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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다시, 시작
일주일이 흘렀다. 의미 없이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꽤 많은 것들을 시도했다.
우선 원래의 글을 수정하려 노력했고, 그것에 실패하자 새로운 글을 쓰려 노력했다. 물론 한글 문서창에서 일정하게 깜박이는 까만 세로줄 옆으로 그 어떤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모두 뽑고, 골이 울릴 정도로 머리를 긁는다고 해서 드라마가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는 것은, 매일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이 7일이나 계속되었다는 뜻이었다.
잠도 잘 오지 않았고 밥맛도 없었다. 작가라면서 드라마 한 편 제대로 못 쓰면서 잠은 어찌 자고, 목구멍으로 무엇을 넘긴단 말인가.
이러다 산송장 치우겠어요, 걱정하는 민정의 말에도 끄떡 않고 노트북의 빈 문서만 바라봤다.
그러던 그녀가 노트북을 덮은 건, 제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우편물 때문이었다.
시청률 25프로와 4프로. 평균 14.5프로. 이번 달에 내야 하는 돈을 계산하다 말고 윤슬은 여태껏 제 작품들의 평균 시청률을 구했다. 나쁘지 않네.
“그런데 잔액은 왜 이렇게 나쁘냐.”
보고 있던 통장을 던지며 윤슬은 뒷목을 벅벅 긁었다. 반전세인 지금의 집은 한 달에 40만 원이나 들어갔다.
거기다 공과금에 지난달부터 무턱대고 긁어 온 카드값, 생활비에 구재형 용돈, 민정이에게 주어야 할 월급까지. 이제 마이너스 통장 한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글자로 가득했던 머리가 이젠 숫자로 뒤덮였다. 어질어질해져 일어서는데 거실 책상에서 민정이 다급히 무언가를 숨겼다.
“뭔데 그렇게 급하게 숨겨?”
“아니, 그게…….”
“뭔데 그래?”
민정 앞으로 가니 흰 종이 뭉치가 보였다. 표지에는 ‘사랑’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분명 자신이 민정에게 버리라고 했던 시아의 글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읽었어요. 언니가 다른 작가 글을 가지고 있으니까 궁금해서…….”
“…….”
“이 작가가 그 여자 맞죠? 그때 TVS, 저랑 통화했던 그 작가. 글 잘 쓰네요.”
글 잘 쓰네요. 민정의 마지막 말이 아니더라도 궁금함이 일었던 글이었다.
가만히 민정의 손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뜻을 알아차리고 대본을 넘겼다. 챠르륵, 손으로 무심히 모든 페이지를 넘기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찬찬히 글을 읽었다.
6편으로 끝나는 글은, 재미있었다. 꼬투리를 잡기 위해 보았던 글인데 마지막 씬은 호흡을 멈춘 채 집중하며 읽었다.
시아는 극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기승전결의 단계가 확실하면서 뻔하지 않았다. 드라마의 중심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윤슬이 부러워하는 부류의 작가였다.
게다가 사랑도 감각적으로 그려 냈다. 대사나 상황들을 사용해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 유치하거나 고루하지 않았다. 혼자 미니시리즈 한 편을 완성시키고도 남을 실력이었다.
이쯤 되니 현민이 이유 없이 시아를 추천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윤슬은 초반 설정은 창의적이나 그 재미가 결말까지 유지되지 않는다는 평을 자주 들었고, 최근엔 사랑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아의 단편 수준으로 볼 때, 그녀는 제 결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대인 것은 분명했다.
단편 드라마 대본 마지막 장에는 윤슬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윤슬의 드라마는 배경 설정이 특이하고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서 재미있다는 칭찬의 글과 함께 자신은 부족하지만 함께한다면 너무 영광일 것 같다는 손 편지.
정성이 담긴 편지를 읽고 나니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또 아니야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를 몇 번. 하도 고개를 저었더니 이젠 골이 띵했다.
드라마를 해야 할 이유는 많지만, 드라마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냥 현민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제 마음.
“김민정.”
“네?”
“너 작가 데뷔 하고 싶지?”
조용히 자판을 두드리던 민정이 윤슬을 향해 몸을 돌렸다. 뭐야, 나 잘리는 거예요? 걱정스레 묻는 그녀에게 윤슬은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일 잘 차려입고 와.”
“왜, 왜요?”
“내일 되면 알 거야.”
다음 날, 민정은 윤슬의 말대로 잘 차려입고 왔다. 흰 원피스에 검은 재킷을 입은 그녀는 평소와 다른 차림이 어색한지 연신 현관 옆에 있는 거울을 살폈다.
맨날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커진 것 같다느니, 종아리 근육에 보톡스를 맞아야겠다느니 주절거리는 민정을 윤슬이 한참 바라봤다.
“펜 하나 챙겨.”
“펜이요?”
민정은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모나미 펜 하나를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슬이 제 필통에 있는 만년필 하나를 꺼냈다.
“모양 빠지게 모나미 펜으로 계약서에 사인할래?”
“계약서요?”
“응. 너 이제 내 보조 작가 딱지 떼러 가는 거야, 지금.”
“네? 정말요?”
윤슬이 베이지색 재킷을 걸치며 말했다. 제 결정은 어제 확실해졌다. 저장도 하지 않은 현민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윤슬은 드라마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대신 나 너랑은 자주 안 마주쳤으면 좋겠어.’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 알았어.
그리고 곧이어 그가 말했다.
― 고맙다.
자신의 결정에 대한 그의 첫말이었다. 누구나에게 할 수 있고, 또 누구나에게 들을 수 있는 그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윤슬의 결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나 보다. 고맙다라……. 그의 말을 따라 하는 제 입술조차 그 단어가 낯선지 파르르 떨렸다.
사귀는 동안 그의 자취방을 자신이 청소할 때면 현민은 고맙다는 말 대신 뭐 하러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냐며 타박했다.
기념일에 자그마한 선물을 건네도 똑같았다. 돈도 없으면서 뭐 하러 이런 걸 사.
그녀가 청소한 방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동안 애쓰면서도,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펀지밥 모양의 핸드폰 고리를 1년 넘게 하면서도 윤슬 앞에선 늘 까칠한 반응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현민에겐 쉽지 않은 말.
아직도 잘한 결정인지 헷갈렸지만 그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제 결정이 옳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고마워해.’
당돌한 목소리를 꾸며 내 말하고는 내일 방송국에서 보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윤슬의 눈앞에 민정이 손을 흔들었다. 언니, 언니? 멍한 눈이 곧 초점을 찾고 또르르 움직였다.
“아, 늦겠다. 빨리 가자!”
커다란 윤슬의 목소리에 소파에서 낮잠을 자던 재형이 부스스 일어났다.
“둘 다 차려입고 어디 가? 클럽?”
저놈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깔창까지 껴 넣은 재형의 구두를 그를 향해 집어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구두는 그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구두 안에 있던 깔창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 * *
TVS의 한 회의실. ‘두근거림의 이유’ 작가들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첫인사는 현민이 했다.
“우현민입니다. 열심히 해 봅시다.”
짧게 인사가 끝나자 그 옆에 있던 시아가 인사를 했다.
“이시아입니다. KBC에서 ‘서바이벌 퀴즈쇼’ 작가로 있다 드라마가 쓰고 싶어서 현민, 아니, 감독님이랑 같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점투성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서바이벌 퀴즈쇼요?”
윤슬은 못 들은 척했던 예능 프로의 이름을 민정이 콕 집어 말했다.
“그거 담당 피디가 정종훈……. 맞죠?”
“네. 정 피디님 아세요?”
“당연하죠! 우리 언니……. 악!”
이미 헤어지는 장면까지 다 들켜 현민에게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만천하에 공개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주책없이 떠들어 대던 민정의 허벅지를 꼬집자 그녀가 억울한 눈빛으로 윤슬을 봤다.
“왜요…….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네 차례야. 인사나 해.”
“아! 저는…….”
민정의 소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윤슬은 앞에 있는 현민을 봤다. 그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펜을 걸친 채 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며 소개를 이어 가는 민정이 웃겼는지, 그는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처음 보는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모습과 예전의 현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보조 작가라고 하지만 그냥 밑에서 자료 조사 정도만 하고 있었어요.”
염소처럼 달달 떨리는 민정의 목소리에 현민은 웃는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애써 웃음을 삼키고 입술을 말아 문 채 고개를 들었다.
윤슬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윤슬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자신이 먼저 바라보고 있었으면서 당황하는 윤슬과 달리 그는 조금의 미동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입꼬리에 붙어 있던 미소들이 사라졌다.
무표정으로 그는 윤슬을 봤다. 민정의 소개는 더 이상 두 사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의실이 덥게 느껴졌는지 윤슬이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와 마음은 다를 수 있다.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 것은 머리의 일이였고,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마음의 일이었다.
현민의 눈빛을 이렇게 가까이서 몇 번이나 봐야 할지 짐작되지 않았다. 최대한 그와 함께하는 자리는 피하겠지만, 드라마를 위해서라면 그의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반사적으로 빳빳하게 몸이 굳을 텐데……. 이래서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워졌다.
민정의 인사가 끝나고 이제는 윤슬 차례였다. 그녀는 반쯤 일어난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굴의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은 상태였다.
“구윤슬입니다. 잘 부탁해요.”
인사가 모두 끝이 나고 이제 본격적인 드라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현민이 제 노트북을 여는 것을 보고 윤슬도 노트북을 꺼냈다.
새하얀 빈 화면에다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은 절대 마주치지 말자’고 각오를 썼다.
“우리 드라마가 이십 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쓸데없는 곁가지들은 좀 쳐 내고. 인물 설정이나 성격 빼고 억지로 만든 것 같은 씬들은 다 빼 버렸으면 싶은데.”
서론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이어진 현민의 말에 시아와 민정이 윤슬을 바라봤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민정은 옆에 있는 가방끈을 꼭 쥐었다.
계약서에 오늘 사인한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지만 윤슬이라면 이 회의실을 박차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금방이라도 따라나설 준비였다.
“왜?”
민정의 생각보단 태연한 반응이었다. 윤슬은 테이블에 팔을 느리게 올리고는 턱을 괴었다.
“내 글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고, 또 싹 갈아엎을 마음의 준비도 다 하고 왔지만……. 이유는 좀 듣고 싶네. 우 감독은 뭐가 그렇게 쓸데없이 느껴지는데?”
현민은 대본 표지를 가리켰다. 두근거림의 이유. 드라마의 제목이 크게 박혀 있는 곳을 펜으로 툭툭 건드리자 의미 없는 점들이 그 위에 찍혔다.
“제목과 다르잖아. 두근거림이 없어.”
“허!”
“대충 인터넷에서 ‘남자들의 설레는 행동’ 베껴서 쓴 것 같던데, 난. 아무런 맥락 없이 머리만 헝클어트린다고 두근거린다는 게…….”
“충분히 맥락 있는 행동이야. 우 감독이 남자라서 잘 모르나 본데 여자들은 그런 행동에 두근거려. 설레는 순간처럼 보이게 하는 건 연출력의 문제지. 그게 우 감독이 할 일이고.”
동의를 바라는 눈으로 윤슬이 민정을 봤다. 민정은 모른 척 대본을 넘기고 있었다. 그건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싸움에 민정과 시아는 참전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취업 준비생인 여자가 처음으로 최종 면접까지 간 날. 아침부터 세팅 다 해 놓은 머리를 누군가가 헝클어트리면 화가 나지, 두근거리기보다는.”
“드라마 볼 사람들은 결국 여자야. 대부분 여자들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 행동에 두근거린다니까?”
“그래?”
묻는 그의 입술이 묘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현민의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 작가도 그래?”
턱을 괴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몸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고 현민을 노려봤다.
그의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윤슬은 현민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구 작가는 남이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할 것 같은데.”
“…….”
“아닌가.”
윤슬은 노트북을 덮었다.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그의 말을 더 이상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도망갈까, 민정이 놓았던 가방끈을 다시 붙잡았다.
시아와 민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대체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그들 사이에 예전에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여유로운 표정과 태도의 현민과 달리 그 앞에서 씩씩거리는 윤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쉬었다 하죠.”
현민이 노트북을 덮고 말했다.
일주일이 흘렀다. 의미 없이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꽤 많은 것들을 시도했다.
우선 원래의 글을 수정하려 노력했고, 그것에 실패하자 새로운 글을 쓰려 노력했다. 물론 한글 문서창에서 일정하게 깜박이는 까만 세로줄 옆으로 그 어떤 글자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을 제 손으로 모두 뽑고, 골이 울릴 정도로 머리를 긁는다고 해서 드라마가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는 것은, 매일 심각한 표정으로 노트북을 바라보고 있지만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날이 7일이나 계속되었다는 뜻이었다.
잠도 잘 오지 않았고 밥맛도 없었다. 작가라면서 드라마 한 편 제대로 못 쓰면서 잠은 어찌 자고, 목구멍으로 무엇을 넘긴단 말인가.
이러다 산송장 치우겠어요, 걱정하는 민정의 말에도 끄떡 않고 노트북의 빈 문서만 바라봤다.
그러던 그녀가 노트북을 덮은 건, 제 책상에 수북하게 쌓인 우편물 때문이었다.
시청률 25프로와 4프로. 평균 14.5프로. 이번 달에 내야 하는 돈을 계산하다 말고 윤슬은 여태껏 제 작품들의 평균 시청률을 구했다. 나쁘지 않네.
“그런데 잔액은 왜 이렇게 나쁘냐.”
보고 있던 통장을 던지며 윤슬은 뒷목을 벅벅 긁었다. 반전세인 지금의 집은 한 달에 40만 원이나 들어갔다.
거기다 공과금에 지난달부터 무턱대고 긁어 온 카드값, 생활비에 구재형 용돈, 민정이에게 주어야 할 월급까지. 이제 마이너스 통장 한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글자로 가득했던 머리가 이젠 숫자로 뒤덮였다. 어질어질해져 일어서는데 거실 책상에서 민정이 다급히 무언가를 숨겼다.
“뭔데 그렇게 급하게 숨겨?”
“아니, 그게…….”
“뭔데 그래?”
민정 앞으로 가니 흰 종이 뭉치가 보였다. 표지에는 ‘사랑’이라는 제목이 쓰여 있었다. 분명 자신이 민정에게 버리라고 했던 시아의 글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읽었어요. 언니가 다른 작가 글을 가지고 있으니까 궁금해서…….”
“…….”
“이 작가가 그 여자 맞죠? 그때 TVS, 저랑 통화했던 그 작가. 글 잘 쓰네요.”
글 잘 쓰네요. 민정의 마지막 말이 아니더라도 궁금함이 일었던 글이었다.
가만히 민정의 손을 바라보고 있자, 그녀가 뜻을 알아차리고 대본을 넘겼다. 챠르륵, 손으로 무심히 모든 페이지를 넘기고는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찬찬히 글을 읽었다.
6편으로 끝나는 글은, 재미있었다. 꼬투리를 잡기 위해 보았던 글인데 마지막 씬은 호흡을 멈춘 채 집중하며 읽었다.
시아는 극을 이끄는 힘이 있었다. 기승전결의 단계가 확실하면서 뻔하지 않았다. 드라마의 중심이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윤슬이 부러워하는 부류의 작가였다.
게다가 사랑도 감각적으로 그려 냈다. 대사나 상황들을 사용해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 유치하거나 고루하지 않았다. 혼자 미니시리즈 한 편을 완성시키고도 남을 실력이었다.
이쯤 되니 현민이 이유 없이 시아를 추천한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윤슬은 초반 설정은 창의적이나 그 재미가 결말까지 유지되지 않는다는 평을 자주 들었고, 최근엔 사랑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아의 단편 수준으로 볼 때, 그녀는 제 결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상대인 것은 분명했다.
단편 드라마 대본 마지막 장에는 윤슬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윤슬의 드라마는 배경 설정이 특이하고 각자의 개성이 잘 드러나서 재미있다는 칭찬의 글과 함께 자신은 부족하지만 함께한다면 너무 영광일 것 같다는 손 편지.
정성이 담긴 편지를 읽고 나니 한번 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또 아니야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기를 몇 번. 하도 고개를 저었더니 이젠 골이 띵했다.
드라마를 해야 할 이유는 많지만, 드라마를 하고 싶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냥 현민과 엮이고 싶지 않다는 제 마음.
“김민정.”
“네?”
“너 작가 데뷔 하고 싶지?”
조용히 자판을 두드리던 민정이 윤슬을 향해 몸을 돌렸다. 뭐야, 나 잘리는 거예요? 걱정스레 묻는 그녀에게 윤슬은 웃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내일 잘 차려입고 와.”
“왜, 왜요?”
“내일 되면 알 거야.”
다음 날, 민정은 윤슬의 말대로 잘 차려입고 왔다. 흰 원피스에 검은 재킷을 입은 그녀는 평소와 다른 차림이 어색한지 연신 현관 옆에 있는 거울을 살폈다.
맨날 앉아 있어서 엉덩이가 커진 것 같다느니, 종아리 근육에 보톡스를 맞아야겠다느니 주절거리는 민정을 윤슬이 한참 바라봤다.
“펜 하나 챙겨.”
“펜이요?”
민정은 거실 테이블 위에 있는 모나미 펜 하나를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윤슬이 제 필통에 있는 만년필 하나를 꺼냈다.
“모양 빠지게 모나미 펜으로 계약서에 사인할래?”
“계약서요?”
“응. 너 이제 내 보조 작가 딱지 떼러 가는 거야, 지금.”
“네? 정말요?”
윤슬이 베이지색 재킷을 걸치며 말했다. 제 결정은 어제 확실해졌다. 저장도 하지 않은 현민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 윤슬은 드라마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곧바로 덧붙였다.
‘대신 나 너랑은 자주 안 마주쳤으면 좋겠어.’
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떨어지는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렸다.
― 알았어.
그리고 곧이어 그가 말했다.
― 고맙다.
자신의 결정에 대한 그의 첫말이었다. 누구나에게 할 수 있고, 또 누구나에게 들을 수 있는 그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윤슬의 결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나 보다. 고맙다라……. 그의 말을 따라 하는 제 입술조차 그 단어가 낯선지 파르르 떨렸다.
사귀는 동안 그의 자취방을 자신이 청소할 때면 현민은 고맙다는 말 대신 뭐 하러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냐며 타박했다.
기념일에 자그마한 선물을 건네도 똑같았다. 돈도 없으면서 뭐 하러 이런 걸 사.
그녀가 청소한 방을 더럽히지 않으려 한동안 애쓰면서도, 성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펀지밥 모양의 핸드폰 고리를 1년 넘게 하면서도 윤슬 앞에선 늘 까칠한 반응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현민에겐 쉽지 않은 말.
아직도 잘한 결정인지 헷갈렸지만 그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만큼은 제 결정이 옳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 고마워해.’
당돌한 목소리를 꾸며 내 말하고는 내일 방송국에서 보잔 말로 전화를 끊었다.
어제의 일을 떠올리고 있는 윤슬의 눈앞에 민정이 손을 흔들었다. 언니, 언니? 멍한 눈이 곧 초점을 찾고 또르르 움직였다.
“아, 늦겠다. 빨리 가자!”
커다란 윤슬의 목소리에 소파에서 낮잠을 자던 재형이 부스스 일어났다.
“둘 다 차려입고 어디 가? 클럽?”
저놈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깔창까지 껴 넣은 재형의 구두를 그를 향해 집어 던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구두는 그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구두 안에 있던 깔창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 * *
TVS의 한 회의실. ‘두근거림의 이유’ 작가들의 공식적인 첫 만남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첫인사는 현민이 했다.
“우현민입니다. 열심히 해 봅시다.”
짧게 인사가 끝나자 그 옆에 있던 시아가 인사를 했다.
“이시아입니다. KBC에서 ‘서바이벌 퀴즈쇼’ 작가로 있다 드라마가 쓰고 싶어서 현민, 아니, 감독님이랑 같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부족한 점투성이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서바이벌 퀴즈쇼요?”
윤슬은 못 들은 척했던 예능 프로의 이름을 민정이 콕 집어 말했다.
“그거 담당 피디가 정종훈……. 맞죠?”
“네. 정 피디님 아세요?”
“당연하죠! 우리 언니……. 악!”
이미 헤어지는 장면까지 다 들켜 현민에게 숨길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만천하에 공개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주책없이 떠들어 대던 민정의 허벅지를 꼬집자 그녀가 억울한 눈빛으로 윤슬을 봤다.
“왜요…….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네 차례야. 인사나 해.”
“아! 저는…….”
민정의 소개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윤슬은 앞에 있는 현민을 봤다. 그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펜을 걸친 채 민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들바들 떨며 소개를 이어 가는 민정이 웃겼는지, 그는 고개를 숙여 웃었다. 그를 다시 만나고 처음 보는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그 모습과 예전의 현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보조 작가라고 하지만 그냥 밑에서 자료 조사 정도만 하고 있었어요.”
염소처럼 달달 떨리는 민정의 목소리에 현민은 웃는 것이 조금 미안해졌다. 애써 웃음을 삼키고 입술을 말아 문 채 고개를 들었다.
윤슬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윤슬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자신이 먼저 바라보고 있었으면서 당황하는 윤슬과 달리 그는 조금의 미동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입꼬리에 붙어 있던 미소들이 사라졌다.
무표정으로 그는 윤슬을 봤다. 민정의 소개는 더 이상 두 사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회의실이 덥게 느껴졌는지 윤슬이 손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와 마음은 다를 수 있다. 현 상황에서 그와 같이 일하는 것이 옳다 생각하는 것은 머리의 일이였고, 확신이 서지 않는 것은 마음의 일이었다.
현민의 눈빛을 이렇게 가까이서 몇 번이나 봐야 할지 짐작되지 않았다. 최대한 그와 함께하는 자리는 피하겠지만, 드라마를 위해서라면 그의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그때마다 저는 이렇게 반사적으로 빳빳하게 몸이 굳을 텐데……. 이래서 일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워졌다.
민정의 인사가 끝나고 이제는 윤슬 차례였다. 그녀는 반쯤 일어난 채 고개를 꾸벅 숙였다. 얼굴의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은 상태였다.
“구윤슬입니다. 잘 부탁해요.”
인사가 모두 끝이 나고 이제 본격적인 드라마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현민이 제 노트북을 여는 것을 보고 윤슬도 노트북을 꺼냈다.
새하얀 빈 화면에다 무엇을 써야 할지 막막해졌다. 저도 모르게 ‘눈은 절대 마주치지 말자’고 각오를 썼다.
“우리 드라마가 이십 대의 풋풋한 사랑 이야기에 집중했으면 좋겠어. 쓸데없는 곁가지들은 좀 쳐 내고. 인물 설정이나 성격 빼고 억지로 만든 것 같은 씬들은 다 빼 버렸으면 싶은데.”
서론도 없이 바로 본론으로 이어진 현민의 말에 시아와 민정이 윤슬을 바라봤다. 그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민정은 옆에 있는 가방끈을 꼭 쥐었다.
계약서에 오늘 사인한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지만 윤슬이라면 이 회의실을 박차고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럴 때를 대비해 금방이라도 따라나설 준비였다.
“왜?”
민정의 생각보단 태연한 반응이었다. 윤슬은 테이블에 팔을 느리게 올리고는 턱을 괴었다.
“내 글을 별로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 알고 있고, 또 싹 갈아엎을 마음의 준비도 다 하고 왔지만……. 이유는 좀 듣고 싶네. 우 감독은 뭐가 그렇게 쓸데없이 느껴지는데?”
현민은 대본 표지를 가리켰다. 두근거림의 이유. 드라마의 제목이 크게 박혀 있는 곳을 펜으로 툭툭 건드리자 의미 없는 점들이 그 위에 찍혔다.
“제목과 다르잖아. 두근거림이 없어.”
“허!”
“대충 인터넷에서 ‘남자들의 설레는 행동’ 베껴서 쓴 것 같던데, 난. 아무런 맥락 없이 머리만 헝클어트린다고 두근거린다는 게…….”
“충분히 맥락 있는 행동이야. 우 감독이 남자라서 잘 모르나 본데 여자들은 그런 행동에 두근거려. 설레는 순간처럼 보이게 하는 건 연출력의 문제지. 그게 우 감독이 할 일이고.”
동의를 바라는 눈으로 윤슬이 민정을 봤다. 민정은 모른 척 대본을 넘기고 있었다. 그건 시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싸움에 민정과 시아는 참전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취업 준비생인 여자가 처음으로 최종 면접까지 간 날. 아침부터 세팅 다 해 놓은 머리를 누군가가 헝클어트리면 화가 나지, 두근거리기보다는.”
“드라마 볼 사람들은 결국 여자야. 대부분 여자들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그 행동에 두근거린다니까?”
“그래?”
묻는 그의 입술이 묘하게 위로 올라갔다. 그제야 현민의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 작가도 그래?”
턱을 괴고 있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몸이 앞으로 쓰러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일으켜 세우고 현민을 노려봤다.
그의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가는 것을 보고 윤슬은 현민의 얼굴을 피해 고개를 돌려 버렸다.
“구 작가는 남이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할 것 같은데.”
“…….”
“아닌가.”
윤슬은 노트북을 덮었다.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는 그의 말을 더 이상 참아 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도망갈까, 민정이 놓았던 가방끈을 다시 붙잡았다.
시아와 민정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묘한 긴장감이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대체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그들 사이에 예전에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여유로운 표정과 태도의 현민과 달리 그 앞에서 씩씩거리는 윤슬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쉬었다 하죠.”
현민이 노트북을 덮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