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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 그럼 이제 3반의 무대입니다!”
“꺅, 어떡해. 이제 우리 반이야.”
“파이팅! 파이팅!”
앞에 앉아 있다가 무대로 올라가는 아이들의 등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무대에 불이 꺼지고 노랫소리가 시작되었다.
동준이 마이크를 쥐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긴장했는지 음 이탈이 나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음을 꾹 참는 표정의 동준이 손가락을 위로 뻗자 비트가 빨라지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리고 무대 양옆에서 다른 애들도 우루루 뛰어나와 자세를 잡았다.
정태를 선두로 빠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을 추느라 숨이 흐트러진 동준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삑사리를 내었지만 그 때문에 다들 신나게 웃을 수 있었다. 시연은 우리 반이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개그까지 준비했던 거였는지 잠깐 생각했다.
“어우, 유쾌한 3반의 무대였습니다. 다음은…….”
“잘했어, 잘했어!”
“수고했어!”
“우리 반이 제일 웃겼음!”
자리로 돌아온 장기 자랑 팀에게 박수를 치자 정태가 거만하게 웃어 보였다.
“얘네 춤 다 내가 가르쳤다.”
“그래그래, 잘했어.”
시연이 장난스럽게 정태의 머리를 토닥였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게임 하나 하고 갑시다. 일단, 각 반의 반장들! 빠르게 집합!”
“아, 이럴 줄 알았어.”
시연이 울상을 지으며 일어나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반장을 여러 번 해 봤지만 제일 싫은 게 바로 이것이었다. 늘 식상하게 반장이 무대 위로 올라가서 춤추고……
“1등 7반, 2등 6반, 3등 4반…….”
사회자가 무대에 오른 순서대로 일렬로 줄을 세웠다.
“네, 이 순서는 사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길게 말할 거 없이 우리 반장들 댄스 한번 보고 가시죠.”
그래, 차라리 춤이 낫다. 노래를 하는 것이 더 끔찍했다. 시연이 뻣뻣하게 몸을 움직이는 5반 반장에게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이제 시연도 앞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노래가 뚝 끊겼다.
“여기까지! 이제 여기서부터는 노래 한번 보시죠.”
“저부터요?”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감기에 걸려서요…… 그냥 춤추면 안 될까요?”
사회자가 짓궂은 말을 하려다가 볼이 발간 시연의 안색이 안 좋아 보였는지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여기까지! 하고 반장은 식상하니까 반에서 제일 까불거리는 친구 집합!”
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화끈거리는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사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건 다른 이유였다. 사회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이미 노래를 부른 탓이었다.
***
“여기까지! 이제 여기서부터는 노래 한번 보시죠.”
“저부터요?”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한숨을 푹 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사회자가 건네는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잘하네, 율동도 같이!”
사회자가 하는 말에 시연이 눈을 질끈 감으며 무릎을 굽혔다 펴며 몸을 움직였다. 흡사 유치원 재롱 잔치를 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매일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네―”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지고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영원한 흑역사가 될 것 같아 결국 시연은 시간을 되돌렸다.
***
“안 내려가요?”
얼굴이 빨간 시연이 멍하게 서 있자 사회자가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아…….”
시연은 꾸벅 인사를 한 다음 후다닥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자리에 앉아서도 연신 부채질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현도의 것이었다. 시연보다 서너 줄 뒤에 앉아 있었지만 저 빨간 얼굴만큼은 그에게 무척 잘 보였다.
최현도가 시연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보면 볼수록 저건 진짜…….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약간 꾸며 낸 것 같은 부분이 있었다.
“자, 그럼 대망의 1위는…… 3반입니다!”
3등도 아니고 인기상도 아니어서 포기하고 있던 차였는데 1등이라니. 3반에서 뒤늦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진짜 수고했어!”
시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장기 자랑 팀의 등을 두드리다가 멈칫했다. 늘 그랬듯이 최현도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오전에 최현도가 단단히 잡았던 손목의 느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연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가 그러는 것처럼 집요하게 응시해 주었다.
최현도가 눈을 떼지 않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최현도와 그녀 사이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온통 검게 칠해졌다.
“3반 나가세요― ”
최현도가 흘깃 사회자를 보더니 그녀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뒤돌았다.
“……어?”
방금 쟤……
웃은 것 같은데.
반별로 강당을 빠져나왔으나 복도는 참 시끌벅적했다. 3반의 경우는 더했다. 모두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이거 다 내 노래 덕분이다?”
“뭔 니 노래 덕분이야, 내 춤 덕분이지.”
정태가 동준에게 헤드록을 걸며 장난을 치다 뒤따라 나오던 현도와 툭― 부딪쳤다.
“아.”
현도가 아주 작게 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태와 동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헤드록을 풀어내려 여기저기 마구 휘두른 동준의 팔이 현도의 명치를 가격한 것을 원망스럽게도 동준과 정태 모두 정확히 보았다.
후다닥― 헤드록을 풀고 정자세로 돌아간 그들이 화또의 얼굴을 긴장하며 응시했다. 화또는 배에 손을 얹은 채로 약간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직도 손에 화또의 단단한 배를 가격했던 그 타격감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동준의 낯빛은 더 안 좋아질 수 없을 만큼 안 좋아졌다.
“미안! 괘, 괜찮냐.”
동준이 약간 뒷걸음질을 쳤다. 화또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아오, 새끼야. 그러니까 내가 풀라고 했잖아.’
동준이 등 뒤로 정태를 꼬집으며 속삭였다.
‘악, 뭐 인마. 니가 때렸잖아, 내 잘못이냐!’
‘몰라! 야, 쫄지 마. 2대 1이니까 우리가 더 유리함.’
‘우리가 더 유리한 거 맞냐.’
‘…….’
정태의 속삭임에 동준이 침묵을 유지했다.
“비켜.”
현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자 정태와 동준이 벽에 바짝 붙었다. 그는 그런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는지 유유히 지나갔다.
“와, 오정태 너 이 새끼 잔뜩 쫄아 가지고.”
최현도가 보이지 않을 즈음이 되자 벽과 하나가 된 것처럼 찰싹 붙었던 몸을 떼고 동준이 허세를 부렸다.
“지가 더 쫄았으면서.”
“어. 티 났냐.”
아, 이 손을 잘라 버리든가 해야지. 동준이 제 손목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빨리 가자.”
존나 쪽팔려. 정태가 이제는 벽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자책하고 있는 동준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넌 그래도 다른 방이잖아. 난 같은 방이라고.”
“오, 정태야……. 넌 왜 오 정태란 말인가…….”
오, 라임 쩔었어. 동준의 뇌 맑은 얼굴을 보며 정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새끼는 아무 생각이 없다. 지금 지 친구는 오늘 밤에 자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 아빠 성이 그 흔한 김씨였으면 최씨와는 엮일 일이 없잖아.
안타깝게도 고등학교는 대부분이 가, 나, 다 이름순이었다.
“야, 우리 방에서 자면 되잖아.”
“그래야겠다.”
“어우, 남자 새끼가 소심해 가지고.”
“지는 손을 자르느니 어쩌니 했으면서.”
동준이 코를 쓱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남학생 방 2개, 여학생 방 2개였는데 그날 밤 남학생 방에서는 꽤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 하나를 최현도 혼자 쓰다시피 한 것이었다. 새벽에 그 방으로 건너가 잠을 잔 몇몇이 있긴 했지만 모두 최현도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들어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동준과 정태에게 그들이 화또의 스위치를 건드린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도는 방에 아무도 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예민한 성격 탓에 누가 옆에 있으면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른 아침 그는 꽤 개운하게 눈을 떠 방에 시체처럼 자고 있는 몸뚱어리들을 넘어 욕실로 들어갔다.
지금이 벌써 8시인데 이놈들은 아침을 먹을 생각이 없나 보다. 현도는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며 가방에서 옷을 꺼내 입고 다시 시체들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아악―!”
다리 하나를 밟긴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
“하아암―”
시연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도무지 잠이 깨지 않는다. 수학여행 마지막 밤이니 그냥 자기 아쉬워서 새벽 5시까지 카드 게임을 하며 놀았다. 철민 대신 아침 식사 배식을 하기로 한 바람에 딱 1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게다가 어제 등산의 여파로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아침을 거르고 쭉 잘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다른 반 애들도 어제 다들 늦게 잔 건지 아침을 먹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식당 안은 한적했다.
“오이는 조금만.”
시연이 오이소박이를 듬뿍 집어 식판에 올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오이를 한가득 받은 학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연은 몽롱한 상태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간간이 하품을 쩍쩍 하면서 꾸준히 오는 식판에 오이소박이를 담았다. 꼭 공장의 기계가 된 것 같았다.
반복적인 일에 점점 더 피곤해지고 눈이 감길 때였다. 집게를 쥔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오이소박이가 그리 인기 있는 반찬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헛손질과 느린 움직임에 지친 몇몇은 오이소박이는 그냥 생략하고 지나갔다.
시연은 꾸벅꾸벅 졸다가 바닥에 오이 몇 개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손에 쥔 집게는 이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딱―
누군가 시연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시연은 반쯤 풀린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최현도였다.
갑자기 식판과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줄이 더 이상 없었다. 앞에서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최현도가 마지막이었다. 최현도는 회색 후드 티를 입고 약간 젖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싱그러운 얼굴이었다.
“자든가 배식하든가 한 가지만 해.”
“뭐.”
시연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졸려서 예민한 상태였고 상황 판단이 잘 안 됐다. 놀랍게도 최현도는 피식― 웃고는 시연의 손에서 집게를 뺏어 들었다. 서늘한 손과 스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진짜 웃은 건가. 입가를 다시 자세히 보았을 땐 웃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멍청하게 서 있을 거면 방으로 가.”
“내가 언제 멍청하게 서 있었다고…….”
시연은 꿍얼거리다 국을 뜨던 현도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입을 꾹 다물고 앞치마를 벗었다. 그녀가 식판에 제 몫의 음식을 담고 고개를 돌렸을 때 저 멀리 홀로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최현도가 보였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최현도와, 화또와 대화라는 걸 했다. 그와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자, 그럼 이제 3반의 무대입니다!”
“꺅, 어떡해. 이제 우리 반이야.”
“파이팅! 파이팅!”
앞에 앉아 있다가 무대로 올라가는 아이들의 등에 대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쳤다. 무대에 불이 꺼지고 노랫소리가 시작되었다.
동준이 마이크를 쥐고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긴장했는지 음 이탈이 나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음을 꾹 참는 표정의 동준이 손가락을 위로 뻗자 비트가 빨라지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리고 무대 양옆에서 다른 애들도 우루루 뛰어나와 자세를 잡았다.
정태를 선두로 빠른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춤을 추느라 숨이 흐트러진 동준이 가면 갈수록 더 많은 삑사리를 내었지만 그 때문에 다들 신나게 웃을 수 있었다. 시연은 우리 반이 춤과 노래뿐만 아니라 개그까지 준비했던 거였는지 잠깐 생각했다.
“어우, 유쾌한 3반의 무대였습니다. 다음은…….”
“잘했어, 잘했어!”
“수고했어!”
“우리 반이 제일 웃겼음!”
자리로 돌아온 장기 자랑 팀에게 박수를 치자 정태가 거만하게 웃어 보였다.
“얘네 춤 다 내가 가르쳤다.”
“그래그래, 잘했어.”
시연이 장난스럽게 정태의 머리를 토닥였다.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게임 하나 하고 갑시다. 일단, 각 반의 반장들! 빠르게 집합!”
“아, 이럴 줄 알았어.”
시연이 울상을 지으며 일어나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반장을 여러 번 해 봤지만 제일 싫은 게 바로 이것이었다. 늘 식상하게 반장이 무대 위로 올라가서 춤추고……
“1등 7반, 2등 6반, 3등 4반…….”
사회자가 무대에 오른 순서대로 일렬로 줄을 세웠다.
“네, 이 순서는 사실 아무 상관 없습니다. 길게 말할 거 없이 우리 반장들 댄스 한번 보고 가시죠.”
그래, 차라리 춤이 낫다. 노래를 하는 것이 더 끔찍했다. 시연이 뻣뻣하게 몸을 움직이는 5반 반장에게 박수를 치며 생각했다. 이제 시연도 앞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노래가 뚝 끊겼다.
“여기까지! 이제 여기서부터는 노래 한번 보시죠.”
“저부터요?”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감기에 걸려서요…… 그냥 춤추면 안 될까요?”
사회자가 짓궂은 말을 하려다가 볼이 발간 시연의 안색이 안 좋아 보였는지 능청스럽게 넘어갔다.
“여기까지! 하고 반장은 식상하니까 반에서 제일 까불거리는 친구 집합!”
시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화끈거리는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사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진 건 다른 이유였다. 사회자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녀는 이미 노래를 부른 탓이었다.
***
“여기까지! 이제 여기서부터는 노래 한번 보시죠.”
“저부터요?”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묻자 사회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연은 한숨을 푹 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 사회자가 건네는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사랑―은 은하수 다방 문 앞에서 만나…….”
“잘하네, 율동도 같이!”
사회자가 하는 말에 시연이 눈을 질끈 감으며 무릎을 굽혔다 펴며 몸을 움직였다. 흡사 유치원 재롱 잔치를 보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홍차와 냉커피를 마시며 매일 똑같은 노래를 듣다가 온다네―”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얼굴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지고 정말 엉망진창이었다. 영원한 흑역사가 될 것 같아 결국 시연은 시간을 되돌렸다.
***
“안 내려가요?”
얼굴이 빨간 시연이 멍하게 서 있자 사회자가 걱정스러운 눈을 했다.
“아…….”
시연은 꾸벅 인사를 한 다음 후다닥 무대 밑으로 내려왔다.
자리에 앉아서도 연신 부채질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었다. 현도의 것이었다. 시연보다 서너 줄 뒤에 앉아 있었지만 저 빨간 얼굴만큼은 그에게 무척 잘 보였다.
최현도가 시연을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보면 볼수록 저건 진짜……. 못마땅하다는 듯이 그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약간 꾸며 낸 것 같은 부분이 있었다.
“자, 그럼 대망의 1위는…… 3반입니다!”
3등도 아니고 인기상도 아니어서 포기하고 있던 차였는데 1등이라니. 3반에서 뒤늦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아아―
“진짜 수고했어!”
시연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장기 자랑 팀의 등을 두드리다가 멈칫했다. 늘 그랬듯이 최현도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어서였다. 오전에 최현도가 단단히 잡았던 손목의 느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연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그가 그러는 것처럼 집요하게 응시해 주었다.
최현도가 눈을 떼지 않으며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최현도와 그녀 사이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이 온통 검게 칠해졌다.
“3반 나가세요― ”
최현도가 흘깃 사회자를 보더니 그녀를 보던 시선을 거두고 뒤돌았다.
“……어?”
방금 쟤……
웃은 것 같은데.
반별로 강당을 빠져나왔으나 복도는 참 시끌벅적했다. 3반의 경우는 더했다. 모두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이거 다 내 노래 덕분이다?”
“뭔 니 노래 덕분이야, 내 춤 덕분이지.”
정태가 동준에게 헤드록을 걸며 장난을 치다 뒤따라 나오던 현도와 툭― 부딪쳤다.
“아.”
현도가 아주 작게 소리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정태와 동준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 헤드록을 풀어내려 여기저기 마구 휘두른 동준의 팔이 현도의 명치를 가격한 것을 원망스럽게도 동준과 정태 모두 정확히 보았다.
후다닥― 헤드록을 풀고 정자세로 돌아간 그들이 화또의 얼굴을 긴장하며 응시했다. 화또는 배에 손을 얹은 채로 약간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직도 손에 화또의 단단한 배를 가격했던 그 타격감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동준의 낯빛은 더 안 좋아질 수 없을 만큼 안 좋아졌다.
“미안! 괘, 괜찮냐.”
동준이 약간 뒷걸음질을 쳤다. 화또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아오, 새끼야. 그러니까 내가 풀라고 했잖아.’
동준이 등 뒤로 정태를 꼬집으며 속삭였다.
‘악, 뭐 인마. 니가 때렸잖아, 내 잘못이냐!’
‘몰라! 야, 쫄지 마. 2대 1이니까 우리가 더 유리함.’
‘우리가 더 유리한 거 맞냐.’
‘…….’
정태의 속삭임에 동준이 침묵을 유지했다.
“비켜.”
현도의 싸늘한 목소리가 들리자 정태와 동준이 벽에 바짝 붙었다. 그는 그런 그들을 신경도 쓰지 않는지 유유히 지나갔다.
“와, 오정태 너 이 새끼 잔뜩 쫄아 가지고.”
최현도가 보이지 않을 즈음이 되자 벽과 하나가 된 것처럼 찰싹 붙었던 몸을 떼고 동준이 허세를 부렸다.
“지가 더 쫄았으면서.”
“어. 티 났냐.”
아, 이 손을 잘라 버리든가 해야지. 동준이 제 손목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빨리 가자.”
존나 쪽팔려. 정태가 이제는 벽에 머리를 쿵쿵 박으며 자책하고 있는 동준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넌 그래도 다른 방이잖아. 난 같은 방이라고.”
“오, 정태야……. 넌 왜 오 정태란 말인가…….”
오, 라임 쩔었어. 동준의 뇌 맑은 얼굴을 보며 정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새끼는 아무 생각이 없다. 지금 지 친구는 오늘 밤에 자다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 아빠 성이 그 흔한 김씨였으면 최씨와는 엮일 일이 없잖아.
안타깝게도 고등학교는 대부분이 가, 나, 다 이름순이었다.
“야, 우리 방에서 자면 되잖아.”
“그래야겠다.”
“어우, 남자 새끼가 소심해 가지고.”
“지는 손을 자르느니 어쩌니 했으면서.”
동준이 코를 쓱 문지르며 멋쩍게 웃었다.
남학생 방 2개, 여학생 방 2개였는데 그날 밤 남학생 방에서는 꽤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다. 방 하나를 최현도 혼자 쓰다시피 한 것이었다. 새벽에 그 방으로 건너가 잠을 잔 몇몇이 있긴 했지만 모두 최현도가 자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들어가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동준과 정태에게 그들이 화또의 스위치를 건드린 것 같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현도는 방에 아무도 오지 않아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예민한 성격 탓에 누가 옆에 있으면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이른 아침 그는 꽤 개운하게 눈을 떠 방에 시체처럼 자고 있는 몸뚱어리들을 넘어 욕실로 들어갔다.
지금이 벌써 8시인데 이놈들은 아침을 먹을 생각이 없나 보다. 현도는 수건으로 대충 머리를 털며 가방에서 옷을 꺼내 입고 다시 시체들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아악―!”
다리 하나를 밟긴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
“하아암―”
시연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도무지 잠이 깨지 않는다. 수학여행 마지막 밤이니 그냥 자기 아쉬워서 새벽 5시까지 카드 게임을 하며 놀았다. 철민 대신 아침 식사 배식을 하기로 한 바람에 딱 1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게다가 어제 등산의 여파로 온몸이 얻어맞은 것처럼 아팠다. 아침을 거르고 쭉 잘 친구들이 정말 부러웠다. 다른 반 애들도 어제 다들 늦게 잔 건지 아침을 먹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식당 안은 한적했다.
“오이는 조금만.”
시연이 오이소박이를 듬뿍 집어 식판에 올렸다.
좋아하지도 않는 오이를 한가득 받은 학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지만 시연은 몽롱한 상태라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간간이 하품을 쩍쩍 하면서 꾸준히 오는 식판에 오이소박이를 담았다. 꼭 공장의 기계가 된 것 같았다.
반복적인 일에 점점 더 피곤해지고 눈이 감길 때였다. 집게를 쥔 손에 힘이 풀리기 시작하더니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오이소박이가 그리 인기 있는 반찬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헛손질과 느린 움직임에 지친 몇몇은 오이소박이는 그냥 생략하고 지나갔다.
시연은 꾸벅꾸벅 졸다가 바닥에 오이 몇 개를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손에 쥔 집게는 이제 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딱―
누군가 시연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냈다. 시연은 반쯤 풀린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최현도였다.
갑자기 식판과 수저가 달그락거리는 소음이 들리는 것을 느끼며 시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줄이 더 이상 없었다. 앞에서 고개를 기울이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는 최현도가 마지막이었다. 최현도는 회색 후드 티를 입고 약간 젖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싱그러운 얼굴이었다.
“자든가 배식하든가 한 가지만 해.”
“뭐.”
시연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졸려서 예민한 상태였고 상황 판단이 잘 안 됐다. 놀랍게도 최현도는 피식― 웃고는 시연의 손에서 집게를 뺏어 들었다. 서늘한 손과 스치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진짜 웃은 건가. 입가를 다시 자세히 보았을 땐 웃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멍청하게 서 있을 거면 방으로 가.”
“내가 언제 멍청하게 서 있었다고…….”
시연은 꿍얼거리다 국을 뜨던 현도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입을 꾹 다물고 앞치마를 벗었다. 그녀가 식판에 제 몫의 음식을 담고 고개를 돌렸을 때 저 멀리 홀로 앉아 밥을 먹고 있는 최현도가 보였다.
그러고 나서 깨달았다. 최현도와, 화또와 대화라는 걸 했다. 그와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