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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버지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자신에게는 알리지 말아 달라며 신신당부했다는 의사의 말에 멍해졌던 것이 불과 보름 전이었다.
아버지의 시간은 어림잡아 6개월, 아무리 길어야 1년이라 했다. 그것도 고작해야 예상일뿐.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종일 귓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았다.
실력 없는 의사가 오진을 내린 거라고 하루에도 수십 번 돌팔이 의사라는 말을 되뇌고 자려고 누운 밤중에 괜히 눈물이 나지만, 밥을 먹다가 울컥 목이 메지만, 숨을 쉬다가도 가슴이 답답해져 툭툭 두드려 줘야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함께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다 큰 어른이 웬 잔병치레를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니까. 붙들고 울 수는 없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 현실은 비겁하게도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있다.
“엄마, 시원아…….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줘.”
먼저 간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아버지 속을 무던히도 태웠던 일만이 되새김질을 하듯 떠오르고 또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착한 딸이 되어 드렸을 텐데. 그렇게 가슴 아프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해도 해도 끝없는 후회로 종일 괴로웠다.
널찍한 사무실 창 너머 도시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벽에 걸린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다.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있던 주환의 낯빛이 흐려졌다. 신문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금세 구깃구깃해져 휙, 구석으로 던져졌다.
“젠장…….”
억눌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주환은 손을 들어 머리를 헝클였다. 혹시나 했었는데 여지없이 누군가가 따라붙었다. 거리가 멀어 흐릿하긴 했어도 분명 사진 속의 주인공은 자신과 유라였다.
『약혼을 앞둔 한유라. 옛 연인과 밀회 중.』
자극적인 타이틀 문구에 저절로 미간이 확 구겨졌다.
다음 달에 약혼을 하기로 했다는 유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어 만난 날이었다. 한밤중이었고 갑자기 잡은 약속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따라붙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그건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유라와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매번 그것을 수습하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기에 조심한다고 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다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주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이정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라에 대해서라면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유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소유욕이 대단한 남자. 이 기사를 그도 분명 보았을 텐데 괜찮을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유라가 난처해질 것이다. 무슨 방법이라도 찾아야 했다.
답답해진 마음에 책상에 놓아두었던 담배를 끌어당겨 입술에 비딱하게 물고는 불을 붙였다. 전화가 울린 것은 막 한 모금을 빨아들였을 때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이정우였다.
“양반이 되긴 틀린 모양이네.”
크리스털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올려 두고 버튼을 누르자 이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다 할 인사도 생략한 채 그가 말했다.
― 좀 만나죠.
이정우가 자신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건 처음 만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유라에게 첫눈에 빠졌던 이정우로선 유라와 가깝게 지내는 남자들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특히나 몇 번 열애설까지 났던 주환은 그의 경계 대상 1호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조심해 달라고 경고했던 것 같은데 잊으셨나 봅니다.
“천만에요.”
― 좀 보죠. 해명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죠. 한 시간 후에 지난번 거기서 뵙죠.”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주환은 일이 복잡하게 돼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정우에게만은 절대 안 된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고집을 부리던 유라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유라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까. 주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쓰고 있는 건물은 두 곳이었는데 압구정에 있는 건물은 오디션을 담당하고 있어 늘 분주한 반면 이곳은 주로 사무업무와 배우들의 정산을 담당하고 있어 대체로 한가했다. 대부분이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엔 더욱 그러했다.
인사를 건네는 경비원을 지나쳐 건물 로비로 향하던 주환의 눈길이 출입문 너머 한 여자에게로 쏠렸다. 여자는 길에 선 채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여자를 바라보던 주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걸음이 느려졌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여자의 단발머리는 건강하게 반질거렸고 하얀 린넨 소재의 셔츠와 연한 갈색빛이 도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는 몹시도 단정해 보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분명 달랐지만 언뜻 보면 유라라고 생각이 될 만큼 키와 체형이 비슷한 여자였다. 머리카락이 좀 더 길고 유라가 좋아하는 시폰 소재의 원피스를 입힌다면 언뜻 착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여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정면을 바라본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유리문을 밀고 나서는 주환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건조했다. 그러다 주환을 알아본 것일까. 슬쩍 표정이 변하는 여자에게로 다가가며 주환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의 그였더라면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유라를 닮아 있었고 돌파구가 절실했던 주환은 어느새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 여자도 배우 지망생인 것일까. 주환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여기 대표 도주환입니다.”
그의 이름과 직함을 확인한 여자는 긴장된 얼굴로 명함을 만지작거리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여기 캐스팅을 담당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캐스팅? 실례지만 성함이?”
“정연서예요.”
“정연서 씨.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담당 직원은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아…….”
당황한 얼굴로 낮게 신음하는 여자를 찬찬히 훑으며 주환은 머릿속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 배우가 되기를 원하는 여자라면 오늘의 이 복잡한 스캔들을 쉽게 해결할 방도가 되어 줄 수 있을 터였다. 잠깐 애인 노릇을 해 주는 대가로 꽤 비중 있는 조연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름 없는 무명 배우에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자신과의 스캔들로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도 있을 테니 그녀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유명해질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가 제안할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디션을 보고 싶은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여자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런 거 아닙니다.”
여자는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오디션을 보려는 것이 아니고 배우를 찾고 있어요.”
배우를 찾고 있다는 말에 주환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정신없이 그려 나가던 머릿속의 그림은 깡그리 지워졌다. 너무 앞서간 모양이다.
“배우?”
“네.”
“그 일이라면 내일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낫겠군요.”
괜한 시간을 허비했다 싶어 여자를 지나치려는데 성급한 물음이 들려왔다.
“뭐 하나만 여쭤 봐도 될까요?”
“…….”
“배우는, 돈만 주면 무슨 역할이든 다 해 주나요?”
주환은 몸을 틀어 여자를 마주 보았다. 긴장을 한 듯 가방을 움켜잡은 여자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쪽 일을 처음 맡은 것일까.
“돈이라고 다 되는 건 아닙니다.”
“…….”
“어떤 배우를 찾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영화? 드라마?”
배려가 아닌 호기심. 그에 돌아온 건 여자의 간절함.
“아니요. 저는…… 몇 달 동안, 아니 1년 정도 남편 역할을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주환은 눈을 껌벅였다.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듯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가짜 남편이, 필요해요. 그런 일도 해 줄 배우가 있을까요?”
차는 한참 전부터 시동이 꺼져 있었지만 주환은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전화번호도 적혀 있지 않은 파르스름한 간판이 걸린 건물을 올려다본다. 그 안에는 곧 유라의 약혼자가 될 이정우가 스캔들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약속 시간은 딱 5분 남아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주환은 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매캐함이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든다. 이곳에 오는 동안 머릿속에 완성된 시나리오를 천천히 더듬으며 주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 스캔들과 눈앞에 나타난 한 여자. 여자에게 필요한 건 1년짜리 남편, 제게 필요한 건 이 스캔들을 무마시켜 줄 어떤 쇼. 분명한 건 둘 다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
“…….”
어쩌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유라와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을 최고의 변명이 될 수도 있다. 그 사이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생각을 멈춰야 할 때였다.
주환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지배인이 달려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앞서 안내를 하기 시작한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복도를 지나 룸 안으로 들어가자 이정우가 앉아 있었다. 들어서는 주환을 힐끗 바라본 그가 건너편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적당히 채도가 낮은 조명 속에 앉은 정우는 여유로우면서도 부드러운 태도였지만 그의 눈빛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 지난번 경고를 무시한 대가일 것이다.
쪼르륵. 술잔을 채우는 정우의 단정한 얼굴을 응시하며 주환은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회사로 다짜고짜 찾아와 유라와 사귀겠다는 선언을 하던 때가 1년 전쯤이었던가. 집안도 워낙 대단했고 능력도 뛰어나 이정우는 정·재계에서도 사윗감으로 탐을 내는 1순위였다. 처음엔 적당히 연애를 하다 유라만 상처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반대를 했었다. 그의 진심을 알 턱이 없는 이정우는 여전히 그 반대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기사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술잔을 단숨에 비워 낸 주환이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하자 정우가 건너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라 소속사 대표로서의 자격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스캔들 상대자. 정우의 눈빛이 사납다.
“기사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전 도주환 씨의 본심이 궁금한 겁니다.”
“유라는.”
“남의 여자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건 경곱니다.”
아버지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자신에게는 알리지 말아 달라며 신신당부했다는 의사의 말에 멍해졌던 것이 불과 보름 전이었다.
아버지의 시간은 어림잡아 6개월, 아무리 길어야 1년이라 했다. 그것도 고작해야 예상일뿐.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종일 귓가를 괴롭히고 있었지만 여전히 실감은 나지 않는다. 아니, 믿지 않았다.
실력 없는 의사가 오진을 내린 거라고 하루에도 수십 번 돌팔이 의사라는 말을 되뇌고 자려고 누운 밤중에 괜히 눈물이 나지만, 밥을 먹다가 울컥 목이 메지만, 숨을 쉬다가도 가슴이 답답해져 툭툭 두드려 줘야 하지만 그것 말고는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함께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다 큰 어른이 웬 잔병치레를 하느냐고 투덜거린다.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니까. 붙들고 울 수는 없으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 현실은 비겁하게도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있다.
“엄마, 시원아……. 우리 아버지 좀 살려 줘.”
먼저 간 사람들에게 매달리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동안 아버지 속을 무던히도 태웠던 일만이 되새김질을 하듯 떠오르고 또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착한 딸이 되어 드렸을 텐데. 그렇게 가슴 아프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해도 해도 끝없는 후회로 종일 괴로웠다.
널찍한 사무실 창 너머 도시는 어둠에 휩싸여 있었고 벽에 걸린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다.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아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있던 주환의 낯빛이 흐려졌다. 신문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 힘이 실리는가 싶더니 금세 구깃구깃해져 휙, 구석으로 던져졌다.
“젠장…….”
억눌린 음성으로 중얼거리며 주환은 손을 들어 머리를 헝클였다. 혹시나 했었는데 여지없이 누군가가 따라붙었다. 거리가 멀어 흐릿하긴 했어도 분명 사진 속의 주인공은 자신과 유라였다.
『약혼을 앞둔 한유라. 옛 연인과 밀회 중.』
자극적인 타이틀 문구에 저절로 미간이 확 구겨졌다.
다음 달에 약혼을 하기로 했다는 유라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고 싶어 만난 날이었다. 한밤중이었고 갑자기 잡은 약속이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따라붙으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그건 명백한 자신의 실수였다.
유라와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매번 그것을 수습하느라 진이 빠질 지경이었기에 조심한다고 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다니.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주환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이정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라에 대해서라면 머리카락 하나 건드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 유라에 대한 사랑만큼이나 소유욕이 대단한 남자. 이 기사를 그도 분명 보았을 텐데 괜찮을까.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유라가 난처해질 것이다. 무슨 방법이라도 찾아야 했다.
답답해진 마음에 책상에 놓아두었던 담배를 끌어당겨 입술에 비딱하게 물고는 불을 붙였다. 전화가 울린 것은 막 한 모금을 빨아들였을 때였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이정우였다.
“양반이 되긴 틀린 모양이네.”
크리스털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올려 두고 버튼을 누르자 이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다 할 인사도 생략한 채 그가 말했다.
― 좀 만나죠.
이정우가 자신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건 처음 만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유라에게 첫눈에 빠졌던 이정우로선 유라와 가깝게 지내는 남자들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특히나 몇 번 열애설까지 났던 주환은 그의 경계 대상 1호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연락이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조심해 달라고 경고했던 것 같은데 잊으셨나 봅니다.
“천만에요.”
― 좀 보죠. 해명이라도 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러죠. 한 시간 후에 지난번 거기서 뵙죠.”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주환은 일이 복잡하게 돼 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정우에게만은 절대 안 된다며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얼굴로 고집을 부리던 유라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유라가 상처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제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까. 주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엔터테인먼트 사옥으로 쓰고 있는 건물은 두 곳이었는데 압구정에 있는 건물은 오디션을 담당하고 있어 늘 분주한 반면 이곳은 주로 사무업무와 배우들의 정산을 담당하고 있어 대체로 한가했다. 대부분이 출근을 하지 않는 주말엔 더욱 그러했다.
인사를 건네는 경비원을 지나쳐 건물 로비로 향하던 주환의 눈길이 출입문 너머 한 여자에게로 쏠렸다. 여자는 길에 선 채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여자를 바라보던 주환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걸음이 느려졌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한 여자의 단발머리는 건강하게 반질거렸고 하얀 린넨 소재의 셔츠와 연한 갈색빛이 도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스커트는 몹시도 단정해 보였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분명 달랐지만 언뜻 보면 유라라고 생각이 될 만큼 키와 체형이 비슷한 여자였다. 머리카락이 좀 더 길고 유라가 좋아하는 시폰 소재의 원피스를 입힌다면 언뜻 착각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순간, 고개를 치켜들고 있던 여자가 시선을 느꼈는지 정면을 바라본다.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유리문을 밀고 나서는 주환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건조했다. 그러다 주환을 알아본 것일까. 슬쩍 표정이 변하는 여자에게로 다가가며 주환이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평소의 그였더라면 건물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여자는 유라를 닮아 있었고 돌파구가 절실했던 주환은 어느새 머릿속으로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 여자도 배우 지망생인 것일까. 주환은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어 내밀었다.
“여기 대표 도주환입니다.”
그의 이름과 직함을 확인한 여자는 긴장된 얼굴로 명함을 만지작거리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믿기지 않을 만큼 차분했다.
“……여기 캐스팅을 담당하시는 분을 만날 수 있을까요?”
“캐스팅? 실례지만 성함이?”
“정연서예요.”
“정연서 씨.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담당 직원은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아…….”
당황한 얼굴로 낮게 신음하는 여자를 찬찬히 훑으며 주환은 머릿속에서 완성되어 가고 있는 시나리오가 현실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 배우가 되기를 원하는 여자라면 오늘의 이 복잡한 스캔들을 쉽게 해결할 방도가 되어 줄 수 있을 터였다. 잠깐 애인 노릇을 해 주는 대가로 꽤 비중 있는 조연 자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름 없는 무명 배우에겐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더구나 자신과의 스캔들로 단숨에 이목을 집중시킬 수도 있을 테니 그녀가 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유명해질 수도 있는 기회였다. 그가 제안할 일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디션을 보고 싶은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는데 여자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런 거 아닙니다.”
여자는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오디션을 보려는 것이 아니고 배우를 찾고 있어요.”
배우를 찾고 있다는 말에 주환의 미간이 확 구겨졌다. 정신없이 그려 나가던 머릿속의 그림은 깡그리 지워졌다. 너무 앞서간 모양이다.
“배우?”
“네.”
“그 일이라면 내일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낫겠군요.”
괜한 시간을 허비했다 싶어 여자를 지나치려는데 성급한 물음이 들려왔다.
“뭐 하나만 여쭤 봐도 될까요?”
“…….”
“배우는, 돈만 주면 무슨 역할이든 다 해 주나요?”
주환은 몸을 틀어 여자를 마주 보았다. 긴장을 한 듯 가방을 움켜잡은 여자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쪽 일을 처음 맡은 것일까.
“돈이라고 다 되는 건 아닙니다.”
“…….”
“어떤 배우를 찾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됩니까? 영화? 드라마?”
배려가 아닌 호기심. 그에 돌아온 건 여자의 간절함.
“아니요. 저는…… 몇 달 동안, 아니 1년 정도 남편 역할을 해 줄 사람을 찾고 있어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주환은 눈을 껌벅였다. 그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 주듯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감겨들었다.
“가짜 남편이, 필요해요. 그런 일도 해 줄 배우가 있을까요?”
차는 한참 전부터 시동이 꺼져 있었지만 주환은 여전히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전화번호도 적혀 있지 않은 파르스름한 간판이 걸린 건물을 올려다본다. 그 안에는 곧 유라의 약혼자가 될 이정우가 스캔들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약속 시간은 딱 5분 남아 있었다.
시간을 확인한 주환은 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매캐함이 머릿속을 아찔하게 만든다. 이곳에 오는 동안 머릿속에 완성된 시나리오를 천천히 더듬으며 주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간 스캔들과 눈앞에 나타난 한 여자. 여자에게 필요한 건 1년짜리 남편, 제게 필요한 건 이 스캔들을 무마시켜 줄 어떤 쇼. 분명한 건 둘 다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것.
“…….”
어쩌면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유라와 스캔들에 휘말리지 않을 최고의 변명이 될 수도 있다. 그 사이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생각을 멈춰야 할 때였다.
주환이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지배인이 달려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앞서 안내를 하기 시작한다.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복도를 지나 룸 안으로 들어가자 이정우가 앉아 있었다. 들어서는 주환을 힐끗 바라본 그가 건너편 자리를 권했다.
“앉아요.”
적당히 채도가 낮은 조명 속에 앉은 정우는 여유로우면서도 부드러운 태도였지만 그의 눈빛은 분노를 담고 있었다. 지난번 경고를 무시한 대가일 것이다.
쪼르륵. 술잔을 채우는 정우의 단정한 얼굴을 응시하며 주환은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회사로 다짜고짜 찾아와 유라와 사귀겠다는 선언을 하던 때가 1년 전쯤이었던가. 집안도 워낙 대단했고 능력도 뛰어나 이정우는 정·재계에서도 사윗감으로 탐을 내는 1순위였다. 처음엔 적당히 연애를 하다 유라만 상처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반대를 했었다. 그의 진심을 알 턱이 없는 이정우는 여전히 그 반대의 의도를 의심하고 있었다.
“기사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술잔을 단숨에 비워 낸 주환이 정중한 태도로 사과를 하자 정우가 건너다보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유라 소속사 대표로서의 자격이라도 있었는데 이젠 스캔들 상대자. 정우의 눈빛이 사납다.
“기사 따위는 관심 없습니다. 전 도주환 씨의 본심이 궁금한 겁니다.”
“유라는.”
“남의 여자 이름을 그렇게 다정하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이건 경곱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