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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왜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등산을 수학여행 코스에 넣는 걸까. 오늘 오전 일정은 전부 등산. 그 시간 동안 다른 곳을 갔으면 조금 더 재미있게 놀 수 있을 텐데.

시연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은 기간 내내 근육통으로 고생하는 것은 정말 사양이다. 그녀가 팔을 휘휘 돌리면서 눈앞에 무섭게 솟은 산을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정상은 하얗게 눈이 덮여 있었다.

“그래…… 정상까지 안 가는 게 어디야.”

“아, 진짜 힘들다.”

“아직 흙을 밟지도 않았거든?”

그녀가 민지의 말에 작게 웃으며 발목을 돌렸다. 준비 운동을 단단히 해 두어야 할 것 같다.

“30분 뒤의 내가 할 말이야. 시연아, 나 버리고 가면 안 돼.”

“당연하지.”

“2학년 3반! 혹시 몸 안 좋은 친구 있어?”

“저요!!!”

선생님의 말에 손을 번쩍 들고 뛰어가는 민지를 보며 시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보고 버리지 말라고 했으면서 자기는 이렇게 쉽게 버리다니. 담임 선생님의 옆에서 민지가 애교스럽게 보내는 하트에 시연은 헛웃음을 지었다.

“반장은 뒤에서 뒤처지는 애들 잘 끌고 올라가. 아, 부반장이 하는 게 좋으려나.”

“아뇨, 쌤. 반장 체력 좋아요. 작년 체육 대회 M.V.P였어요.”

시연이 요즘 들어 친해진 정태를 말없이 노려보았다.

“오, 의왼데. 암튼 반장 잘 갔다 와. 힘들면 그냥 내려오고.”

“쌤은 안 가세요?”

“응.”

너무 단호하게 대답해서 할 말을 잃었다.

“……예. 다녀오겠습니다.”

시연이 담임 선생님 뒤에서 작게 손을 흔드는 엄살쟁이들에게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고는 앞서 가는 일행을 따라 출발했다. 네 명 빠졌으니까 나 포함해서 스물다섯 명이네.

“아, 진짜 힘들다.”

시연은 헉헉거리며 중얼거렸다. 아까 민지가 했던 말은 30분 후의 시연이 할 말이었나 보다. 그녀는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꽃샘추위는 어디로 간 건지 더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잠시 가방을 바위 위에 내려놓고 외투를 벗어 허리에 묶었다.

애초에 선생님들이 힘들면 내려가라고 한 터라 여자애들은 등산을 하는 시늉만 대충 하다가 하산하고 있었다. 산을 내려가는 여자애들이 시연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반장, 너도 같이 내려가자. 쌤이 힘들면 내려오라고 했잖아.”

“아니, 괜찮아. 난 도착점 찍고 내려갈게.”

시연이 내려가는 여자애들 숫자를 세며 말했다.

“파이팅!”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 그녀가 휘적휘적 손을 저었다. 체력이 꽤 좋은 시연인데도 산이 험해서 무척 힘들었다. 엄마 아빠 모두 등산에는 별로 취미가 없으셔서 등산을 해 본 적도 별로 없었고.

이제 시연의 앞에서 가는 여자애들은 두세 명뿐이었다. 시연이 조금 전에 인원 점검을 할 때도 여자애들의 숫자는 변하지 않은 걸 보면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내려가긴 아깝잖아.’라고 시연과 같은 생각을 했던 것이 분명하다.

“10분 쉬다가 내려가자!”

시연이 큰 소리를 내서 말하고는 바위에 대충 걸터앉았다. 수학여행 일정에 왜 이리 험준한 코스를 넣은 건지 모르겠다. 초봄에 땀을 뻘뻘 흘릴 정도라니. 시연은 땀에 젖어 축축한 머리를 대충 빗어 묶고 물을 마셨다. 몸에서 열이 올라와서 그런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이 무척 차갑게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남은 연지와 잠깐 얘기를 나누다 보니 10분이 금방 지나갔다.

“난 뒤에서 갈게.”

“응. 밑에서 봐.”

“파이팅!”

파이팅! 시연도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내려가는 건 훨씬 쉽겠지 뭐. 시연이 안일하게 생각하며 엉덩이를 일으켰다.

“3반 출발할게!”

기세 좋게 출발한 것과 다르게 시연은 금방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내리막길을 걸으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꼭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았다. 게다가 커다란 바위는 왜 이렇게 많은지. 남자애들은 어쩜 저렇게 성큼성큼 잘 내려가는지 모르겠다. 시연은 거의 앉다시피 자세를 낮춰 걸으며 구슬땀을 닦았다.

“어우, 이건 어떻게 내려가지.”

올라올 때는 옆에 밧줄을 잡고 오른 커다란 바위였다. 그녀가 바위에 앉아서 발을 뻗어도 땅에 발이 닿지가 않았다. 앞서 가는 우리 반 애들은 점점 멀어져 가고 뒤에서는 4반 애들이 다가오고. 총체적 난국이었다. 다리에 힘이 없어서 뛰어내리면 넘어질 것 같아서 뒤로 돌아서 내려가야 하나.

“야.”

어찌할 바를 몰라 땅만 뚫어지게 보던 시야에 남색 운동화가 들어왔다. 그리고 크고 모양 좋은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어?”

시연이 그 손을 멍하게 보고 있자 현도가 조금 미간을 찌푸렸다.

“잡으라고.”

“어어……”

손의 주인을 확인한 시연이 여전히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가 시연의 손목을 잡았다. 4반은 이제 바로 등 뒤에 있었다. 최현도의 손이 무척이나 어색했지만 그녀도 현도의 팔을 꼭 붙잡고 급한 경사가 있는 바위 위로 한 발을 내디뎠다. 순간 힘이 풀린 다리에 몸이 휘청했지만 그가 단단히 손목을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다.

“그냥 뛰어내려.”

“넘어질 것 같은데…….”

시연의 머뭇거림은 최현도의 미간이 기어이 찌푸려지자 이내 사라졌다.

탁―

그녀가 결국 뛰어내리자 현도가 안정감 있게 받았다. 바닥에 착지하는데 다리가 휘청 풀려서 그녀의 팔을 단단히 잡은 최현도가 없었더라면 넘어질 뻔했다.

“고, 고맙…… 으악!”

손목을 놓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난 현도에게 인사를 하며 비켜서려던 시연이 움푹 꺼진 땅을 밟고 앞으로 넘어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넘어지지는 않았다.

최현도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푹― 박아 몸을 지탱했으니까. 코가 시큰시큰 아픈데 그의 표정을 볼 엄두가 안 나서 시연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그대로 굳었다.

“뭐 하냐.”

짜증과 한숨이 섞인 목소리에 시연이 얼얼한 코를 움켜쥐며 뒤로 물러났다. 설마 도와줬으면서 심기에 거슬린다고 주먹을 날리진 않겠지? 시연이 무표정한 현도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오오오오, 3반 반장!”

“쟤네 사귀나?”

“남자앤 누구야?”

뒤에서 즐거운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시연은 얕게 숨을 고르며 현도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최현도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움찔거렸지만 그가 입을 떼기 전에 시간이 돌아갔다.

깜박―

탁―

“고마워.”

이번에는 움푹 꺼진 땅을 피해 발을 내디디며 가볍게 인사했다.

“……멍청이.”

최현도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는 휙― 몸을 돌려 앞서 걸어갔다. 다리가 휘청거리지도 않는지 일정하고 빠른 걸음걸이였다.

시연은 제 손목을 주물러 보았다.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개학식 날엔 엄청 세게 그녀의 팔을 틀어쥐었었는데. 하긴, 쟨 모르는 일이었다. 시연은 잠깐 그의 길쭉한 다리를 멍하게 보다가 걸음을 재촉했다.



***



“아빠!”

멀리 아빠가 보였다. 시연은 정문을 향해 달려갔다. 하루 종일 후들거리던 다리가 지금은 제 역할을 잘해 주고 있었다. 그녀는 담임 선생님께 부탁해 저녁 먹기 전 1시간을 얻어 냈다.

“어어, 한시연, 어디 가.”

과학 선생님이었다. 그가 담배를 비벼 끄고는 그녀에게 다가왔다.

“쌤, 저 담임 쌤한테 허락 맡았어요. 아빠 오셔서.”

시연이 담임 선생님이 주신 허가서를 내밀며 말했다.

“아아, 원래 제주도 살았다고 그랬지. 어이쿠, 아버님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다 와. 쌤은 들어간다.”

“네!”

그녀는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아빠에게 다시 달려갔다.

“어이구, 우리 공주! 못 본 사이에 아가씨 다 됐네.”

“뭐야, 한 달도 안 지났거든요.”

시연이 새침을 떨자 아빠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빠의 다정하고 투박한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6시까지 들어가면 되는 거야?”

“응응.”

“그래, 우리 딸 오늘은 뭐 했어.”

“말도 마. 아침부터 등산했는데 오후에는…….”

아빠와 벤치에 나란히 앉은 시연은 오랜만에 수다쟁이가 되었다.

“맘에 드는 남학생은 없어?”

“아직 없어.”

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왜 그 순간 화또의 인상 쓴 얼굴이 스쳐 지나갔는지는 의문이었다.

“아직? 아…직?”

“아, 왜 그래, 아빠.”

경직된 얼굴의 아빠를 보며 시연이 깔깔 웃었다.

“그 나이대 남자애들은 다 멍청이야. 그러니까 보이는 대로 믿으면 안 돼, 알겠지?”

“알겠어요.”

“너한테 틱틱거리는 애도 무시하고, 너한테 잘해 주는 애도 무시해.”

“그냥 남자애들이랑은 말도 섞지 말라고 해.”

“……그럴래, 그럼?”

반색을 하는 아빠의 얼굴에 시연은 눈썹을 찌푸리며 웃었다.

“크흠. 어이쿠야, 벌써 1시간이 지났네.”

“……벌써?”

시계를 보니 1시간하고도 10분이 지났다.

“수고하십니다. 우리 딸 좀 데려다주고 금방 나오겠습니다!”

입구에 무료하게 앉아 있는 경비원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공주.”

시연은 아빠의 손을 잡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근육통 때문에 걷는 것이 힘들었지만 시연은 벌써 세 번이나 시간을 되돌렸다. 세 번 시간을 돌려서 네 배 더 많이 걷는 것 같지만 몸이 느끼는 피로감은 똑같다. 단지, 네 배 더 많이 걷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이 피곤할 뿐이었다.

“딸, 공부 열심히 하고. 늘 씩씩하게. 알겠지?”

“당연하지. 아빠도 밥 잘 챙겨 드시고 주말엔 쉬어야 돼.”

“우리 공주가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아빠 걱정도 하고.”

“흥. 아 참, 반주는 딱 반병만 하시고요.”

오냐. 아빠가 시연의 머리를 흩트리며 대답했다. 시연은 본관 건물 입구에서 아빠와 진하게 포옹을 하고는 아쉬운 작별 인사를 했다. 아빠가 시야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입구에 서 있다가 시연은 얼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 되니 꽤 쌀쌀했다. 아빠와 떨어지고 나니 차가운 날씨가 더욱 확연히 전해졌다.



“뭐야, 반장! 반장 없어서 내가 배식했잖아.”

부반장인 철민이가 투덜거렸다. 철민인 아침에도 배식 당번을 했던 터라 불만이 많아 보였다.

“미안, 미안. 내일 아침이랑 점심 내가 할게.”

“뭐야, 신철민! 그럴 수도 있지!”

“맞아, 맞아. 시연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민지와 현정이가 어느새 곁으로 와 쏘아붙이자 철민이 당황한 기색으로 ‘내일 아침에 니가 하는 거다.’ 하고 확인하고는 밥을 먹으러 갔다.

“아, 배고프다.”

시연이 주린 배를 부여잡고 식판에 밥을 퍼 담았다.

“아빠는 잘 만나고 왔어?”

“응. 근데 이거 맛있어?”

시연이 어묵볶음을 가리키며 묻자 현정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이건 패스.

“장기 자랑 하는 애들은 레크레이션 전까지 연습한대.”

“30만 원 꼭 받아야지!”

“30만 원이면 우리 진짜 포식하겠다.”

“그러…….”

시연이 말을 하려다 말고 멈추자 현정과 민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기 뭐 있어?”

“아니, 아니야.”

시연은 고개를 저으며 물을 마셨다. 어디에 있다 왔는지 이제야 밥을 받는 최현도와 눈이 마주쳤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일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순간 오전에 그가 도와줬던 일이 머릿속에 갑자기 떠올랐다. 시연은 테이블 밑에 있는 한쪽 손목을 문질렀다.

정말 화또는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