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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대답 없으셨는데, 그냥 문 열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성훈의 말에 도운은 매우 급한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게 느긋하면서도 우아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건 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나 설명해.”
“앞에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큰 사고라서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지만, 차들이 많이…….”
한여름의 땡볕보다 더 뜨거운 숨결이 도운의 입술 사이에서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이 길로 7년 동안 출퇴근하면서 한 번도 사고가 일어났던 적은 없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일진 사납다.
자신을 쳐다보는 도운의 눈동자가 어찌나 이글거리는지, 성훈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슬그머니 도운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대표님. 지하철을…… 이용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
성훈이 때마침 앞에 있는 역 입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철?”
“네.”
지하철은 흡사, 거대한 개미 동굴 같았다. 평소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해 오던 냉정하고 차가웠던 도운의 표정은 살짝, 걱정스럽게 바뀌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려 버리고 만다.
“난 그딴 거 안 타.”
안 타는 것이 아니라, 못 타는 것이라고 말은 똑바로 하라는 소리가 성훈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다시 삼켜졌다.
“지하철은 막힐 일이 없어서 잘만 하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방법 없어?”
“네.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급한 대로 오토바이를 대여하게 되더라도 어쨌든 시간이 지체되어 장소엔 늦게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
사람이 많은 곳은 소름 끼치게 질색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극심한 결벽증은 언제나 도운을 괴롭혔다. 한두 사람 정도는 상관없지만, 다수의 사람들과 몸이 닿으면 짜증과 불쾌감을 넘어서 현기증과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격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곤 했다.
그런데, 지하철이라니……. 그 사람 많은…….
“대표님. 지금은 애매한 시간이라 지하철에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정말이야?”
“네.”
자신을 믿어 보라며 당당하게 대답하는 성훈의 모습에도 도운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대표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오늘도 늦으시면 재작년 때처럼……. 재작년 생각 안 나세요?”
그래. 아무리 사람들이 많은 것이 싫어도, 아버지의 끈질기고도 유치한 뒤끝보다는 낫지.
도운은 그리 생각하며 길쭉한 다리를 마지못해 차 밖으로 뻗었다.
“그럼 너는?”
“저는, 차 때문에 함께 못 갈 거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도운의 생일이라고 직접 골라서 사 준 차를 이대로 도로 위에 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대표님을 뒤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얼른 가시죠, 대표님. 아, 그리고 표를 구매하셔야 하는데 아마 이 돈이면 충분하실 겁니다.”
성훈이 지갑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도운에게 건넸다. 현금이라면 도운도 충분히 있지만 전부 오만 원권이라 나름 챙겨 준 건데, 도운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는 대표님께서 혼자서도 지하철을 잘 타서 약속 장소에 잘 도착하실 거라 믿습니다. 뭐든 잘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지하철 출입구 앞까지만 데려다준 성훈의 인사에 대꾸도 없이 도운은 커다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천 원짜리 지폐를 꽉 쥐었다.
“아셨죠? 일회용 기계! 돈 넣으시고, 목적지 청담동 선택이요!”
뒤에서 걱정이 되어 외치는 성훈의 당부에도 도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회용 카드 기계…… 목적지…… 돈 넣고…… 청담동 누르고.”
그러니까.
그곳에 자신의 운명에 닿을 어떠한 연(緣)의 끈이 놓여 있는지는 전혀, 모른 채로.
* * *
‘몇 정거장 남았지?’
노선표를 확인해 보니, 세 정거장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청심환을 먹어서인지 조금 마음이 안정되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접이라고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슬그머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음…… 졸면 안 되는데…….’
속으로는 그리 말하면서도 서서히 감기는 눈을 이겨 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서서 깜빡 졸아 버린 태영이 갑자기 다리에 힘이 확 풀려 주저앉을 뻔하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아함, 너무 피곤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기 위해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으로 뺨을 가볍게 쳐 내던 그때였다.
“……!”
엉덩이 쪽을 누군가가 투박한 손길로 만지작거리는 게 느껴진 것은.
처음에는 실수일지 몰라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실수로 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주물럭거리는 것이 확실한 불쾌한 느낌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빠른 속도로 연속 세 번이나!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그곳을 노골적으로 바짝 들이밀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너무 놀란 마음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긴가민가하여 잠자코 있었지만, 더는 그럴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변태 새끼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에 태영은 망설임 없이 몸을 빠르게 돌려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등 뒤로 손모가지를 꺾어 버렸다.
* * *
길쭉한 손가락으로 일회용 지하철 카드를 불안하게 매만지고 있는 도운의 주위로 여자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도운은 이 밀폐되고 갑갑한 공간에서 금방이라도 기절을 해 버릴 만큼 숨이 막혔다. 아까부터 계속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예수를 믿으라며 고함 빽빽 지르며 자리를 옮기는 아저씨들이 툭툭 치고 가는 것도 너무 싫었다.
‘한국 사람 여기 죄다 모아 놨나, 무슨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아……. 윽, 또 닿았어.’
애매한 시간대라서 사람이 없을 거라던 성훈의 말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도운은 호흡이 불안정해질 정도로 갑갑했다. 언제나 이랬다. 원하지 않는 누군가의 몸이 함부로 자신의 몸에 닿을 때 나오는 증상.
의사의 말대로 그 순간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공포의 시간은 쉽게 달아나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자신의 앞에 있던 남자가 급하게 몸을 뒤로 빼더니 ‘에이취!’ 소리와 함께 상당한 침을 도운의 재킷에 뱉어 버리다시피 하고서는 황급히 내려 버린 것은. 그리고 남자가 몸을 뒤로 빼면서 팔꿈치로 명치를 격하게 쳐 버린 바람에 너무 놀라 찍소리도 못 하고 기겁하며 굳어 버린 도운의 시야로…….
“이 변태 새끼가!”
앞에 있던 여자가 느닷없이 불같이 화를 내며 도운의 등 뒤로 손목을 꺾어 버렸다. 호흡 곤란까지 온 무방비한 상태에서 여자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한 도운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여자는 오랫동안 단련해 온 듯한 기술을 쓰며 도운의 등 뒤로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한 짓이 있으면서, 몰라서 물어요? 아저씨가 내 엉덩이를 만졌잖아요!”
누가, 누구 엉덩이를 만져? 도운은 기가 막히고도 어이가 없어서 이 와중에 실소를 터트렸다.
두 사람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당신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당신 엉덩이를 왜 만져.”
도운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 없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괜한 사람 잡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라 오히려 태영이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거야 변태니까 만졌겠지!”
“당신이 보기엔, 내가 변태 짓을 해야 할 만큼 만질 여자 엉덩이가 없어 보이나? 함께 경찰서로 가자고. 내가 진짜 변태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증명해 줄 테니까.”
남자는 당당했다.
“어떤 일을 저지를 땐,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거야.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했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날 망신시킨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어 있겠지? 당신, 명예 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도운의 말에 그제야 태영은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듯이 차올랐던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자신에게 맥없이 붙들려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태영의 손을 가볍게 쳐 버린 도운이 수그러져 있던 몸을 반듯하게 세우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자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큰 키의 위압감이 태영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쏟아 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를 피하지도 않는 지나치게 당당한 남자의 반응에 태영은 정말로 자신이 오해를 한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반면, 도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태영에 언짢은 기분이 몰려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봐.”
불러도 대답 없이 저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여자 때문에 도운의 미간은 더욱 좁혀졌다. 자신의 말을 이렇게 맛있게도 씹어 버리는 여자는 난생처음이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지, 더군다나 자신을 졸지에 변태로 만들어 버린 이 분수 모를 여자를 어떡하면 더 큰 개망신으로 되갚아 줄 수 있을지, 도운은 이쪽으로는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야 했다.
― 이번 역은 삼성, 삼성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사람이 말을 하면 좀…….”
“헉!”
자신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던 여자가 이번에도 역시 느닷없이 기겁하며 놀라더니 몸을 홱 돌려 초인적인 힘으로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허둥지둥 지하철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아차, 할 틈도 없이 도망가 버린 여자는 빛의 속도로 우사인 볼트도 울고 갈 만한 안정된 자세를 취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가 버리면 안 되지!’
여자는 정확하게 ‘맞아요. 제가 뭔가 오해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에 도운을 지하철에서 여자 엉덩이나 만지는 변태로 사람들에게 낙인찍어 버린 것이다.
억울하고 분노가 치솟는 마음에 아직 닫히지 않은 문으로 여자를 잡으러 가려고 도운이 몸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옆에 잠자코 서 있던 60대 중반의 아저씨가 도운을 안타깝고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차며 올려다본 것은.
“이봐, 총각. 허우대는 멀쩡해서……. 뭐가 부족해서 이런 곳에서 여자 엉덩이를 몰래 만졌어, 그래?”
아저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야속하게도 문은 닫혀 버렸고, 졸지에 여자 엉덩이에 환장한 허우대만 멀쩡한 변태 신세가 되어 버린 도운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까지 붉게 타올라 버린 얼굴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얼굴을 더 깊숙하게 숙이고 싶었지만, 이놈의 큰 키 때문에 아무리 숙여도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큰 키와 넓은 어깨를 끔찍하게 원망했다.
“대답 없으셨는데, 그냥 문 열어서 죄송합니다. 대표님.”
성훈의 말에 도운은 매우 급한 지금의 상황과는 다르게 느긋하면서도 우아하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건 됐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나 설명해.”
“앞에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큰 사고라서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지만, 차들이 많이…….”
한여름의 땡볕보다 더 뜨거운 숨결이 도운의 입술 사이에서 여지없이 터져 나왔다. 이 길로 7년 동안 출퇴근하면서 한 번도 사고가 일어났던 적은 없었는데,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일진 사납다.
자신을 쳐다보는 도운의 눈동자가 어찌나 이글거리는지, 성훈은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슬그머니 도운의 시선을 피해야 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대표님. 지하철을…… 이용해 보시는 게 어떠신지.”
성훈이 때마침 앞에 있는 역 입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지하철?”
“네.”
지하철은 흡사, 거대한 개미 동굴 같았다. 평소 한 번도 흐트러짐 없이 유지해 오던 냉정하고 차가웠던 도운의 표정은 살짝, 걱정스럽게 바뀌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려 버리고 만다.
“난 그딴 거 안 타.”
안 타는 것이 아니라, 못 타는 것이라고 말은 똑바로 하라는 소리가 성훈의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그대로 다시 삼켜졌다.
“지하철은 막힐 일이 없어서 잘만 하면 제시간에 도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방법 없어?”
“네. 지금으로써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급한 대로 오토바이를 대여하게 되더라도 어쨌든 시간이 지체되어 장소엔 늦게 도착하실 것 같습니다.”
“…….”
사람이 많은 곳은 소름 끼치게 질색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극심한 결벽증은 언제나 도운을 괴롭혔다. 한두 사람 정도는 상관없지만, 다수의 사람들과 몸이 닿으면 짜증과 불쾌감을 넘어서 현기증과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격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곤 했다.
그런데, 지하철이라니……. 그 사람 많은…….
“대표님. 지금은 애매한 시간이라 지하철에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정말이야?”
“네.”
자신을 믿어 보라며 당당하게 대답하는 성훈의 모습에도 도운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다.
“대표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아마, 오늘도 늦으시면 재작년 때처럼……. 재작년 생각 안 나세요?”
그래. 아무리 사람들이 많은 것이 싫어도, 아버지의 끈질기고도 유치한 뒤끝보다는 낫지.
도운은 그리 생각하며 길쭉한 다리를 마지못해 차 밖으로 뻗었다.
“그럼 너는?”
“저는, 차 때문에 함께 못 갈 거 같습니다.”
아버지께서 도운의 생일이라고 직접 골라서 사 준 차를 이대로 도로 위에 버려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대표님을 뒤따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얼른 가시죠, 대표님. 아, 그리고 표를 구매하셔야 하는데 아마 이 돈이면 충분하실 겁니다.”
성훈이 지갑에서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도운에게 건넸다. 현금이라면 도운도 충분히 있지만 전부 오만 원권이라 나름 챙겨 준 건데, 도운의 표정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저는 대표님께서 혼자서도 지하철을 잘 타서 약속 장소에 잘 도착하실 거라 믿습니다. 뭐든 잘하시는 분이잖아요! 그럼, 조금 있다가 뵙겠습니다.”
지하철 출입구 앞까지만 데려다준 성훈의 인사에 대꾸도 없이 도운은 커다란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천 원짜리 지폐를 꽉 쥐었다.
“아셨죠? 일회용 기계! 돈 넣으시고, 목적지 청담동 선택이요!”
뒤에서 걱정이 되어 외치는 성훈의 당부에도 도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일회용 카드 기계…… 목적지…… 돈 넣고…… 청담동 누르고.”
그러니까.
그곳에 자신의 운명에 닿을 어떠한 연(緣)의 끈이 놓여 있는지는 전혀, 모른 채로.
* * *
‘몇 정거장 남았지?’
노선표를 확인해 보니, 세 정거장 정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청심환을 먹어서인지 조금 마음이 안정되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면접이라고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였더니 슬그머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음…… 졸면 안 되는데…….’
속으로는 그리 말하면서도 서서히 감기는 눈을 이겨 낼 도리가 없었다. 결국, 서서 깜빡 졸아 버린 태영이 갑자기 다리에 힘이 확 풀려 주저앉을 뻔하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아함, 너무 피곤하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잠에서 깨기 위해 손잡이를 쥐고 있던 손으로 뺨을 가볍게 쳐 내던 그때였다.
“……!”
엉덩이 쪽을 누군가가 투박한 손길로 만지작거리는 게 느껴진 것은.
처음에는 실수일지 몰라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실수로 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주물럭거리는 것이 확실한 불쾌한 느낌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빠른 속도로 연속 세 번이나!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그곳을 노골적으로 바짝 들이밀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잠시 너무 놀란 마음에, 그리고 한편으로는 긴가민가하여 잠자코 있었지만, 더는 그럴 이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 변태 새끼가!”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에 태영은 망설임 없이 몸을 빠르게 돌려 뒤에 서 있는 남자의 등 뒤로 손모가지를 꺾어 버렸다.
* * *
길쭉한 손가락으로 일회용 지하철 카드를 불안하게 매만지고 있는 도운의 주위로 여자들의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도운은 이 밀폐되고 갑갑한 공간에서 금방이라도 기절을 해 버릴 만큼 숨이 막혔다. 아까부터 계속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 예수를 믿으라며 고함 빽빽 지르며 자리를 옮기는 아저씨들이 툭툭 치고 가는 것도 너무 싫었다.
‘한국 사람 여기 죄다 모아 놨나, 무슨 인간들이 이렇게나 많아……. 윽, 또 닿았어.’
애매한 시간대라서 사람이 없을 거라던 성훈의 말이 그저 원망스럽기만 했다.
도운은 호흡이 불안정해질 정도로 갑갑했다. 언제나 이랬다. 원하지 않는 누군가의 몸이 함부로 자신의 몸에 닿을 때 나오는 증상.
의사의 말대로 그 순간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 보려고 해도 공포의 시간은 쉽게 달아나 주지 않았다.
그때였다.
자신의 앞에 있던 남자가 급하게 몸을 뒤로 빼더니 ‘에이취!’ 소리와 함께 상당한 침을 도운의 재킷에 뱉어 버리다시피 하고서는 황급히 내려 버린 것은. 그리고 남자가 몸을 뒤로 빼면서 팔꿈치로 명치를 격하게 쳐 버린 바람에 너무 놀라 찍소리도 못 하고 기겁하며 굳어 버린 도운의 시야로…….
“이 변태 새끼가!”
앞에 있던 여자가 느닷없이 불같이 화를 내며 도운의 등 뒤로 손목을 꺾어 버렸다. 호흡 곤란까지 온 무방비한 상태에서 여자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제압당한 도운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여자는 오랫동안 단련해 온 듯한 기술을 쓰며 도운의 등 뒤로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한 짓이 있으면서, 몰라서 물어요? 아저씨가 내 엉덩이를 만졌잖아요!”
누가, 누구 엉덩이를 만져? 도운은 기가 막히고도 어이가 없어서 이 와중에 실소를 터트렸다.
두 사람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한곳에 집중되었다.
“당신 미친 거 아니야? 내가 당신 엉덩이를 왜 만져.”
도운의 목소리는 당황한 기색 없이 지나치게 차분했다. 괜한 사람 잡고 있다는 듯한 뉘앙스라 오히려 태영이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거야 변태니까 만졌겠지!”
“당신이 보기엔, 내가 변태 짓을 해야 할 만큼 만질 여자 엉덩이가 없어 보이나? 함께 경찰서로 가자고. 내가 진짜 변태인지 아닌지 정확하게 증명해 줄 테니까.”
남자는 당당했다.
“어떤 일을 저지를 땐,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거야. 당신은 지금 큰 실수를 했어.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날 망신시킨 대가를 치를 각오는 되어 있겠지? 당신, 명예 훼손으로 고소할 거야.”
도운의 말에 그제야 태영은 피가 거꾸로 솟아오를 듯이 차올랐던 흥분을 조금 가라앉히고 자신에게 맥없이 붙들려 있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는 태영의 손을 가볍게 쳐 버린 도운이 수그러져 있던 몸을 반듯하게 세우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러자 아까는 느끼지 못했던 큰 키의 위압감이 태영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쏟아 냈다.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동자를 피하지도 않는 지나치게 당당한 남자의 반응에 태영은 정말로 자신이 오해를 한 건 아닌지 불안해졌다.
반면, 도운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태영에 언짢은 기분이 몰려와 미간을 확 찌푸렸다.
“이봐.”
불러도 대답 없이 저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여자 때문에 도운의 미간은 더욱 좁혀졌다. 자신의 말을 이렇게 맛있게도 씹어 버리는 여자는 난생처음이라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지, 더군다나 자신을 졸지에 변태로 만들어 버린 이 분수 모를 여자를 어떡하면 더 큰 개망신으로 되갚아 줄 수 있을지, 도운은 이쪽으로는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머리를 열심히 굴려야 했다.
― 이번 역은 삼성, 삼성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This stop is…….
“사람이 말을 하면 좀…….”
“헉!”
자신을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던 여자가 이번에도 역시 느닷없이 기겁하며 놀라더니 몸을 홱 돌려 초인적인 힘으로 사람들의 무리를 뚫고 허둥지둥 지하철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아차, 할 틈도 없이 도망가 버린 여자는 빛의 속도로 우사인 볼트도 울고 갈 만한 안정된 자세를 취하며 달아나고 있었다.
‘그렇게 가 버리면 안 되지!’
여자는 정확하게 ‘맞아요. 제가 뭔가 오해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결국에 도운을 지하철에서 여자 엉덩이나 만지는 변태로 사람들에게 낙인찍어 버린 것이다.
억울하고 분노가 치솟는 마음에 아직 닫히지 않은 문으로 여자를 잡으러 가려고 도운이 몸을 움직인 순간이었다.
옆에 잠자코 서 있던 60대 중반의 아저씨가 도운을 안타깝고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쯧쯧 혀를 차며 올려다본 것은.
“이봐, 총각. 허우대는 멀쩡해서……. 뭐가 부족해서 이런 곳에서 여자 엉덩이를 몰래 만졌어, 그래?”
아저씨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야속하게도 문은 닫혀 버렸고, 졸지에 여자 엉덩이에 환장한 허우대만 멀쩡한 변태 신세가 되어 버린 도운은 다음 정거장에 도착해서 문이 열릴 때까지 붉게 타올라 버린 얼굴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얼굴을 더 깊숙하게 숙이고 싶었지만, 이놈의 큰 키 때문에 아무리 숙여도 사람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큰 키와 넓은 어깨를 끔찍하게 원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