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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아, 진짜 망했다. 시연은 캐리어에서 완전히 빠져 버린 바퀴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바퀴를 끼워 넣어도 이음새가 부서져서 고정이 되지 않았다. 이미 시간을 한 번 돌려서 아주 천천히 상전 모시듯 조심스럽게 끌고 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헐. 야, 어쩌지?”
“그냥 들어야겠는데? 우리가 한 번씩 도와줄게.”
민지와 현정이 말했다.
“아냐, 이거 별로 안 무거울걸? 나 혼자 들 수 있어!”
시연이 캐리어를 번쩍 들며 앞서 걸어갔다. 하나도 안 무거운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엄청 무겁다. 이걸 이렇게 들고 숙소를 빠져나가서 공항까지 가야 된다는 말이지. 서울에 도착하면 또 이걸 들고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타야 되고.
“아…….”
시연에게 시간을 돌리는 것은 걷고, 말하고,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짧게는 몇 초 길게는 몇 시간 정도를 돌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4일 전으로 시간을 돌려서 다른 캐리어를 들고 오기엔 너무……
그러니까, 무섭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며칠 단위로 시간을 돌리는 것이 무척 거북하게 느껴진 것이.
‘미래로 가는 게 안 되면 조심해야겠다, 시연아. 잘못해서 갓난아기로 돌아가 버리면 큰일이잖니.’
아빠는 과거로 돌아왔다는 어린 시연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장난처럼 말했었다. 아빠의 그 말 이후로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로, 혹은 그 이전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늘 심연에 깔려 있었다.
뭐, 어렸을 때는 단순히 학교에 더 가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서 며칠 단위로 시간을 돌리는 것을 피했지만. 요즘은 다른 이유가 생겼다. 학교를 더 가야 한다는 사실보다―물론 학교도 더 가기 싫지만―훨씬 더 두려운 이유.
전과는 다른 미래가 오는 것이 무섭다.
시간을 며칠 단위로 돌리게 되면 그 이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는 미래―그녀가 시간을 돌렸던 시점, 즉 현재―는 달라져 버린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일상이야 늘 비슷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공포였다.
어쩌면 그녀는 시간을 돌리고, 미래를 알고 있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줘. 내가 들어 줄게.”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들고 가던 시연의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또 화또인가. 얘가 드디어 어떻게 된 걸까. 그제도, 어제도 그녀를 도와주고 오늘 아침에는 대화도 했었지. 아침엔 몽롱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의 최현도는 그녀를 관찰하지도,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냥, 뭐랄까…… 평범했다.
“바퀴가 빠진 거지?”
옆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시연이 고개를 돌렸다.
“아, 5반 반장…….”
화또가 아니니 안심해야 하는 건데 왜 말끝을 흐리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리 줘.”
“아, 아냐. 내가 들 수 있어. 넌 니 거 있잖아.”
“내 건 저기.”
늘 웃는 낯인 그가 턱짓을 했다. 저 멀리서 한 명이 2개의 캐리어와 2개의 배낭을 짊어지고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었고, 주위에서 서너 명이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시연, 맞지?”
그가 시연의 캐리어를 자연스럽게 들며 물었다.
“응. 너는 김원?”
“내 이름 아네.”
원이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근데 나 친구랑 같이 가는 중이어서 그냥 내가 들게.”
“누구? 쟤네?”
저만치 뒤에서 현정과 민지가 ‘우리 매점 좀 들렀다 갈게!’ 하고 소리쳤다.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가득한 걸 보면 굳이 매점에 갈 일은 없는 것 같다. 나중에 그녀들이 놀릴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영화부지?”
“너도 영화부야?”
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엇, 저번에 못 본 것 같은데.”
“니가 나한테 관심이 없었나 보지.”
“아니거든.”
“어, 그럼 관심이 있다는 얘긴가?”
시연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리는 원의 팔뚝을 가볍게 때렸다.
“크흠, 다음 주에 뭐 하는지 알아?”
“아니. 저번에 보던 영화 마저 보는 거 아니야?”
“한 30분이면 끝날 텐데.”
“다른 영화 보나?”
“글쎄……. 다음 영화는 위대한 개츠비라고 듣긴 했는데.”
“위대한 개츠비? 나 그 소설 진짜 재밌게 읽었는데.”
시연의 눈이 금방 초롱초롱해졌다.
“아, 원래 소설이구나. 너 그 책 있어?”
“왜? 빌려줄까?”
“그럼 좋고.”
“그래, 그럼 월요일에 가져올게.”
5반 반장은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얘기가 잘 통했다. 전에 본 영화로 열띤 토론을 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 앞에 도착했다.
“나중에도 도움 필요하면 말해.”
“그래! 근데 아마 괜찮을 거야.”
고마워. 시연은 손을 흔들었다.
“가라고?”
“응?”
시연이 당황한 얼굴을 하자 그가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뭐 잊은 거 없어?”
뭘 잊었지 내가. 휴대폰도 여기 있고. 지갑도 있고…….
“그…… 번호 좀…….”
시연은 머리를 긁적이는 원을 눈을 깜박거리며 쳐다보았다.
“번호 달라고.”
“아, 그래. 폰 줘 봐.”
그의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보자 그녀 역시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번호를 교환했다.
“카톡 할게.”
“응, 잘 가.”
시연은 괜히 부끄러워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재빨리 제일 앞좌석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맨 뒷자리에 앉은 현도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17층입니다.
18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최현도가 타고 있을 줄로 예상하고 있어서 시연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최현도도 별로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은 걸 보면 예상한 것 같다.
“안녕.”
시연이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리 살갑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녀의 인사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용기를 낸 보람이 있다. 수학여행 때문인가, 아주, 개미의 똥만큼 아주 조금 그가 겁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딱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았다. 시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부러 천천히 내린 후 신발 끈을 묶는 척 시간을 끌었다. 아직 화또와 나란히 걷는 것은 무리였다. 시연은 앞서 걷는 최현도와 열 발자국쯤의 거리를 유지하며 교실 문에 들어섰다. 아무도 그들이 이웃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의 거리였다.
시연은 꽤 일찍 등교하는 편이었다. 교실에 도착하면 7시 40분쯤. 8시 전의 교실은 그렇게 북적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시끌벅적해지기 전의 이 한적한 교실이 좋았다. 주번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창문이 닫혀 있어서 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드르륵―
시연이 앞쪽 창문을 열고 있자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은 최현도가 일어나 뒤쪽 창문을 열었다. 그는 걸음을 별로 움직이지 않고도 손이 손쉽게 창문에 닿았다. 시연이 우뚝 멈춰서 그를 바라보자, 그도 시연을 바라보았다.
“뭐.”
무뚝뚝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마저 열고 자리에 앉았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교실을 채웠다. 시연이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기분이 상쾌했다.
8시 10분쯤이 되자 반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왔다. 수학여행의 여흥이 식지 않아 교실은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웠고, 공부하는 애들은 겨우 두세 명뿐이었다. 그 두세 명에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문제집을 푸는 최현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 금요일에 집에 와서 5시쯤 잤거든? 근데 그다음 날 10시에 일어났어.”
“와, 무슨 동물이냐?”
민지의 말에 지나가던 철민이 깐죽거렸다. 시연이 봤을 땐 분명 신철민이 민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장난을 치다가도 슬쩍 민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넌 주말에 뭐 했어?”
“주말에 계속 집에 있었어.”
“김원 안 만났어?”
민지와 현정이 음흉한 표정을 하고 동시에 물었다.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수학여행 마지막 날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몰아갔었다.
“어? 뭔데, 뭔데. 5반에 김원?”
“넌 좀 가. 우리끼리 얘기하잖아.”
민지가 짜증을 내자 철민이 터덜터덜 남자애들 무리로 돌아갔다. 민지한테만 잘해 주는 약간 얄미운 스타일이긴 하지만 철민이 조금 불쌍했다.
“그래서 카톡은 계속 하고?”
“아니. 번호는 그냥 책 빌려 달라고 물어본 거야.”
“연락하고 싶으니까 책 빌려 달라고 하는 거지!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면 되는데 굳이 너한테 빌려 달라잖아.”
“니가 먼저 하지 그랬어. 선톡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바보야.”
민지와 현정이 열변을 토해 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카톡―
“어어, 이거 김원 아니야?”
현정이 재빨리 폰을 빼앗아 들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꺄악! 진짜 김원인데.”
현정에게 바싹 붙어 같이 액정을 확인한 민지가 소리를 질렀다. 꺄악, 진짜 대박. 민지와 현정이 호들갑을 떨며 시연에게 폰을 건넸다. 진짜 김원이었다.
점심시간에 책 받으러 가도 돼?
“야야, 교실 말고 매점에서 만나자고 해. 같이 딸기 우유라도 한잔 하자고.”
“어머머, 너무 좋다.”
민지와 현정이 아줌마처럼 방정맞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냥 알겠다고 보냈어.”
“아, 왜!”
민지가 김샜다는 얼굴을 했다.
“왜 너네가 더 난리야?”
“그야 우린 아무 일도 없으니까.”
민지는 아닐 텐데. 시연이 생각했다. 시끄러운 아줌마 둘을 상대하고 있을 때 종소리가 울렸다. 아침 조례 시간이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다들 잘 쉬었어?”
“네―”
“아뇨, 쌤 아직 피곤해 죽겠어요.”
동준의 말에 선생님도 나도, 라고 대답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늙으니까 피로가 안 풀려. 동준이 너도 늙었나 보다.”
“그럼 쌤, 저희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헛소리하지 말고. 이제 막 수학여행 갔다 와서 들떠 있는 건 알겠는데 이제 4월이야. 중간고사 한 달 남은 거 알지?”
아아아아―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슬슬 공부 시작해야지. 어…… 너희끼리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제일 점수 향상 폭이 높은 팀한테는 상금 준다는데?”
선생님이 손에 든 종이를 팔랑였다.
“얼마요?”
“보자…… 1등이 7만 원이네.”
“와, 대박! 저저, 저 할래요!”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조용, 조용. 얘기 다 듣고 결정해. 일단 과목별로 그룹 리더가 있어. 멘토, 멘티 식으로 하는 거야. 3월 모의고사 각 과목별로 성적 좋은 애가 멘토가 되고 나머지는 멘티.”
“그럼 스터디 그룹이 5개예요?”
“그렇지. 우리 반은 국어, 외국어, 수리 1등이 똑같네. 최현도―”
“네.”
최현도의 단정한 음성을 들으며 모두 경악했다. 왜 안 어울리게 공부를 잘하는 거지. 중학교 때도 분명히 놀았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공부를 잘하는 건가. 저 얼굴에 공부까지 잘하면 너무 완…… 아, 성격이 더럽지. 아이들이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도 해 볼래?”
“아니요.”
현도가 딱 잘라 대답했다.
“선생님은 현도가 셋 중에 하나는 맡았으면 좋겠는데. 반 친구들이니까 재능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나중에 원서 쓸 때도 도움이 될 거야.”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 그럼 수리로 하자. 수리는 전교 1등이네.”
선생님의 제멋대로인 결정에 현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맙소사. 저 스터디 그룹에 누가 들어가긴 할까. 아이들의 패닉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과목 멘토도 담임 재량으로 멋대로 정했다. 과탐 1등은 시연이었지만 반장이라 할 일이 많다고 다음 등수에게 넘겼다. 시연은 그게 그녀를 더 잘 부려 먹기 위함인 것을 알았다.
“여섯 명 이상이면 조금 힘들 것 같으니까 알아서 하고, 만약에 인원수가 적으면…… 꼴찌부터 네 명 채워 넣으면 되겠다. 성적 낮을수록 올리긴 더 쉬운 거 알지? 다른 반한테 7만 원 뺏기지 말자! 7만 원 받은 팀한테는 쌤이 5만 원 더 붙여 준다!”
그럼 이만. 자기 말만 끝낸 담임 선생님이 게시판에 종이를 딱 붙여 두고 앞문으로 후다닥 나갔다.
“반장, 저 종이 오늘 7교시 전까지 가지고 와.”
창문을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그녀가 덧붙이고는 사라졌다.
“야, 우리 쌤 재벌 딸이냐.”
“그니까. 우리 반이 진짜로 다섯 과목 다 1등 하면 25만 원인데.”
정태와 동준이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근데…….
“수리 꼴등 누구냐.”
고요한 교실에 던져진 한마디에 다들 책상 서랍을 뒤져 꾸깃꾸깃한 성적표를 꺼내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득 퍼졌다.
“나 210등. 아 씨, 200등 넘으면 위험한 것 같은데.”
“오오, 난 199등이다.”
‘아니 근데 이것들이…….’
버젓이 그가 자리에 있는데 요란 법석을 떠는 아이들을 보며 현도가 헛웃음을 지었다.
“정태, 몇 등임? 275등? 푸하하하하―”
“뭐 이 새끼야. 넌 몇 등인데. 273등? 아오,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구만.”
“전교에 니 뒤로 다섯 명 있는 거네. 니 뒤에 있는 다섯 명은 도대체 얼마나 멍청이인 거냐?”
동준과 정태가 성적표를 비교하며 서로 비웃을 때, 성적표를 읽던 시연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성적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276등.
그 멍청이가 바로 그녀였다.
아, 진짜 망했다. 시연은 캐리어에서 완전히 빠져 버린 바퀴를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바퀴를 끼워 넣어도 이음새가 부서져서 고정이 되지 않았다. 이미 시간을 한 번 돌려서 아주 천천히 상전 모시듯 조심스럽게 끌고 왔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헐. 야, 어쩌지?”
“그냥 들어야겠는데? 우리가 한 번씩 도와줄게.”
민지와 현정이 말했다.
“아냐, 이거 별로 안 무거울걸? 나 혼자 들 수 있어!”
시연이 캐리어를 번쩍 들며 앞서 걸어갔다. 하나도 안 무거운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엄청 무겁다. 이걸 이렇게 들고 숙소를 빠져나가서 공항까지 가야 된다는 말이지. 서울에 도착하면 또 이걸 들고 밖으로 나가서 택시를 타야 되고.
“아…….”
시연에게 시간을 돌리는 것은 걷고, 말하고,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짧게는 몇 초 길게는 몇 시간 정도를 돌리곤 했으니까.
그러나 4일 전으로 시간을 돌려서 다른 캐리어를 들고 오기엔 너무……
그러니까, 무섭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며칠 단위로 시간을 돌리는 것이 무척 거북하게 느껴진 것이.
‘미래로 가는 게 안 되면 조심해야겠다, 시연아. 잘못해서 갓난아기로 돌아가 버리면 큰일이잖니.’
아빠는 과거로 돌아왔다는 어린 시연의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장난처럼 말했었다. 아빠의 그 말 이후로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로, 혹은 그 이전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은 늘 심연에 깔려 있었다.
뭐, 어렸을 때는 단순히 학교에 더 가야 한다는 사실이 싫어서 며칠 단위로 시간을 돌리는 것을 피했지만. 요즘은 다른 이유가 생겼다. 학교를 더 가야 한다는 사실보다―물론 학교도 더 가기 싫지만―훨씬 더 두려운 이유.
전과는 다른 미래가 오는 것이 무섭다.
시간을 며칠 단위로 돌리게 되면 그 이전에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다르게 행동하기 때문에 그녀가 아는 미래―그녀가 시간을 돌렸던 시점, 즉 현재―는 달라져 버린다. 평범한 고등학생의 일상이야 늘 비슷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알 수 없는 공포였다.
어쩌면 그녀는 시간을 돌리고, 미래를 알고 있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줘. 내가 들어 줄게.”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들고 가던 시연의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또 화또인가. 얘가 드디어 어떻게 된 걸까. 그제도, 어제도 그녀를 도와주고 오늘 아침에는 대화도 했었지. 아침엔 몽롱해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오늘 아침의 최현도는 그녀를 관찰하지도,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냥, 뭐랄까…… 평범했다.
“바퀴가 빠진 거지?”
옆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시연이 고개를 돌렸다.
“아, 5반 반장…….”
화또가 아니니 안심해야 하는 건데 왜 말끝을 흐리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리 줘.”
“아, 아냐. 내가 들 수 있어. 넌 니 거 있잖아.”
“내 건 저기.”
늘 웃는 낯인 그가 턱짓을 했다. 저 멀리서 한 명이 2개의 캐리어와 2개의 배낭을 짊어지고 휘청거리며 걸어가고 있었고, 주위에서 서너 명이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시연, 맞지?”
그가 시연의 캐리어를 자연스럽게 들며 물었다.
“응. 너는 김원?”
“내 이름 아네.”
원이 기쁘다는 듯이 웃었다.
“근데 나 친구랑 같이 가는 중이어서 그냥 내가 들게.”
“누구? 쟤네?”
저만치 뒤에서 현정과 민지가 ‘우리 매점 좀 들렀다 갈게!’ 하고 소리쳤다.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가득한 걸 보면 굳이 매점에 갈 일은 없는 것 같다. 나중에 그녀들이 놀릴 것을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영화부지?”
“너도 영화부야?”
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엇, 저번에 못 본 것 같은데.”
“니가 나한테 관심이 없었나 보지.”
“아니거든.”
“어, 그럼 관심이 있다는 얘긴가?”
시연은 장난스럽게 말꼬리를 늘리는 원의 팔뚝을 가볍게 때렸다.
“크흠, 다음 주에 뭐 하는지 알아?”
“아니. 저번에 보던 영화 마저 보는 거 아니야?”
“한 30분이면 끝날 텐데.”
“다른 영화 보나?”
“글쎄……. 다음 영화는 위대한 개츠비라고 듣긴 했는데.”
“위대한 개츠비? 나 그 소설 진짜 재밌게 읽었는데.”
시연의 눈이 금방 초롱초롱해졌다.
“아, 원래 소설이구나. 너 그 책 있어?”
“왜? 빌려줄까?”
“그럼 좋고.”
“그래, 그럼 월요일에 가져올게.”
5반 반장은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얘기가 잘 통했다. 전에 본 영화로 열띤 토론을 하다 보니 어느새 버스 앞에 도착했다.
“나중에도 도움 필요하면 말해.”
“그래! 근데 아마 괜찮을 거야.”
고마워. 시연은 손을 흔들었다.
“가라고?”
“응?”
시연이 당황한 얼굴을 하자 그가 조금 소리 내어 웃었다.
“뭐 잊은 거 없어?”
뭘 잊었지 내가. 휴대폰도 여기 있고. 지갑도 있고…….
“그…… 번호 좀…….”
시연은 머리를 긁적이는 원을 눈을 깜박거리며 쳐다보았다.
“번호 달라고.”
“아, 그래. 폰 줘 봐.”
그의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보자 그녀 역시 얼굴이 조금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번호를 교환했다.
“카톡 할게.”
“응, 잘 가.”
시연은 괜히 부끄러워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재빨리 제일 앞좌석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맨 뒷자리에 앉은 현도가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
― 17층입니다.
18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보고 최현도가 타고 있을 줄로 예상하고 있어서 시연은 별로 놀라지 않았다. 최현도도 별로 놀란 표정을 짓지 않은 걸 보면 예상한 것 같다.
“안녕.”
시연이 짤막하게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그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
그리 살갑지 않은 대답이었지만 어찌 됐든 그녀의 인사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용기를 낸 보람이 있다. 수학여행 때문인가, 아주, 개미의 똥만큼 아주 조금 그가 겁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딱 여기까지가 좋을 것 같았다. 시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부러 천천히 내린 후 신발 끈을 묶는 척 시간을 끌었다. 아직 화또와 나란히 걷는 것은 무리였다. 시연은 앞서 걷는 최현도와 열 발자국쯤의 거리를 유지하며 교실 문에 들어섰다. 아무도 그들이 이웃이라는 것을 모를 만큼의 거리였다.
시연은 꽤 일찍 등교하는 편이었다. 교실에 도착하면 7시 40분쯤. 8시 전의 교실은 그렇게 북적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시끌벅적해지기 전의 이 한적한 교실이 좋았다. 주번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창문이 닫혀 있어서 시연은 창문부터 열었다.
드르륵―
시연이 앞쪽 창문을 열고 있자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은 최현도가 일어나 뒤쪽 창문을 열었다. 그는 걸음을 별로 움직이지 않고도 손이 손쉽게 창문에 닿았다. 시연이 우뚝 멈춰서 그를 바라보자, 그도 시연을 바라보았다.
“뭐.”
무뚝뚝한 얼굴로 내뱉는 말에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창문을 마저 열고 자리에 앉았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교실을 채웠다. 시연이 허리를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기분이 상쾌했다.
8시 10분쯤이 되자 반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로 들어왔다. 수학여행의 여흥이 식지 않아 교실은 평소보다 더 소란스러웠고, 공부하는 애들은 겨우 두세 명뿐이었다. 그 두세 명에는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문제집을 푸는 최현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 금요일에 집에 와서 5시쯤 잤거든? 근데 그다음 날 10시에 일어났어.”
“와, 무슨 동물이냐?”
민지의 말에 지나가던 철민이 깐죽거렸다. 시연이 봤을 땐 분명 신철민이 민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장난을 치다가도 슬쩍 민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넌 주말에 뭐 했어?”
“주말에 계속 집에 있었어.”
“김원 안 만났어?”
민지와 현정이 음흉한 표정을 하고 동시에 물었다.
“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
수학여행 마지막 날에도 계속 이런 식으로 몰아갔었다.
“어? 뭔데, 뭔데. 5반에 김원?”
“넌 좀 가. 우리끼리 얘기하잖아.”
민지가 짜증을 내자 철민이 터덜터덜 남자애들 무리로 돌아갔다. 민지한테만 잘해 주는 약간 얄미운 스타일이긴 하지만 철민이 조금 불쌍했다.
“그래서 카톡은 계속 하고?”
“아니. 번호는 그냥 책 빌려 달라고 물어본 거야.”
“연락하고 싶으니까 책 빌려 달라고 하는 거지!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면 되는데 굳이 너한테 빌려 달라잖아.”
“니가 먼저 하지 그랬어. 선톡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바보야.”
민지와 현정이 열변을 토해 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카톡―
“어어, 이거 김원 아니야?”
현정이 재빨리 폰을 빼앗아 들며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꺄악! 진짜 김원인데.”
현정에게 바싹 붙어 같이 액정을 확인한 민지가 소리를 질렀다. 꺄악, 진짜 대박. 민지와 현정이 호들갑을 떨며 시연에게 폰을 건넸다. 진짜 김원이었다.
점심시간에 책 받으러 가도 돼?
“야야, 교실 말고 매점에서 만나자고 해. 같이 딸기 우유라도 한잔 하자고.”
“어머머, 너무 좋다.”
민지와 현정이 아줌마처럼 방정맞게 웃으며 손뼉을 쳤다.
“그냥 알겠다고 보냈어.”
“아, 왜!”
민지가 김샜다는 얼굴을 했다.
“왜 너네가 더 난리야?”
“그야 우린 아무 일도 없으니까.”
민지는 아닐 텐데. 시연이 생각했다. 시끄러운 아줌마 둘을 상대하고 있을 때 종소리가 울렸다. 아침 조례 시간이었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다들 잘 쉬었어?”
“네―”
“아뇨, 쌤 아직 피곤해 죽겠어요.”
동준의 말에 선생님도 나도, 라고 대답하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늙으니까 피로가 안 풀려. 동준이 너도 늙었나 보다.”
“그럼 쌤, 저희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헛소리하지 말고. 이제 막 수학여행 갔다 와서 들떠 있는 건 알겠는데 이제 4월이야. 중간고사 한 달 남은 거 알지?”
아아아아―
여기저기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슬슬 공부 시작해야지. 어…… 너희끼리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제일 점수 향상 폭이 높은 팀한테는 상금 준다는데?”
선생님이 손에 든 종이를 팔랑였다.
“얼마요?”
“보자…… 1등이 7만 원이네.”
“와, 대박! 저저, 저 할래요!”
여기저기서 손이 올라왔다.
“조용, 조용. 얘기 다 듣고 결정해. 일단 과목별로 그룹 리더가 있어. 멘토, 멘티 식으로 하는 거야. 3월 모의고사 각 과목별로 성적 좋은 애가 멘토가 되고 나머지는 멘티.”
“그럼 스터디 그룹이 5개예요?”
“그렇지. 우리 반은 국어, 외국어, 수리 1등이 똑같네. 최현도―”
“네.”
최현도의 단정한 음성을 들으며 모두 경악했다. 왜 안 어울리게 공부를 잘하는 거지. 중학교 때도 분명히 놀았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공부를 잘하는 건가. 저 얼굴에 공부까지 잘하면 너무 완…… 아, 성격이 더럽지. 아이들이 수긍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도 해 볼래?”
“아니요.”
현도가 딱 잘라 대답했다.
“선생님은 현도가 셋 중에 하나는 맡았으면 좋겠는데. 반 친구들이니까 재능 기부한다는 생각으로. 나중에 원서 쓸 때도 도움이 될 거야.”
“별로 하고 싶지 않은데요.”
“그래, 그럼 수리로 하자. 수리는 전교 1등이네.”
선생님의 제멋대로인 결정에 현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맙소사. 저 스터디 그룹에 누가 들어가긴 할까. 아이들의 패닉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과목 멘토도 담임 재량으로 멋대로 정했다. 과탐 1등은 시연이었지만 반장이라 할 일이 많다고 다음 등수에게 넘겼다. 시연은 그게 그녀를 더 잘 부려 먹기 위함인 것을 알았다.
“여섯 명 이상이면 조금 힘들 것 같으니까 알아서 하고, 만약에 인원수가 적으면…… 꼴찌부터 네 명 채워 넣으면 되겠다. 성적 낮을수록 올리긴 더 쉬운 거 알지? 다른 반한테 7만 원 뺏기지 말자! 7만 원 받은 팀한테는 쌤이 5만 원 더 붙여 준다!”
그럼 이만. 자기 말만 끝낸 담임 선생님이 게시판에 종이를 딱 붙여 두고 앞문으로 후다닥 나갔다.
“반장, 저 종이 오늘 7교시 전까지 가지고 와.”
창문을 사이로 얼굴을 빼꼼 내민 그녀가 덧붙이고는 사라졌다.
“야, 우리 쌤 재벌 딸이냐.”
“그니까. 우리 반이 진짜로 다섯 과목 다 1등 하면 25만 원인데.”
정태와 동준이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근데…….
“수리 꼴등 누구냐.”
고요한 교실에 던져진 한마디에 다들 책상 서랍을 뒤져 꾸깃꾸깃한 성적표를 꺼내느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가득 퍼졌다.
“나 210등. 아 씨, 200등 넘으면 위험한 것 같은데.”
“오오, 난 199등이다.”
‘아니 근데 이것들이…….’
버젓이 그가 자리에 있는데 요란 법석을 떠는 아이들을 보며 현도가 헛웃음을 지었다.
“정태, 몇 등임? 275등? 푸하하하하―”
“뭐 이 새끼야. 넌 몇 등인데. 273등? 아오, 별로 차이도 안 나는구만.”
“전교에 니 뒤로 다섯 명 있는 거네. 니 뒤에 있는 다섯 명은 도대체 얼마나 멍청이인 거냐?”
동준과 정태가 성적표를 비교하며 서로 비웃을 때, 성적표를 읽던 시연은 아연실색한 표정을 지었다. 성적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276등.
그 멍청이가 바로 그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