같아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말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업무 보기도 힘든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공모전을 열어라? 사원들 사기 충족시키는 건, 공모전을 열어서 서로 경쟁시키는 게 아니죠. 상무님들께서, 이사님들께서, 부장님과 팀장님과 실장님들께서 해야 할 일을 미루지 말고 야근을 시키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킬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데.”
여태, 부하 직원에게 제 일을 미루고 일찍 퇴근했던 상사들이 뜨끔하여 괜한 헛기침을 해 보였다.
“상무라는 직책을 가진 여러분께 야근이라니. 제 의견이 참, 한심해 보이시죠?”
“아, 아닙니다! 대표님.”
유 상무를 더불어 직책을 가지고 있는 모든 직원이 손을 거세게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렇다면 이번 기획안은, 팀장님의 직책을 기준으로 상사분들께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부하 직원을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의 의견대로, 사원들의 사기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모두들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대답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 월요일. 다시 회의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다음 주 ‘월요일’이라는 말에 소리 없는 아우성을 펼쳤다. 오늘이 수요일이니, 다음 주 월요일이라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 야근을 하라는 것은 둘째 치고 주말까지 반납하여 일하라는 무언의 압박과도 같았다. 독한 인간이라 속으로 연신 욕들을 해 댔다.
“알겠습니다. 오늘도 회의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대표님.”
“월요일에 뵙겠습니다. 대표님.”
하지만 누구도 불평불만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도운을 예의 바르게 배웅했다.
회의실에서 나온 도운은 답답한 마음에 꽉 조여 매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이사들을 비롯하여 직책을 지니고 있는 모든 직원이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돈은 돈대로 받아 가면서 뭐 하나 제대로 완벽하게 일을 진행하는 꼴을 못 봤다. 자신보다 훨씬 적은 월급을 받아 가는 부하 직원에게 미루기만 할 뿐…….
도운은 아무리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양손에 잡다 못해 입에 물고 발가락 사이사이에 끼고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남자였다. 그래서 대학 졸업 후 2년간 신입 사원으로 입사하여 일한 적도 있었다.
그때 느낀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상사들은 일을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기획안을 제대로 못 만들어 올 경우,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16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도운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자신의 업무를 보고 있던 비서 성훈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가 생각보다 늦게 끝나셨네요.”
피곤한 기색이 완연한 얼굴로 낮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표실로 들어가려는 도운을 성훈이 얼른 막아 세웠다.
“지금 바로 출발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어디를.”
“혹시, 까먹으신 건 아니죠?”
“…….”
도운의 눈동자가 잠시 허허로운 공중을 한 번 쓱 훑어보더니, 곧 휘둥그레져서는 앞에 서 있는 성훈의 얼굴 위를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은 일흔다섯 번째 생신을 맞이하신 김 회장님과 난다 긴다 하는 기업들의 고위직을 맡은 측근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기로 한 날이었다.
“이런, 젠장! 당장 나가서 차 대기시켜!”
가장 중요한 건, 김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로서 말이다.
* * *
“후유…….”
태영은 아무리 호흡을 가다듬어도 온몸에 무겁게 내려앉은 긴장감이 도통 달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학 졸업 후의 첫 면접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너무 지나치게 긴장을 하는 자신이 한없이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안 되겠다!”
태영은 웬만하면 먹지 않으려고 했던 청심환을 꺼내 입에 쏙, 집어넣고 야무지게 씹어 먹었다. 혹시 모르니 가져가 보라는 엄마의 말을 듣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아, 왜 이렇게 덥지!’
쓴 청심환을 다 먹고 나자, 이번에는 지나치게 몸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영은 손부채질을 하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냈다. 하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태영의 옷차림은 뜨거운 광선이 쏟아지는 이 한여름 날과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여름용이라 해도 손목까지 덮는 검은색 정장 재킷에 발목까지 오는 정장 바지는 두꺼운 솜이불을 덮고 있는 것같이 괴롭기만 했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목선이 훤히 다 드러나는 짧은 커트 머리가 전부였다.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러 오게 된 회사는 규모가 큰 복합 쇼핑몰의 보안 요원이었다. 센터 대부분이 계약직이거나 아르바이트로 채용하는 것과 달리 이 회사는 정직원을 채용 중이었고, 복리 후생이 꽤 좋았다.
경호학과 출신으로서 취업에 한계가 있는 터라, 태영에겐 더없이 꼭 잡고 싶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떨지 말자. 떨지 마!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런 쿠크다스같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새가슴으로 어떻게 경찰이 될 생각을 했는지. 태영은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의 꿈이 어이없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태영은 양쪽으로 입가를 살짝 들어 올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있자니, 미소 짓는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딸이라며 좋아하던 아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
생각만 하면 코끝이 시큰해지고 목울대가 눈물로 차오를 만큼 그리운 이름. 아빠.
태영은 주책없게 붉어진 눈시울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더 짙고 깊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빠, 잘 지켜봐 줘. 아빠가 그토록 사랑했던 딸, 꼭! 면접에 합격해서 아빠가 엄청나게 사랑했던 엄마, 행복하게 해 줄게.’
태영의 결의를 가득 채운 지하철은 어두운 터널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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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을 주시하던 도운의 유난히 까맣고 깊은 눈동자가 매섭게 백미러로 향했다.
“어떻게 된 거야?”
회사에서 출발한 차는 얼마 가지 않아 도로 한가운데에 망부석처럼 멈춰 버렸고 도통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대표님.”
성훈이 다급하게 차에서 내려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도운이 붉고 도톰한 입술을 꾹 깨물며 굵은 핏줄이 선연한 손목에 차 있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미치겠네…….”
약속 시간까지 고작, 20분 남짓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늦게 도착할까, 의심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촉박했다.
도운은 짜증 섞인 한숨을 거칠게 토해 내며 눈을 지그시 감고 애써 화를 삼켰다.
문득, 재작년에 오늘과 마찬가지로 급하게 소집된 회의가 길어지는 바람에 약속 장소로 가지 못했던 일이 떠올랐다.
‘얼마나 바쁘셨으면, 다 늙어 빠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 생신을 다 깜빡하셨겠습니까? 다― 이해해 드려야죠. 제가 다― 이해해야죠. 아이고. 지금까지 살아서 일하시는 피곤한 아드님 더 피곤하게 해 드린 것이 죄송할 따름입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며 도운을 불효자 만든 것으로도 부족해서 정확하게 두 달가량 도운을 유령 취급 했고―급기야는 화장실에 도운이 버젓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을 꺼 버리는 등― 도운의 생일에 어머니와 함께 축하한다는 말도 없이 홀라당 해외여행을 가 버리신 아버지였다.
아무리 존경하기를 이를 데 없고 하늘 같은 자신의 아버지이지만, 두 번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유치함과 민망함이었다.
그 생각에 치를 떨고 있는데 창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답하지도 않았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달갑지 않은, 뜨뜻미지근한 공기가 훅, 하고 몰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