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자네 혹시 A물산에 아는 사람이 있나?”

“A물산이요?”

A물산이라면 재희도 워낙 유명한 곳이라 이름은 익히 알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아는 곳은 아니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그래?”

박 상무가 콧방울을 손톱으로 긁적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 우리 쪽으로 스카우트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말이야. 그 사람이 자네를 묻더군.”

“저를요?”

이번엔 재희의 고개가 갸웃해졌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 회사엔 아는 사람이 없는데 대체 누굴까.

“그분 성함을 좀 알려 주시겠어요?”

재희의 물음에 박 상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모른다면 나도 비밀일세. 곧 우리 회사로 출근할 테니 이제 알게 되겠지.”

사무실로 돌아온 재희는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파일을 열었지만 멍하니 모니터만 바라볼 뿐이었다. 자신에 대해 물었다는 사람은 대체 누굴까. 궁금증이 깊어졌다.



***



목요일 아침.

가벼운 걸음으로 출근을 하던 재희가 회사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불렀다. 돌아보니 같은 팀에 있는 홍은지다.

“윤 대리님. 소식 들으셨어요?”

“무슨 소식?”

“오늘 저희 팀장님 새로 오신다던데요?”

“나도 누군지는 잘 모르겠는데 꽤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는 하더라.”

“스카우트해 올 정도면 능력이야 이미 인정받은 거죠, 뭐.”

얼마 전 팀장으로 지내던 김진원이 다른 곳으로 이직을 하면서 공석이 생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번엔 과장으로 승진한 조인국이 팀장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깨고 외부 사람이 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근데 기왕이면 잘생겼으면 좋겠다. 그나마 볼만하던 김 팀장님이 그만두고 나니까 요즘은 출근할 맛이 안 나요.”

은지의 이야기에 슬쩍 웃으며 회사로 들어선 재희는 먼저 출근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윤 대리님, 커피 드세요.”

따끈한 커피 한 잔이 책상에 놓인다. 이곳에서 근무한 지도 벌써 3년. 지난달 승진해 대리가 되었고 일상은 늘 평온하다.

매달 나오는 월급을 모아 부은 적금도 곧 있으면 만기가 돌아오고 올해 안으로는 좀 더 괜찮은 곳으로 이사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희는 가져다준 커피를 마시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업무를 시작했다. 오늘 하루도 즐겁게 일을 했으면 싶었다.



***



개발팀이 있는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박 상무를 따라 그곳에서 내린 이환은 복도를 걸으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며 심호흡을 했다. 앞으로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다. 게다가 윤재희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자자, 주목.”

움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새로 오신 팀장님입니다. 능력 있는 분 어렵게 모셔 왔으니 인사들 나눠요.”

박 상무의 소개에 이환은 한 발자국을 앞으로 나오며 주변을 빙 돌아보았다. 여러 명의 사람들 중 그가 찾는 재희의 모습은 보이지가 않는다.

“안녕하십니까. 강이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자, 다들 환영의 박수 한번 치고 시작할까요?”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힘찬 박수 소리에 묵례를 한 이환을 박 상무가 한쪽에 있는 사무실로 안내했다.

제법 넓은 개발팀 한쪽에 사방이 유리로 된 공간이 따로 마련이 되어 있었다. 새로 들여온 듯한 책상과 물품들이 가지런하게 정리가 된 그곳에서는 개발팀 내부가 훤히 내다보였다.

“마음에 들어요?”

“네. 좋습니다.”

“그럼 인사는 저녁에 회식하면서 천천히 하기로 합시다.”

사무실을 나서던 박 상무가 힐끗 돌아보더니 들으라는 듯 다른 직원에게 물었다.

“윤 대리는 자리에 없는 모양이네?”

박 상무의 물음에 누군가가 대답했다.

“네. 조금 전에 공장에 가셨어요.”

“들어오면 잠깐 나 좀 보자고 해.”

윤 대리라…. 이환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자신의 집 현관에서 떠나 버렸던 윤재희는 그동안 많이 변한 모양이다. 몇 번이나 보낸 연락에 한 번도 답을 해 오지도 않더니 그동안 생각보다 잘 지냈나 보다.

시간이 흘렀으니 아마도 자신은 깡그리 잊었을 테지. 그녀는 자신이 팀장이라는 것을 알면 몹시 놀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만두거나 뛰쳐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가족을 위해 자존심까지 버릴 줄 알았던 책임감은 강한 윤재희니까.

이환은 자리에 앉아 블라인드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응시했다. 윤 대리의 자리가 어디쯤일까. 주변을 살피는 이환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



“그러니까 이번 주 안으로만 물량을 맞춰 주시면 됩니다. 물론 시간이 촉박한 건 알죠. 그래도 공장장님밖에 믿을 곳이 없는데 어떡해요. 부탁 좀 드릴게요. 네. 네.”

길게 이어지는 통화를 끝내지 못하고 사무실로 들어선 재희는 한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가방을 책상에 내려놓고 통화를 마저 했다.

매번 모델이 바뀔 때마다 앓는 소리를 해 대는 부산에 있는 제2 공장장을 달래는 일도 재희의 몫이었는데 이번엔 그 앓는 소리가 좀 더 심했다. 아무래도 조만간 공장장이 좋아하는 막걸리를 사 들고 찾아가 봐야겠다.

“다음 주쯤 한번 내려갈게요.”

- …오긴 뭘 온다고.

말은 그러면서도 싫다고 하지 않는 상대방을 향해 재희는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닮은 이분을 이래서 미워하려야 할 수가 없다.

“또 부산 가세요?”

통화를 마치자 홍은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지 얼굴빛이 환하다.

“아직 새로 오신 팀장님 못 보셨죠?”

“응. 오셨어?”

“네. 저희는 아까 인사했으니까 윤 대리님은 들어가 보세요. 아마 기대 이상이라 놀라실 거예요.”

‘기대 이상’이라는 말을 하며 한쪽 눈을 찡긋하는 홍은지로 보아 아마도 꽤나 잘생긴 인물인가 보다.

요즘 시대엔 남자의 외모도 능력이라며 늘 힘주어 말하는 홍은지에게 합격점을 받았으니 말이다.

재희는 힐끗 팀장실을 바라보았다. 갈색의 블라인드가 반쯤 기울어져 있어 안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새 팀장이라. 재희는 서랍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에 뭐 묻은 것이 없나 확인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팀장실로 향하였다.

똑똑.

노크를 하자 곧이어 들어오라는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문을 열기 전 심호흡을 하고 들어선 재희는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를 향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십니까. 윤재희 대리….”

고개를 들어 올린 새로운 팀장과 눈이 마주친 재희는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한 채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차마 믿기지 않는 얼굴이다.

“…여긴 어떻게.”

어지간히 놀랐는지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재희는 늘어트리고 있던 손을 꼭 쥐고는 이를 악물었다.

“오랜만이네.”

이환이 인사를 건네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전히 큰 키에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한 외모.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는 하나 변한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승진했다는 얘기 들었는데 축하를 해 줘도 되나?”

책상을 빙 돌아 점점 가까워지는 그를 보고 있으니 예전의 기억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었던 해에 그를 만났고 1년 넘는 시간을 함께했었다.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둘만의 시간을 까맣게 지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이환의 출현으로 그 잊고 있던 것들이 일제히 선명해진다.

이환이 가까이 오자 재희는 저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사람들이 보고 있을 텐데 괜찮겠어?”

이환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음성은 소름이 일 정도로 나직했다. 재희는 그제야 자신이 서 있는 곳이 팀원들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공간임을 깨닫고는 뒷걸음질을 멈추었다.

“예상보다 너무 놀라는 것 같아 조금 당황스럽군.”

“왜 이곳에 계시는지 설명을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아, 내 소개를 깜빡했네. 오늘부터 이곳에서 근무해. 새로 팀장을 맡았다는 사람이 바로 나거든.”

“…….”

“별로 반갑지 않은 표정이네.”

“네. 솔직히 좀 그러네요.”

이환이 빙그레 웃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있는 강이환은 늘 차갑고 오만한 표정뿐인데 그사이 사람이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도 상사가 될 사람인데 빈말로라도 좀 좋다고 해 주지그래.”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