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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아, 3번으로 찍을걸. 시연은 재빨리 표정을 바로 하고는 성적표를 빠르게 접어 책상 서랍에 밀어 넣었다.

“화또랑 스터디 그룹 같이 하는 애는 일단 저 두 명으로 정해진 것 같은데. 우리 반에 설마 쟤네보다 못한 애는 없겠지.”

민지가 몸싸움을 하고 있는 정태와 동준을 가리켰다.

뜨끔―

“크흠, 너 스터디 그룹 들어갈 거야?”

시연이 성적표를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으며 태연한 척 물었다.

“응. 나는 국어나 영어 들어가고 싶은데. 너는? 하긴 넌 잘하니까 굳이 들어갈 필요는 없겠다.”

“나는…… 수학?”

“어?”

민지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다 거긴 안 들어가고 싶을 거 아냐.”

“시연아…… 넌 진짜 최고의 반장이야. 반 친구들을 위해서 이렇게 희생하다니.”

“아하하하하하― 별거 아니야. 그리고 화또도 요즘 조용한데 뭐!”

담담한 척 연기하는 시연의 입가가 조금 떨렸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세상에나…….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시연이 게시판 앞으로 다가갔다. 선생님이 벌써 과목별 리더는 써 놓은 상태고 팀원 칸은 비어 있었다. 한숨을 푹 내쉰 시연이 제 이름을 써 넣었다.

“영어 할 사람!”

“나나나나나!”

“너 영어 좀 하잖아. 내가 할래.”

1등 해서 상금을 받겠다는 생각으로 다들 들떠 있는 것 같았다. 1등 해서 상금을 받으면 고기 뷔페를 가자느니, 피자를 먹으러 가자느니 꿈에 부풀어 있었다. 시연만 울적한 것 같다. 정태와 동준은 잠깐 울적해 있다가 늘 그랬듯 장난을 치며 킬킬거리고 있었다.

“……내가 저것들보다 뒤라니.”

시연이 중얼거리며 종이를 마저 읽었다. 수요일까지 학습 계획서 제출. 그 말인즉, 화또와 머리를 맞대고 학습 계획을 짜야 한다는 말이군.

그리고 매주 2번 이상 모여서 스터디 하고 학습 보고서 제출. 이 말 역시 매주 2번 이상 화또와 정겹게 스터디를 해야 한다는 말.

하아―

또다시 깊은 한숨이 나왔다. 그렇지만 시연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늘 아침에는 화또와 인사도 했으니까. 그리고 무려 전교 1등이다. 전교 1등에게 가르침을 받는 게 어디 흔한 일인가.

“수학 하게?”

게시판 앞에 선 시연의 옆에 현도가 불쑥 다가와 섰다. 사실 심장이 쿵― 떨어진 것 같았지만 종이를 읽는 척 계속 시선을 고정하며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응. 너 진짜 할 거야?”

“안 했으면 좋겠지.”

현도가 다 안다는 눈빛을 했다.

“응.”

제기랄.

시연이 저도 모르게 대답하고는 그의 표정을 볼 틈도 없이 바로 시간을 돌렸다.

깜박―

“안 했으면 좋겠지.”

“아니! 했으면 좋겠어!”

그녀가 소리치자 그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리고 그가 손을 들어 올렸다. 설마 드디어 때리려고? 시연은 마음의 준비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톡―

그러나 마음의 준비가 무색하게 그의 손바닥이 이마에 아주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보통 남자애들이 장난치는 수준에 비하면 열을 쟀다고도 믿을 만큼 가벼운 터치였다.

시연이 감았던 눈을 뜨고 멍하게 깜박였다. 최현도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더니 비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럼 해야겠네. 니가 그렇게 원한다니까.”

놀리는 것 같은 말투였다.

시연이 멍한 얼굴로 교실을 나가는 최현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괜히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면서.



***



점심시간이 되자 스터디 그룹은 얼추 다 짜인 것 같았다. 수학만 빼고. 수학 팀원 칸에는 아직도 아침에 써 넣은 그녀의 이름밖에 없었다. 과자를 손에 들고 게시판을 멍하게 바라보는 시연의 팔을 현정이 흔들었다.

“왜?”

“야, 저기. 김원 왔어.”

현정이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뒷문으로 턱짓을 했다. 시연이 뒤를 돌아보니 그가 살짝 손을 흔들었다.

‘책.’

“아…….”

그의 입 모양을 보고 찾아온 이유를 떠올린 시연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챙겼다. 현정과 민지가 호들갑을 떠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뒷문에 서 있는 김원에게 책을 내밀었다.

“고마워.”

“응. C.A 시간에 보자.”

“그래. 안녕.”

시연이 손을 흔든 다음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대박, 뭐래, 뭐래? 김원이 뭐래?”

“뭘 뭐래. 그냥 책만 줬는데.”

그녀는 일부러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밀당을 잘하시는군! 그치, 현정아.”

“그렇지. 와, 근데 책을 빌리다니. 이거 아주 고전적인 수법인데.”

뭐래 진짜. 시연은 표정 관리에 애를 쓰면서 과자를 입으로 넣었다. 그리고 흘금 최현도를 바라봤다. 또 눈이 마주쳤다. 전처럼 집요하게 그녀를 바라볼 줄 알았는데 최현도는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고는 다시 문제집으로 고개를 내렸다.



더 기다려 봤자 수학에는 아무도 이름을 적지 않을 것 같아서 시연은 게시판에 붙인 종이를 들고 교무실로 내려갔다.

“쌤, 여기요.”

종이를 훑어보던 선생님이 볼을 긁적거렸다. 다른 그룹은 인원이 터져 나가는데 수학만 텅텅 비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애들이 수학 공부를 안 하려고 하네.”

정말 모르시는 건가요, 선생님? 시연이 속으로 물었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뒤에서 세 명 넣어야겠다.”

그게 어딨더라……. 선생님이 파일을 뒤적거렸다.

“이거 아니에요?”

“오, 맞아, 맞아.”

‘3월 모의고사 성적’ 파일을 열어 모니터에 대고 선을 그으며 등수를 확인하던 손가락이 멈칫 멈췄다. 시연의 성적이었다.

“에엑―!”

선생님이 몸을 들썩였다. 오래된 바퀴 의자가 요란스럽게 삐걱거렸다.

“왜, 왜……. 다른 건 다 잘하면서 수학이…….”

쌤이 그렇게 반응하시면 제가 민망하다고요. 시연이 속으로 원망의 말을 하면서 멋쩍게 웃었다.

“……다음부턴 그냥 한 줄로 찍어.”

“네.”

“어디 보자……. 그럼 박동준…… 박지웅…… 오정태. 반장까지 네 명. 그러고 보니까 반장 홍일점이네?”

“엇, 그러네요.”

“이거 다시 게시판에 붙이고 수요일까지 학습 계획서 써 오면 돼. 알겠지?”

“네―”

진짜 다 남자애들뿐이다. 게다가 박동준, 오정태까지 있는 스터디 그룹이 잘 될 수 있을까. 박지웅과는 별로 안 친하지만 늘 만화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즉, 공부를 더럽게 안 한다는 말이지.

이 그룹에 자신이 끼어 있다는 것이 정말 수치스럽다. 하지만 꼴등은 바로 그녀였다. 다음 시험 때도 찍게 된다면 꼭 한 번호로 찍어야겠다.



“스터디 그룹 확정된 거야. 수요일까지 학습 계획서 제출하래―!”

시연이 교실로 들어와 게시판에 종이를 붙이며 말했다. 다들 수학에 들어갈 불운한 친구들이 누굴지 관심이 많은 듯 우르르 게시판 앞으로 몰려왔다.

“아―! 결국 나네.”

정태가 이름을 확인하고 분하다는 듯 교탁을 쿵― 내리쳤다.

“야, 박동준. 넌 어째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수학…… 수학이라……. 참 좋은 과목이지…….”

아, 이미 정신이 나갔구나. 정태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동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찌 됐든 함께라서 무섭지 않다, 친구야.

“지웅이! 너도 당첨.”

음울하게 중얼거리던 동준이 갑자기 푹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뒷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던 지웅에게 손 화살을 날리자 지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하기 싫은데…… 지웅이 우물우물 말을 내뱉었지만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작 리더인 최현도는 게시판 앞에 와 보지도 않고 제 할 일만 계속했다. 제 그룹원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은 것 같았다. 다른 그룹들은 벌써 모여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수학 그룹만 각자 자리에 앉아 눈치만 살폈다. 그들은 보충 수업이 끝나고 석식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 눈치만 살폈다.

“야, 반장. 니가 화또한테 말 좀 걸어 봐.”

“내가 왜. 니가 하면 되잖아.”

“니가 반장이잖아.”

식당에서 밥을 먹고 올라오는 시연의 양옆으로 동준과 정태가 붙어 자꾸 보챘다. 그녀는 오늘의 용기는 이미 다 써 버렸다. 아침에 엘리베이터에서 한 번, 게시판 앞에서 한 번.

“반장.”

“안 한다니까.”

시연이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시야에 가슴팍에 붙은 명찰의 이름이 들어왔다.

‘최현도.’

고개를 쭉 올리니 단정한 옷깃 위로 남자와 소년의 중간쯤에 있는 것 같은 수려한 턱, 높은 콧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까만 눈까지 눈에 들어왔다.

“뭘 안 하는데.”

최현도가 무덤덤하게 물었다. 그녀는 손사래를 치면서 어느새 뒤로 훌쩍 물러난 덤 앤 더머에게 눈을 흘겼다. 최현도는 덤 앤 더머에게 흘깃 시선을 주고는 온 용건을 꺼냈다.

“스터디 계획서 써야지.”

“응, 나한테 종이 있어.”

교실 문을 들어오면서 얘기를 한 터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러나 최현도가 스윽― 훑으니 이내 전부 사라졌다. 시연은 무려 화또와 함께 제 자리로 가며 대화를 했다.

“우리 그룹원은 박동준, 오정태, 박지웅이야.”

“아아― 그래.”

관심 없다는 말투였다.

“어……. 박동준! 오정태! 빨리 와. 계획 짜게.”

현도는 뒷문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동준과 정태를 부르는 시연의 상기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펴, 편하게 앉아.”

시연은 혀를 잘근 깨물었다. 제 집에 온 것도 아닌데 편하게 앉아는 무슨. 그리고 화또는 이미 옆에서 의자를 끌어와 앉아 있었다. 전처럼 적의가 있는 시선은 아니었지만 최현도가 너무 빤히 바라보니 자꾸만 긴장이 되었다.

깜박―

물 흐르듯이 시간을 돌리고 나서는 ‘편하게 앉아’와 같은 말도 안 되는 말은 집어치우고 침묵을 택했다. 계획서를 읽는 시연은 한쪽 얼굴에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른 척 중얼거리기까지 하며 열심히 읽었다.

드륵―

정태와 동준이 의자를 끌어와 시연의 책상 주위에 앉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지웅이 데려오느라고. 야, 박지웅! 빨리 와!”

몰래 다시 나가려다 들킨 지웅이 울적한 표정을 지으며 꾸물꾸물 걸어왔다. 정태와 동준의 뒤에 지웅이 숨듯이 앉자 시연이 책상 위에 학습 계획서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묵.

“그룹명.”

“학수.”

현도가 툭 말을 던지자 그의 말에 대답이 늦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동준에게서 즉각 의견이 튀어나왔다. 뇌를 거치지 않고 막 튀어나온 거라 무척 괴상했다.

“왜 학순데.”

정태가 속삭이듯이 물었다.

“몰라, 인마. 걍 거꾸로 하면 학수잖아.”

미친. 정태가 미간을 찌푸렸고 조용하던 지웅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좋네.”

“어??”

최현도에게서 긍정의 말이 들리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리가 1등을 하고 전교생 앞에서 상을 받을 때 ‘수학 1등은 학수!’라는 말을 듣고 싶은 거니?

“왜.”

“아니야, 괜찮네.”

“맞아. 느낌 있고 친근하고…….”

“그걸로 하자.”

그러나 아무도 의사를 표현하지 못했다. 나머지 사항들을 정할 때도 최현도가 간간이 말을 한마디씩 하면 그걸로 결정이 되어서 무척 쉽게 계획서를 작성할 수 있었다. 화요일, 목요일 야자 시간에 과학실에서. 과학실은 다른 스터디 그룹한테도 인기가 많겠지만 화또가 한다고 하면 알아서 포기할 테니 별문제 없을 것이다.

어쩌면 정말 1등 할지도 모르겠다. 꼴등이 모여 있는 그룹이기도 하고 그 ‘화또’가 내주는 숙제를 안 할 리 없으니까. 시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최현도를 흘끔 살폈다. 최현도는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다 할 말도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제 자리에 앉기 무섭게 야자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와, 앞으로 진짜 어떡하냐.”

“죽었다고 봐야지.”

동준의 푸념에 정태가 대답했다.

“다 지 말대로 됐잖아. 저 독재자 밑에서 수학 공부라니.”

“그러게 말이다. 지웅이 너 어쩌냐. 이제 만화 못 봐서.”

“……숙제를 그렇게 많이 내 주겠어.”

침울한 표정을 한 세 사람을 보며 시연은 가슴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최현도가 독재자라니. 영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