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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비겁해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현민은 그 안에서 윤슬이 어떤 표정으로 있을지 상상했다. 실망과 화가 뒤섞인 오묘한 표정이려나.

뻔하디뻔한 사각 관계지만 대사발 좋은 윤슬이니 믿고 하겠다는 감독들이 몇 있었다. 관심을 갖는 감독들을 몽땅 찾아가 후배 가는 길에 꽃 한번 놔 달라고 사정했다.

평소엔 말도 잘 걸지 않는 놈이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듯 사정하니 다들 윤슬의 작품에 관심을 끊었다. 그녀의 대본은 송별회 회식까지 제 돈으로 계산하며 얻은 전리품이었다.

그러한 뒷이야기를 알 리 없는 윤슬은 드라마를 하자고 제안한 사람이 하필 현민이라서 실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할 수 있다. 이 드라마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현민 본인뿐이라고.

윤슬이 쓰지 않은 미묘한 감정까지도 그려 낼 수 있는 감독, 그녀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감독은 대한민국에 없다. 현민 자신 말고.

문을 열고 들어온 오피스텔의 공기는 아까와 달랐다. 윤슬이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도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윤슬이 나가며 흐트러트린 신발들을 바라봤다. 원래라면 바로 신발을 정리했을 그였지만 현민은 자신의 신발마저 대충 벗어 놓고 안으로 들어왔다. 부엌에 시아가 있었다.

“어떡해요? 작가님 많이 화나신 것 같던데.”

“점심 안 먹고 왔어?”

“아뇨. 전 먹었는데 피디님은 안 드셨을 것 같아서…….”

“됐어. 그냥 나와.”

시아가 물 묻은 손을 앞치마에 문질러 닦았다.

“그냥 간단하게 토스트…….”

“요리하라고 너 부른 거 아냐. 네 일 해.”

차가운 그의 말에 시아의 눈썹이 축 처졌다.

이제는 윤슬의 온기가 모두 사라진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넌 참 쿨해서 좋겠다. 윤슬의 말이 맴돌았다. 매번 자신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윤슬은 사실은 자신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

쿨하다니, 누가, 대체…….

테이블 위에 가까스로 사수한 그녀의 대본이 놓여 있었다. 대본을 들고 그는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쿨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윤슬에겐 쿨하게 보이고 싶으니까. 혹시 이 드라마를 같이 하면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검은 속내를 보이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란 걸 잘 알고 있으니까.



* * *



읽고 있던 대본을 던져 버렸다. 현민을 만나고 난 뒤로는 아무리 봐도 제 글에 괜찮은 곳이 없어 보였다.

고슴도치가 새끼를 보살피는 것처럼 저라도 제 글을 품어 주려 했지만 도무지 예쁜 구석이 없으니 쉽지 않았다. 이딴 글을 쓰고 내가 드라마를 또 하겠다고 했다니. 자신의 무모함에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읽을 수는 있지만 좀처럼 찾아 읽고 싶진 않은 글.

이런 글은 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침 채널이 틀어져 있으면 보기야 하겠지만, 굳이 찾아 보고 싶지는 않은 드라마가 될 것이다.

윤슬은 핸드폰에서 방 피디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했다. 긴 신호가 거의 끊기려 할 때쯤, 늘 붕붕 떠 있는 방 피디의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 어이고. 구 작가! 안 그래도 내가 전화 한번 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잘 지내고 있지?

“잘 지내고 있겠어요? 이리저리 까이고 있는데.”

― 에잉? 누가 우리 구 작가를 까나?

“이번에 안 작가랑 드라마 들어간다면서요?”

― 어? 어……. 이 바닥 소문 참 빨러.

허허허, 억지로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한마디 톡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나 뭐 하나만 물어보려고요. 제 대본 봤죠? 뭐가 문제인 것 같은지 툭 터놓고 얘기 좀 해 줘요.”

― 아이, 문제는 무슨 문제. 나는 그냥…….

“나 지금 따지는 거 아녜요. 문제가 뭔지 찾아서 고쳐 보려고요. 그러니까 감독님이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지금.”

곤란한 신음 소리가 들리고, 방 피디는 ‘그럼 잠깐만’ 하며 통화를 하는 장소를 옮겼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 그럼 오해 말고 들어, 구 작가. 구 작가 능력이야 이 바닥에 있는 사람이면 다 알지. 대사 좋고, 구성 특이하고, 설정 좋고. 근데…… 구 작가는 사랑 얘기를 잘 못 쓰더라.

“사랑 얘기?”

― 구 작가가 쓰는 사랑 이야기는 꼭 동화 같아. 왕자랑 공주랑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하는. 마치 사랑을 책으로 배운 애들이 쓴 사랑 이야기 같달까? 너무 일차원적이야.

“…….”

― 한국 드라마 절반이 사랑 이야기잖아. 근데 구 작가는…… 사랑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너무 집에 틀어박혀 글만 쓰지 말고 나가서 연애도 좀 하고, 그래.

꽤나 솔직한 방 피디의 말에 알겠단 말로 통화를 끝냈다. 벅벅 소리가 나게 머리를 긁고 침대로 다가가 벌렁 누웠다.

‘구 작가는 사랑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방 피디의 말이 다시 머리를 울렸다. 늘 사랑 이야기를 쓸 때면 글이 안 풀려 답답했던 것이 그 때문이었나. 이제야 지난 드라마의 시청률이 이해가 된다.

공동 집필. 현민이 뱉은 그 단어가 떠올랐다. 요즘 트렌드이긴 했다. 빡빡한 촬영 일정과 쪽대본이 난무하는 대한민국 드라마 판에선 꽤나 유용한 집필 방법이었다.

최근 성공한 작품들에 작가 이름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길게 쓰여 있는 것을 윤슬도 몇 번 봤었다.

아무리 트렌드라고 해도 그런 제안이 자신에게 올지 몰랐다. 전작이 망하고 나서 지금 제가 있는 곳이 벼랑 끝인 줄은 알았는데 여전히 추락할 곳이 더 남아 있었나 보다.

관자놀이에서 퉁퉁 혈관이 튀어나왔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한기가 들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내일 단단히 아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슬이 예상한 대로 지난 밤 그녀는 끙끙 앓았다. 생리 전이면 꼭 한 번씩 앓아누웠는데 마침 그 날짜와 어제 했던 푸닥거리가 맞물려 정말 제대로 아팠다.

계속 한 자세로 누워 있으니 허리가 아파 몸을 돌아눕는 데도 끙 하는 노인네 신음이 흘러나왔다.

닫힌 자신의 방문을 민정이 열었다.

“언니, 오늘은 그냥 쉴까요?”

조심스레 말하는 민정에게 들어가란 손짓을 했다. 뻑뻑하게 메마른 목구멍으로는 바람 소리만 나왔다. 그럼 하던 것만 마저 끝내고 갈게요. 민정이 문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문을 닫았다.

뒤척이며 잠을 청한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이 발칵 열렸다.

“아, 왜 핸드폰을 거실에 두고 그래!”

웅웅 울리는 윤슬의 핸드폰을 들고 재형이 소리쳤다. 민정에게 했던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동생이라고 하나 있는 놈은 윤슬의 상태는 아랑곳 않고 발을 쿵쿵 구르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 전화 온다고! 방송국이나 피디면 어떡해!”

“…….”

“내가 그냥 받아?”

듣기 싫은 재형의 높은 목소리와 웅웅거리는 기계 소리가 머리를 더 어지럽게 했다. 윤슬은 겨우 입을 움직여 바람 소리에 가까운 말을 했다.

“나……가.”

“뭐? 누나 많이 아파?”

가까이 보니 상태가 꽤 심각해 보였는지 별말 않고 재형이 그녀의 핸드폰을 들고 나갔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몸이 괜찮아지면 저 녀석부터 내쫓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현민과 첫 이별을 했을 때 이렇게 앓아누웠었다. 이불 속에서 끙끙 며칠을 앓았다. 앓고 있는 윤슬을 보고 엄마는 사랑을 앓는 것엔 약이 없다며 그냥 내버려 두라 했었다.

그렇게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매일 눈물로 지새우며 다짐한 것 하나는, 결코 다음 연애는 이런 식으로 끝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별을 하고도 별 후유증이 없이 살아가는 것, 옛 연인이 금세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걸쭉하게 욕 한번 뱉고 돌아서는 사람이 되는 것, 지난 사랑에 그 어떤 미련도 갖지 않는 것이 맞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모든 것들이 틀린 답이었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건 그냥 사랑에 제대로 빠지지 않은 효과들에 지나지 않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현민 이후로 매번 실패했던 연애가 어쩌면 그에게 받았던 첫 상처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더 이상 사랑을 알고 싶지도, 알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단추야 처음부터 잘못 끼웠으면 다시 풀고 끼면 끝이지만 실패한 첫사랑은 다시 풀 수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데. 이제 와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윤슬이 알고 있는 것 하나는 자신이 아직도 사랑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 * *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재형…….”

마른 목구멍 사이로 소리 내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아픈 자신을 내버려 두고 클럽에 간 것이 분명하다. 이놈 자식을 그냥.

몸살이 떨어지면 바로 재형을 이 집에서 내쫓겠다 다시 다짐하며 비적비적 일어났다. 현관까지 가는 길이 멀게만 느껴졌다. 나름 빠르게 가고 있는데도 문밖의 상대는 여전히 재촉하며 문을 두드려 댔다.

어지럽혀져 있는 신발들 위를 그냥 밟고 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세상이 빙글 돌아 신발장에 머리를 기대며 몸을 비스듬히 한 채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현민이 서 있었다. 몽롱한 정신에 꿈인가 싶었지만 제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분명 현민이었다.

무언갈 찾는 듯 집을 빙 둘러보더니 그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스럭거리는 봉투 소리를 내며 그는 집 앞에서 사 온 죽을 꺼냈다.

“식기 전에 와서 먹어.”

아직도 신발장에 머리를 기대고 서 있는 윤슬을 불렀다.

헛것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윤슬은 제 방을 향해 걸어갔다. 눈꺼풀이 무거워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대충 짐작으로 걷는데, 그가 다가와 제 손목을 낚아챘다.

“너 방금 벽에 부딪칠 뻔했어.”

그제야 제 눈앞에 벽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손목을 붙잡힌 채로 고개를 돌려 현민을 봤다. 집이 어두워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넘어지면 좀 어때.”

쉰 목소리로 뱉어 낸 말에 현민이 곧장 얼굴을 찌푸렸다.

“죽 사 왔어. 먹고 자.”

반항할 힘이 없어서 그대로 끌려갔다. 식탁 의자 앞에 멈춰 서서 현민은 그녀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플라스틱 용기에 가득 죽이 담겨 있었다. 윤슬이 좋아하는 전복죽이었다.

예전이라면, 그러니까 첫사랑을 하고 있던 이십 대의 그녀였다면 내가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냐며 신나 떠들었을 테지만, 이젠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다.

어쩌다 그 메뉴가 눈에 보였나 보지. 한 숟가락 가득 죽을 떠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물컹한 느낌이 입 안과 목구멍에서 느껴졌다. 입 속의 꺼끌함을 모두 밀어내고 싶어 꾸역꾸역 삼켜 넣었다.

“약은 먹었어?”

“…….”

“구윤슬.”

“죽…… 먹으라며.”

조용히 하란 뜻으로 검지를 입술 위로 가져다 대었다. 앓으면서도 배는 고팠는지 생각보다 잘 들어갔다. 현민이 맞은편에 앉아 동치미를 죽 그릇 가까이로 밀었다.

눈길도 주지 않기에 다시 그녀 가까이로 밀자, 윤슬이 숟가락으로 그릇을 밀어 버렸다.

“목 막히겠다.”

“……전혀.”

아픈 와중에도 한마디도 지지 않는 윤슬이 웃겨 픽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숟가락질을 하던 윤슬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옮겨 붙었다.

“왜 웃어?”

현민은 손을 뻗어 윤슬의 입가를 닦았다.

“묻어서.”

“…….”

“아프긴 아픈가 보네. 피하지도 않고, 소리도 안 지르는 걸 보면.”

싸움이 벌어진 날은 대부분 윤슬이 화를 내는 날이었다. 그러면 그는 오늘처럼 죽을 사 들고 윤슬을 찾아왔다.

어김없이 끙끙 앓아누워 있는 그녀의 이마에 현민이 손을 올리면 어젯밤 화를 냈던 것도 모두 잊고 그녀는 그의 허리를 안았다.

열이 올라 뜨끈한 얼굴을 그의 몸에 부비며 아기처럼 색색 잠이 들었다. 윤슬이 아프단 이야기에 바로 죽을 사 들고 온 것은 현민도 아직 그때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민은 어제보다 더 창백해진 윤슬의 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자신의 허리를 감싸 안을 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전의 그때가 떠올라 지금의 어색한 감정들이 모두 생경했다.

“왜 아프고 그래.”

“…….”

“약은 먹었고?”

거진 다 먹은 윤슬에게 물컵을 건넸다. 답이 없는 윤슬을 보고 가져온 봉투를 뒤적였다. 약국에서 사 온 약들이 종류별로 있었다.

어떻게 아픈 건데, 묻는 사람을 무시하고 윤슬이 봉투를 빼앗아 들었다. 약은 먹어야겠다 싶었는지 몸살 약을 꽤나 열심히 찾아 꺼냈다.

그러나 반질반질한 약상자를 여는 게 좀처럼 쉽지 않았다. 손에 힘이 없어선지 잘 열리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현민이 바로 약상자를 빼앗았다. 갈 곳을 잃고 허공에 머물러 있는 윤슬의 손가락이 서서히 오므라졌다.

이제 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모두 다 꿈인 것 같았는데,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구나. 윤슬이 몇 번 눈을 깜박이다 현민을 봤다.

“뭐 하는 건데.”

“약 꺼내 주려고.”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주고 윤슬이 말했다.

“지금은 일하자는 거야, 아님 연애하자는 거야?”

죽을 괜히 먹였나. 여태 몸을 축 늘어트린 채 순순히 굴던 윤슬이 기운을 차렸는지 어제 현민에게 화를 낼 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현민은 대답 대신 그녀의 접힌 손가락을 펴고 그 위에 약을 올려 주었다.

“뭔 것 같은데?”

연애, 라고 말하려 했다. 아픈 자신을 찾아와 따뜻한 죽을 먹이고 또 약까지 준비해 준 것이 일과는 멀게 보였으니까.

그러나 그 단어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가만히 저를 쳐다보고 있는 현민 저편엔 실패한 연애의 역사가 있었다.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연애란 말이 쉽사리 나올 리 없다.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는 윤슬을 보다 현민이 제 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냈다.

“그때 본 이 작가가 쓴 단편들. 이건 네 대본 보고 너한테 쓴 편지.”

살짝 벌어진 입술을 말아 물자 금방 불퉁한 표정으로 변했다. 방금 전 ‘연애’라는 단어를 뱉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잘근잘근 입술을 씹으며 이어지는 현민의 말을 들었다.

꽤나 열심이지 싶었다. 자신과 함께 일을 하고 싶은 건지, 신인 작가를 띄우고 싶은 건지 헷갈릴 정도로 그는 열심히 시아에 대해 설명했다.

KBC에서 예능 작가로 있었다가 드라마를 쓰고 싶어서 틈틈이 극본을 써 왔다는 설명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윤슬은 손에 꾹 쥐고 있던 약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럼 그렇게 잘 쓰는 작가랑 하면 되겠네. 드라마.”

현민이 물컵을 건넸지만 윤슬은 모른 척 물 없이 약을 삼켰다. 턱 하고 걸린 약에서 기분 나쁜 쓴맛이 배어 나왔다. 약이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쓸까. 윤슬은 눈썹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너랑 하고 싶어. 그거 네 대본이잖아.”

“같이 하고 싶은 사람에게 넌 공동 집필 해라, 내용 뒤집어엎으란 말을 잘도 하네, 넌.”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나는 너랑 그냥 드라마 한 편 대충 만들어 보자고 이러는 게 아니야.”

“…….”

“제대로 만들고 싶어서 그래.”

물컵을 윤슬 앞에 내려놓으며 현민이 말했다. 마음의 파도가 크게 한번 출렁였다.

윤슬은 애써도 열지 못했지만 그는 쉽게 열었던 약상자가 제 눈앞에 놓여 있었다. 가만히 약상자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그가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생각해 봐.”

그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흘러나왔다. 현민과 눈을 마주치기 위해 살짝 올려다봤다. 윤슬과 눈이 마주치자 현민의 손이 그녀의 둥근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머리 만지지 마.”

“맞다, 너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하지.”

고작 10년 전에 조금 만난 것 가지고 나에 대해 다 안다는 듯 얘기하지 마. 날카롭고 무거운 말들은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현민, 너 비겁해.”

“…….”

“아픈 사람 상대로 이러는 거. 비겁해, 정말.”

싫어한다 말하면서도 늘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가만히 있었다. 그때처럼 그는 윤슬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

“…….”

“간다.”

반칙이다. 몸이 약해지고 마음이 약해졌을 때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자신을 헤집어 놓는 것은.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곧바로 쓰러지듯 식탁에 엎드렸다.

식탁 위에는 그가 내려놓은 흰 종이 더미가 있었다. 풀썩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혼자 잠깐 무슨 기대를 했던 것인지 제 자신이 한심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