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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달칵.
조금 전 문을 열고 들어온 재희는 현관에 선 채로 움직이질 않는다. 먼지 하나 없는 대리석 바닥을 멍하니 응시하다 거기에 놓인 남자 구두를 발견하고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신은 싸구려 단화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구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켤레의 구두처럼 그 주인들도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1년이 참 길긴 길었구나.
어울리지 않는 신발 옆에 제 신발을 대보며 재희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다른 길에 내몰렸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래.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잘못된 만남임을 그도,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계절은 어느덧 다섯 번이나 지나 버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 이 순간이다.
우리가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마음을 이만큼이나 내줘 버렸을까.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뻔히 알면서도 왜 조금 더 옆에 머물고 싶었을까.
신발을 내려다보던 재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안 들어오고 뭐 해?”
문을 열고 들어선 지 한참이 지나도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이상했는지 이환이 현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딱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다. 여전히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 재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를 외면했다.
“며칠 동안 대체….”
살짝 짜증이 묻어나던 남자의 음성이 흐려졌다. 아마도 재희의 머리에 꽂힌 하얀 리본을 발견한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야?”
“…….”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재희는 남자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연락이라니. 그래도 빈말을 하긴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보다. 끝내려는 마당에 남자의 새로운 모습 하나를 발견하고야 만다.
몇 년째 아프셨던 아버지가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막막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이 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무섭고 힘드니까 와 달라고 하고 싶어 몇 번이나 전화기를 집었다가 끝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조문객도 몇 되지 않았던 장례식장에 그가 와 앉아 있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누군가가 그에 관해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했을까. 그동안 아버지가 썼던 병원비를 댔던 사람이라고 해야 했을까. 아니면 돈이 필요해 저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한 순간마다 옆에 누웠다고 사실대로 밝혔어야 했을까. 재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끝내야 할 관계다. 그래. 더 이상 미련은 두지 말자….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결심이 선 재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180이 훌쩍 넘는 장신인 이환과 가까이에서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살짝 젖혀야 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주저 없이 그를 선택했던 건 첫 남자가 근사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정’이라고는 하나 없을 것 같은 삭막한 눈빛, 자신의 처지를 알더라도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분위기. 옳지 못한 선택을 한 자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벌 같은 거였다.
생각해 보니 진즉에 그만했어야 했다.
“이제 여기 안 오려고요.”
“…….”
“내 말 들었어요? 이제 여기 그만 올 거예요.”
이환의 눈썹이 심술맞게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차가운 표정이 살벌하게 얼어붙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에게 지금 이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건데?”
특유의 그 차가운 말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유가 뭐야?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젠 내 도움은 필요 없다 이거야?”
이환의 입가에 떠오른 조소를 멍하니 바라보며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라면 이미 충분히 받았어요.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은혜?”
“…….”
“넌 돈이 필요했고 나는 여자가 필요했어. 그런 관계를 은혜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힘들어 보이는데 괜히 버티지 말고 들어와.”
“아뇨.”
“윤재희.”
화가 났음을 증명하듯 이름을 부르는 이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힘들어서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거라면 적당히 하고 들어와.”
그의 말대로 힘이 들었다. 몹시도 힘이 들어 투정 부릴 힘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를 따라 이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끝내자는 말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바보처럼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또 이곳을 찾을 테고 이 문을 되돌아 나갈 때면 후회를 할 테지. 그러다 더 이상 쓸모없어지는 날이면 빤히 알고 있었음에도 절망을 하겠지. 재희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부탁하셨어요.”
“…….”
“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대요. 제대로 된 연애도 하고 화목한 집안의 남자도 만나 결혼도 했으면 좋겠대요. 그래서 나, 여기 그만 오려고요. 원하신 게 겨우 그것뿐인데 마지막까지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잖아요.”
“…….”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이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새까만 동공에 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할래요.”
목소리가 떨렸다. 더 하다가는 바보처럼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아서 휙 돌아서는데 손목이 붙들렸다.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힘을 주었는지 손목이 몹시도 아파 왔다.
“누구 맘대로 그만이래.”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해요.”
손목을 잡은 이환의 손이 움찔했다.
“…보내 줘요.”
차라리 더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마라는 말 한마디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말을 못 하겠으면 안아 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조용히 안아 주기만 해도 그만둘 생각 같은 건 잊을 텐데. 수십 번도 더 안겼던 그 가슴에서 외롭고 무서웠다고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이라도 부려 볼 텐데.
하지만 재희의 바람과 달리 이환의 손이 멀어졌다.
“알았어. 정 가고 싶다면 가. 배웅은 여기서 하는 걸로 하지.”
귓가를 스치는 남자의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만하자고 한 사람은 자신인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자 코가 매웠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재희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그가 문을 열고 쫓아올까 싶은 헛된 바람에 걸음이 제멋대로 느려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바람일 뿐 이환은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
우뚝. 걸음이 멈춰졌다.
결국은 이게 마지막이구나. 정말로 끝을 내 버렸어.
상을 치르느라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해 푸석해진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상처로 엉망인 가슴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게 용했다.
눈물 때문에 세상은 온통 흐릿하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래오래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눈을 뜨면 긴 꿈을 꾸었구나 싶게. ‘강이환’이란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말이다.
#01
박 상무가 찾았다는 말에 1공장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던 재희는 들어오자마자 상무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노크한 재희가 안으로 들어서자 박 상무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일단 앉아. 차 한잔 줄까?”
“괜찮습니다.”
“현장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네. 이번에 저희 팀에서 개발한 제품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해서요. 확인해 본 결과 사소한 오류라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윤 대리야 워낙에 일 처리가 꼼꼼한 사람이니 뭐 별일이야 있겠어.”
인사 쪽을 담당하고 있는 박 상무는 사장의 조카 되는 사람이었는데 두루뭉술한 체형과는 달리 꽤 깐깐한 스타일의 사람이다.
재희가 이곳에 입사할 당시 다른 지원자들보다 스펙이 뒤처진다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받았었는데 다행히 면접에서 박 상무가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입사 이후에도 그녀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덕분에 재희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
#프롤로그
달칵.
조금 전 문을 열고 들어온 재희는 현관에 선 채로 움직이질 않는다. 먼지 하나 없는 대리석 바닥을 멍하니 응시하다 거기에 놓인 남자 구두를 발견하고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신은 싸구려 단화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구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켤레의 구두처럼 그 주인들도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는다.
이제 와 돌이켜 보니 1년이 참 길긴 길었구나.
어울리지 않는 신발 옆에 제 신발을 대보며 재희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우린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막다른 길에 내몰렸고 잘못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래.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잘못된 만남임을 그도, 자신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계절은 어느덧 다섯 번이나 지나 버렸고 정신을 차려 보니 지금 이 순간이다.
우리가 그럴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마음을 이만큼이나 내줘 버렸을까.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뻔히 알면서도 왜 조금 더 옆에 머물고 싶었을까.
신발을 내려다보던 재희의 눈가가 붉어졌다.
“안 들어오고 뭐 해?”
문을 열고 들어선 지 한참이 지나도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이상했는지 이환이 현관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딱 열흘 만에 보는 얼굴이다. 여전히 차가운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 재희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를 외면했다.
“며칠 동안 대체….”
살짝 짜증이 묻어나던 남자의 음성이 흐려졌다. 아마도 재희의 머리에 꽂힌 하얀 리본을 발견한 모양이다.
“어떻게 된 거야?”
“…….”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어.”
재희는 남자의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연락이라니. 그래도 빈말을 하긴 할 줄 아는 사람이었나 보다. 끝내려는 마당에 남자의 새로운 모습 하나를 발견하고야 만다.
몇 년째 아프셨던 아버지가 일주일 전에 돌아가셨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막막했을 때 가장 먼저 생각이 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었다.
무섭고 힘드니까 와 달라고 하고 싶어 몇 번이나 전화기를 집었다가 끝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조차 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조문객도 몇 되지 않았던 장례식장에 그가 와 앉아 있는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누군가가 그에 관해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했을까. 그동안 아버지가 썼던 병원비를 댔던 사람이라고 해야 했을까. 아니면 돈이 필요해 저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한 순간마다 옆에 누웠다고 사실대로 밝혔어야 했을까. 재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끝내야 할 관계다. 그래. 더 이상 미련은 두지 말자….
“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결심이 선 재희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180이 훌쩍 넘는 장신인 이환과 가까이에서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살짝 젖혀야 했다.
“일단 들어와. 들어와서 얘기해.”
처음 그를 만났을 때 주저 없이 그를 선택했던 건 첫 남자가 근사한 사람이었으면 하는 욕심 때문이 아니었다.
‘정’이라고는 하나 없을 것 같은 삭막한 눈빛, 자신의 처지를 알더라도 동정 같은 건 하지 않을 것 같은 냉랭한 분위기. 옳지 못한 선택을 한 자신에게 내리는 일종의 벌 같은 거였다.
생각해 보니 진즉에 그만했어야 했다.
“이제 여기 안 오려고요.”
“…….”
“내 말 들었어요? 이제 여기 그만 올 거예요.”
이환의 눈썹이 심술맞게 꿈틀거렸다. 가뜩이나 차가운 표정이 살벌하게 얼어붙었다. 누군가에게 거절당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남자에게 지금 이 상황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결정을 내리는 건데?”
특유의 그 차가운 말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유가 뭐야?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이젠 내 도움은 필요 없다 이거야?”
이환의 입가에 떠오른 조소를 멍하니 바라보며 재희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움이라면 이미 충분히 받았어요. 그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은혜?”
“…….”
“넌 돈이 필요했고 나는 여자가 필요했어. 그런 관계를 은혜라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남자는 코웃음을 쳤다.
“힘들어 보이는데 괜히 버티지 말고 들어와.”
“아뇨.”
“윤재희.”
화가 났음을 증명하듯 이름을 부르는 이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힘들어서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 거라면 적당히 하고 들어와.”
그의 말대로 힘이 들었다. 몹시도 힘이 들어 투정 부릴 힘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남자를 따라 이곳에 들어가면 다시는 끝내자는 말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바보처럼 남자가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 또 이곳을 찾을 테고 이 문을 되돌아 나갈 때면 후회를 할 테지. 그러다 더 이상 쓸모없어지는 날이면 빤히 알고 있었음에도 절망을 하겠지. 재희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한 걸음을 뒤로 물러섰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한테 부탁하셨어요.”
“…….”
“내가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대요. 제대로 된 연애도 하고 화목한 집안의 남자도 만나 결혼도 했으면 좋겠대요. 그래서 나, 여기 그만 오려고요. 원하신 게 겨우 그것뿐인데 마지막까지 실망시켜 드릴 수는 없잖아요.”
“…….”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이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새까만 동공에 화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할래요.”
목소리가 떨렸다. 더 하다가는 바보처럼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아서 휙 돌아서는데 손목이 붙들렸다. 부러뜨릴 것처럼 세게 힘을 주었는지 손목이 몹시도 아파 왔다.
“누구 맘대로 그만이래.”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해요.”
손목을 잡은 이환의 손이 움찔했다.
“…보내 줘요.”
차라리 더 붙잡아 주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지 마라는 말 한마디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말을 못 하겠으면 안아 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조용히 안아 주기만 해도 그만둘 생각 같은 건 잊을 텐데. 수십 번도 더 안겼던 그 가슴에서 외롭고 무서웠다고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이라도 부려 볼 텐데.
하지만 재희의 바람과 달리 이환의 손이 멀어졌다.
“알았어. 정 가고 싶다면 가. 배웅은 여기서 하는 걸로 하지.”
귓가를 스치는 남자의 목소리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만하자고 한 사람은 자신인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억지로 눈물을 삼키자 코가 매웠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재희는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혹시나 그가 문을 열고 쫓아올까 싶은 헛된 바람에 걸음이 제멋대로 느려졌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바람일 뿐 이환은 이름조차 부르지 않았다.
우뚝. 걸음이 멈춰졌다.
결국은 이게 마지막이구나. 정말로 끝을 내 버렸어.
상을 치르느라 며칠째 잠을 이루지 못해 푸석해진 얼굴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뜩이나 상처로 엉망인 가슴이 난도질을 당하는 것 같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게 용했다.
눈물 때문에 세상은 온통 흐릿하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래오래 잠이나 잤으면 싶었다. 눈을 뜨면 긴 꿈을 꾸었구나 싶게. ‘강이환’이란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말이다.
#01
박 상무가 찾았다는 말에 1공장에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웠던 재희는 들어오자마자 상무실로 향했다.
똑똑.
문을 노크한 재희가 안으로 들어서자 박 상무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일단 앉아. 차 한잔 줄까?”
“괜찮습니다.”
“현장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네. 이번에 저희 팀에서 개발한 제품에 문제가 좀 생겼다고 해서요. 확인해 본 결과 사소한 오류라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윤 대리야 워낙에 일 처리가 꼼꼼한 사람이니 뭐 별일이야 있겠어.”
인사 쪽을 담당하고 있는 박 상무는 사장의 조카 되는 사람이었는데 두루뭉술한 체형과는 달리 꽤 깐깐한 스타일의 사람이다.
재희가 이곳에 입사할 당시 다른 지원자들보다 스펙이 뒤처진다는 이유로 낮은 점수를 받았었는데 다행히 면접에서 박 상무가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았다.
그래서인지 입사 이후에도 그녀를 관심 있게 지켜보았고 덕분에 재희도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