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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그럼 지내는 동안 월세라도 지불할게요.”

주환이 동작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연서는 그의 반응에 머쓱해져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눈을 내리깔았다.

“난 지금 하숙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구하는 겁니다. 우리가 하려는 건 결혼이죠. 집 문제는 정연서 씨가 좀 더 고민해 보는 걸로 하고 다른 걸 말해 봐요. 나한테 남편으로서 원하는 것들을.”

다시 식사가 시작되었다. 생각이 많아지자 입맛이 사라졌지만 맛있게 먹고 있는 주환의 식사를 망칠까 싶어 연서는 되도록 소화가 잘 될 만한 것들을 골라 천천히 먹었다. 그러면서 며칠 동안 주환과 결혼을 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생각해 두었던 것들을 차분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가족 행사엔 아무리 바쁘더라도 되도록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는 일은 될 수 있으면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노력하도록 하죠.”

“어차피 1년뿐인데 혼인신고는 굳이 필요 없다고 봐요.”

“원하던 바입니다.”

“혹시 주사 있어요?”

“딱히 주사라고 할 만한 건 없어요. 그쪽은?”

“술을 별로 못해요.”

“계속해 봐요.”

“몇 가지 조항이 더 필요할 것 같아서 도주환 씨가 작성한 계약서 뒤에 한 장을 더 첨부했어요. 읽어 보시고 더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아래 공백란에 쓰셔도 괜찮아요.”

서류를 꺼내 들춰 보자 그녀의 말대로 그가 작성한 계약서 뒤에 종이 한 장이 더 추가가 되어 있었다. 타이핑된 주환의 계약서와 달리 손 글씨로 작성이 되어 있었는데 그녀만큼이나 글씨는 반듯반듯했다.

주환은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연서를 넌지시 살펴보았다. 생각해 보니 벌써 여러 번을 만나는 동안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뭐랄까, 새침하기보다는 조금은 건조한 분위기. 교단에 선 여자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에겐 어떤 선생님일까. 사진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이들에겐 활짝 웃어 주는 인기 많은 선생님일까.

머릿속에 떠오른 이런저런 생각들을 뒤로하고 주환은 컵에 들어 있던 얼음 하나를 입에 물고 와그작 깨물었다. 그러고는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병원에 계시는 아버지를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쯤은 찾아봐 주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잠시 그의 미간이 찡그러졌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해야 몇 개월일 텐데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괜찮겠군요.”

조건을 확인한 주환이 테이블 위에 두 장의 계약서를 놓고 사인을 하더니 연서 쪽으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연서가 사인을 함으로써 완성된 계약서를 사이좋게 하나씩 나눠 가지자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결혼하기 전에 몇 번 만났으면 합니다.”

“결혼 전에요?”

“알다시피 나는 지금 스캔들에 휘말려 있고 그걸 잠재우려면 약간의 쇼가 필요합니다. 물론 정연서 씨의 신분을 밝히지는 않겠지만 잠깐 시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쇼라면 어떤?”

“평범한 연인들이 하는 데이트 말입니다. 영화를 보거나, 함께 사람들 눈에 띌 만한 곳에서 밥을 먹거나.”

한유라의 대역이 되어 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거였구나. 연서는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좀 신경 쓰였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 앞에서 그가 연기를 해야 하듯 그에게 자신이 필요한 순간 똑같이 해 줘야 한다. 최소한 앞으로의 1년은.

“장소랑 시간 알려 주시면 나가죠. 하실 말씀 다 했으면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혼자 갈게요. 나중에 연락 주세요.”

이야기를 마친 연서가 계약서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주환이 따라 일어서더니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합니다.”

연서는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잡았다. 주환의 손은 따듯했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연서가 가게를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를 가로지르는 그녀의 뒷모습이 창밖으로 보였다. 번화가를 한 번쯤은 두리번거릴 것도 같은데 곧장 큰길 쪽으로 멀어져 가는 연서를 바라보며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던 주환의 맞은편에 레스토랑 주인이자 그의 친구인 명훈이 앉았다. 연서는 이미 골목을 벗어나고 있었다.

“저 여자는 누구야? 배우는 아닌 것 같은데.”

“어때 보여?”

“흠. 글쎄……. 분위기로 봐서는 딱 학교 선생님 스타일?”

명훈의 말에 주환의 눈이 커지는가 싶더니 쿡쿡 소리를 내어 웃어 버렸다. 그렇게 티가 났던가.

“가게 접고 자리 깔아도 되겠다.”

“뭐야. 진짜 선생님이야?”

“선생님인 동시에 곧 네 형수가 될 사람.”

“형수? 이건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우리 좀 전에 결혼하기로 합의했거든.”

뜨악한 표정으로 주환을 바라보던 명훈은 황급히 몸을 틀어 연서가 사라진 길을 내려다보았다. 주환이 실없는 농담을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결혼을 하겠다는 말은 믿기지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자세히 봐 둘걸. 명훈이 손을 불쑥 내밀어 주환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너 제정신이지?”

“그래. 아주 멀쩡해.”

“결혼을 하려면 청혼을 해야지 합의라니? 대체 무슨 꿍꿍이야?”

취조를 하듯 주환을 아래위로 훑으며 명훈이 심각하게 물었다. 벌써 20년째 친구로 지내온 터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부처냐는 소리를 듣던 놈이 결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설마 너? 유라 때문에 그래?”

합의라는 말에 짚이는 구석이 있어 묻는 명훈에게 주환은 귀찮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한 추측 하지 마.”

한번 입을 다물어 버리면 도통 그 속을 털어놓지 않는 주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 내느니 포기를 하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터였다. 명훈이 테이블에서 연서가 마시던 잔을 들어 신중하게 살피자 주환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며 잔을 빼앗았다.

“무슨 수작이야?”

“네놈은 죽어도 말을 안 할 테고, 우리 제수씨가 될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려면 이 컵을 가져다 국과수에 의뢰라도 해야지 별수 있어?”

“국과수? 참 여러 가지 한다. 조만간 다시 데리고 올 테니까 그때 직접 물어봐.”

“이야. 이 자식 진짜인가 보네? 진짜 유부남 되는 거야?”

대답을 재촉하는 명훈을 무시하고 주환은 연서가 사라진 길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이용하면 되는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를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정연서란 여자에게 어쩐지 신경이 쓰였다. 아버지를 위해 기꺼이 결혼을 하겠다는 여자의 건조한 눈동자가 이상하게도 자꾸 떠올랐다.

생각이 깊어지는 밤은 점점 무르익고 있었다.



주환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은 건 토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밤새 병원에서 지낸 탓에 피곤했던 연서가 잠깐 조는 사이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연서는 장소와 시간을 확인하고는 알았다는 답장을 보내었다. 그날 이후 몇 번의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퀵서비스가 집으로 도착한 건 오후 4시. 막 샤워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하려던 때였다. 배달 온 남자에게 사인을 하고 상자를 받아 든 연서는 도주환이란 이름에 조금 당황해 잠시 현관에 서 있었다. 때마침 주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이게 뭐예요?”

― 벌써 받았습니까?

“네. 방금이요.”

― 오늘 입고 나왔으면 좋겠다 싶어서 보냈어요. 마음에 안 들어도 좀 부탁합니다.

옷을 보냈다는 건 그가 원하는 것이 있다는 거겠지. 연서는 짧게 알았다는 말을 하고는 통화를 마쳤다.

거실에 앉아 상자를 뜯어보니 크림색 원피스다. 무릎 정도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허리 라인에 주름이 들어간 원피스는 평소 연서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분명 예쁜 옷이었다. 그리고 낯이 익었다. 얼마 전 주환의 스캔들 기사에서 본 한유라가 입고 있던 옷.

“…….”

정연서가 아닌 한유라를 원하는 자리. 연기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는 자신이 과연 잘 해낼 수 있을까. 연서는 저도 모르게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옷을 앞에 대 보고는 거울 속 자신을 살펴보았다. 머리에 웨이브를 넣고 눈 화장을 좀 해 볼까. 그러면 좀 더 비슷해 보일까.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던 연서는 마침내 결심이 선 듯 헤어스타일을 만들고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진하게 화장을 했다. 그러고는 그가 보내온 옷을 입었다.

“이걸 어쩌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짧은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을 감추듯 쓰다듬었다. 여름이 오는 것이 달갑지 않다. 날이 더워지고 점점 옷 길이가 짧아지는 여름은 그녀로서는 곤욕이었다. 이렇게 소매가 짧은 옷을 입는 날이면 그녀의 어깨와 팔에 난 상처가 드러났고 그럴 때마다 연서는 한참을 멍해진 얼굴로 제 몸을 바라보곤 했다. 오래된 흉터는 통증이 느껴질 리도 없는데 괜히 욱신거리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제법 상처 부위가 커 볼썽사나운 제 어깨와 팔이 창피한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특히나 안쓰럽다는 얼굴로 왜 이렇게 되었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은 받고 싶지가 않다. 그럴 때마다 묻어 두고 싶은 절망은 단숨에 수면 위로 올라오고는 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술을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렇게 흉터라도 남아 있어야 잊지 않을 것 같았다. 이젠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 기억들을. 자신이 아니면 기억해 줄 리 없는 오랜 추억들을.

원피스 위에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팔의 흉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연서는 집을 나서기 직전 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 서랍에 넣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시원아.”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가 서랍 안에서 반짝거렸다. 돌아서는 연서의 발걸음이 다른 날보다 유독 무거웠다.



시내의 한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서며 주환은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는데 연서는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미리 예약해 둔 자리로 안내를 받으며 그는 신경을 곤두세웠다. 오늘 이곳에서 그가 결혼할 여자를 만날 거라 미끼를 흘렸으니 어딘가에 기자가 와 있을 것이었다. 유라와의 스캔들로 이목이 집중된 요즘 이런 정보를 기자들이 반가워하지 않을 리가 없을 테니까.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주변을 살피던 주환의 레이더에 대각선 방향의 테이블에서 수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언젠가 유라에 대해 악의적인 기사를 썼던 일로 만난 적이 있는 기자였다. 재빨리 몸을 돌려 그의 시선을 피하는 기자를 보지 못한 척 주환은 담담한 얼굴로 메뉴판을 뒤적였다. 눈치가 백단인 저 기자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으려면 정연서가 잘해 줘야 할 텐데……. 주환의 다물린 입술 틈으로 가느다란 한숨이 흘렀다.

얼마쯤 지났을까. 입구로 들어서는 연서가 보였다. 연서는 그가 보낸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날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눈이 마주치자 주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