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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정 선생, 퇴근 안 해?”
옆자리를 쓰고 있는 김 선생이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바람에 흠칫 놀란 연서는 기사를 끄며 돌아보았다.
“저녁 먹기로 했는데 정 선생도 낄래?”
책상을 정리하며 틈틈이 핸드폰 문자를 확인하는 김 선생의 제안에 연서는 난처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쩌죠.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곤란하겠어요.”
“그래? 할 수 없지 뭐. 나 먼저 갈게.”
“죄송해요. 나중에 맛있는 저녁 한번 살게요. 들어가세요.”
김 선생이 떠난 후 다시 모니터를 응시하던 연서는 가방을 열고 이틀 전 주환에게서 받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엔 똑같은 내용이 적힌 두 장의 종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계약에 관한 내용이었다. 검토해 보고 연락을 달라던 주환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무슨 사업계획서를 짜듯 꽤 디테일하게 짜인 그의 제안서를 들여다보며 연서는 슬쩍 콧등을 찡그렸다. A4용지에는 그들이 결혼 생활 동안 지켜야 할 수칙들이 조목조목 쓰여 있었다.
결혼기간은 그녀가 원했던 1년. 개인적인 사생활은 최대한 존중하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함께 부부로 지내는 동안만큼은 절대 스캔들은 일으키지 않을 것. 헤어질 때의 명분은 그 흔한 성격 차이로 하자는 내용까지 열거된 종이를 죽 훑으며 연서는 문득 그가 궁금해졌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한유라를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라면 왜 그녀를 차지하지 않은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답답해진 연서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잠시 눈을 감고 결심을 하던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 남자의 사정까지 헤아려 주기엔 제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신호가 가자 곧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도주환입니다.
“정연서예요. 오늘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뇨. 제가 움직일게요. 네. 네. 거기 알아요. 이따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연서는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아직 전화기를 내려놓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괜찮아. 1년은 금방 지나 버릴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방을 챙겨 든 연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서류 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 생활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겠지만 그녀가 아버지를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신과 아버지의 마음에 남은 무거운 짐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다면 그깟 1년쯤, 기꺼이 연극처럼 살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아버지가 오래오래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평생을 연극하며 살아야 한다 해도 기꺼이 그렇게 살 것이다.
레스토랑 이름치고는 조금 진부하다 싶은 ‘무랑루즈’ 앞에 도착한 연서는 간판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름에 걸맞게 지붕엔 작고 붉은 풍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제 기능을 하며 돌아가긴 할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자 은은한 재즈 음악이 들려왔다. 흑인 여자가 부를 법한 풍성한 소울이 느껴지는 음악은 어두컴컴한 조명과도 잘 어울렸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플로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여긴 분명 레스토랑이라고 했는데 클럽이었던가.
“어서 오세요. 일행이 있으신가요?”
내부를 둘러보며 잠깐 딴생각에 빠져 있던 연서의 귓가에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핸섬한 젊은 남자였다.
“도주환 씨를 만나기로 했는데요.”
주환을 찾는 말에 키가 제법 큰 남자는 연서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그는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게 웃으며 안쪽으로 연서를 안내했다.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거기에 주환이 있었다. 그는 창가 쪽에 앉아 있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그는 묵례를 하고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맞은편에 앉아 그가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연서는 앞에 놓인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프랑스 요리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지 메뉴판 한 면은 온통 불어로 적혀 있었다.
“원래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들어가 있는 우리 쪽 사람들 전부 계약 파기하겠다고 전해. 거기 아니어도 자리는 많아. 아니, 다시 협상할 것 없어. 그래. 이따 다시 통화하지.”
통화를 하고 있는 주환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차분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그의 목소리엔 뭐랄까, 무게감 같은 것이 있었다. 절대 허투루 농담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미안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괜찮아요.”
주환이 한참 만에 통화를 마치고 나자 그녀를 안내했던 남자가 돌아와 주문을 받았다. 가벼운 샐러드 종류로 주문을 한 연서의 메뉴를 살피던 주환이 슬쩍 미간을 찡그리더니 몇 가지를 더 추가로 주문했다.
“지난번엔 소스가 너무 진했어. 좀 묽게 부탁해.”
“까탈스럽기는. 알았다.”
친근한 말투에 연서는 두 사람이 꽤 친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멀어지고 둘만 남게 되자 주환은 연서를 똑바로 응시했다.
“날씨가 꽤 덥죠?”
주환의 물음에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답잖은 이야기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들어갈까요? 피차 목적이 있어서 만난 사람들인데 괜히 뜸 들일 필요 없잖습니까.”
“그러죠. 저도 다시 병원에 들어가 봐야 해서 시간이 여유 있지는 않아요.”
연서는 가방에서 반으로 접힌 서류 봉투를 꺼내어 주환에게 밀었다. 주환 역시 그 봉투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자신이 건넨 것이었으므로.
“병원? 어디 아픕니까?”
“…….”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연서의 침묵이 길어졌다. 주환은 의자 팔걸이에 지그시 몸을 기댄 채 연서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좀 편찮으세요. 그래서 결혼을 하려는 거예요.”
“아버지 때문이라……. 솔직히 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꼭 가짜 결혼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주환의 말에 연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대답하기 곤란하면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의사는.”
연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을 때 주환의 눈빛이 흔들렸다.
“길어야 몇 달이라고 하더군요.”
“…….”
“내가 울며 매달려도 어떻게 도와줄 방법은 없다더군요.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겁이 날 정도로 짧았어요.”
연서의 목소리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덤덤했다. 처음 봤을 때 연서에게서 느껴지던 그 쓸쓸함을 떠올리며 주환은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아버지 마지막 소원은…….”
내내 차분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힘에 겨운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거구나. 연서를 바라보는 주환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제 결혼식에 손을 잡고 들어가는 거예요. 고작 그게 남은 소원이시래요.”
“아버지가 따님을 끔찍이 사랑하시는군요.”
이해한다는 듯 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오래오래 사시게 해 드리고 싶지만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일은 신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니까요.”
“…….”
“그러는 그쪽은 왜 이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나요?”
생각에 잠겨 있던 주환의 시선이 연서를 지나쳐 창밖으로 향하였다.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이혼했다는 꼬리표를 달고서 이곳에 앉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날 한유라와의 스캔들에서 구제해 주는 일.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정확하게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을 말해 주시죠.”
여자는 분명 눈치가 빨랐다. 돌아가는 것보다 한 번에 이야기를 끝내는 편이 쉬울지도 모른다.
“혹시 한유라 닮았다는 소리 한 번도 안 들어 봤습니까?”
“아주 가끔요.”
“헤어스타일과 분위기를 조금 바꾸면 꽤 비슷할 것 같군요.”
“한유라 씨의 대역이 되어 드려야 하나요?”
“아니라고는 안 합니다. 눈속임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잠깐이면 됩니다. 정연서 씨가 아버지에게 보여 줄 가짜 남편이 필요하듯 나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아내가 필요한 겁니다. 정연서 씨는 그냥 내 아내라는 사람으로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로, 나를 사랑하는 여자로 보여지기만 하면 되는 거죠.”
주환의 설명에 연서의 표정이 슬쩍 찡그러졌지만 싫다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주환에게 선택할 여지가 없듯 그녀도 그럴 것이다.
“다른 여배우라도 충분히 구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나는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뜨고 싶어 안달이 난 배우를 데려다 그런 배역을 맡겼다간 평생 시달릴지도 모르는데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왕이면 똑같은 처지의 사람이 낫죠.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연서는 제 앞에 하나둘 놓이는 접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움푹 들어간 원형 그릇에 담아진 샐러드와 참숯 향기가 물씬 풍기는 스테이크.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접시가 또 놓였다. 정말 이걸 다 먹을 생각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 주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포크를 들었다.
“내가 보기보다 많이 먹어요. 배고픈데 일단 먹죠. 맛은 꽤 좋을 겁니다.”
이른 시간은 아닌 탓에 연서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샐러드는 신선했고 그가 지적했던 소스의 맛은 훌륭했다. 적당히 잘 익은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에 올려 주는 주환을 슬쩍 바라본 연서는 포크로 스테이크 조각을 찍어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이미 여러 날이 지나 있어서 언제까지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집은 어떻게 할까요?”
“연서 씨 계획이 뭐였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버지랑 함께 지내고 있어서 한 1년쯤 작은 아파트 세를 얻을까 생각 중이었어요. 아무래도 실제 결혼처럼 보이려면 신혼집을 꾸며야 할 테니까요. 집 가까운 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은 뭘 어떡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연서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늘어놓은 말에 주환이 골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잠시 후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괜히 무리를 할 거 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요? 그쪽 한 명쯤 더 들어온다고 해도 좁지는 않을 테고 어차피 2층 그냥 비어 있는데.”
주환의 제의에 연서는 싱싱한 방울토마토를 입안에서 터트리며 슬쩍 이마를 찡그렸다. 배우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몇 년 동안 넣던 적금을 해약했다. 집도 얻어야 할 테고 상대에게 지불할 비용도 마련을 해야 했으니까.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그 값은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 걸까.
“정 선생, 퇴근 안 해?”
옆자리를 쓰고 있는 김 선생이 불쑥 고개를 들이미는 바람에 흠칫 놀란 연서는 기사를 끄며 돌아보았다.
“저녁 먹기로 했는데 정 선생도 낄래?”
책상을 정리하며 틈틈이 핸드폰 문자를 확인하는 김 선생의 제안에 연서는 난처한 얼굴을 해 보였다.
“어쩌죠.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곤란하겠어요.”
“그래? 할 수 없지 뭐. 나 먼저 갈게.”
“죄송해요. 나중에 맛있는 저녁 한번 살게요. 들어가세요.”
김 선생이 떠난 후 다시 모니터를 응시하던 연서는 가방을 열고 이틀 전 주환에게서 받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 봉투 안엔 똑같은 내용이 적힌 두 장의 종이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계약에 관한 내용이었다. 검토해 보고 연락을 달라던 주환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무슨 사업계획서를 짜듯 꽤 디테일하게 짜인 그의 제안서를 들여다보며 연서는 슬쩍 콧등을 찡그렸다. A4용지에는 그들이 결혼 생활 동안 지켜야 할 수칙들이 조목조목 쓰여 있었다.
결혼기간은 그녀가 원했던 1년. 개인적인 사생활은 최대한 존중하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함께 부부로 지내는 동안만큼은 절대 스캔들은 일으키지 않을 것. 헤어질 때의 명분은 그 흔한 성격 차이로 하자는 내용까지 열거된 종이를 죽 훑으며 연서는 문득 그가 궁금해졌다. 이렇게까지 해서라도 한유라를 지켜 주고 싶었던 것이라면 왜 그녀를 차지하지 않은 것일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답답해진 연서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었다. 잠시 눈을 감고 결심을 하던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집어 들었다. 그 남자의 사정까지 헤아려 주기엔 제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신호가 가자 곧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네, 도주환입니다.
“정연서예요. 오늘 좀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뇨. 제가 움직일게요. 네. 네. 거기 알아요. 이따 뵙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연서는 이게 정말 잘하는 짓인가 싶었다. 아직 전화기를 내려놓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괜찮아. 1년은 금방 지나 버릴 거야.”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가방을 챙겨 든 연서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서류 봉투를 꽉 움켜쥐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 생활을 하겠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겠지만 그녀가 아버지를 위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신과 아버지의 마음에 남은 무거운 짐이 조금이라도 덜어질 수 있다면 그깟 1년쯤, 기꺼이 연극처럼 살아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아버지가 오래오래 곁에 남을 수만 있다면 평생을 연극하며 살아야 한다 해도 기꺼이 그렇게 살 것이다.
레스토랑 이름치고는 조금 진부하다 싶은 ‘무랑루즈’ 앞에 도착한 연서는 간판을 올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이름에 걸맞게 지붕엔 작고 붉은 풍차가 세워져 있었는데 제 기능을 하며 돌아가긴 할지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계단을 이용해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자 은은한 재즈 음악이 들려왔다. 흑인 여자가 부를 법한 풍성한 소울이 느껴지는 음악은 어두컴컴한 조명과도 잘 어울렸다.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넓은 플로어가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다. 여긴 분명 레스토랑이라고 했는데 클럽이었던가.
“어서 오세요. 일행이 있으신가요?”
내부를 둘러보며 잠깐 딴생각에 빠져 있던 연서의 귓가에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핸섬한 젊은 남자였다.
“도주환 씨를 만나기로 했는데요.”
주환을 찾는 말에 키가 제법 큰 남자는 연서를 빠르게 훑어보더니 씩 웃었다. 그는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나게 웃으며 안쪽으로 연서를 안내했다.
“환영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남자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거기에 주환이 있었다. 그는 창가 쪽에 앉아 있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그는 묵례를 하고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맞은편에 앉아 그가 통화를 마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연서는 앞에 놓인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프랑스 요리를 전문으로 하고 있는지 메뉴판 한 면은 온통 불어로 적혀 있었다.
“원래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들어가 있는 우리 쪽 사람들 전부 계약 파기하겠다고 전해. 거기 아니어도 자리는 많아. 아니, 다시 협상할 것 없어. 그래. 이따 다시 통화하지.”
통화를 하고 있는 주환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차분했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그의 목소리엔 뭐랄까, 무게감 같은 것이 있었다. 절대 허투루 농담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지 모른다.
“미안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괜찮아요.”
주환이 한참 만에 통화를 마치고 나자 그녀를 안내했던 남자가 돌아와 주문을 받았다. 가벼운 샐러드 종류로 주문을 한 연서의 메뉴를 살피던 주환이 슬쩍 미간을 찡그리더니 몇 가지를 더 추가로 주문했다.
“지난번엔 소스가 너무 진했어. 좀 묽게 부탁해.”
“까탈스럽기는. 알았다.”
친근한 말투에 연서는 두 사람이 꽤 친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멀어지고 둘만 남게 되자 주환은 연서를 똑바로 응시했다.
“날씨가 꽤 덥죠?”
주환의 물음에 연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답잖은 이야기는 생략하고 본론부터 들어갈까요? 피차 목적이 있어서 만난 사람들인데 괜히 뜸 들일 필요 없잖습니까.”
“그러죠. 저도 다시 병원에 들어가 봐야 해서 시간이 여유 있지는 않아요.”
연서는 가방에서 반으로 접힌 서류 봉투를 꺼내어 주환에게 밀었다. 주환 역시 그 봉투 안에 뭐가 들었는지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자신이 건넨 것이었으므로.
“병원? 어디 아픕니까?”
“…….”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연서의 침묵이 길어졌다. 주환은 의자 팔걸이에 지그시 몸을 기댄 채 연서를 바라보았다.
“지난번엔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좀 편찮으세요. 그래서 결혼을 하려는 거예요.”
“아버지 때문이라……. 솔직히 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꼭 가짜 결혼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주환의 말에 연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일까.
“대답하기 곤란하면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의사는.”
연서가 덤덤하게 입을 열었을 때 주환의 눈빛이 흔들렸다.
“길어야 몇 달이라고 하더군요.”
“…….”
“내가 울며 매달려도 어떻게 도와줄 방법은 없다더군요.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겁이 날 정도로 짧았어요.”
연서의 목소리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덤덤했다. 처음 봤을 때 연서에게서 느껴지던 그 쓸쓸함을 떠올리며 주환은 의자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이야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아버지 마지막 소원은…….”
내내 차분하게 이어지던 목소리가 힘에 겨운 듯 파르르 떨고 있었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거구나. 연서를 바라보는 주환의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제 결혼식에 손을 잡고 들어가는 거예요. 고작 그게 남은 소원이시래요.”
“아버지가 따님을 끔찍이 사랑하시는군요.”
이해한다는 듯 주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분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어요. 마음 같아서는 오래오래 사시게 해 드리고 싶지만 목숨을 살리고 죽이는 일은 신의 몫이지 내 몫이 아니니까요.”
“…….”
“그러는 그쪽은 왜 이 결혼을 하려고 하는지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나요?”
생각에 잠겨 있던 주환의 시선이 연서를 지나쳐 창밖으로 향하였다.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내년 이맘때쯤이면 이혼했다는 꼬리표를 달고서 이곳에 앉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날 한유라와의 스캔들에서 구제해 주는 일. 내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정확하게 제가 해야 하는 역할을 말해 주시죠.”
여자는 분명 눈치가 빨랐다. 돌아가는 것보다 한 번에 이야기를 끝내는 편이 쉬울지도 모른다.
“혹시 한유라 닮았다는 소리 한 번도 안 들어 봤습니까?”
“아주 가끔요.”
“헤어스타일과 분위기를 조금 바꾸면 꽤 비슷할 것 같군요.”
“한유라 씨의 대역이 되어 드려야 하나요?”
“아니라고는 안 합니다. 눈속임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잠깐이면 됩니다. 정연서 씨가 아버지에게 보여 줄 가짜 남편이 필요하듯 나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아내가 필요한 겁니다. 정연서 씨는 그냥 내 아내라는 사람으로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로, 나를 사랑하는 여자로 보여지기만 하면 되는 거죠.”
주환의 설명에 연서의 표정이 슬쩍 찡그러졌지만 싫다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주환에게 선택할 여지가 없듯 그녀도 그럴 것이다.
“다른 여배우라도 충분히 구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나는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뜨고 싶어 안달이 난 배우를 데려다 그런 배역을 맡겼다간 평생 시달릴지도 모르는데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기왕이면 똑같은 처지의 사람이 낫죠. 안 그렇습니까, 선생님?”
때마침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연서는 제 앞에 하나둘 놓이는 접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움푹 들어간 원형 그릇에 담아진 샐러드와 참숯 향기가 물씬 풍기는 스테이크.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접시가 또 놓였다. 정말 이걸 다 먹을 생각이냐고 묻는 듯한 표정에 주환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포크를 들었다.
“내가 보기보다 많이 먹어요. 배고픈데 일단 먹죠. 맛은 꽤 좋을 겁니다.”
이른 시간은 아닌 탓에 연서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다. 샐러드는 신선했고 그가 지적했던 소스의 맛은 훌륭했다. 적당히 잘 익은 스테이크를 썰어 접시에 올려 주는 주환을 슬쩍 바라본 연서는 포크로 스테이크 조각을 찍어 입에 넣고는 우물거렸다. 이미 여러 날이 지나 있어서 언제까지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집은 어떻게 할까요?”
“연서 씨 계획이 뭐였는지 물어봐도 됩니까.”
“아버지랑 함께 지내고 있어서 한 1년쯤 작은 아파트 세를 얻을까 생각 중이었어요. 아무래도 실제 결혼처럼 보이려면 신혼집을 꾸며야 할 테니까요. 집 가까운 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은 뭘 어떡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연서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늘어놓은 말에 주환이 골똘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고는 잠시 후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괜히 무리를 할 거 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오는 건 어때요? 그쪽 한 명쯤 더 들어온다고 해도 좁지는 않을 테고 어차피 2층 그냥 비어 있는데.”
주환의 제의에 연서는 싱싱한 방울토마토를 입안에서 터트리며 슬쩍 이마를 찡그렸다. 배우를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면서 몇 년 동안 넣던 적금을 해약했다. 집도 얻어야 할 테고 상대에게 지불할 비용도 마련을 해야 했으니까. 이야기가 이렇게 되면 그 값은 어떻게 지불해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