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6화
“여기야.”
갑작스러운 반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가온 연서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연인처럼 어깨에 손을 얹으며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기자가 보고 있어요.”
기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였지만 연서는 이내 침착하게 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작은 말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로 기자와의 거리가 가깝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주 보고 앉아 음식을 주문한 다음 주환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몸을 가까이 했다.
“대화 내용까진 들리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대해요. 그냥 가끔 웃어 주기만 해요.”
“배우들은 참 대단해요. 웃음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 웃어 줘야 한다니.”
“이 상황이 웃기지 않습니까?”
“웃어야 한다고 미리 말해 주셨더라면 거울 보고 충분히 연습이라도 하고 왔을 텐데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다는 주환의 말에 연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벌써 몇 번째. 하지만 여전히 이 남자와 마주 앉아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 연기인 줄은 알지만 마치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도 역시 적응은 불가능했다.
“내가 망칠까 봐 걱정이 돼서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연서가 말을 돌리자 주환이 나직하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제법 잘나가는 배우였던 탓일까.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 손짓 하나까지도 달콤하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지 말고 날 학부모라고 생각하는 건 어떻습니까.”
“학부모요?”
“학생 때문에 면담을 한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예뻐하는 제자라 생각해 주면 더 좋고. 오케이?”
연서는 주환이 아무래도 불안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학부모라 여겨 달라는 그의 말에 살짝 웃음이 났다.
“왜 웃어요?”
“제가 만나는 학부모님 중에 가장 젊고 잘생겨서요.”
“그렇게 웃으니까 좋네요, 선생님.”
주환의 배려 때문이었을까. 지켜보고 있는 기자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식사 자리는 나쁘지 않았다. 주환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눈빛으로 연서의 학교생활에 관심을 보였고 연서는 주환의 말대로 학부모와 상담을 하듯 최대한 예의 바르게 굴었다. 대부분 그가 물으면 그녀가 대답하는 방식이었는데 얼마쯤 지나 주환이 질문 던지는 일을 멈추고는 연서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에도 그렇게 진지합니까?”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지했다. 하다못해 웃는 일도 계산해서 하는 사람처럼 똑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여자들은 대부분 수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연서란 여자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불편합니까?”
“편하진 않죠. 원래 사람 사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인 데다 도주환 씨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인데 편할 리가 없죠.”
연서의 솔직한 대답에 주환은 픽 웃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니 참 난감하겠어요.”
“피차일반인데요 뭐.”
“시간 괜찮으면 주말에 집에 한번 들러요. 당분간 살아야 할 곳인데 한번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게요. 그리고 아버지께 얘기를 꺼내야 할 텐데 언제가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금방 기사 나갈 텐데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 조만간 자리 마련할게요. 아버지가 요즘 입원해 계셔서 병원에서 인사를 드려야 할지도 몰라요.”
“괜찮으니까 시간 정해지면 연락 줘요.”
“네.”
결혼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식사를 마저 했다. 여느 연인들처럼 차를 마시고 가벼운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에도 누군가가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늘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아야하는 연예인들도 참 피곤하겠구나 싶었다. 주환이 연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 차를 세운 건 저녁이 늦어서였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도로에 내려선 주환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경비실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던 연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환이 그 자리에 선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돌아보는 연서를 향해 그가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
다정한 연인을 배웅하듯 선 남자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조금 이상했다.
#3. 첫 데이트
어느 햇살 좋은 오후.
연서는 문자메시지에 적혀 있던 주소에 도착했지만 한참을 차 안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층집들이 띄엄띄엄 자리한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산의 한적한 마을. 그곳은 자신의 집에서 불과 30분 정도의 거리인 데다 도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한 곳이었다.
연락을 받은 것은 도주환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모자이크 된 두 사람의 사진이 인터넷 검색어에 오르내리던 날이었다. 동시에 연관 검색어로 떠 있는 한유라라는 이름이 순위 다툼이라도 하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도주환 열애 중! 마이더스의 손을 잡은 그녀는 누구인가.]
자극적인 타이틀을 단 기사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은 분명 자신이었다. 그제야 연서는 자신이 결혼을 하기로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실감 나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결혼 상대자로 선택한 사람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사람.
원래 계획은 아버지에게 평범한 남자를 소개시키고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고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 집을 얻어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보낼 계획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짧은 결혼 생활을 함께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남자로 결정되기 전에는 말이다.
신문과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자신에 관한 기사들을 보며 연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조용한 결혼 생활을 원했던 제게 도주환이란 남자는 전혀 부합하지 않은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그를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이 남자와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시선을 끌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
연서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며 지금이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무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다. 자신이 마음을 바꿔 버리면 도주환의 입장은 난처해질 테지만 말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차에서 내린 연서는 잡지에나 나올 법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주환의 말이 떠올랐다.
‘그곳은 가까운 지인들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일종의 요새 같은 곳이죠. 원한다면 계약 기간 내내 아무도 연서 씨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해 줄 수도 있어요.’
건물의 외관은 특이했다. 회색의 벽면 중 절반은 유리창이었고 두 개의 건물을 이어 놓은 듯 중앙은 좁았다. 이웃과의 거리도 상당했고 주차장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거의 없어 보였다. 건물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키가 큰 나무와 곳곳에 눈에 띄는 방범 카메라들. 이 집을 털려면 최소한 영화 속 주인공만큼의 실력은 있어야겠구나 싶었다. 주환이 왜 완벽한 사생활 보호가 가능하다고 자신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
자신을 찍고 있음이 분명한 현관의 카메라가 보였다. 벨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아직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였다.
그때였다.
― 도망갈 생각입니까?
인터폰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연서는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 도망칠 생각이라면 마음 바꿔요. 아버님께 헤어졌다는 말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연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철컹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주환을 아버지께 인사를 시키기로 한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하루 만에 주환을 대신할 다른 남자를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내부가 눈에 들어오자 연서는 멈칫했다. 잘 가꿔진 정원과 잔디밭. 정원 한쪽엔 작은 물레방아가 도는 연못도 있었다. 그리고 낯선 그녀를 발견하고 짖기 시작하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컹컹. 개 짖는 소리에 움찔해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말아요. 절대 물지 않을 테니까.”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2층 난간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철제 난간을 짚은 채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 때문이었을까. 눈이 부셨다.
“떼루. 앞으로 주인이 되실 분이야. 그만 짖고 잘 봐 두라고.”
큰 소리로 짖고 있는 개 이름이 떼루인 모양이다. 마치 남자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짖던 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가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마른 흙먼지가 났다. 덩치 커다란 개의 애교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 연서는 더욱 격렬해진 움직임을 선보이는 떼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잘 부탁해.”
개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자 언제 내려왔는지 주환이 현관문을 열고 서 있었다. 하얀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그는 여유로운 포즈로 그녀를 맞이했다.
“들어와요.”
한쪽으로 비켜서는 그에게선 옅은 스킨로션 냄새가 풍겼다. 여름과 잘 어울리는 상쾌한 향. 지난번에도 맡아 본 기억이 있었다. 거실로 연서를 안내한 주환은 소파를 권하고는 주방으로 향하였다.
“커피?”
“시원한 물로 주세요.”
“찾기 힘들지는 않았어요?”
“아뇨. 괜찮았어요.”
주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연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집 안은 유난히 높은 천장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높은 창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마치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높은 책장이었다. 소파에 앉는 대신 책장으로 향하였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야 하는 높은 책장엔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책이 채워져 있었다.
“여기야.”
갑작스러운 반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가온 연서에게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고는 다정한 연인처럼 어깨에 손을 얹으며 웃는 얼굴로 속삭였다.
“미안합니다. 기자가 보고 있어요.”
기자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에 잠시 당황한 듯하였지만 연서는 이내 침착하게 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작은 말소리까지 다 들릴 정도로 기자와의 거리가 가깝지 않다는 것이었다.
마주 보고 앉아 음식을 주문한 다음 주환은 테이블에 턱을 괴고 몸을 가까이 했다.
“대화 내용까진 들리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대해요. 그냥 가끔 웃어 주기만 해요.”
“배우들은 참 대단해요. 웃음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 웃어 줘야 한다니.”
“이 상황이 웃기지 않습니까?”
“웃어야 한다고 미리 말해 주셨더라면 거울 보고 충분히 연습이라도 하고 왔을 텐데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잘하고 있다는 주환의 말에 연서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만나는 것도 벌써 몇 번째. 하지만 여전히 이 남자와 마주 앉아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 적응이 되지 않는다. 연기인 줄은 알지만 마치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도 역시 적응은 불가능했다.
“내가 망칠까 봐 걱정이 돼서 밥이나 제대로 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워 연서가 말을 돌리자 주환이 나직하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제법 잘나가는 배우였던 탓일까.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 손짓 하나까지도 달콤하다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지 말고 날 학부모라고 생각하는 건 어떻습니까.”
“학부모요?”
“학생 때문에 면담을 한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예뻐하는 제자라 생각해 주면 더 좋고. 오케이?”
연서는 주환이 아무래도 불안했나 보다고 생각했다. 학부모라 여겨 달라는 그의 말에 살짝 웃음이 났다.
“왜 웃어요?”
“제가 만나는 학부모님 중에 가장 젊고 잘생겨서요.”
“그렇게 웃으니까 좋네요, 선생님.”
주환의 배려 때문이었을까. 지켜보고 있는 기자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식사 자리는 나쁘지 않았다. 주환은 시종일관 부드러운 눈빛으로 연서의 학교생활에 관심을 보였고 연서는 주환의 말대로 학부모와 상담을 하듯 최대한 예의 바르게 굴었다. 대부분 그가 물으면 그녀가 대답하는 방식이었는데 얼마쯤 지나 주환이 질문 던지는 일을 멈추고는 연서를 빤히 쳐다봤다.
“평소에도 그렇게 진지합니까?”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지했다. 하다못해 웃는 일도 계산해서 하는 사람처럼 똑같았다. 그가 알고 있는 여자들은 대부분 수많은 표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정연서란 여자는 그게 아닌 모양이다.
“내가 불편합니까?”
“편하진 않죠. 원래 사람 사귀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인 데다 도주환 씨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사람인데 편할 리가 없죠.”
연서의 솔직한 대답에 주환은 픽 웃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니 참 난감하겠어요.”
“피차일반인데요 뭐.”
“시간 괜찮으면 주말에 집에 한번 들러요. 당분간 살아야 할 곳인데 한번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게요. 그리고 아버지께 얘기를 꺼내야 할 텐데 언제가 괜찮으시겠어요?”
“어차피 금방 기사 나갈 텐데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럼 조만간 자리 마련할게요. 아버지가 요즘 입원해 계셔서 병원에서 인사를 드려야 할지도 몰라요.”
“괜찮으니까 시간 정해지면 연락 줘요.”
“네.”
결혼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두 사람은 식사를 마저 했다. 여느 연인들처럼 차를 마시고 가벼운 드라이브를 하는 동안에도 누군가가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늘 사람들을 의식하며 살아야하는 연예인들도 참 피곤하겠구나 싶었다. 주환이 연서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앞에 차를 세운 건 저녁이 늦어서였다.
비상 깜빡이를 켜고 도로에 내려선 주환이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나누고 경비실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던 연서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주환이 그 자리에 선 채로 지켜보고 있었다. 돌아보는 연서를 향해 그가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
다정한 연인을 배웅하듯 선 남자를 보고 있으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냥. 조금 이상했다.
#3. 첫 데이트
어느 햇살 좋은 오후.
연서는 문자메시지에 적혀 있던 주소에 도착했지만 한참을 차 안에 앉은 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층집들이 띄엄띄엄 자리한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일산의 한적한 마을. 그곳은 자신의 집에서 불과 30분 정도의 거리인 데다 도심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조용한 곳이었다.
연락을 받은 것은 도주환의 연인이라는 제목으로 모자이크 된 두 사람의 사진이 인터넷 검색어에 오르내리던 날이었다. 동시에 연관 검색어로 떠 있는 한유라라는 이름이 순위 다툼이라도 하듯 오르내리고 있었다.
[도주환 열애 중! 마이더스의 손을 잡은 그녀는 누구인가.]
자극적인 타이틀을 단 기사에 실린 사진 속 인물은 분명 자신이었다. 그제야 연서는 자신이 결혼을 하기로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실감 나기 시작했다. 누구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결혼 상대자로 선택한 사람은 전혀 평범하지 않은 사람.
원래 계획은 아버지에게 평범한 남자를 소개시키고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었다. 그러고는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 집을 얻어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와 함께 보낼 계획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짧은 결혼 생활을 함께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남자로 결정되기 전에는 말이다.
신문과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자신에 관한 기사들을 보며 연서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 앞에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일 수 있을지에 관해서도 확신이 들지 않았지만 조용한 결혼 생활을 원했던 제게 도주환이란 남자는 전혀 부합하지 않은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엔 그를 모르는 사람보다 아는 사람이 많을 텐데 이 남자와 어딜 가든 무엇을 하든 시선을 끌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
연서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바라보며 지금이 이 말도 안 되는 결혼을 무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있다. 자신이 마음을 바꿔 버리면 도주환의 입장은 난처해질 테지만 말이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차에서 내린 연서는 잡지에나 나올 법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주환의 말이 떠올랐다.
‘그곳은 가까운 지인들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일종의 요새 같은 곳이죠. 원한다면 계약 기간 내내 아무도 연서 씨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게 해 줄 수도 있어요.’
건물의 외관은 특이했다. 회색의 벽면 중 절반은 유리창이었고 두 개의 건물을 이어 놓은 듯 중앙은 좁았다. 이웃과의 거리도 상당했고 주차장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거의 없어 보였다. 건물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키가 큰 나무와 곳곳에 눈에 띄는 방범 카메라들. 이 집을 털려면 최소한 영화 속 주인공만큼의 실력은 있어야겠구나 싶었다. 주환이 왜 완벽한 사생활 보호가 가능하다고 자신을 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
자신을 찍고 있음이 분명한 현관의 카메라가 보였다. 벨을 누르기가 망설여졌다. 아직 마음을 제대로 정리하지도 못한 채였다.
그때였다.
― 도망갈 생각입니까?
인터폰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연서는 카메라를 올려다보았다.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 도망칠 생각이라면 마음 바꿔요. 아버님께 헤어졌다는 말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연서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철컹 소리와 함께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주환을 아버지께 인사를 시키기로 한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하루 만에 주환을 대신할 다른 남자를 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서는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에서는 보이지 않던 내부가 눈에 들어오자 연서는 멈칫했다. 잘 가꿔진 정원과 잔디밭. 정원 한쪽엔 작은 물레방아가 도는 연못도 있었다. 그리고 낯선 그녀를 발견하고 짖기 시작하는 커다란 시베리안 허스키가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컹컹. 개 짖는 소리에 움찔해 저도 모르게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서자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말아요. 절대 물지 않을 테니까.”
위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2층 난간에 서 있는 그가 보였다. 철제 난간을 짚은 채 그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살 때문이었을까. 눈이 부셨다.
“떼루. 앞으로 주인이 되실 분이야. 그만 짖고 잘 봐 두라고.”
큰 소리로 짖고 있는 개 이름이 떼루인 모양이다. 마치 남자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 전까지 미친 듯이 짖던 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꼬리를 살랑거렸다. 털이 북슬북슬한 꼬리가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마른 흙먼지가 났다. 덩치 커다란 개의 애교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간 연서는 더욱 격렬해진 움직임을 선보이는 떼루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잘 부탁해.”
개와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자 언제 내려왔는지 주환이 현관문을 열고 서 있었다. 하얀 셔츠에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그는 여유로운 포즈로 그녀를 맞이했다.
“들어와요.”
한쪽으로 비켜서는 그에게선 옅은 스킨로션 냄새가 풍겼다. 여름과 잘 어울리는 상쾌한 향. 지난번에도 맡아 본 기억이 있었다. 거실로 연서를 안내한 주환은 소파를 권하고는 주방으로 향하였다.
“커피?”
“시원한 물로 주세요.”
“찾기 힘들지는 않았어요?”
“아뇨. 괜찮았어요.”
주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연서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집 안은 유난히 높은 천장과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높은 창 때문에 예상보다 훨씬 넓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마치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높은 책장이었다. 소파에 앉는 대신 책장으로 향하였다. 사다리를 딛고 올라가야 하는 높은 책장엔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만큼 빼곡하게 책이 채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