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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사랑을 모르겠다





사랑을 모르겠다.

여태껏 해 왔던 것이 사랑이면서도, 이렇게 이별의 순간을 맞이할 때면 결국 ‘아, 나는 사랑을 모른다.’는 결론을 짓고 만다.

집에서 빠져나와 종훈과의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그동안 그와 함께했던 연애의 연보를 되짚는 것 같았다.

방송국에서 처음 만나 눈인사를 했었을 때, 고백을 받았을 때, 첫 데이트, 첫 키스…….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면 의도적으로 숨겨 두었던 나빴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첫 싸움, 추운 겨울날 오들오들 떨면서 그의 집 앞에서 기다렸던 것…….

오늘은 모처럼 바쁜 날이었다.

종훈을 만나야 했고, 오후에는 졸업한 대학교에서 선배 신분으로 하는 특강이 잡혀 있었다.

약속 시간은 세 시, 학교 측에서 와 달라 한 시간은 다섯 시.

종훈이 있는 방송국과 학교는 꽤 멀었지만 늦지는 않을 것이다. 종훈과의 이별은 빨리 끝날 테니까.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그러한 이별을 많이 경험했기도 했고.

취향인지 몰라도 윤슬은 쓸데없는 말이 많지 않으며, 맺고 끊음이 분명한 남자만 만나 왔다. 그런 남자와의 이별은 늘 놀라울 만큼 간단했다. 헤어지자, 그러면 그냥 끝이었다.

그중 한 명 정도는 지저분하게 매달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너무나 간단히 그동안의 연애가 정리되었다. 자신과의 이별을 손꼽아 기다린 건가 싶을 만큼.



방송국 앞 카페.

데이트를 할 때면 바쁜 종훈을 배려한답시고 늘 이 카페에서 만났다. 특별한 것 없는 인테리어에 커피도 맛없고, 그렇다고 케이크가 맛있지도 않은 이 카페를 참 많이도 왔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종훈이 보였다.

“뭐 시킬래?”

“아니. 금방 들어가 봐야 해.”

“그래…….”

맛없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주지 않았다. 윤슬아, 우리 그만하자. 그는 짧게 말했다.

그래, 그러자. 이미 예상한 이별이기에 그를 붙잡거나 이유를 따져 물을 생각이 없었다. 더 할 얘기가 없어진 종훈이 카페 밖을 나갔다. 절로 길게 숨이 뿜어져 나왔다.

침대에 눕듯 카페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댔다. 예상했던 이별이었지만 어쩐지 허한 느낌은 지울 수 없다. 이렇게도 빨리 끝날 것을 무엇을 위해 질질 끌어 왔나.

눈을 꾹 감았다. 잠깐만, 잠깐 쉬었다 가자.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이였다. 윤슬이 새로 집필을 시작한 최근 몇 달 동안은 거의 사귀는 사이라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종훈에게 사귀는 사람이 있느냐 물어본다면 그는 머뭇거렸을 것이다. 그건 윤슬도 마찬가지다. 이게 대체 사귀는 사이일까, 싶은 관계. 그런 미지근한 관계가 오늘부로 끝났다.

많은 생각이 스쳤다. 같이 일하는 민정은 윤슬의 일상이 꼭 시트콤 같다 했지만 지금은 정통 로맨스였다.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어젯밤 단단히 준비한 덕인지 흐르지는 않았다.

이유 모를 눈물은 흘리지 않는 것이 낫다. 별 미련도 없으면서 흘리는 눈물은 왜인지 아깝게 느껴진다.

“어?”

1분쯤 지났다 생각하고 눈을 뜨자 앞에 사람이 보였다. 종훈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자리에 신문을 쫙 펴 들고 앉아 있는 남자.

혹시 미련이 남아 돌아온 종훈인가, 했지만 종훈은 아니었다. 종훈은 다리 라인을 드러내는 바지를 입지 않는다. 펄럭, 소리를 내며 신문 한 장이 넘어갔다.

상대를 착각했나 보지. 모른 척 일어나려는데 남자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신문을 내렸다.

“안 붙잡아?”

“…….”

“그냥 그렇게 헤어지는 건가?”

현민이었다. 신문을 내린 그의 얼굴에 햇빛이 옅게 스쳤다. 보고 있던 신문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현민이 윤슬을 봤다.

여기서 현민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제 앞에 떳떳하게 나타나 말을 걸 줄은 더욱 몰랐고.

짧게 서로 눈이 마주쳤지만 이내 윤슬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가 또 어떤 말을 꺼낼지 두려워진 윤슬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이면 이때……. 민정의 말처럼 어쩌면 제 인생은 정말 시트콤일지도 모른다.

“구윤슬, 오랜만.”

오랜만은 오랜만이지. 쏘아붙이고 싶은 말을 참고 윤슬은 그를 못 본 척 그냥 지나치려 했다.

마치 살아 있는 귀신을 본 것처럼. 상대는 나를 알아보지만 나는 상대를 볼 수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지나가려 했다.

여전히 커다란 그의 손에 손목이 붙잡히기 전까진.

어깨에 대충 걸쳐 놓은 가방이 툭 떨어졌다. 윤슬이 가만히 있자 현민이 몸을 숙여 떨어진 가방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충격적인가. 나는 조금 예상했었는데. 좁은 한국 땅에서 언젠가 만나지 않을까, 하고.”

뻔뻔하게만 들리는 그의 말에 윤슬이 현민을 돌아봤다. 그의 말대로 윤슬도 예상했었다.

언젠가 만나지 않을까. 그는 드라마를 만들고, 자기는 드라마를 쓰고 있으니 언젠가 한 번쯤은 만나지 않을까 했었다.

그렇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길 원하지 않았다. 이렇게 현민과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그와 말을 섞을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더구나 윤슬은 방금 전 종훈과 이별을 한 사람이었다. 이별만으로도 버거운데 현민까지 제 눈앞에 데려다 놓을 필요까지 있었나.

신을 믿진 않지만 이 순간만큼은 신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하루에 이런 큰 시련을 두 번씩이나.

“구윤슬.”

“누구세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하니 현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나 우현민, 네 첫…….”

그의 말을 끊고 윤슬은 현민 손에 들린 가방을 낚아챘다.

“아, 착각하셨나 본데 저는 구윤슬 아니에요.”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는지 현민이 황당하단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 잡힌 손목에서 아까보다 더 센 압력이 느껴졌다.

“이렇게 생긴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뿐일 것 같은데.”

쉽게 단정 짓는 그에게 한 방 먹이고 싶었다.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모르지만 매번 자신이 맞다 생각하는 그도 틀릴 때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쌍둥이라 가끔 겪는 일이긴 한데……. 저희 언니랑 헷갈리신 거 같네요.”

그래도 글로 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고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어색한 미소를 씩 보이자 현민이 픽 웃었다. 그래요? 짙은 눈썹이 다 알고 있다는 듯 묘하게 휘었다.

역시 쌍둥이란 설정은 너무 막장이었나. 현민이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윤슬에게 내밀었다.

“그럼 언니 번호 좀 알려 줘요. 오랜만에 목소리라도 좀 듣게.”

“아……. 그게…….”

“나쁜 사람 아니니까 걱정 말고. 나 예전 구윤슬 남…….”

“……여기요!”

핸드폰에 번호를 빠르게 입력했다. 결국 누른 건 제 번호였다. 끝 번호를 하나 바꿔야지 생각하긴 했는데 저도 모르게 익숙하게 제 번호가 눌러졌다.

아…… 망했다, 진짜. 생각과 함께 일그러지는 얼굴 표정을 들킬까, 윤슬은 나가려는 문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고마워요. 나중에 언니랑 같이 한번 봐요. 내가 위로주라도 살게.”

위로주? 윤슬은 잠깐 갸웃했다. 아, 맞다. 나 방금 헤어졌지. 그걸 현민에게 들켰고. 멍해진 상태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아, 네.”

“꼭 언니랑 같이.”

윤슬의 손등을 툭툭 친 후, 현민은 내려놓은 신문을 다시 들었다. 윤슬은 혹시나 그가 자신을 다시 붙잡을까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빠져나갔다.

카페 앞 횡단보도에 섰을 때, 가방에서 전화가 울렸다. 슬쩍 돌아본 카페 안에는 현민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고 있었다.



* * *



객석은 가득 차지 않았을지언정, 돌아가는 학생들의 만족도는 높았다. 생각보다 예쁜 윤슬의 외모도 한몫한 것 같았다.

생글생글 웃으며 사진도 찍고 사인까지 하고 나와서 윤슬을 곧바로 중얼거렸다. 마지막 질문은 받지 말 걸 그랬다.

‘작가님 최근 드라마가 왜 망한 것 같으세요?’

웃으며 넘기긴 했지만 윤슬에겐 꽤 큰 대미지를 주는 아픈 질문이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윤슬은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는 현민에게 걸려 온 부재중 전화 기록이 선명히 찍혀 있었다. 모른 척 인터넷을 켜고, 그녀는 바로 자신의 드라마 팬 게시판을 열었다.

“시청률이 좀 안 나와서 그렇지, 드라마 자체는 괜찮았어. 드라마 끝까지 본 사람들은 아직까지…….”

게시판엔 온통 광고 글뿐이었다. 다들 새드 엔딩으로 끝난 드라마로 인해 끙끙 앓고 있을 줄 알았는데 윤슬이 틀렸다.

4프로로 막을 내린 그녀의 드라마를 사람들은 모두 잊었다. 제목을 읽기만 해도 낯 뜨거워지는 성인용품 광고들이 게시판에 가득했다.

“어우, 진짜!”

핸드폰을 조수석에 던지고 윤슬은 핸들 위로 머리를 박았다. 때마침 조수석에 던져 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머리는 그대로 핸들 위에 둔 채 손만 뻗어 더듬더듬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방송국이나 제작사 전화일지 몰라 낯선 번호지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어, 받네.

익숙한 목소리에 윤슬이 핸드폰을 다시 바라봤다. 번호는 몰라도 이 목소리는 알았다. 이대로 그냥 끊어 버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그가 더 빨랐다.

― 나야.

현민이다. 이름을 듣지 않았는데도 단박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려 버렸다. 동시에 낮에 보았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 오늘 우연히 네 동생을 만났어.

나긋하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윤슬은 미간을 좁히고 창밖을 바라봤다. 하필 차를 댄 곳이 현민과 첫 키스를 한 주차장이었다.

― 너랑 정말 많이 닮았더라. 아, 쌍둥이니까 당연한 건가.

“…….”

― 동생이랑 같이 한번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윤슬은 차가운 차창에 머리를 기댔다.

“내가 왜 그래야 해?”

― 약속했거든.

“무슨 약속?”

― 네 동생한테 위로주 사 주기로.

그게 무슨 약속이냐 소리칠 뻔했다. 그냥 현민이 예의상 한 말에 알겠다 답한 것이 다였다.

어떻게 그것이 약속이 된단 말인가. 따져 묻고 싶었으나 낮에 한 거짓말 때문에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 언제가 좋아?

“아, 내가 나중에…….”

― 토요일 저녁 여섯 시 어때?

낮에 했던 것처럼 알겠단 답이 새어 나왔다. 뱉고 나서 곧바로 후회하며 차창에 머리를 쿵쿵 박았지만 이미 늦었다. 만족스러운지 현민이 내는 엷은 웃음소리와 함께 통화는 끝난 뒤였다.

“아, 정말 바보 같아…….”

스스로에게 짜증이 치솟았지만 이제 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이미 알겠다고 해 버렸는걸. 핸드폰을 다시 조수석에 던져두고 윤슬은 차 밖으로 나왔다.

본관 뒤편 주차장 벤치. 세월 탓에 많이 낡은 그 벤치 앞에 서자 현민과 함께했던 기억들이 몰려왔다.

어색하게 벤치 끝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부터 첫 키스, 그리고 이별의 그 순간까지. 꼭꼭 숨겨 두었던 기억들이 누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동시에 터져 나왔다.

처음 사랑다운 사랑을 시작한 건 스물두 살. 현민과 처음 만난 건 그 전해의 늦여름.

새카맣게 그을린 피부에 머리카락 길이가 채 손가락 두 마디를 넘지 않던 그는 이제 막 제대를 한 복학생이었다.

첫 만남은 교양 수업에서였다. 우연히 같이 조를 지어 발표하게 되고 그 후 아는 사람들이 겹쳐 편하게 연락하며 지냈다.

‘네가 현민 선배랑 친하니까 하는 소린데 그 선배 진짜 못됐더라. 지난번에 유미가 몰래 사물함에 초콜릿 갖다 놨더니 바로 찾아와서 돌려주더라니까? 자긴 이런 거 받을 수 없다면서.’

‘……현민 선배가?’

‘응. 초콜릿 같은 건 좀 받아 줘도 되지 않아? 사귀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근데 현민 선배 여자한텐 작은 거 하나도 안 받는대. 괜히 오해 사기 싫다나.’

수희의 이야기를 들은 그날 밤, 윤슬은 홀로 침대에 누워 밤새 뒤척였다.

윤슬이 준 초콜릿을 현민은 받았었다. 과자도, 캔 커피도 받았다. 그녀가 뭔가를 줄 때 현민은 거절하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다음엔 자기가 사 주겠다고까지 했는데…….

별거 아닌 일이지만 그가 자신을 다른 여자와 다르게 대하는 것 하나만으로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그게 어찌나 좋던지.

윤슬에겐 스물한 살의 겨울은 현민이 제게 주었던 의미 모를 눈빛들과 말들의 뜻을 파헤치느라 밤잠을 설친 기억뿐이었다.

푸후, 마치 담배를 피우는 것처럼 밤공기를 깊게 들이켰다 뱉었다. 홀린 듯 손끝으로 벤치를 매만졌다.

벤치는 자신의 손이 닿으면 금방 바스라질 것처럼 생겨서는 꽤나 탄탄했다. 앞으로 10년은 더 여기 있을 듯 보였다.

10년도 더 넘게 이곳에 제 추억을 머금은 벤치가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니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 * *



집으로 돌아와서 윤슬은 곧장 제 동생이 있는 방문을 열었다.

“나와 봐, 구재형.”

그녀의 말에 재형이 얼굴을 찌푸렸다.

“내가 취업 성공하면 바로 집 구해서 나간다, 진짜.”

궁시렁거리며 재형이 거실로 나왔다.

“왜!”

“너 어디 가서 나 좀 닮았단 소리 듣지 않아?”

“……뭐? 누가 그딴 소리를 지껄이고 다녀. 가서 전해. 나한테 걸리면 진짜 뼈도 못……. 아, 뭐 하는 거야!”

“가만히 있어 봐.”

윤슬은 자신의 파운데이션을 재형의 얼굴에 치덕치덕 발랐다.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재형이 그녀의 손길을 피하자, 윤슬이 제법 무서운 표정을 하고 말했다.

“너 다음 달부터 생활비랑 월세 받는다?”

“아, 진짜……. 치사하게!”

“그럼 가만히 있어.”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대충 아이라인을 그렸다. 그래도 영 제 얼굴 같지는 않았다. 립스틱을 바르면 좀 나아지려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화장을 하면 할수록 자신과 닮기는커녕 우람한 트랜스젠더처럼 보이는 재형을 보고 윤슬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뭐야! 왜 이러는 건데? 뭐 잘못 잡쉈어?”

“……아니. 나랑 닮은 사람이 필요해.”

“엑? 왜? 둘이 손잡고 지구 멸망시키고 우주 정복이라도 하려고?”

윤슬이 테이블 위에 쏟아진 자신의 물건 중 눈썹 칼을 잡아 쥐었다.

“조용히 해. 얼굴에 있는 털 다 밀어 버리기 전에.”

제 누나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재형이 조용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그의 비명이 들렸지만 윤슬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아, 저 자식은 왜 남자로 태어났을까. 갑자기 녀석에게 Y 유전자를 준 아빠가 원망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