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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 * *





“후우…….”

무슨 정신으로 면접을 봤는지 태영은 아직도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 상태였다.

명찰을 떼서 담당 직원에게 건네준 후 면접실을 빠져나오자 앞에 익숙하고도 반가운 얼굴을 한 석현이 서 있었다.

“선배!”

“면접, 잘 본 거 같아?”

석현이 손에 들고 있던 음료를 태영에게 넌지시 건네며 다정하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사실, 면접을 보는 내내 자려고 누운 머리맡 위에서 윙윙 떠도는 모기처럼 지하철의 그가 윙윙 떠돌았다. 면접관이 물어본 질문에 엉뚱한 것을 대답하기도 했고, 면접 중간마다 연거푸 한숨을 내뱉기도 했다. 한마디로 면접을 쫄딱 망쳐 버린 것이다.

“무슨 대답이 그렇게 미적지근해? 너답지 않게. 호탕하고 씩씩한 이태영 아니었나?”

면접을 보러 오기 전에 있었던 지하철 변태 사건을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라 태영이 멋쩍게 웃어 보이며 음료 캔을 뜯어 시원스럽게 들이켰다. 온몸이 축 처질만큼 났던 갈증이 그나마 조금 해결되는 기분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볼 땐, 너 붙었어. 세상에 우리 학과 수석으로 졸업한 이태영이 아니면 이 쇼핑몰을 누가 지킬 수 있겠어?”

선배의 과도한 위로에 태영이 실없이 핏, 웃어 버렸다.

“점심 안 먹었지?”

“네. 아직이요. 선배도 아직 안 드셨어요?”

“응. 너랑 먹으려고 안 먹었지. 가자. 선배가 면접 합격 기념으로다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선배, 너무 앞서가시는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떨어지면 제 상심 어떡하라고.”

“그 상심, 내가 책임지지!”

석현이 자신의 든든한 가슴을 탕탕 치며 호기롭게 말했다.

“네에?”

“너 면접 떨어지면 내 월급 반띵 해서 회사 다니게 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진짜요?”

“당연하지!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난 네가 합격할 거라고 확신하거든. 그러니까 괜한 걱정에 힘 빼지 마.”

“감사합니다, 선배. 저 이렇게 잘되라고 응원해 주시고, 또 제가 잘될 거라고 믿어도 주시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석현이 손을 뻗어 태영의 볼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꼬집었다.

“감사하면 이제 진짜 가자. 정말 배고파 죽겠다.”

“네! 근데 지금 보니까 선배 너무 멋있어요.”

까만 슈트 차림에 무전기를 끼고 있는 훤칠한 석현의 모습에 태영이 감탄을 쏟아부었다. 검은색 슈트가 너무 잘 어울렸다.

“자식. 너랑 내가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이제야 좀 알아보냐? 나 멋있는 거?”

“누가 매일 멋있다고 했나요? 지금 보니까, 지금 상태가 멋있으시다는 거지.”

“기왕 칭찬하는 거 매일 멋있다고 해 주면 좀 좋지 않겠어? 아무튼 너는 솔직해도 너무 솔직해서 탈이지, 인마!”

석현이 장난기가 다분한 얼굴로 태영의 목을 꽉 잡고 헤드록을 걸었다.

“아, 선배! 선배! 여기 학교 아닙니다!”

“내가 너 장소 가리고 이랬어? 우리 선배는 언제나 봐도 멋있다. 세 번 제창!”

엉켜 붙어 있는 두 사람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태영은 창피했다.

“아, 정말. 주변에 사람도 많은데!”

“어? 안 할 거야?”

석현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며 버둥거리는 태영의 목을 더욱 세게 조였다.

“할게요! 해! 우리 선배는 언제나 봐도 멋있다! 멋있다! 멋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되어 쏟아지는 그득한 햇빛 줄기는 익숙한 장난을 치며 멀어져 가는 태영과 석현의 까만 그림자를 집어삼키며 더욱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 * *



석현과 함께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온 태영은 하얀 봉투를 손에 들고 주인집 대문 앞에 섰다.

그동안 풀타임 아르바이트를 해 왔지만, 엄마 병원비와 생활비에 공과금, 대학 학자금을 내고 나니 밀린 석 달 치 월세방값을 다 구하지 못하고, 겨우 한 달 치만 봉투에 담겨 있었다.

“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이러다가 정말 내쫓기는 건 아닌지 몰라…….”

쓰디쓴 한숨을 토해 내며 조심스럽게 주인집 대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고 저녁을 준비하고 계셨는지 앞치마를 두른 주인아주머니가 고개를 빠끔히 내미셨다.

“어, 태영이구나. 무슨 일이야?”

“이거 저희 방세요.”

“으응? 너희 방값 세 달 치 전부 다 들어왔던데, 내 통장으로.”

“네에?”

“박호라는 이름으로 월세 들어왔어. 전화도 왔고. 너희 집 방값이라고.”

“…….”

하얀 봉투를 손에 꼭 쥐고서는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태영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문을 닫았다.

“휴…….”

태영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고서는 자신의 집인 옥탑으로 올라왔다.

노을빛이 그려진 짙은 저녁 그늘 뒤로 병풍 같은 산 아래에 옹골지게 모여 있는 빛나는 건물들이 만들어 낸 도시의 전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 아름다웠던 공간에서 아빠는 태영의 이름을 간절하게 울부짖으며 죽어 갔다. 정성을 다해 차려 놓은 엄마의 맛있는 저녁조차 먹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가야만 했던 아빠.

태영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휴대 전화를 꺼내 ‘박호 아저씨’라고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꾹 눌렀다. 신호는 얼마 가지 않아, 아저씨의 목소리로 바뀌었다.

― 태영이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셨어요?”

― 그럼, 아저씨는 잘 지냈지. 우리 태영이는 잘 지내고 있어?

“네.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오늘은 유명한 쇼핑몰 보안팀 면접도 보고 왔어요.”

― 정말? 꼭 합격할 수 있을 거야! 그 회사에서 너 안 뽑아 가면 큰 손해다! 학교 수석 졸업자에다가 성실하고, 정직하고, 얼굴까지 예쁘고!

박호의 연이어 쏟아져 나오는 칭찬 속에서도 태영은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애꿎은 땅만 바닥으로 툭툭 쳤다.

“아저씨…….”

― 어, 그래. 태영아.

“저희 방값 또 내주셨다고…….”

― …….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태영의 잔잔한 목소리에 박호는 또다시 울컥 솟아오르는 눈물을 목울대로 간신히 끌어 넘겼다. 태영의 아빠이자, 강력계 형사였던 민혁의 동료인 박호는 자신의 사정으로 쉬는 날을 바꿔 준 민혁이 참혹한 참사를 당한 것에 대해 평생 씻지 못할 죄책감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었다.

“하늘에서 아저씨를 볼 때마다, 저희 아빠도 마음이 편치 않으실 거예요.”

― 태영아…….

“저 이제 취업도 하고, 그럼 꼬박꼬박 남부럽지 않은 월급도 들어와서 형편도 더 나아질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저씨. 이제 더는 저희 집 도와주지 않으셔도 돼요. 여태 도와주신 것만 해도 제가 어떻게 갚아 나가야 할지, 너무 막막하고 감사할 따름이니까.”

박호는 결국 자신의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15년 동안 함께했던 동료의 얼굴이, 모두의 기억 속에서는 시나브로 사라져 버린 동료의 얼굴이 이젠 자신에게조차 희미해져 버린 것이 너무 안쓰러워서. 정말 미안해서, 그렇게 박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헤헤. 아직 합격 통지는 못 받았지만, 그래도 합격하겠죠? 아저씨 말대로! 아, 그리고 저희 선배 말대로! 저 성실하고 수석 졸업에 정직하고! 얼굴도 예쁘고! 저 안 뽑으면 진짜 손해죠. 안 그래요? 아저씨?”

― 그럼!

“조만간 찾아뵐게요. 첫 월급 타면 아저씨 좋아하는 한라봉 들고.”

― 그래그래.

씩씩한 태영의 말에 박호는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Chapter 2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 아래,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큰 쇼핑몰을 올려다보던 태영은 설레는 마음에 어깨까지 들썩거리며 미소 지었다.

석현과 박호의 응원대로 회사에 합격한 태영은 속으로 믿음직스러운 보안 요원이 되겠다는 포부를 또 한 번 결심하며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태영아!”

로비에 도착해서 보안팀이 위치한 지하로 가기 위해 비상구 문을 막 열던 태영의 뒤로 석현의 달가운 목소리가 발걸음을 세웠다.

“선배.”

“여기서 너 보니까 몇 배는 더 반가운 것 같다.”

석현의 넉살에 태영이 작게 미소 지었다.

“합격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한다.”

석현이 태영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올려놓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

쑥스러운 태영이 습관처럼 가렵지도 않은 머리를 쓱쓱 긁어 보였다.

“아침은 먹었어?”

“네. 든든하게 먹고 왔습니다.”

“아주 잘했어. 자, 이제 가자.”

석현은 태영이 열려던 비상구 문을 대신 열어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우리 보안팀은 3교대야. 아마 너는 신입이라 중간 조인 12시 출근에 21시 퇴근이 대다수일 거야.”

“아…….”

태영이 설레설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얼버무리자, 석현이 팔꿈치로 태영을 장난스럽게 툭 쳐 보였다.

“긴장 많이 돼? 자식.”

“네. 진짜 너무 긴장돼요. 티 많이 나요?”

석현이 대답 대신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영이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우…….”

“떨 거 없어. 여기 이렇게 든든한 선배님이 계시잖냐.”

말을 이으며 석현이 또 한 번 태영의 목에 팔을 걸었다.

“아, 아 선배! 잠깐만요.”

“자랑스러운 대한대학 경호학과 후배가 겁을 먹고 떨어? 어디, 없어 보이게. 선배들이 그렇게 키웠나? 이태영 후배님?”

“아!”

석현의 이런 행동들이 태영은 싫지 않았다. 때로는 석현의 짓궂은 장난이 지나치게 긴장한 마음을 달래 주는 유일한 위로가 될 때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아직도 긴장하고 있나? 우리 후배.”

“아닙니다! 긴장 다 풀렸습니다!”

우렁찬 태영의 대답에 그제야 놓아준 석현이 흐트러진 태영의 머리를 긴 손가락으로 다듬어 주었다.

“너랑 일하게 돼서 나는 진짜 좋다.”

“…….”

저도, 선배랑 같이 일하게 돼서 정말 좋아요. 그거 모르시죠? 선배가 저한테 얼마나 든든한 사람인지…….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쑥스러운 감정이 그 말을 억눌렀다. 대신 살포시 미소 지은 채 돌아서는 석현을 보며 태영은 소리 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1층으로 내려와 직원 전용 문을 열자, 긴 복도를 사이에 두고 CCTV로 쇼핑몰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큰 보안실과 사무실, 직원 휴게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부장님께 인사 먼저 드리자.”

“네!”

긴장된 마음을 씩씩한 목소리로 억누르며 태영은 석현을 따라 부장실로 들어갔다.

“부장님.”

“어, 강 대리 왔나?”

석현과 태영의 등장에 부장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신문과 안경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