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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실패의 여파
골목이 어둠 속에 어슴푸레 잠긴 밤. 호프집에서 뛰쳐나온 윤슬은 곧바로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 사이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술에 취해 토한 것은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던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많이 마신 탓일까. 먹은 것과 마신 것을 모두 게워 내도 속이 편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소매로 입을 닦으려다 멈칫했다. 윤슬이 입고 있는, 제 덩치보다 큰 점퍼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컴퓨터공학과 남학생의 것이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허세는.”
“혼내려고 나온 거면 그냥 들어가요. 나 진짜 속 안 좋아서 죽을 것 같으니까.”
뒤에서 드리워진 그림자는 곧바로 윤슬의 등 위로 내려앉았다.
“괜찮아?”
윤슬의 뒤에 앉아서 현민은 그녀의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토하는 사람 등을 처음 두드려 보는 것이 분명했다. 우는 아기 재우듯 토닥거리는 손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더 세게 두드려 줘요.”
“세게 하면 아프잖아.”
“지금이 더 죽을 것 같으니까 그냥……. 욱……!”
윤슬이 벽을 붙잡고 다시 또 게워 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자괴감도 함께. 맙소사, 구윤슬, 맙소사.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창피함에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등을 보이고 있는 윤슬에게 현민이 말했다.
“구윤슬.”
“선배!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나 지금 엄청 창피하니…….”
“사귀자, 우리.”
꿈이었다, 꿈. 잠에서 깬 윤슬은 한참이나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이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10년 전 일이 아직도 이리 생생할 필요가 있나?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던데. 제 무의식 속에 현민의 그 고백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거야, 대체.
그래도 현민에게 고백을 듣고 꿈이 끝나 버려 다행이었다. 그 멋없는 고백에 바로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던 것까지 꿈에 나왔다면 현민을 참 좋아했던 자신이 떠올라 더 힘들 뻔했다.
“그 고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아마.”
현민이 제게 먼저 마음 표현을 한 것은. 윤슬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사랑을 경제 논리로 해석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현민과의 연애를 설명하기엔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다.
100을 주고 20을 돌려받았다. 그래서 윤슬은 늘 80만큼 부족함을 느꼈다.
원래 성격이 그래서, 표현이 서툴러서, 제 마음을 달래려고 여러 이유들을 덧붙이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다 매번 저 스스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서글퍼져서 헤어지자 말했다.
‘그래.’
담담히 말하는 현민의 머리를 가방으로 내리쳤다.
‘안 붙잡아?’
현민에게 어제 들었던 그 문장은 자신이 10년 전에 그에게 울며 한 말이었다.
박박 지워 없애진 못해도 그 기억들이 꽤나 흐릿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꿈 때문에 선명하게 첫사랑의 시작과 끝이 떠올라 버렸다.
“작가님! 커피 사 왔어요.”
노크도 없이 민정이 방문을 열었다. 윤슬의 집은 그녀와 재형이 함께 사는 집이기도 했고, 그녀의 작업실이기도 했다.
다른 작가들처럼 작업실을 따로 만들면 좋겠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글을 쓸 때 장소에 별 구애를 받지 않는 타입이라 특별히 필요하단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빈손으로 오던 민정이 윤슬이 좋아하는 카페의 마크가 새겨진 종이컵을 흔들었다. 침대 옆 책상에 컵을 내려놓고 민정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던 윤슬이 민정을 봤다.
“왜?”
“아니, 어제 많이 울었나 해서요.”
“안 울었어.”
“그래, 그런 것 같네. 언니 울고 나면 눈 이렇게 띵띵 붓는데 오늘은 멀쩡하네요.”
손을 눈가로 가져다 대며 민정이 과장해서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윤슬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엔 대본 쓰다 슬픈 장면에서 꺽꺽대고 울 정도로 눈물이 많으면서 어떻게 헤어질 땐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려요?”
“말했잖아. 남자 때문에 흘릴 눈물은 첫사랑 때 다 쏟았다고.”
윤슬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 이불을 대충 정리했다. 컵을 들고 나오자 그 뒤를 민정이 쫄래쫄래 쫓았다.
“정말 그냥 그렇게 끝인 거예요? 종훈 오빠가 헤어지자 말하고, 언니는 알겠다 말하고……. 그냥 그렇게 끝?”
“그럼 거기에 뭐가 더 있어야 해?”
“대충 헤어지자고 겁주면 언니도 잘못했다 싹싹 빌고…….”
“왜?”
당당한 윤슬의 말투에 민정이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몰라서 묻나, 윤슬의 얼굴을 살피는데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다.
“이번 드라마 하면서 언니 정말 신경질적이었잖아요. 내가 언니를 정말 좋아하긴 하지만, 나 이번엔 진짜 보조 작가고 뭐고 그냥 때려 치고 싶었다니까?”
“그건…….”
“그래, 그건 시청률이 잘 안 나와서 그랬다 쳐. 그런데 언니, 종훈 오빠 진짜 사랑한 건 맞아요? 뭐 그냥 남매처럼 지냈잖아, 두 사람!”
말하면서 열이 받았는지 침까지 튀기며 하는 민정의 말들이 모두 맞았다. 종훈은 매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연애인지를 물었고, 윤슬은 그때마다 그를 꼭 안아 주곤 했다.
대답을 피하고 싶어서, 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연인인지를 잊을 것 같아서. 자신도, 종훈도.
첫사랑의 실패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적당히 사랑할 것, 사랑도 하나의 계약이니 절대 손해 보지 말 것, 헤어질 때 구질구질해지지 말 것.
나름 그 지침들을 바르게 지키며 연애를 해 왔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자신은 사랑을 잘 모르겠고, 또 어려웠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번 이별도 결국 윤슬의 탓이었다. 그랬다. 또 실패다. 매번 이렇게 사랑이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보면 첫사랑을 통해 배운 것이 모두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때 실패한 여파가 아직도 이렇게 자신을 괴롭힐 줄이야.
지금이라도 현민의 멱살을 잡고 따져 볼까. 너 때문에 내 사랑의 역사가 우중충해졌다고.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이제 와 그를 탓해 봤자 자신만 더 구차해질 뿐이다. 커피가 담긴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윤슬이 길게 숨을 뱉었다.
“아, 방 피디한테 연락 왔어요.”
“정말? 뭐라고?”
“이번에 안윤숙 작가랑 드라마 들어간대요.”
방 피디는 윤슬의 첫 작품을 함께한 피디였다. 연출력은 그렇게 뛰어나진 않지만 작가가 원하는 방향대로는 잘 움직여 주었다.
윤슬과 함께 첫 대박을 터트리고 나서, 그 뒤로는 뜰 것 같은 신예 작가와만 일했다. 이 바닥 신예 작가들은 대체로 말을 잘 듣고 덜 까탈스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최근에 같이 한 신예 작가랑 시원하게 말아먹고 나서는 다시 베테랑을 찾는단 이야기가 있어 대본을 보냈건만 자신이 아닌 안윤숙 작가를 택하다니.
“내 글 보긴 봤대?”
“……네.”
“나랑 왜 안 한대?”
“소재는 괜찮은데 공감이 잘……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공감이 되지 않는다. 최악의 평가였다. 민정의 앞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제작사들이나 방송국 모두 제 작품을 외면하고 있다.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별로 좋지 않은 소식에 한숨을 뿌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벽에 붙은 달력이 보였다. 대본에 관한 스케줄과 방송국 관계자 연락처들이 난잡하게 적혀 있었다.
마침 윤슬의 눈에 토요일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토요일, 글자만 봤는데도 현민이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저 혼자 통보한 여섯 시에 만나자는 약속도 함께.
볼펜을 쥐고 일어나 그가 만나자 말한 그 날짜에 죽죽 X 표시를 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 위에 몇 번 더 표시를 했다.
“그날 왜요?”
“날짜가 좀 재수 없어.”
따지고 보면 자신의 대본이 인기가 없는 것이 현민의 탓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추면 그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곤 할 수 없다.
윤슬은 첫사랑을 실패했고, 사랑도 제대로 모른다. 그러니 사랑 이야기가 전부인 드라마가 잘 써지지 않고, 공감도 불러일으키질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모든 화살을 현민에게로 돌리자 무겁게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민정이 윤슬을 보고 서 있었다. 윤슬은 다 식은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나 씻을게.”
나갈 일 없으면 잘 씻지도 않는 윤슬이 욕실로 쑥 들어가자 민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청결한 척하는 건 아마도 이별 후유증이려나.
민정은 윤슬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가만히 봤다.
* * *
토요일 아침. 윤슬은 우선 핸드폰을 껐다. 그리고 이불을 얼굴 끝까지 덮고 눈을 꼭 감았다.
늦게까지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에 어제 밤새 재미없는 영화도 꾸역꾸역 보았는데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알람도 울리지 않았고,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귀찮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토요일 아침 눈이 절로 번쩍 뜨여 버렸다.
꺼진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려 놓고 윤슬은 무거운 눈을 감았다. 현민에게서 전화가 오면 곧바로 전원이 꺼져 있다는 딱딱한 메시지가 들릴 것이다.
모든 것에 너그러웠던 현민은 유일하게 연락에는 민감했다. 전화를 잘 받지 않거나, 문자 메시지에 답이 오랫동안 없으면 꼭 그만의 무서운 표정으로 윤슬을 바라봤었다.
그럴 때면 윤슬은 그의 팔을 붙잡고 헤헤 웃었다. 뭐가 좋아서 웃어. 그가 무뚝뚝하게 말하며 이마를 툭 밀면, 다시 또 헤헤 웃었다.
현민이 그녀를 따라 살짝 미소를 짓는 것 같을 때 윤슬은 자신과 연락이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지만 윤슬은 옅은 쾌감이 일곤 했었다. 늘 마음을 표현하지 않던 이 남자가 날 사랑하긴 하나 보네, 하고.
깊은 옛 기억까지 떠오르자 윤슬은 이불을 발로 차며 일어났다. 이게 문제다.
그와 재회 후, 윤슬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옛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잊었다 생각했던 제게 민망하게도 끊임없이 그와의 일들이 불쑥불쑥 추억이란 옷을 입고 튀어나왔다. 빛바랜 줄 알았던 그 기억들은 꽤나 선명한 색까지 띠고 있었다.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잡생각은 그만두고 잠이나 자자. 흰 벽을 가만 보다가 예전 일이 또 떠올라 버렸다.
뭔 이유에서인지 누군가에게 들었던 조악한 벽 귀신 이야기를 현민에게 해 주었다. 오히려 말하는 자신이 더 무서워하고 이야기를 듣던 현민은 늘 그렇듯 심드렁했다.
그런데 그 뒤로 윤슬과 같이 침대에 누울 때면 현민은 늘 벽 쪽에서 잤다. 귀신이 너 잡아가면 안 되잖아, 하면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쁜…….
“아, 미쳤나 봐. 정말!”
분명 그와 연애하는 것이 힘들어 헤어지자고 한 것인데 떠오르는 추억들은 다 이렇게 밝은색을 띠고 있는 것들이다.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좋았던 추억 때문에 그를 옹호하게 되어 버린다.
구윤슬, 너 뭐야. 다시 만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소스라치게 놀라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네라도 한 바퀴 뛰어야지 안 되겠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아침 여덟 시 십 분이었다.
* * *
동네를 몇 바퀴 뛰고, 땀을 대충 말린 채 쇼핑을 했다. 잡히는 대로 샀다. 카드를 긁을 때 나오는 소리가 경쾌했다.
오늘 아침 눈이 일찍 떠지고, 또 잘 기억도 나지 않던 옛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미련이 아니라 스트레스. 우현민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
차에 올라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모두 모아 높이 묶었다. 뒷좌석에는 방금 사 온 물건들이 가득했다.
다음 달에 날아올 카드 명세서가 조금 두렵긴 했지만, 괜찮다. 방구석에서 빛바랜 첫사랑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궁상떠는 것보단 다음 달 조금 힘들게 사는 것이 훨씬 나았다.
꾸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에 윤슬이 안전벨트를 매던 손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 일어나 먹은 것이라고는 쇼핑하며 마신 스무디 한 잔이 전부였다.
시동을 걸려다 말고 주위를 살피니 베이커리 카페가 보였다.
종훈과 자주 찾던 곳이었다. 방송국과 자신의 집 중간에 위치해서 종종 저녁을 거를 때면 같이 이곳에 와서 빵과 샐러드,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무슨 구 남친의 날이기라도 한 건지, 겨우 현민을 머릿속에서 떨쳐 냈더니 이젠 종훈이 와서 괴롭힌다.
딸랑. 안으로 들어가니 빵 냄새가 훅 끼쳤다. 잊고 있던 허기에 침이 고였다.
주문을 하려는데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윤슬은 허리를 꺾어 테이블 아래에 있는 남자의 바지와 신발을 살폈다.
운동화를 뒤로 꺾어 신은 것이나, 80년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통 큰 바지를 보니 확신이 섰다. 종훈이다. 익숙한 뒤태의 주인은 종훈이 분명했다.
그 앞에는 예쁘장한 여자가 연신 미소 띤 얼굴로 종훈을 보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문 여자의 입가를 종훈이 재빠르게 휴지로 닦았다.
그와의 헤어짐이 자신의 탓이라던 민정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지만 결국 모든 이별에 일방적인 잘못이란 없다.
자신은 소홀했고, 그 틈에 종훈에겐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보단 안도감이 들었다. 이별이 모두 제 탓이라는 죄책감을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받아 들고 윤슬은 카페를 빠져나왔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종소리가 울렸다. 종훈의 인생에서 자신의 퇴장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딸랑. 안녕, 정종훈.
* * *
일요일 핸드폰을 켰을 때, 현민의 번호로 몇 개의 부재중 전화가 찍혔다. 윤슬은 모두 무시하고 심지어 부재중 전화 목록에서 그 번호들을 삭제시켜 버렸다.
더 이상 현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생각하는 것도 곧 그를 떠올리는 것이었지만.
“언니. 어제 방송국에서 전화 왔어요!”
“진짜? 어디? MBS? SBC?”
“TVS요! 근데 언니, 그거 알죠? 요즘 TVS에서 유능한 드라마 감독들 스카우트하는 거.”
“아, TVS…….”
나쁘지 않았다. 케이블 채널이라고 하지만 요즘 공중파랑 케이블이 큰 의미가 없어지기도 했고, 오히려 케이블이라 더 자유롭게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공중파에서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순 없었다.
“그래? 약속 잡았어?”
“네. 내일 당장 보자던데요?”
“TVS가 어디에 있더라? 목동이었나, 상암이었나…….”
“아니, 방송국 말고……. 잠실에 어떤 오피스텔로 오라던데요?”
컵에 물을 따르던 윤슬의 손이 멈췄다. 반쯤 따른 물컵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피스텔?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목이 턱 막혔다.
“사기 아냐?”
“아니에요. 전화번호가 방송국이었어요.”
“피디 이름이 뭔데?”
“그건 모르겠고……. 무슨 작가가 전화했는데…….”
검은 가죽 표지의 수첩을 민정이 빠르게 뒤적였다. 어제의 날짜 칸에 작은 글씨로 적힌 이름을 민정이 찬찬히 읽었다.
“이……시아. 이시아 작가라는데요? 아세요?”
“이시아?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왜 작가가 전화했지? 뭐 어쨌든, 오피스텔 주소는 여기 있어요.”
포스트잇에 적힌 주소를 윤슬이 받아 들었다. 이게 여자 글씨냐. 휘갈겨 쓴 글씨를 타박하자 민정이 조용히 웃었다. 언니 글씨도 내 글씨 못지않거든요.
윤슬이 다시 또 컵에 물을 채웠다. 냉장고로 몸을 돌리니 조리법이라고 뭔가를 적어 놓은 제 글씨가 보였다. 민정은 요즘 바른 말만 했다.
* * *
다음 날,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왔지만 모두 허사였다. 고장 난 내비게이션에서는 듣기 싫은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반복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결국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묻고 물어 오피스텔을 찾아갔다.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 것인지, 주차 공간도 없어 속을 끓였다.
첫 만남부터 지각이라니. 민정이 전화번호를 받아 두지 않은 탓에 늦는다고 미리 연락을 하지도 못해 마음이 더 급해졌다.
1204호. 오피스텔 앞에 선 윤슬은 문고리에 대충 비치는 모습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누군가 나오는 발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긴장을 숨기며 재킷 끝을 잡고 매무새를 다듬었다. 인사는 어떻게 할까. 안녕하세요, 아니면 처음 뵙겠습니다. 윤슬이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기다렸어.”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현민이었다.
골목이 어둠 속에 어슴푸레 잠긴 밤. 호프집에서 뛰쳐나온 윤슬은 곧바로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틈 사이로 들어가 쪼그려 앉았다.
술에 취해 토한 것은 대학에 갓 입학한 신입생이던 때를 제외하곤 처음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많이 마신 탓일까. 먹은 것과 마신 것을 모두 게워 내도 속이 편해지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소매로 입을 닦으려다 멈칫했다. 윤슬이 입고 있는, 제 덩치보다 큰 점퍼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컴퓨터공학과 남학생의 것이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허세는.”
“혼내려고 나온 거면 그냥 들어가요. 나 진짜 속 안 좋아서 죽을 것 같으니까.”
뒤에서 드리워진 그림자는 곧바로 윤슬의 등 위로 내려앉았다.
“괜찮아?”
윤슬의 뒤에 앉아서 현민은 그녀의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는 토하는 사람 등을 처음 두드려 보는 것이 분명했다. 우는 아기 재우듯 토닥거리는 손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더 세게 두드려 줘요.”
“세게 하면 아프잖아.”
“지금이 더 죽을 것 같으니까 그냥……. 욱……!”
윤슬이 벽을 붙잡고 다시 또 게워 냈다.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자괴감도 함께. 맙소사, 구윤슬, 맙소사.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다니.
창피함에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등을 보이고 있는 윤슬에게 현민이 말했다.
“구윤슬.”
“선배!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나 지금 엄청 창피하니…….”
“사귀자, 우리.”
꿈이었다, 꿈. 잠에서 깬 윤슬은 한참이나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뻑뻑한 눈을 몇 번 깜박이다 이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10년 전 일이 아직도 이리 생생할 필요가 있나?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던데. 제 무의식 속에 현민의 그 고백이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거야, 대체.
그래도 현민에게 고백을 듣고 꿈이 끝나 버려 다행이었다. 그 멋없는 고백에 바로 활짝 웃으며 알겠다고 답했던 것까지 꿈에 나왔다면 현민을 참 좋아했던 자신이 떠올라 더 힘들 뻔했다.
“그 고백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아마.”
현민이 제게 먼저 마음 표현을 한 것은. 윤슬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사랑을 경제 논리로 해석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현민과의 연애를 설명하기엔 이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없다.
100을 주고 20을 돌려받았다. 그래서 윤슬은 늘 80만큼 부족함을 느꼈다.
원래 성격이 그래서, 표현이 서툴러서, 제 마음을 달래려고 여러 이유들을 덧붙이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다 매번 저 스스로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서글퍼져서 헤어지자 말했다.
‘그래.’
담담히 말하는 현민의 머리를 가방으로 내리쳤다.
‘안 붙잡아?’
현민에게 어제 들었던 그 문장은 자신이 10년 전에 그에게 울며 한 말이었다.
박박 지워 없애진 못해도 그 기억들이 꽤나 흐릿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꿈 때문에 선명하게 첫사랑의 시작과 끝이 떠올라 버렸다.
“작가님! 커피 사 왔어요.”
노크도 없이 민정이 방문을 열었다. 윤슬의 집은 그녀와 재형이 함께 사는 집이기도 했고, 그녀의 작업실이기도 했다.
다른 작가들처럼 작업실을 따로 만들면 좋겠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없었다. 글을 쓸 때 장소에 별 구애를 받지 않는 타입이라 특별히 필요하단 생각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빈손으로 오던 민정이 윤슬이 좋아하는 카페의 마크가 새겨진 종이컵을 흔들었다. 침대 옆 책상에 컵을 내려놓고 민정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핸드폰 시계를 확인하던 윤슬이 민정을 봤다.
“왜?”
“아니, 어제 많이 울었나 해서요.”
“안 울었어.”
“그래, 그런 것 같네. 언니 울고 나면 눈 이렇게 띵띵 붓는데 오늘은 멀쩡하네요.”
손을 눈가로 가져다 대며 민정이 과장해서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닌데. 윤슬은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평소엔 대본 쓰다 슬픈 장면에서 꺽꺽대고 울 정도로 눈물이 많으면서 어떻게 헤어질 땐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려요?”
“말했잖아. 남자 때문에 흘릴 눈물은 첫사랑 때 다 쏟았다고.”
윤슬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 이불을 대충 정리했다. 컵을 들고 나오자 그 뒤를 민정이 쫄래쫄래 쫓았다.
“정말 그냥 그렇게 끝인 거예요? 종훈 오빠가 헤어지자 말하고, 언니는 알겠다 말하고……. 그냥 그렇게 끝?”
“그럼 거기에 뭐가 더 있어야 해?”
“대충 헤어지자고 겁주면 언니도 잘못했다 싹싹 빌고…….”
“왜?”
당당한 윤슬의 말투에 민정이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몰라서 묻나, 윤슬의 얼굴을 살피는데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이다.
“이번 드라마 하면서 언니 정말 신경질적이었잖아요. 내가 언니를 정말 좋아하긴 하지만, 나 이번엔 진짜 보조 작가고 뭐고 그냥 때려 치고 싶었다니까?”
“그건…….”
“그래, 그건 시청률이 잘 안 나와서 그랬다 쳐. 그런데 언니, 종훈 오빠 진짜 사랑한 건 맞아요? 뭐 그냥 남매처럼 지냈잖아, 두 사람!”
말하면서 열이 받았는지 침까지 튀기며 하는 민정의 말들이 모두 맞았다. 종훈은 매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이 연애인지를 물었고, 윤슬은 그때마다 그를 꼭 안아 주곤 했다.
대답을 피하고 싶어서, 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연인인지를 잊을 것 같아서. 자신도, 종훈도.
첫사랑의 실패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적당히 사랑할 것, 사랑도 하나의 계약이니 절대 손해 보지 말 것, 헤어질 때 구질구질해지지 말 것.
나름 그 지침들을 바르게 지키며 연애를 해 왔다 생각했는데 아직도 자신은 사랑을 잘 모르겠고, 또 어려웠다.
부정하고 싶지만 이번 이별도 결국 윤슬의 탓이었다. 그랬다. 또 실패다. 매번 이렇게 사랑이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보면 첫사랑을 통해 배운 것이 모두 잘못된 게 분명했다.
그때 실패한 여파가 아직도 이렇게 자신을 괴롭힐 줄이야.
지금이라도 현민의 멱살을 잡고 따져 볼까. 너 때문에 내 사랑의 역사가 우중충해졌다고.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었다. 이제 와 그를 탓해 봤자 자신만 더 구차해질 뿐이다. 커피가 담긴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윤슬이 길게 숨을 뱉었다.
“아, 방 피디한테 연락 왔어요.”
“정말? 뭐라고?”
“이번에 안윤숙 작가랑 드라마 들어간대요.”
방 피디는 윤슬의 첫 작품을 함께한 피디였다. 연출력은 그렇게 뛰어나진 않지만 작가가 원하는 방향대로는 잘 움직여 주었다.
윤슬과 함께 첫 대박을 터트리고 나서, 그 뒤로는 뜰 것 같은 신예 작가와만 일했다. 이 바닥 신예 작가들은 대체로 말을 잘 듣고 덜 까탈스럽다는 것이 이유였다.
최근에 같이 한 신예 작가랑 시원하게 말아먹고 나서는 다시 베테랑을 찾는단 이야기가 있어 대본을 보냈건만 자신이 아닌 안윤숙 작가를 택하다니.
“내 글 보긴 봤대?”
“……네.”
“나랑 왜 안 한대?”
“소재는 괜찮은데 공감이 잘……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
공감이 되지 않는다. 최악의 평가였다. 민정의 앞이라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제작사들이나 방송국 모두 제 작품을 외면하고 있다. 자존심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별로 좋지 않은 소식에 한숨을 뿌리며 고개를 돌리는데, 벽에 붙은 달력이 보였다. 대본에 관한 스케줄과 방송국 관계자 연락처들이 난잡하게 적혀 있었다.
마침 윤슬의 눈에 토요일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토요일, 글자만 봤는데도 현민이 떠올랐다. 아무렇지 않게 저 혼자 통보한 여섯 시에 만나자는 약속도 함께.
볼펜을 쥐고 일어나 그가 만나자 말한 그 날짜에 죽죽 X 표시를 했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 위에 몇 번 더 표시를 했다.
“그날 왜요?”
“날짜가 좀 재수 없어.”
따지고 보면 자신의 대본이 인기가 없는 것이 현민의 탓은 아니었다. 그러나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억지로 끼워 맞추면 그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곤 할 수 없다.
윤슬은 첫사랑을 실패했고, 사랑도 제대로 모른다. 그러니 사랑 이야기가 전부인 드라마가 잘 써지지 않고, 공감도 불러일으키질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모든 화살을 현민에게로 돌리자 무겁게 가라앉았던 기분이 좀 나아졌다.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민정이 윤슬을 보고 서 있었다. 윤슬은 다 식은 커피를 벌컥 들이켰다.
“나 씻을게.”
나갈 일 없으면 잘 씻지도 않는 윤슬이 욕실로 쑥 들어가자 민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고, 청결한 척하는 건 아마도 이별 후유증이려나.
민정은 윤슬이 들어간 화장실 문을 가만히 봤다.
* * *
토요일 아침. 윤슬은 우선 핸드폰을 껐다. 그리고 이불을 얼굴 끝까지 덮고 눈을 꼭 감았다.
늦게까지 침대에서 자고 싶은 마음에 어제 밤새 재미없는 영화도 꾸역꾸역 보았는데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알람도 울리지 않았고,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귀찮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토요일 아침 눈이 절로 번쩍 뜨여 버렸다.
꺼진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려 놓고 윤슬은 무거운 눈을 감았다. 현민에게서 전화가 오면 곧바로 전원이 꺼져 있다는 딱딱한 메시지가 들릴 것이다.
모든 것에 너그러웠던 현민은 유일하게 연락에는 민감했다. 전화를 잘 받지 않거나, 문자 메시지에 답이 오랫동안 없으면 꼭 그만의 무서운 표정으로 윤슬을 바라봤었다.
그럴 때면 윤슬은 그의 팔을 붙잡고 헤헤 웃었다. 뭐가 좋아서 웃어. 그가 무뚝뚝하게 말하며 이마를 툭 밀면, 다시 또 헤헤 웃었다.
현민이 그녀를 따라 살짝 미소를 짓는 것 같을 때 윤슬은 자신과 연락이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지만 윤슬은 옅은 쾌감이 일곤 했었다. 늘 마음을 표현하지 않던 이 남자가 날 사랑하긴 하나 보네, 하고.
깊은 옛 기억까지 떠오르자 윤슬은 이불을 발로 차며 일어났다. 이게 문제다.
그와 재회 후, 윤슬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옛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잊었다 생각했던 제게 민망하게도 끊임없이 그와의 일들이 불쑥불쑥 추억이란 옷을 입고 튀어나왔다. 빛바랜 줄 알았던 그 기억들은 꽤나 선명한 색까지 띠고 있었다.
벽 쪽으로 몸을 돌렸다. 잡생각은 그만두고 잠이나 자자. 흰 벽을 가만 보다가 예전 일이 또 떠올라 버렸다.
뭔 이유에서인지 누군가에게 들었던 조악한 벽 귀신 이야기를 현민에게 해 주었다. 오히려 말하는 자신이 더 무서워하고 이야기를 듣던 현민은 늘 그렇듯 심드렁했다.
그런데 그 뒤로 윤슬과 같이 침대에 누울 때면 현민은 늘 벽 쪽에서 잤다. 귀신이 너 잡아가면 안 되잖아, 하면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나쁜…….
“아, 미쳤나 봐. 정말!”
분명 그와 연애하는 것이 힘들어 헤어지자고 한 것인데 떠오르는 추억들은 다 이렇게 밝은색을 띠고 있는 것들이다.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좋았던 추억 때문에 그를 옹호하게 되어 버린다.
구윤슬, 너 뭐야. 다시 만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소스라치게 놀라 결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네라도 한 바퀴 뛰어야지 안 되겠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이제 겨우 아침 여덟 시 십 분이었다.
* * *
동네를 몇 바퀴 뛰고, 땀을 대충 말린 채 쇼핑을 했다. 잡히는 대로 샀다. 카드를 긁을 때 나오는 소리가 경쾌했다.
오늘 아침 눈이 일찍 떠지고, 또 잘 기억도 나지 않던 옛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미련이 아니라 스트레스. 우현민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
차에 올라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모두 모아 높이 묶었다. 뒷좌석에는 방금 사 온 물건들이 가득했다.
다음 달에 날아올 카드 명세서가 조금 두렵긴 했지만, 괜찮다. 방구석에서 빛바랜 첫사랑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궁상떠는 것보단 다음 달 조금 힘들게 사는 것이 훨씬 나았다.
꾸르륵. 배에서 나는 소리에 윤슬이 안전벨트를 매던 손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오늘 아침 일어나 먹은 것이라고는 쇼핑하며 마신 스무디 한 잔이 전부였다.
시동을 걸려다 말고 주위를 살피니 베이커리 카페가 보였다.
종훈과 자주 찾던 곳이었다. 방송국과 자신의 집 중간에 위치해서 종종 저녁을 거를 때면 같이 이곳에 와서 빵과 샐러드,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무슨 구 남친의 날이기라도 한 건지, 겨우 현민을 머릿속에서 떨쳐 냈더니 이젠 종훈이 와서 괴롭힌다.
딸랑. 안으로 들어가니 빵 냄새가 훅 끼쳤다. 잊고 있던 허기에 침이 고였다.
주문을 하려는데 익숙한 뒤통수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윤슬은 허리를 꺾어 테이블 아래에 있는 남자의 바지와 신발을 살폈다.
운동화를 뒤로 꺾어 신은 것이나, 80년대에나 유행했을 법한 통 큰 바지를 보니 확신이 섰다. 종훈이다. 익숙한 뒤태의 주인은 종훈이 분명했다.
그 앞에는 예쁘장한 여자가 연신 미소 띤 얼굴로 종훈을 보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문 여자의 입가를 종훈이 재빠르게 휴지로 닦았다.
그와의 헤어짐이 자신의 탓이라던 민정의 말이 떠올랐다. 스스로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었지만 결국 모든 이별에 일방적인 잘못이란 없다.
자신은 소홀했고, 그 틈에 종훈에겐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 이상하게도 화가 나기보단 안도감이 들었다. 이별이 모두 제 탓이라는 죄책감을 조금 덜 수 있을 것 같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받아 들고 윤슬은 카페를 빠져나왔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종소리가 울렸다. 종훈의 인생에서 자신의 퇴장을 알리는 소리 같았다. 딸랑. 안녕, 정종훈.
* * *
일요일 핸드폰을 켰을 때, 현민의 번호로 몇 개의 부재중 전화가 찍혔다. 윤슬은 모두 무시하고 심지어 부재중 전화 목록에서 그 번호들을 삭제시켜 버렸다.
더 이상 현민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 생각하는 것도 곧 그를 떠올리는 것이었지만.
“언니. 어제 방송국에서 전화 왔어요!”
“진짜? 어디? MBS? SBC?”
“TVS요! 근데 언니, 그거 알죠? 요즘 TVS에서 유능한 드라마 감독들 스카우트하는 거.”
“아, TVS…….”
나쁘지 않았다. 케이블 채널이라고 하지만 요즘 공중파랑 케이블이 큰 의미가 없어지기도 했고, 오히려 케이블이라 더 자유롭게 자신이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공중파에서 그 어떤 연락도 오지 않는데 언제까지고 기다릴 순 없었다.
“그래? 약속 잡았어?”
“네. 내일 당장 보자던데요?”
“TVS가 어디에 있더라? 목동이었나, 상암이었나…….”
“아니, 방송국 말고……. 잠실에 어떤 오피스텔로 오라던데요?”
컵에 물을 따르던 윤슬의 손이 멈췄다. 반쯤 따른 물컵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피스텔?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 목이 턱 막혔다.
“사기 아냐?”
“아니에요. 전화번호가 방송국이었어요.”
“피디 이름이 뭔데?”
“그건 모르겠고……. 무슨 작가가 전화했는데…….”
검은 가죽 표지의 수첩을 민정이 빠르게 뒤적였다. 어제의 날짜 칸에 작은 글씨로 적힌 이름을 민정이 찬찬히 읽었다.
“이……시아. 이시아 작가라는데요? 아세요?”
“이시아? 들어 본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왜 작가가 전화했지? 뭐 어쨌든, 오피스텔 주소는 여기 있어요.”
포스트잇에 적힌 주소를 윤슬이 받아 들었다. 이게 여자 글씨냐. 휘갈겨 쓴 글씨를 타박하자 민정이 조용히 웃었다. 언니 글씨도 내 글씨 못지않거든요.
윤슬이 다시 또 컵에 물을 채웠다. 냉장고로 몸을 돌리니 조리법이라고 뭔가를 적어 놓은 제 글씨가 보였다. 민정은 요즘 바른 말만 했다.
* * *
다음 날, 약속 시간보다 이른 시간에 집을 나왔지만 모두 허사였다. 고장 난 내비게이션에서는 듣기 싫은 여자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 경로를 이탈하셨습니다.
반복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결국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묻고 물어 오피스텔을 찾아갔다. 오늘 무슨 날이기라도 한 것인지, 주차 공간도 없어 속을 끓였다.
첫 만남부터 지각이라니. 민정이 전화번호를 받아 두지 않은 탓에 늦는다고 미리 연락을 하지도 못해 마음이 더 급해졌다.
1204호. 오피스텔 앞에 선 윤슬은 문고리에 대충 비치는 모습으로 얼굴을 확인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누군가 나오는 발소리가 안에서 들렸다.
긴장을 숨기며 재킷 끝을 잡고 매무새를 다듬었다. 인사는 어떻게 할까. 안녕하세요, 아니면 처음 뵙겠습니다. 윤슬이 미처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 때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고 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기다렸어.”
문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현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