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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우연일까 인연일까
보송보송한 병아리 솜털 같은 노란 햇살이 깊게 내리쬐는 카페 안. 오후의 나른함을 깨는 왁자지껄한 손님들 사이에서 창가에 앉은 두 남녀는 유독 조용했다. 그리 무더운 날씨도 아닌데 건너편에 앉은 남자의 이마에선 몽실몽실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담담해 보이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에 반듯하게 매어 있는 넥타이가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단단히 매고 있으면 숨이 제대로 쉬어질까. 물끄러미 넥타이를 바라보는 연서의 시선에 남자는 앞에 놓인 물 잔을 집어 입술을 축이고는 헛기침을 몇 번 흘렸다.
“제, 제가 좀 말주변이 없어 재미가 없죠?”
순진하게 웃으며 이마를 긁적이는 남자의 모습에 연서는 들키지 않을 만큼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같아선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손수건을 꺼내어 남자에게 건네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차라리 시작도 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결국 오늘도 자신의 시간은 물론이고 죄 없는 저 남자의 시간까지 허비한 꼴이다.
날씨가 끝내주게 좋았던 주말 내내 연서는 선을 보았다. 어제는 세 잔의 차를 마셨고 두 번의 밥을 먹었으며, 오늘도 역시 겨우 점심시간을 넘겼을 뿐인데 두 번째 커피가 앞에 놓였다.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지만 이젠 속이 쓰릴 지경이다. 이런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어야겠지. 마음을 정리한 연서는 진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저기…….”
달칵하고 잔을 내려놓는 연서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더니 말끝을 흐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작지만 강남에 아파트도 한 채 있고요. 어, 어머닌 형님네서 계속 사실 테니 제가 모시지 않아도 돼요. 저는…… 연서 씨만 괜찮다면 또 만나 뵙고 싶습니다.”
서른여섯에 동네에서 제법 큰 마트를 운영한다는 남자의 고백에 연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는 진심으로 자신이 마음에 든 눈치다. 그는 순수해 보였다. 아니 좀 더 솔직하자면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못할 것 같은 착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동의를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평생을 친구처럼 살아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미친 척 결혼을 해 버릴까. 잔잔하던 연서의 마음이 일렁였다.
“죄송합니다.”
연서는 마음의 갈등을 지우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제 속 편하자고 만든 계획에 남자의 진심을 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서의 급작스런 사과에 남자는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실망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의 표정에 연서는 선뜻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저 남자는 이해해 줄까. 진짜 결혼이 필요한 게 아니라 1년짜리 남편이 필요한 거라면 어떤 얼굴을 할까.
“바쁘실 텐데 시간 빼앗아 죄송합니다.”
“이유라도 설명을…….”
이 웃기는 상황에 화를 내지도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남자에게 해 줄 적당한 대답을 찾았으나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괜한 짓을 벌였다는 후회가 또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일어서는 연서를 따라 서둘러 몸을 일으킨 남자가 허둥지둥 주머니 안쪽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 손을 잡은 남자의 손은 투박하기 그지없다. 착실함으로 똘똘 뭉친 손이다.
“기다릴게요. 꼭 전화 주세요.”
가볍게 묵례를 하고 카페를 빠져나온 연서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남자가 지켜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남자의 마음에 괜히 상처를 남긴 것 같아 마음이 영 편하지가 않다. 차에 올라탄 연서는 운전대에 머리를 댄 채로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함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감은 눈이 뻐근하다. 생각해 보니 벌써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였다.
연서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아직 한 사람이 더 남아 있었지만 어쩐지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제 욕심일 뿐 세상 어디에 1년짜리 결혼을 해 줄 사람이 있을까…….
길게 한숨을 내쉬고 시동을 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그녀를 담당하고 있는 최선영이다. 피곤함에 지친 눈두덩을 문지르며 연서는 전화를 받았다.
“네.”
― 벌써 헤어지셨다면서요?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나. 참 빠르기도 하다.
“네. 그렇게 됐어요.
― 유진형 씨는 연서 씨가 꽤 마음에 든 눈치던데 어때요?
“…….”
― 왜, 이번에도 별로예요?
“사람은 좋아 보였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직이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최선영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급하다며 쫓기듯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해 놓고 번번이 퇴짜를 놓는 자신은 그녀로선 상대하고 싶지 않은 고객일 것이다.
― 흠, 도무지 짐작이 안 가요. 정연서 씨 눈에 차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까다롭게 굴고 있다는 건 아시죠?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하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싫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최선영의 입장이었으면 아마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 아무튼 약속 안 잊으셨죠? k호텔 커피숍 5시예요. 급하다고 하셔서 서두른 거니까 펑크 내면 안 돼요. 아시죠? 이번엔 부디 마음에 쏙 드시는 분 만나기를 바라 봅니다. 파이팅!
마지못해 파이팅을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에 흐릿하게 웃으며 연서는 차를 출발시켰다.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뜨겁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차창을 내리자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며 연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금을 들인 대가로 열 번의 만남을 주선받는다. 5시에 만나게 될 남자를 포함하면 벌써 여덟 번째 남자다.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더 남았다지만 과연 뜻대로 될까. 연서는 착잡해진 표정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어쩐지 이대로 끝이 날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좀처럼 편치가 않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차는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도로 위로 끼어들었다.
“하아, 무슨 차들이 이렇게 많아…….”
신호가 걸린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선 연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3시. 남자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2시간쯤 여유가 남아 있었다. 시간이 어정쩡하다. 병원에 들렀다 갈까. 피곤함에 손을 들어 목덜미를 주무르던 연서의 눈길이 길 건너편 대형 건물에 고정이 되었다.
유성 엔터테인먼트
다른 건물들에 비해 확연히 눈에 띄는 검은색 대리석 건물. 그 입구 간판에 박힌 회사 이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성이라면 아무리 연예계 쪽에 문외한인 사람이라 해도 언젠가 한 번은 들어 봤음직한 이름이다. 내로라하는 유명한 배우들이 제법 소속되어 있다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반 아이들 중에서 몇몇이 언젠가 저곳에서 오디션을 봤다고 한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고1이면 한창 연예인에 대한 동경에 몸살을 앓을 나이니까.
유성에서라면 어떤 인생도 가능합니다.
벽면에 걸린 플래카드에 쓰여 있는 신인 배우 모집 문구를 연서는 천천히 곱씹었다.
“어떤 인생도 가능하다…….”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신호는 바뀌어 있었다. 서둘러 차를 출발시키며 그녀는 병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자를 만나기로 한 5시까지는 아직 2시간이나 여유가 남아 있으니 병원에 들렀다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연서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셨을까. 코를 자극하는 단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병원 앞 노점에서 산 과일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병실을 나온 연서는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을 쳐다보다가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
예정에 없던 검사를 받으러 가신 것이 아니라면 병원 안에서 아버지가 가실 만한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또 휴게실에 앉아 문병 온 사람들을 구경하고 계시겠지. 복도를 걷는 연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의 예상처럼 아버지는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언제 오셨는지 고모가 그 옆을 지키고 앉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앉은 모습도 닮았네. 슬쩍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가던 연서는 들려오는 고모의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대체 연서한테는 언제까지 말하지 않을 셈이우?”
고모의 물음엔 근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연서는 저도 모르게 게처럼 옆으로 걸음을 옮겨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전히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이 없었다.
“오빠.”
“나, 자신이 없다.”
“연서도 알 건 알아야지. 그러다가 갑자기…….”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는 고모를 돌아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혀 와 연서는 두어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듣고 싶지 않다.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도망치는 것보다 아버지의 한숨이 더 빨랐다.
“연서. 혼자 남겨 둘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도통 잠이 안 와.”
“……오빠도 참. 연서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혼자 남겨 두긴 왜 혼자 남겨 둬요. 오빠가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세상엔 인력으로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체념하듯 중얼거리던 아버지는 저만치 테이블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그때 말이다……. 시집을 보내 버릴 걸 그랬어.”
“오빠도 참. 새삼스럽게 지나간 일은 왜 꺼내고 그래요.”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마음에 걸려. 나만 고집을 부리지 않았어도 지금쯤 저만한 아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연서 닮았으면 정말 예뻤을 텐데.”
“또 또 쓸데없는 소리한다. 그게 뭐 오빠 탓이우? 제 팔자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거지. 내가 어디 가서 물어보니까 우리 연서 아주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괜한 생각 하지 말고 얼른 나을 생각이나 해요.”
“기왕 물어보는 거 우리 연서 시집갈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수도 있나도 좀 물어보지 그랬어. 끝까지 애비 노릇은 못해도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손은 잡아 줘야 할 텐데. 우리 연서…… 드레스 입으면 제 엄마 닮아 아주 예쁠 거야. 그치?”
“언니가 젊어서 한 인물 했지. 제 엄마 닮아서 연서도 예쁠 거야. 그러니까 오빠.”
더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쳐 그곳을 빠져나오는 연서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향하였다. 눈에 띄는 빈 곳으로 들어가자마자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다. 어떡해야 할까. 대체 뭘 어떡해야 할까. 막막함에 꺽꺽거리며 연서는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1. 우연일까 인연일까
보송보송한 병아리 솜털 같은 노란 햇살이 깊게 내리쬐는 카페 안. 오후의 나른함을 깨는 왁자지껄한 손님들 사이에서 창가에 앉은 두 남녀는 유독 조용했다. 그리 무더운 날씨도 아닌데 건너편에 앉은 남자의 이마에선 몽실몽실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담담해 보이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긴장한 모습이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목에 반듯하게 매어 있는 넥타이가 참 답답하게 느껴졌다. 저렇게 단단히 매고 있으면 숨이 제대로 쉬어질까. 물끄러미 넥타이를 바라보는 연서의 시선에 남자는 앞에 놓인 물 잔을 집어 입술을 축이고는 헛기침을 몇 번 흘렸다.
“제, 제가 좀 말주변이 없어 재미가 없죠?”
순진하게 웃으며 이마를 긁적이는 남자의 모습에 연서는 들키지 않을 만큼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 같아선 가방 속에 들어 있는 손수건을 꺼내어 남자에게 건네주고 싶었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몰라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 차라리 시작도 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결국 오늘도 자신의 시간은 물론이고 죄 없는 저 남자의 시간까지 허비한 꼴이다.
날씨가 끝내주게 좋았던 주말 내내 연서는 선을 보았다. 어제는 세 잔의 차를 마셨고 두 번의 밥을 먹었으며, 오늘도 역시 겨우 점심시간을 넘겼을 뿐인데 두 번째 커피가 앞에 놓였다.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지만 이젠 속이 쓰릴 지경이다. 이런 쓸데없는 짓을 그만두어야겠지. 마음을 정리한 연서는 진땀을 흘리고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두었다.
“저기…….”
달칵하고 잔을 내려놓는 연서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더니 말끝을 흐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작지만 강남에 아파트도 한 채 있고요. 어, 어머닌 형님네서 계속 사실 테니 제가 모시지 않아도 돼요. 저는…… 연서 씨만 괜찮다면 또 만나 뵙고 싶습니다.”
서른여섯에 동네에서 제법 큰 마트를 운영한다는 남자의 고백에 연서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상기된 얼굴로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는 진심으로 자신이 마음에 든 눈치다. 그는 순수해 보였다. 아니 좀 더 솔직하자면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못할 것 같은 착해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동의를 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평생을 친구처럼 살아도 좋을지도 모르겠다……. 정말 미친 척 결혼을 해 버릴까. 잔잔하던 연서의 마음이 일렁였다.
“죄송합니다.”
연서는 마음의 갈등을 지우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제 속 편하자고 만든 계획에 남자의 진심을 이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연서의 급작스런 사과에 남자는 당황한 듯 눈을 굴렸다.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겁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왜…….”
실망을 숨기지 못하는 남자의 표정에 연서는 선뜻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저 남자는 이해해 줄까. 진짜 결혼이 필요한 게 아니라 1년짜리 남편이 필요한 거라면 어떤 얼굴을 할까.
“바쁘실 텐데 시간 빼앗아 죄송합니다.”
“이유라도 설명을…….”
이 웃기는 상황에 화를 내지도 못하고 말끝을 흐리는 남자에게 해 줄 적당한 대답을 찾았으나 그런 것이 있을 턱이 없다. 괜한 짓을 벌였다는 후회가 또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전화드릴게요.”
일어서는 연서를 따라 서둘러 몸을 일으킨 남자가 허둥지둥 주머니 안쪽에서 명함을 꺼내더니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제 손을 잡은 남자의 손은 투박하기 그지없다. 착실함으로 똘똘 뭉친 손이다.
“기다릴게요. 꼭 전화 주세요.”
가볍게 묵례를 하고 카페를 빠져나온 연서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남자가 지켜보고 있음이 느껴졌다. 남자의 마음에 괜히 상처를 남긴 것 같아 마음이 영 편하지가 않다. 차에 올라탄 연서는 운전대에 머리를 댄 채로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자 피곤함이 썰물처럼 밀려들었다. 감은 눈이 뻐근하다. 생각해 보니 벌써 며칠째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상태였다.
연서는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생각을 가다듬었다. 오늘 만나야 할 사람이 아직 한 사람이 더 남아 있었지만 어쩐지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긴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제 욕심일 뿐 세상 어디에 1년짜리 결혼을 해 줄 사람이 있을까…….
길게 한숨을 내쉬고 시동을 켜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그녀를 담당하고 있는 최선영이다. 피곤함에 지친 눈두덩을 문지르며 연서는 전화를 받았다.
“네.”
― 벌써 헤어지셨다면서요?
벌써 거기까지 소문이 퍼졌나. 참 빠르기도 하다.
“네. 그렇게 됐어요.
― 유진형 씨는 연서 씨가 꽤 마음에 든 눈치던데 어때요?
“…….”
― 왜, 이번에도 별로예요?
“사람은 좋아 보였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직이 들려오는 한숨 소리에 최선영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되었다. 급하다며 쫓기듯 사람을 소개해 달라고 해 놓고 번번이 퇴짜를 놓는 자신은 그녀로선 상대하고 싶지 않은 고객일 것이다.
― 흠, 도무지 짐작이 안 가요. 정연서 씨 눈에 차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까다롭게 굴고 있다는 건 아시죠?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였다. 하긴, 가타부타 말도 없이 싫다는데 좋아할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최선영의 입장이었으면 아마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르겠다.
― 아무튼 약속 안 잊으셨죠? k호텔 커피숍 5시예요. 급하다고 하셔서 서두른 거니까 펑크 내면 안 돼요. 아시죠? 이번엔 부디 마음에 쏙 드시는 분 만나기를 바라 봅니다. 파이팅!
마지못해 파이팅을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에 흐릿하게 웃으며 연서는 차를 출발시켰다. 에어컨에서 흘러나오는 바람이 뜨겁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차창을 내리자 바람이 밀려 들어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바닥으로 쓸며 연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금을 들인 대가로 열 번의 만남을 주선받는다. 5시에 만나게 될 남자를 포함하면 벌써 여덟 번째 남자다. 아직 두 번의 기회가 더 남았다지만 과연 뜻대로 될까. 연서는 착잡해진 표정으로 액셀러레이터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어쩐지 이대로 끝이 날 것 같은 생각에 마음이 좀처럼 편치가 않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차는 정체로 몸살을 앓고 있는 도로 위로 끼어들었다.
“하아, 무슨 차들이 이렇게 많아…….”
신호가 걸린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선 연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3시. 남자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아직 2시간쯤 여유가 남아 있었다. 시간이 어정쩡하다. 병원에 들렀다 갈까. 피곤함에 손을 들어 목덜미를 주무르던 연서의 눈길이 길 건너편 대형 건물에 고정이 되었다.
유성 엔터테인먼트
다른 건물들에 비해 확연히 눈에 띄는 검은색 대리석 건물. 그 입구 간판에 박힌 회사 이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성이라면 아무리 연예계 쪽에 문외한인 사람이라 해도 언젠가 한 번은 들어 봤음직한 이름이다. 내로라하는 유명한 배우들이 제법 소속되어 있다는 걸 들어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담임을 맡고 있는 반 아이들 중에서 몇몇이 언젠가 저곳에서 오디션을 봤다고 한 적도 있는 것 같았다. 고1이면 한창 연예인에 대한 동경에 몸살을 앓을 나이니까.
유성에서라면 어떤 인생도 가능합니다.
벽면에 걸린 플래카드에 쓰여 있는 신인 배우 모집 문구를 연서는 천천히 곱씹었다.
“어떤 인생도 가능하다…….”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신호는 바뀌어 있었다. 서둘러 차를 출발시키며 그녀는 병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남자를 만나기로 한 5시까지는 아직 2시간이나 여유가 남아 있으니 병원에 들렀다 가도 늦지 않을 것이다.
연서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를 가셨을까. 코를 자극하는 단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병원 앞 노점에서 산 과일을 냉장고에 넣어 두고 병실을 나온 연서는 바쁘게 움직이는 간호사들을 쳐다보다가 휴게실 쪽으로 향했다.
예정에 없던 검사를 받으러 가신 것이 아니라면 병원 안에서 아버지가 가실 만한 곳은 몇 군데 되지 않는다. 또 휴게실에 앉아 문병 온 사람들을 구경하고 계시겠지. 복도를 걷는 연서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녀의 예상처럼 아버지는 휴게실에 앉아 있었다. 언제 오셨는지 고모가 그 옆을 지키고 앉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 봐 앉은 모습도 닮았네. 슬쩍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가던 연서는 들려오는 고모의 목소리에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대체 연서한테는 언제까지 말하지 않을 셈이우?”
고모의 물음엔 근심이 잔뜩 서려 있었다. 연서는 저도 모르게 게처럼 옆으로 걸음을 옮겨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전히 아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이 없었다.
“오빠.”
“나, 자신이 없다.”
“연서도 알 건 알아야지. 그러다가 갑자기…….”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하는 고모를 돌아보는 아버지의 모습에 숨이 턱 막혀 와 연서는 두어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듣고 싶지 않다. 자신이 알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지만 도망치는 것보다 아버지의 한숨이 더 빨랐다.
“연서. 혼자 남겨 둘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도통 잠이 안 와.”
“……오빠도 참. 연서 들으면 서운해하겠네. 혼자 남겨 두긴 왜 혼자 남겨 둬요. 오빠가 마음 단단히 먹어야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만 세상엔 인력으로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체념하듯 중얼거리던 아버지는 저만치 테이블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가는 어린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였다.
“그때 말이다……. 시집을 보내 버릴 걸 그랬어.”
“오빠도 참. 새삼스럽게 지나간 일은 왜 꺼내고 그래요.”
“생각해 보니까 그게 마음에 걸려. 나만 고집을 부리지 않았어도 지금쯤 저만한 아이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연서 닮았으면 정말 예뻤을 텐데.”
“또 또 쓸데없는 소리한다. 그게 뭐 오빠 탓이우? 제 팔자가 그렇게 생겨 먹은 거지. 내가 어디 가서 물어보니까 우리 연서 아주 잘 먹고 잘 살겠다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괜한 생각 하지 말고 얼른 나을 생각이나 해요.”
“기왕 물어보는 거 우리 연서 시집갈 때까지 내가 살아 있을 수도 있나도 좀 물어보지 그랬어. 끝까지 애비 노릇은 못해도 결혼식장에 들어갈 때 손은 잡아 줘야 할 텐데. 우리 연서…… 드레스 입으면 제 엄마 닮아 아주 예쁠 거야. 그치?”
“언니가 젊어서 한 인물 했지. 제 엄마 닮아서 연서도 예쁠 거야. 그러니까 오빠.”
더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쳐 그곳을 빠져나오는 연서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울음이 터져 나오는 입술을 손등으로 틀어막으며 화장실로 향하였다. 눈에 띄는 빈 곳으로 들어가자마자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다. 어떡해야 할까. 대체 뭘 어떡해야 할까. 막막함에 꺽꺽거리며 연서는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