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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까칠하게 구는 정우의 반응에 주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사업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 유라의 일에서만큼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 제 부모의 거센 반대에서 유라를 지켜 냈을 것이다. 그런 정우의 단호함이 주환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유라가 진심으로 이 남자를 사랑했으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한유라 씨와 저는 그냥 전 소속사 대표와 배우의 관계일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
정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벌써 몇 번째 스캔들이 난 주환을 그가 곱게 볼 리 만무했다.
“그 얘기라면 지난번에도 들었습니다만.”
날 선 정우 목소리를 들으며 스트레이트 잔을 채운 주환은 매끈한 술잔을 손끝으로 쓸며 난처함에 빠졌을 유라를 떠올렸다. 어디다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오해도 깨끗하게 풀어 줄 수 없는 제 자신을 원망하며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술을 삼키자 목구멍이 찌르르하다. 다시 잔을 채우며 주환은 정연서라는 여자를 떠올렸다. 정연서와 한유라. 이 일을 무마시키려면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결혼이란 이름의 쇼일지라도.
“저도, 결혼을 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환의 뜻밖의 선언에 정우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결혼?”
“곧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 기사를 보시면 이 오해가 모두 풀릴 겁니다.”
정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환을 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선언이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상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축하드립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드리죠.”
정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주환은 느리게 이정우의 손을 쥐었다. 그가 골라 주었던 커플링이 정우의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청첩장은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하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주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더 이상 유라와 스캔들이 나거나 그녀의 결혼에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은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2. 같이 갈까요?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 안.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그곳에 주환이 앉아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그 상태였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생각에 빠져 있던 주환이 손을 뻗어 툭 마우스를 건드리자 모니터 화면이 밝아지며 그가 보고 있었던 사진 한 장이 드러났다. 그건 검색을 하다가 어느 블로그에서 발견한 사진이었다. 블로그는 어제 저녁 만났던 정연서란 여자의 것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학생들과 교류를 하느라 사용한 듯한 블로그엔 여러 장의 사진이 있었다. 봄으로 보이는 계절에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도 있었고 졸업사진도 있었다.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를 따르던 제자들이 댓글을 남겼고 이런저런 소통의 창구로 사용을 하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클릭을 하자 가장 최근에 올린 글이 보였다.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데…….’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글은 단 한 줄뿐이었다.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라…….”
주환은 주머니를 뒤적여 어젯밤 여자에게 받아 둔 연락처를 꺼내 들었다. 가짜 남편을 구하는 교사라. 의문이 깊어졌다. 마땅한 사람을 찾으면 연락을 달라며 남기고 간 그녀의 전화번호를 톡톡 건드리며 주환은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조건은 하나였다. 1년 정도 진짜처럼 보여 줄 결혼 생활을 해 줄 남자라면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했다. 그 말은 자신이 그 상대여도 괜찮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파구가 필요한 자신에겐 치명적인 유혹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스캔들을 덮을 상대가 필요한 자신과 가짜 남편이 필요한 정연서는 서로에게 더없이 만족스러운 조건이 되어 줄 것이다. 서로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말이다.
한참을 앉아 있던 주환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그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용건을 꺼내었다.
“사람 하나만 알아봐 줘. 정연서. A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대.”
여자의 신상 명세를 알려 주며 마우스를 움직여 인터넷을 클릭하자 메인화면에 유라의 이름이 보였다. 이번 스캔들로 파경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악의적인 기사였다.
행복하다고 웃던 유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행복한 미소를 지켜 주려면 이번 스캔들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정연서를 자신의 연인으로 내세워 유라가 아닌 정연서와 그 호숫가에 갔던 걸로 기사를 새로 뿌리고 최초의 유포자를 고소하면 어느 정도 사태는 진정이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알아봐 줘. 남자관계나 경제 사정이 어떤지. 과거의 전적들까지 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난 주환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기사부터 흘려도 괜찮을까? 설마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워 버리는 일은 없겠지. 궁지에 몰린 자신이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주환은 여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정연서라…….”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야트막한 산비탈로 쏟아지는 태양은 몹시도 뜨거웠다. 분명 봄이라 믿었던 계절은 여름의 성화에 일찌감치 물러나고 더위가 찾아왔다. 하루가 다르게 미친 듯이 올라가는 기온 때문인지 붉은 파라솔 아래 앉은 여자의 코끝엔 땀이 솟아 있었다. 시원한 실내에 앉을 것을 그랬나, 주환은 잠깐 딴생각을 했다. 갈증이 나는지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켠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환의 시선이 머쓱한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깐이었지만 마주친 눈동자는 참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했다.
여자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160을 겨우 넘을 것 같은 키에 목덜미를 덮는 단발머리. 서른이라고 했던가. 스물다섯의 유라와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여자는 어려 보였다. 화장은 전혀 안 한 것일까. 뺨에 난 몇 개의 주근깨까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피부를 지나 적당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를 훑고 내려온 주환의 시선이 하늘색 셔츠 사이에서 잠시 멈추었다. 적당히 흰 목덜미에서 빛나고 있는 네잎클로버 펜던트가 그녀와 꽤 잘 어울렸다.
여자를 가늠하듯 찬찬히 훑어 내린 주환은 긴 손가락 사이 컵을 끼워 빙그르 돌렸다. 10분 전쯤 내온 얼음 가득한 커피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다.
“그분을 언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여자는 적당한 사람을 구했다는 주환의 연락에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왔다. 급하긴 꽤 급했던 모양이다. 여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탐색을 마친 주환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던 그는 눈썹을 씰룩이며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다.
“전 괜찮아요.”
눈치 하나는 빠르군.
담뱃불을 붙이고 주환은 연서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정연서의 신상을 조사한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녀의 설명대로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부터 교편을 잡고 있었고 뭐 하나 딱히 흠이 될 만한 것도 없을 정도로 신변에 관한 것들은 깨끗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왜 이런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의 느른한 음성에 여자의 반달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것까지 설명을 드려야 하나요?”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 어떻게 대처를 할지 생각을 할 것 아닙니까?”
“그 부분은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흐음. 미묘한 소리를 낮게 내며 주환은 몸을 테이블 가까이로 당긴 채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곤란한 순간에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다.
“그럼 이야기해 봐요.”
“…….”
“그 당사자 여기 있으니까 말해 봐요.”
구했다는 적임자가 주환이라는 말에 좀 놀랐는지 연서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장난하시는 거예요?”
“정연서 씨 눈엔 내가 장난이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
“제 소개를 먼저 하죠. 서른두 살. 유성 엔터테인먼트 대표. 어머니가 계시긴 하지만 이 결혼 생활이 끝나기 전엔 절대 만날 일은 없을 것이고 형제…… 없음. 누구 하나 터치할 사람도 없는데 한 1년쯤 데리고 살다 버리기엔 나란 사람, 더 없이 좋은 조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농담으로 듣기엔 주환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런 장난을 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
자신이야 아버지 때문이라지만 이 남자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려는 것일까.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순간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사람처럼 주환은 슬쩍 입술을 늘였다.
“그런 이상한 얼굴 하지 말아요. 나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럽니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요?”
이 남자와의 결혼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연서의 마음을 흔든 것은 그 한마디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이 거짓 결혼에 동참하고 싶다는 남자의 사정. 그 마음을 연서는 어쩐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나요?”
그 순간 연서를 바라보는 주환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연서는 그 낯설지 않은 느낌에 가슴이 싸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가방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지만 연서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주환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믿기 힘들지만 그의 간절함이 거짓말처럼 손끝에 만져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고 있었다.
종례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온 연서는 출석부를 놓아두고 자리에 앉자마자 모니터 화면을 켰다. 수업을 하는 중간에도 자꾸만 딴생각이 들어 몇 번이나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하루가 엉망이었다. 자판을 두드려 종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남자의 이름을 검색한 다음 서랍을 뒤적여 두통약 한 알을 찾아 물과 함께 삼키었다. 두통이 점심 무렵부터 괴롭히고 있었다.
화면 제일 위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꽤 유명한 배우였으나 현재는 유성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는 약력이 적혀 있었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마우스를 클릭하던 연서의 시선이 화면에 뜬 사진 하나를 보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주환과 한유라의 스캔들 기사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가 지키고 싶다는 사람이 이 여자구나. 한때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 정도로 대단한 배우인 한유라. 얼마 전 엄청난 재벌가 남자와 열애설에 휩싸인 이 여자를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해서라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일까.
까칠하게 구는 정우의 반응에 주환은 희미하게 웃었다. 사업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냉철한 사람이 유라의 일에서만큼은 그러지 못한다. 그러니 제 부모의 거센 반대에서 유라를 지켜 냈을 것이다. 그런 정우의 단호함이 주환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유라가 진심으로 이 남자를 사랑했으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한유라 씨와 저는 그냥 전 소속사 대표와 배우의 관계일 뿐 더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
정우는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와 벌써 몇 번째 스캔들이 난 주환을 그가 곱게 볼 리 만무했다.
“그 얘기라면 지난번에도 들었습니다만.”
날 선 정우 목소리를 들으며 스트레이트 잔을 채운 주환은 매끈한 술잔을 손끝으로 쓸며 난처함에 빠졌을 유라를 떠올렸다. 어디다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의 오해도 깨끗하게 풀어 줄 수 없는 제 자신을 원망하며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술을 삼키자 목구멍이 찌르르하다. 다시 잔을 채우며 주환은 정연서라는 여자를 떠올렸다. 정연서와 한유라. 이 일을 무마시키려면 확실한 무언가가 필요하다. 비록 그것이 결혼이란 이름의 쇼일지라도.
“저도, 결혼을 하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주환의 뜻밖의 선언에 정우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결혼?”
“곧 기사가 나갈 겁니다. 그 기사를 보시면 이 오해가 모두 풀릴 겁니다.”
정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환을 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선언이 이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반가운 소식이군요. 상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단은 축하드립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드리죠.”
정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주환은 느리게 이정우의 손을 쥐었다. 그가 골라 주었던 커플링이 정우의 손가락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청첩장은 꼭 보내 드리겠습니다.”
오늘 처음 만난 낯선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하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주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더 이상 유라와 스캔들이 나거나 그녀의 결혼에 방해가 되지 않을 테니까. 자신은 그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2. 같이 갈까요?
어둠이 내려앉은 사무실 안. 불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그곳에 주환이 앉아 있었다. 벌써 몇 시간째 그 상태였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채 생각에 빠져 있던 주환이 손을 뻗어 툭 마우스를 건드리자 모니터 화면이 밝아지며 그가 보고 있었던 사진 한 장이 드러났다. 그건 검색을 하다가 어느 블로그에서 발견한 사진이었다. 블로그는 어제 저녁 만났던 정연서란 여자의 것이었다.
꽤 오래전부터 학생들과 교류를 하느라 사용한 듯한 블로그엔 여러 장의 사진이 있었다. 봄으로 보이는 계절에 소풍을 가서 찍은 사진도 있었고 졸업사진도 있었다. 그냥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를 따르던 제자들이 댓글을 남겼고 이런저런 소통의 창구로 사용을 하는 모양이었다. 손가락을 움직여 클릭을 하자 가장 최근에 올린 글이 보였다.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데…….’라는 의미심장한 제목의 글은 단 한 줄뿐이었다.
「자신이 없다.」
“자신이 없다라…….”
주환은 주머니를 뒤적여 어젯밤 여자에게 받아 둔 연락처를 꺼내 들었다. 가짜 남편을 구하는 교사라. 의문이 깊어졌다. 마땅한 사람을 찾으면 연락을 달라며 남기고 간 그녀의 전화번호를 톡톡 건드리며 주환은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의 조건은 하나였다. 1년 정도 진짜처럼 보여 줄 결혼 생활을 해 줄 남자라면 상대가 누구이든 상관없다 했다. 그 말은 자신이 그 상대여도 괜찮다는 뜻이기도 했다. 돌파구가 필요한 자신에겐 치명적인 유혹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스캔들을 덮을 상대가 필요한 자신과 가짜 남편이 필요한 정연서는 서로에게 더없이 만족스러운 조건이 되어 줄 것이다. 서로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말이다.
한참을 앉아 있던 주환은 수화기를 집어 들고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자 그는 간단한 안부 인사를 나눈 후 용건을 꺼내었다.
“사람 하나만 알아봐 줘. 정연서. A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고 있대.”
여자의 신상 명세를 알려 주며 마우스를 움직여 인터넷을 클릭하자 메인화면에 유라의 이름이 보였다. 이번 스캔들로 파경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다는 악의적인 기사였다.
행복하다고 웃던 유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행복한 미소를 지켜 주려면 이번 스캔들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정연서를 자신의 연인으로 내세워 유라가 아닌 정연서와 그 호숫가에 갔던 걸로 기사를 새로 뿌리고 최초의 유포자를 고소하면 어느 정도 사태는 진정이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빨리 알아봐 줘. 남자관계나 경제 사정이 어떤지. 과거의 전적들까지 될 수 있는 한 자세하게.”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난 주환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그나저나 어떤 여자인지도 모르는데 기사부터 흘려도 괜찮을까? 설마 벼룩을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다 태워 버리는 일은 없겠지. 궁지에 몰린 자신이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 아니기만을 바라며 주환은 여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정연서라…….”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야트막한 산비탈로 쏟아지는 태양은 몹시도 뜨거웠다. 분명 봄이라 믿었던 계절은 여름의 성화에 일찌감치 물러나고 더위가 찾아왔다. 하루가 다르게 미친 듯이 올라가는 기온 때문인지 붉은 파라솔 아래 앉은 여자의 코끝엔 땀이 솟아 있었다. 시원한 실내에 앉을 것을 그랬나, 주환은 잠깐 딴생각을 했다. 갈증이 나는지 물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켠 여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환의 시선이 머쓱한지 이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잠깐이었지만 마주친 눈동자는 참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덤덤했다.
여자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160을 겨우 넘을 것 같은 키에 목덜미를 덮는 단발머리. 서른이라고 했던가. 스물다섯의 유라와 친구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여자는 어려 보였다. 화장은 전혀 안 한 것일까. 뺨에 난 몇 개의 주근깨까지 다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피부를 지나 적당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를 훑고 내려온 주환의 시선이 하늘색 셔츠 사이에서 잠시 멈추었다. 적당히 흰 목덜미에서 빛나고 있는 네잎클로버 펜던트가 그녀와 꽤 잘 어울렸다.
여자를 가늠하듯 찬찬히 훑어 내린 주환은 긴 손가락 사이 컵을 끼워 빙그르 돌렸다. 10분 전쯤 내온 얼음 가득한 커피는 어느새 바닥을 보이고 있다.
“그분을 언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여자는 적당한 사람을 구했다는 주환의 연락에 한달음에 여기까지 달려왔다. 급하긴 꽤 급했던 모양이다. 여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탐색을 마친 주환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불을 붙이려던 그는 눈썹을 씰룩이며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았다.
“전 괜찮아요.”
눈치 하나는 빠르군.
담뱃불을 붙이고 주환은 연서를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 정연서의 신상을 조사한 지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녀의 설명대로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부터 교편을 잡고 있었고 뭐 하나 딱히 흠이 될 만한 것도 없을 정도로 신변에 관한 것들은 깨끗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왜 이런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그의 느른한 음성에 여자의 반달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것까지 설명을 드려야 하나요?”
“적어도 이유는 알아야 어떻게 대처를 할지 생각을 할 것 아닙니까?”
“그 부분은 당사자와 직접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흐음. 미묘한 소리를 낮게 내며 주환은 몸을 테이블 가까이로 당긴 채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 곤란한 순간에 나타나는 그의 버릇이다.
“그럼 이야기해 봐요.”
“…….”
“그 당사자 여기 있으니까 말해 봐요.”
구했다는 적임자가 주환이라는 말에 좀 놀랐는지 연서는 한참이나 말이 없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장난하시는 거예요?”
“정연서 씨 눈엔 내가 장난이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
“제 소개를 먼저 하죠. 서른두 살. 유성 엔터테인먼트 대표. 어머니가 계시긴 하지만 이 결혼 생활이 끝나기 전엔 절대 만날 일은 없을 것이고 형제…… 없음. 누구 하나 터치할 사람도 없는데 한 1년쯤 데리고 살다 버리기엔 나란 사람, 더 없이 좋은 조건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농담으로 듣기엔 주환은 더없이 진지했다. 그의 말마따나 이런 장난을 치고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
자신이야 아버지 때문이라지만 이 남자는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하려는 것일까. 대체 무슨 이유로. 그 순간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사람처럼 주환은 슬쩍 입술을 늘였다.
“그런 이상한 얼굴 하지 말아요. 나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럽니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요?”
이 남자와의 결혼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연서의 마음을 흔든 것은 그 한마디였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이 거짓 결혼에 동참하고 싶다는 남자의 사정. 그 마음을 연서는 어쩐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사람이 누군지 말해 줄 수 있나요?”
그 순간 연서를 바라보는 주환의 눈빛이 아득해졌다. 연서는 그 낯설지 않은 느낌에 가슴이 싸해졌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가방 안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지만 연서는 전화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였다. 주환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믿기 힘들지만 그의 간절함이 거짓말처럼 손끝에 만져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고 있었다.
종례를 마치고 교무실로 돌아온 연서는 출석부를 놓아두고 자리에 앉자마자 모니터 화면을 켰다. 수업을 하는 중간에도 자꾸만 딴생각이 들어 몇 번이나 실수를 하고 말았다. 하루가 엉망이었다. 자판을 두드려 종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남자의 이름을 검색한 다음 서랍을 뒤적여 두통약 한 알을 찾아 물과 함께 삼키었다. 두통이 점심 무렵부터 괴롭히고 있었다.
화면 제일 위에는 그의 사진과 함께 꽤 유명한 배우였으나 현재는 유성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는 약력이 적혀 있었다.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며 마우스를 클릭하던 연서의 시선이 화면에 뜬 사진 하나를 보고 미세하게 흔들렸다. 도주환과 한유라의 스캔들 기사가 끝도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가 지키고 싶다는 사람이 이 여자구나. 한때 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휩쓸 정도로 대단한 배우인 한유라. 얼마 전 엄청난 재벌가 남자와 열애설에 휩싸인 이 여자를 그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해서라도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