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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일이건 연애건 싫어
윤슬을 가르친 교수는 작가도 하나의 세일즈맨과 다를 바가 없다 말했었다. 다만 작가는 글을 제작사, 감독, 시청자, 독자들에게 팔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글 좀 쓴다고 제 멋에 취해 자존심 세우면 안 된다고, 사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때는 몇 번이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그런데 교수님, 어쩌죠. 저 이 사람에게는 제 글을 정말로 팔고 싶지 않은데.
“안 오는 줄 알았어. 왔네. 다행히.”
“……알았으면 안 왔겠지.”
“우선 들어와.”
현민은 현관문을 더 활짝 열었다.
그가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윤슬로선 알 길이 없었다. 이대로 그냥 가 버린다면 평생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뭐 때문에 이렇게 자신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를 들어 보자.
윤슬은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아래에 놓인 신발들은 그의 성격을 대변했다. 나란히 줄 지어 있는 그의 신발 옆엔, 더 정갈히 놓인 검은색 힐이 있었다.
눈만 올려 현민을 보니 그는 이미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찔한 검은색 힐 옆에 조심히 신발을 벗어 놓고 그를 뒤따라 들어갔다. 현민이 내려놓은 손님용 실내화는 신지 않았다. 일종의 저항이라면 저항이었다.
이름만 오피스텔일 뿐, 일반 아파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이 두 개에 거실도 꽤 넓었다. 웬만한 아파트에 버금가는 구조였다. 마치 집을 알아보는 사람처럼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현민이 그녀를 소파로 안내했다.
“차 마실래?”
“아니. 길게 안 있을 거야.”
자연스럽게 답한 것과 반대로 온몸은 경직된 상태였다. 부엌으로 가는 현민을 향해 돌린 꼿꼿한 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찬장에서 컵 두 개를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저럴 거면 묻지나 말지. 여전히 제멋대로네.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윤슬은 그냥 입을 닫았다.
지금 그와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제멋대로 굴든 말든, 굳이 싸움을 걸 필요는 없었다.
테이블 위엔 자신이 방송국과 피디들에게 보낸 시놉시스와 대본 뭉텅이가 펼쳐져 있었다. 제가 오기 직전까지 읽고 있었는지 대본집이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대본 표지에 뭔가가 쓰여 있는 것 같아 찬찬히 들여다봤지만 그의 필기체는 도통 알아볼 수가 없다. 뭐라도 읽어 보겠다고 한참 뚫어져라 보는데, 현관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어머! 구 작가님 벌써 오셨어요?”
“응. 방금 전에.”
부엌에서 나오며 현민이 컵 하나를 여자에게 건넸다. 그녀가 검정 하이힐의 주인이란 것은 어려운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윤슬 쪽으로 걸어왔다.
향수를 뿌렸는지 여자가 가까워질수록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아직 이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윤슬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벅였다.
“죄송해요. 본가가 수원인데 어제 급히 다녀오느라고…….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저도 금방 왔어요.”
여자는 현민에게 건네받은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현민이 여자 옆에 앉고, 그녀를 따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동작으로 컵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엔 헝클어져 있는 윤슬의 글들과 두 사람의 컵이 놓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봤다. 누가 뇌의 전원을 꺼 버린 것처럼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이제 설명 좀 해 줄래?”
“우선 얘는 이시아라고……. 작가.”
“아이참, 그렇게 성의 없게 소개시켜 주면 어떻게 해요!”
귀여운 목소리였다. 시아는 웃으며 현민의 팔을 손으로 툭 쳤다. 억지로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원래 목소리가 귀엽고, 행동이 사랑스러운 여자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모습이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윤슬은 다리를 꼬고 귀밑머리를 뒤로 넘겼다.
“애인 소개 하려고 나 부른 건 아니지?”
“아니에요, 작가님!”
“그게 아니면?”
윤슬이 현민을 바라봤다. 이 엿 같은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을 이곳까지 부르고 기어이 이딴 꼴을 보게 만드는 이유. 그리고 그 설명은 시아가 아닌 현민에게 듣고 싶었다.
“드라마, 같이 하자.”
헛,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머리가 복잡해 터질 것 같은 와중에 기가 차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내가? 왜? 왜 너랑?”
원치 않았는데 얼굴색이 붉게 변했다. 열이 확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식히려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우현민, 너 미쳤지?”
“아니.”
“그럼 뭐야?”
‘너’라는 호칭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현민은 평온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들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의 제목 위로 손가락으로 밑줄 그리듯 죽 그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윤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대본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원래 제 것이니 가져가야 했다.
그러나 현민이 조금 더 빨랐다. 윤슬의 낚아채려는 손을 피해 대본을 테이블 위에 다시 놓은 뒤 그는 낮게 말했다.
“앉아. 아직 얘기 안 끝났으니까.”
“…….”
“구성은 다시 짜자. 네 남녀 이야기라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관계나 배경 설정은 아예 다시…….”
“미친놈.”
“……뭐?”
“아, 들었어? 나는 네가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기에 내 목소리는 아예 안 들리는 줄 알았거든.”
윤슬은 현민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도 별로 무섭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대본은 그냥 버리는 셈 치기로 했다. 가방을 들고 돌아서니 시아가 먼저 그녀를 붙잡았다.
“작가님!”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멈추지 않았다. 신발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 뒤를 노려봤다. 어느새 따라온 현민이 제 뒤에 서 있었다.
“나랑 안 하면 이 드라마 이대로 엎어져.”
“너랑은 안 해. 엎어지면 다른 거 하지, 뭐.”
“다른 거? 생각해 둔 건 있고?”
그와 대화를 할 때면 몇 번이고 이렇게 말문이 막혔다. 뭐든 하나에 빠지면 그 하나에 올인하는 윤슬의 성격상 새로운 작품을 구상할 리 없었다.
머뭇거리면서 도망치듯 신발에 억지로 발을 욱여넣었다. 거친 발 동작에 아까부터 거슬렸던 검은 힐이 옆으로 넘어졌다.
“이거 지금 피디들 사이에서 폭탄 돌리기처럼 돌아다녀. 하겠다는 놈 찾기 힘들어.”
“…….”
“나랑 해, 제대로 만들 테니까.”
아마 현민은 민정이 말한 그 ‘스카우트당해 온 유능한 감독’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 MBS 소속이었으니까.
현민은 이 바닥에서 뜨고 있는 몇 안 되는 드라마 감독 중 하나였다. MBS 내에서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가 윤슬의 귀까지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의 최근 작품은 높은 시청률로 수목 드라마 1위를 했었고, 방송계에서 별 기대감 없던 대본을 연출력 하나로 살려 냈다는 극찬을 받았다. 물론, 윤슬은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너랑은 싫어.”
그러나저러나 윤슬은 싫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피디인지는 그녀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윤슬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제 전 남자 친구 ‘우현민’이라는 것이다.
요즘 세대들은 헤어져도 얼굴 보고 하하 호호 잘 지낸다 하지만, 윤슬은 그럴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쿨하지도 않고, 억지로 쿨한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거 지금 제목이랑 집필 의도 빼고 다 문제인 건 알고 있냐.”
현민이 들고 있는 윤슬의 대본을 흔들었다.
“자기 복제에 자아 분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비밀 일기장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대본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보다 키가 한참 큰 그의 손목에도 닿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야, 네 글.”
또렷하게 들렸지만 그의 말을 모른 척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아까 전부터 노력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욱여넣는 탓에 신발이 제대로 신겨지지 않았다.
아우씨. 화가 나 발을 차니 대충 걸쳐져 있던 신발이 거실 안까지 날아갔다. 후……. 숨을 쉬고 손을 허리에 올렸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치켜들고 현민을 봤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그 눈빛은 여전히 제 숨을 막았다. 그래도 물러서면 안 된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윤슬이 입을 열었다.
“자기 복제에 자아 분열, 총체적 난국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내가 너랑 왜 해야 해? 너는 그런 형편없는 드라마를 왜 하겠다는 건데?”
“그냥 꽂혔어.”
“그게 이유가 돼?”
“나한텐.”
윤슬의 신발을 쥐고 시아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녀의 발밑까지 날아갔던 신발을 조심스레 앞에 내려놓았다. 윤슬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저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다시 새로 써 봤자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고……. 공동 집필 하자.”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란 식으로 윤슬은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졌다. 자신의 글에 온갖 비난을 쏟아붓더니 거기다 싹 엎고 공동 집필을 해라? 이건 지금 싸우자는 선전 포고였다.
“작가는 너랑 이시아. 네가 추가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 더 넣어도 되고.”
공동 집필이라는 집필 방법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작가 스스로 원치 않는 이러한 권유는 욕이 분명했다.
너는 스스로 드라마 한 편을 제대로 쓸 능력치가 되지 않으니, 다른 놈들과 함께 써 보거라. 윤슬 귀에는 딱 그렇게 들렸다.
“내가 왜 내 이름 팔면서 그래야 해? 공동 집필은 무슨 얼어 죽을……. 너 지금 이 작가 한번 키워 보자고 나랑 공동 육아 하자는 거야?”
“구윤슬.”
“네 새끼 키우고 싶으면 너 혼자 키워. 나는 내 글로 남의 자식 거둬 먹일 생각 전혀 없으니까.”
이제 신발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대충 앞코에 발을 욱여넣고 뒤를 돌았다. 도어록 작동법을 제대로 몰라 문고리를 몇 번이나 쥐고 흔들어서야 문이 열렸다.
현관을 나와서는 대충 신은 신발을 두 손에 쥐었다. 맨발로 차가운 대리석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기분이 처참했다.
12층에 도착하려면 아직 먼 엘리베이터 버튼을 무자비하게 누르고 하나씩 떨어지는 숫자를 마냥 바라보는데 눈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구윤슬.”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힘이 가득 실렸다.
“나도 하나 묻자.”
“…….”
“너는 나랑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그걸 몰라서 물어? 고개를 홱 돌려 현민을 쳐다봤다. 그거야……. 말하려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덤덤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이 뜨거웠다. 괜히 긴장이 됐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애초에 끝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럴까. 혹여나 제 마음을 들킬까 주먹을 꾹 쥐었다.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질문일 것이다. 영리한 현민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멈칫하고 있는 틈을 노려 그가 다시 또 물어 왔다.
“우리가 사귀었던 사이라서?”
두 질문 모두 답을 하지 않자 현민은 지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축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너랑 다시 연애하자는 게 아니잖아.”
“…….”
“드라마 하자고, 구윤슬. 일하자고 나랑.”
내리꽂히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뎅뎅 울렸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었다. 산과 들, 강과 바다 모든 것이 변해 갈 동안 우현민, 너는 대체 무엇이 변했냐고 묻고 싶어졌다.
옳다 생각하면 그냥 멋대로 밀어붙이는 모습이나,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헤집어 놓는 것.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런 그 앞에 서면 항상 아무 말도 못 하는 자신도.
승자는 현민이고 패자는 윤슬이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이번엔 패자이고 싶지 않았다. 자격지심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현민이 제 감정을 쥐고 흔드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날카롭게 눈을 뜨고 현민을 봤다.
“네가 하자는 게 일이건, 연애건……. 난 다 싫어.”
“…….”
“넌 참 쿨해서 좋겠다.”
엘리베이터가 때마침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올라탔다. 더 이상 현민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한 엘리베이터 앞 그의 모습도 피하고만 싶다. 문이 닫히기 전 몇 초를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문이 닫히자 윤슬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제 성격이 곱지는 않았지만 천성이 그리 나쁘진 않은지, 남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 꼭 제 몸이 먼저 아팠다.
어차피 아플 거 더 시원하게 퍼부을걸.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내내 후회가 밀려왔다.
윤슬을 가르친 교수는 작가도 하나의 세일즈맨과 다를 바가 없다 말했었다. 다만 작가는 글을 제작사, 감독, 시청자, 독자들에게 팔 뿐이라고 했다.
그러니 글 좀 쓴다고 제 멋에 취해 자존심 세우면 안 된다고, 사 주는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잊어선 안 된다고 했다. 그때는 몇 번이고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그런데 교수님, 어쩌죠. 저 이 사람에게는 제 글을 정말로 팔고 싶지 않은데.
“안 오는 줄 알았어. 왔네. 다행히.”
“……알았으면 안 왔겠지.”
“우선 들어와.”
현민은 현관문을 더 활짝 열었다.
그가 대체 뭐 하는 짓인지 윤슬로선 알 길이 없었다. 이대로 그냥 가 버린다면 평생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그래,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뭐 때문에 이렇게 자신을 복잡하게 만드는지 그 이유를 들어 보자.
윤슬은 무거운 발걸음을 움직여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아래에 놓인 신발들은 그의 성격을 대변했다. 나란히 줄 지어 있는 그의 신발 옆엔, 더 정갈히 놓인 검은색 힐이 있었다.
눈만 올려 현민을 보니 그는 이미 안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찔한 검은색 힐 옆에 조심히 신발을 벗어 놓고 그를 뒤따라 들어갔다. 현민이 내려놓은 손님용 실내화는 신지 않았다. 일종의 저항이라면 저항이었다.
이름만 오피스텔일 뿐, 일반 아파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방이 두 개에 거실도 꽤 넓었다. 웬만한 아파트에 버금가는 구조였다. 마치 집을 알아보는 사람처럼 한참을 두리번거리자, 현민이 그녀를 소파로 안내했다.
“차 마실래?”
“아니. 길게 안 있을 거야.”
자연스럽게 답한 것과 반대로 온몸은 경직된 상태였다. 부엌으로 가는 현민을 향해 돌린 꼿꼿한 목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다.
그가 찬장에서 컵 두 개를 꺼내 드는 것이 보였다. 저럴 거면 묻지나 말지. 여전히 제멋대로네. 뭐라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 윤슬은 그냥 입을 닫았다.
지금 그와 연애하는 것도 아닌데 제멋대로 굴든 말든, 굳이 싸움을 걸 필요는 없었다.
테이블 위엔 자신이 방송국과 피디들에게 보낸 시놉시스와 대본 뭉텅이가 펼쳐져 있었다. 제가 오기 직전까지 읽고 있었는지 대본집이 펼쳐진 채 엎어져 있었다.
대본 표지에 뭔가가 쓰여 있는 것 같아 찬찬히 들여다봤지만 그의 필기체는 도통 알아볼 수가 없다. 뭐라도 읽어 보겠다고 한참 뚫어져라 보는데, 현관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어머! 구 작가님 벌써 오셨어요?”
“응. 방금 전에.”
부엌에서 나오며 현민이 컵 하나를 여자에게 건넸다. 그녀가 검정 하이힐의 주인이란 것은 어려운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윤슬 쪽으로 걸어왔다.
향수를 뿌렸는지 여자가 가까워질수록 따뜻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아직 이 상황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윤슬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끔벅였다.
“죄송해요. 본가가 수원인데 어제 급히 다녀오느라고……. 많이 기다리셨어요?”
“아니요. 저도 금방 왔어요.”
여자는 현민에게 건네받은 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어서 현민이 여자 옆에 앉고, 그녀를 따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같은 동작으로 컵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엔 헝클어져 있는 윤슬의 글들과 두 사람의 컵이 놓여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을 봤다. 누가 뇌의 전원을 꺼 버린 것처럼 정상적인 사고가 되지 않았다.
“……이제 설명 좀 해 줄래?”
“우선 얘는 이시아라고……. 작가.”
“아이참, 그렇게 성의 없게 소개시켜 주면 어떻게 해요!”
귀여운 목소리였다. 시아는 웃으며 현민의 팔을 손으로 툭 쳤다. 억지로 꾸며 낸 것이 아니라 원래 목소리가 귀엽고, 행동이 사랑스러운 여자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 모습이 그리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 윤슬은 다리를 꼬고 귀밑머리를 뒤로 넘겼다.
“애인 소개 하려고 나 부른 건 아니지?”
“아니에요, 작가님!”
“그게 아니면?”
윤슬이 현민을 바라봤다. 이 엿 같은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든 상관없이 자신을 이곳까지 부르고 기어이 이딴 꼴을 보게 만드는 이유. 그리고 그 설명은 시아가 아닌 현민에게 듣고 싶었다.
“드라마, 같이 하자.”
헛,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머리가 복잡해 터질 것 같은 와중에 기가 차 웃음이 실실 나왔다.
“내가? 왜? 왜 너랑?”
원치 않았는데 얼굴색이 붉게 변했다. 열이 확 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얼굴을 식히려 열심히 손부채질을 했다. 별로 효과는 없었다.
“우현민, 너 미쳤지?”
“아니.”
“그럼 뭐야?”
‘너’라는 호칭에 미간을 좁히면서도 현민은 평온한 얼굴로 테이블 위에 있는 종이들을 주워 들었다. 그리고 드라마의 제목 위로 손가락으로 밑줄 그리듯 죽 그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
“그게 이유가 된다고 생각해?”
윤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대본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원래 제 것이니 가져가야 했다.
그러나 현민이 조금 더 빨랐다. 윤슬의 낚아채려는 손을 피해 대본을 테이블 위에 다시 놓은 뒤 그는 낮게 말했다.
“앉아. 아직 얘기 안 끝났으니까.”
“…….”
“구성은 다시 짜자. 네 남녀 이야기라는 뼈대는 그대로 두고, 관계나 배경 설정은 아예 다시…….”
“미친놈.”
“……뭐?”
“아, 들었어? 나는 네가 내 말을 깡그리 무시하기에 내 목소리는 아예 안 들리는 줄 알았거든.”
윤슬은 현민이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고도 별로 무섭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대본은 그냥 버리는 셈 치기로 했다. 가방을 들고 돌아서니 시아가 먼저 그녀를 붙잡았다.
“작가님!”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멈추지 않았다. 신발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아 뒤를 노려봤다. 어느새 따라온 현민이 제 뒤에 서 있었다.
“나랑 안 하면 이 드라마 이대로 엎어져.”
“너랑은 안 해. 엎어지면 다른 거 하지, 뭐.”
“다른 거? 생각해 둔 건 있고?”
그와 대화를 할 때면 몇 번이고 이렇게 말문이 막혔다. 뭐든 하나에 빠지면 그 하나에 올인하는 윤슬의 성격상 새로운 작품을 구상할 리 없었다.
머뭇거리면서 도망치듯 신발에 억지로 발을 욱여넣었다. 거친 발 동작에 아까부터 거슬렸던 검은 힐이 옆으로 넘어졌다.
“이거 지금 피디들 사이에서 폭탄 돌리기처럼 돌아다녀. 하겠다는 놈 찾기 힘들어.”
“…….”
“나랑 해, 제대로 만들 테니까.”
아마 현민은 민정이 말한 그 ‘스카우트당해 온 유능한 감독’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 MBS 소속이었으니까.
현민은 이 바닥에서 뜨고 있는 몇 안 되는 드라마 감독 중 하나였다. MBS 내에서 엄청난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소리가 윤슬의 귀까지 들릴 정도였으니까.
그의 최근 작품은 높은 시청률로 수목 드라마 1위를 했었고, 방송계에서 별 기대감 없던 대본을 연출력 하나로 살려 냈다는 극찬을 받았다. 물론, 윤슬은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
“너랑은 싫어.”
그러나저러나 윤슬은 싫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피디인지는 그녀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윤슬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제 전 남자 친구 ‘우현민’이라는 것이다.
요즘 세대들은 헤어져도 얼굴 보고 하하 호호 잘 지낸다 하지만, 윤슬은 그럴 수가 없다. 그 정도로 쿨하지도 않고, 억지로 쿨한 척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거 지금 제목이랑 집필 의도 빼고 다 문제인 건 알고 있냐.”
현민이 들고 있는 윤슬의 대본을 흔들었다.
“자기 복제에 자아 분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비밀 일기장이라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대본을 낚아채려 손을 뻗었지만 그녀보다 키가 한참 큰 그의 손목에도 닿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야, 네 글.”
또렷하게 들렸지만 그의 말을 모른 척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아까 전부터 노력하고 있었지만 억지로 욱여넣는 탓에 신발이 제대로 신겨지지 않았다.
아우씨. 화가 나 발을 차니 대충 걸쳐져 있던 신발이 거실 안까지 날아갔다. 후……. 숨을 쉬고 손을 허리에 올렸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치켜들고 현민을 봤다.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그 눈빛은 여전히 제 숨을 막았다. 그래도 물러서면 안 된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윤슬이 입을 열었다.
“자기 복제에 자아 분열, 총체적 난국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 내가 너랑 왜 해야 해? 너는 그런 형편없는 드라마를 왜 하겠다는 건데?”
“그냥 꽂혔어.”
“그게 이유가 돼?”
“나한텐.”
윤슬의 신발을 쥐고 시아가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그녀의 발밑까지 날아갔던 신발을 조심스레 앞에 내려놓았다. 윤슬과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저가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몇 번이나 숙였다.
“다시 새로 써 봤자 시간만 잡아먹을 것 같고……. 공동 집필 하자.”
어디 한번 끝까지 해보란 식으로 윤슬은 가슴 위로 팔짱을 꼈다.
대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졌다. 자신의 글에 온갖 비난을 쏟아붓더니 거기다 싹 엎고 공동 집필을 해라? 이건 지금 싸우자는 선전 포고였다.
“작가는 너랑 이시아. 네가 추가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 더 넣어도 되고.”
공동 집필이라는 집필 방법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작가 스스로 원치 않는 이러한 권유는 욕이 분명했다.
너는 스스로 드라마 한 편을 제대로 쓸 능력치가 되지 않으니, 다른 놈들과 함께 써 보거라. 윤슬 귀에는 딱 그렇게 들렸다.
“내가 왜 내 이름 팔면서 그래야 해? 공동 집필은 무슨 얼어 죽을……. 너 지금 이 작가 한번 키워 보자고 나랑 공동 육아 하자는 거야?”
“구윤슬.”
“네 새끼 키우고 싶으면 너 혼자 키워. 나는 내 글로 남의 자식 거둬 먹일 생각 전혀 없으니까.”
이제 신발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대충 앞코에 발을 욱여넣고 뒤를 돌았다. 도어록 작동법을 제대로 몰라 문고리를 몇 번이나 쥐고 흔들어서야 문이 열렸다.
현관을 나와서는 대충 신은 신발을 두 손에 쥐었다. 맨발로 차가운 대리석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니 기분이 처참했다.
12층에 도착하려면 아직 먼 엘리베이터 버튼을 무자비하게 누르고 하나씩 떨어지는 숫자를 마냥 바라보는데 눈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구윤슬.”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힘이 가득 실렸다.
“나도 하나 묻자.”
“…….”
“너는 나랑 왜 못 하겠다는 건데?”
그걸 몰라서 물어? 고개를 홱 돌려 현민을 쳐다봤다. 그거야……. 말하려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덤덤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이 뜨거웠다. 괜히 긴장이 됐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애초에 끝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럴까. 혹여나 제 마음을 들킬까 주먹을 꾹 쥐었다.
대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질문일 것이다. 영리한 현민이라면 모를 리 없었다. 멈칫하고 있는 틈을 노려 그가 다시 또 물어 왔다.
“우리가 사귀었던 사이라서?”
두 질문 모두 답을 하지 않자 현민은 지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축 내려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그가 다시 말했다.
“내가 너랑 다시 연애하자는 게 아니잖아.”
“…….”
“드라마 하자고, 구윤슬. 일하자고 나랑.”
내리꽂히는 그의 시선을 피했다. 어린아이 달래듯 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뎅뎅 울렸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이었다. 산과 들, 강과 바다 모든 것이 변해 갈 동안 우현민, 너는 대체 무엇이 변했냐고 묻고 싶어졌다.
옳다 생각하면 그냥 멋대로 밀어붙이는 모습이나,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헤집어 놓는 것. 모두 예전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런 그 앞에 서면 항상 아무 말도 못 하는 자신도.
승자는 현민이고 패자는 윤슬이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이번엔 패자이고 싶지 않았다. 자격지심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현민이 제 감정을 쥐고 흔드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날카롭게 눈을 뜨고 현민을 봤다.
“네가 하자는 게 일이건, 연애건……. 난 다 싫어.”
“…….”
“넌 참 쿨해서 좋겠다.”
엘리베이터가 때마침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올라탔다. 더 이상 현민의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마주한 엘리베이터 앞 그의 모습도 피하고만 싶다. 문이 닫히기 전 몇 초를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문이 닫히자 윤슬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왔다. 제 성격이 곱지는 않았지만 천성이 그리 나쁘진 않은지, 남에게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면 꼭 제 몸이 먼저 아팠다.
어차피 아플 거 더 시원하게 퍼부을걸.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는 내내 후회가 밀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