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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반! 출석 체크한다!”

시연이 중구난방으로 떠드는 아이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건이 왜 안 왔어! 일건이랑 연락 되는 사람!! 시연은 공항에서 수학여행이라 잔뜩 들뜬 3반 아이들을 통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집합 시간에서 15분이 지나서야 모두들 모여서 수하물을 부칠 수 있었다.

“수고했어, 반장.”

담임 쌤이 배시시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차마 선생님께 선생님이 좀 도와주시지 그랬어요, 하고 말할 배짱은 없어서 시연은 그저 웃었다.

“자! 30분 후 8시에 다시 여기서 집합이다! 늦으면 놔두고 갈 테니까 알아서 해!”

네! 다들 대답은 우렁차게 했지만 선생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슬금슬금 흩어지고 있었다. 시연은 반장 체면상 말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렸다가 말이 끝나자마자 민지의 팔을 붙잡고 쌩 자리를 떴다.

“나 배고파 죽겠어. 뭐 좀 먹자.”

“근데 나 지갑을 아까 캐리어에 넣었어.”

“바보. 그럼 어쩔 수 없이 이 언니가 쏜다.”

시연이 씩 웃으며 민지의 팔을 잡아끌고 도넛 가게로 들어갔다. 혹시나 늦을까 봐 아침을 안 먹고 나왔더니 배에서 천둥소리가 나고 있었다.

하얀 가루가 발린 도넛도 맛있을 것 같고, 진한 초코로 코팅된 도넛도 맛있을 것 같다. 카라멜 크림? 저것도 맛있을 것 같은데……. 하나 먹고 시간을 돌려서 다른 걸로 또 먹을까.

시연은 꽤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오늘 같은 날에 시간을 돌리면 이 설렘이 줄어들 것 같아서 아침부터 몇 번이나 참았다. 그 인내에 대한 보상인지 너무나 설레고 두근거려서 입꼬리가 줄곧 멋대로 씰룩거렸다. 그러니 아쉽지만 하나만 먹어야겠다.

시연은 하얀 가루가 발린 도넛과 민지가 고른 초코 도넛을 담고 계산대로 가져갔다.

“아메리카노 두 잔도 주세요.”

“네. 9천8백 원입니다.”

지갑이…… 지갑이…….

시연이 다급하게 가방을 뒤적거렸다. 작은 파우치도 꺼내고 혹시 몰라 준비한 필통도 꺼냈는데 그 중요한 지갑만 없었다.

“왜, 설마 도둑맞았어?”

민지가 덩달아 놀란 얼굴로 묻자 불현듯 기억이 떠올랐다. 지갑을 다른 가방에 넣은 채 그대로 캐리어에 넣었다.

“내 지갑도 캐리어 안에 있나 봐…….”

헐. 순식간에 상황 판단을 한 민지가 도넛을 아쉽게 쳐다보았다.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되어서 표정을 흐리고 있던 시연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야.”

그리고 불쑥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내밀어졌다. 지폐를 쥔 손은 크고 단정했다. 먼저 그 손과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민지의 표정이 요상해졌다. 그것은 경악과 놀람 비슷한 것이었다. 뒤를 돌아본 시연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바로 화또가 그들의 뒤에서 무표정으로 손만 내민 채 서 있었으니까.

“받으라고.”

화또의 말에 이제 짜증이 섞였다.

“왜, 왜?”

당황하며 물은 말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돈을 안 받으면 한 대 때리기라도 할 것 같은 화또의 얼굴에 시연은 얼떨떨하게 돈을 받았다.

“……고마워.”

시연이 작게 속삭이자 현도는 시연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이내 휙 고개를 돌리고 가게를 나가 버렸다.

화또는 정말, 알면 알수록 알 수가 없다.



***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솔직히 몇 년쯤 지나면 어디서 뭘 했고 뭘 봤는지 전부 잊어버릴 테다. 그래도 이곳에서 즐거웠다는 기억만은 분명히 오래도록 남아 있겠지만.

제주도는 시연에게는 특별한 곳이었다. 그녀가 나고 자란 곳, 그리고 그녀의 능력을 처음 발견한 곳. 또, 아빠가 살고 있는 곳.

“민지야, 사진 좀 찍어 줘!”

신나게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셀카를 찍던 민지가 방방거리며 달려왔다. 폭포 잘 나오게 찍어 줘야 돼? 시연은 민지에게 폰을 넘기며 당부했다.

“예쓰. 찍는다? 하나, 둘, 셋!”

오, 예쁘게 나오는데? 민지가 사진을 보며 감탄했다. 즉, 그녀도 여기서 꼭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 아빠한테 사진 좀 보내고 찍어 줄게.”



아빠, 나 지금 천지연 폭포지롱! 이따 저녁에 전화할게∼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 공주! 여긴 어쩐 일로 왔어!

아빠의 목소리에서 놀람과 반가움이 물씬 묻어 나왔다.

“내가 얘기 안 했었나? 수학여행 제주도로 온다고.”

― 아빠는 몰랐지! 그러면 얼굴 한번 볼 수 있는 거야? 얼굴 보는 김에 선생님도 한번 뵙고 하면 좋을 텐데.

“음, 잘 모르겠어. 일정대로 움직이는 거라서. 아빠는 안 바빠?”

― ……안 바빠.

“바쁘구나.”

일도 제쳐 놓고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인 아빠가 귀여웠고, 또 그 모습에 울컥했다. 아빠가 그녀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에서 제주도는 참 멀었고 매일매일 연락을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 언제 서울 가는데?

“3일 뒤에.”

― 3일 뒤? 그러면…… 내일 아빠가 숙소로 찾아갈까?

“그럼 내가 선생님한테 말해 놓을게. 아빠 만난다고.”

밤늦게 방 밖으로 나갈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우리 담임 쌤은 이해해 주실 거다. 아마도.

― 그래, 우리 공주 재밌게 놀고. 사진 계속 보내고!

“네.”

대답은 잘 하고 끊었는데 눈물이 차올랐다. 괜히 폭포를 구경하는 척 난간에 기대서서 눈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폭포가 만드는 하얀 물보라를 구경하는 줄로 알 것이다.

아, 수학여행까지 와서 괜히 분위기 깨게 이게 뭐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되자 코 밑을 쓱쓱 문지르며 킁― 하고 코를 들이마신 시연이 고개를 돌렸다가 돌처럼 굳었다. 난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최현도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우는 걸 봤나?

창피함과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순식간에 시간을 돌리고 최현도에게서 게걸음으로 슬금슬금 멀어졌다. 물론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시간을 돌린다고 차오른 눈물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 최현도 아까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던 걸까? 아냐, 아닐 거야. 수학여행까지 와서 굳이 그녀를 노려보진 않았을 것이다. 화또라고 고등학교 수학여행이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닐 테니까. 아까는 그냥 우연히 시선이 닿았겠지 뭐. 그래그래. 시연은 혼자 중얼거리면서 게걸음으로 끝없이 멀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우리 반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고만고만한 애들 가운데 우뚝 솟은 최현도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어쩐지 그가 또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지만 멀어서 확신할 수는 없었다. 수학여행에서 아름다운 추억을 쌓으려면 어찌 됐든 최현도와는 웬만하면 엮이지 않길 진심으로 소망했다.

그러나,

신은 제 편이 아니었다.

“다들 네 명씩 앉았지요? 알아서 구워 드시면 됩니다.”

푸근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쓱쓱 닦으며 외쳤다. 빨간 양념에 재운 돼지 불고기를 가운데 두고 여기저기서 왁자지껄 떠들어 댔지만 시연이 앉은 테이블에는 침묵만 맴돌았다.

그녀의 옆자리에는 현정이, 현정이의 맞은편엔 동준이, 그리고…… 시연의 맞은편에는 최현도가 앉아 있었다. 그녀와 최현도는 정말 악연인 것이 틀림없다. 최현도 역시도 유일하게 그가 싫어하는―1학년 때 화또는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사람을 자꾸 마주치게 되니 이 망할 악연을 저주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현정과 동준, 시연은 차라리 홀로 다른 반과 같이 앉게 된 민지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화또의 주먹 사정거리 안에 위치한 동준은 촐싹거림은 잠시 내려 두고 숙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3월 한 달간 꽤 잠잠한 화또를 봤음에도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현정이는 트라우마가 깊게 박혔는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움찔거리고 있었다.

“꺄악!”

최현도가 팔을 뻗자 현정이 비명을 질렀다. 주변이 시끄러워서 소리가 묻혔지만 이 비운의 테이블에 앉은 나머지 세 명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현정이의 앞에 있던 사이다 병을 제 앞으로 가져온 현도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딸칵―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 안에서 최현도만 자유롭게 움직여 사이다 뚜껑을 땄다. 그리고 제 잔에 따르려다가 멈칫하고는 현정이를 보며 병을 살짝 들었다.

“사이다 마실래?”

“아냐아냐, 괘, 괘, 괜찮아!”

현정이는 안쓰러울 정도로 벌벌 떨었다. 화또의 면전에 대고 소리를 질러 버렸으니 당연히 화또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시연은 테이블 아래로 현정의 손을 꽉 붙잡으며 화또가 쥔 병을 주시했다. 화또가 손에 든 저 녹색 사이다 병이 어디로 향할지 몰랐다. 아주 위험해 보이는 흉기였다.

시연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시간을 돌릴 수 있게끔 정신을 집중했다. 빠르게 돌리려다 보면 정확한 시점으로 이동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 사람부터 살리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탁―

다행히 그가 얌전히 테이블에 병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벌벌 떨고 있는 이들에겐 관심도 없는 듯 젓가락으로 고기를 뒤적거렸다. 엉덩이를 뒤로 쑥 빼고 앉은 세 사람은 화또 모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빨리 먹고 나가자.’

시연이 눈치를 주자 동준이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입을 열었다.

“아이, 배고파라. 어디 한번 먹어 볼까나?”

아오, 저 발 연기. 시연이 입술을 꾹 깨물며, 젓가락을 든 동준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동준의 젓가락이 고기에 닿을 때쯤 음산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야.”

“어, 어?”

동준이 반사적으로 의자를 뒤로 쭉 빼며 자라목을 하자 현도가 인상을 팍― 찌푸렸다. 드디어, 화또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인가. 시연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현정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 안 익었어, 새끼야.”

“아…… 뒤집, 뒤집어야지 그럼.”

동준이 머쓱한 듯 목 뒤를 긁적이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시연도 어느새 뒤 테이블에 앉은 남자애와 등이 찰싹 맞닿을 만큼 이동한 의자를 슬쩍 당겨 앉았다.

드륵―

살살 당긴다고 당겼는데 소리가 났다.

최현도가 한심하다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연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점심을 해치웠다. 밥을 먹은 것 같지가 않아서 그녀는 테마파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매점으로 향했다. 조금 있다가 저녁을 먹을 테니 우유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뭐 먹지. 딸기 우유 먹을까, 초코 우유 먹을까.”

음, 그럼 일단 초코 우유 사서 한 모금 마셔 보고 결정해야지. 남들에게는 의아할 테지만 시연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시연은 초코 우유를 계산대로 들고 가 계산을 한 다음 그 자리에서 바로 뜯어 마셨다.

“목말랐어?”

“으음. 역시 딸기 우유가 낫겠다.”

시연이 초코 우유가 묻은 입가를 쓱쓱 닦으며 중얼거리자 민지가 물음표 가득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고는 시간을 돌렸다.

깜박―

“나는 딸기 우유.”

시연은 딸기 우유를 집어 들며 배시시 웃었다. 계산을 하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매점을 나오려다 시연은 우뚝 멈춰 섰다. 최현도가 매점 문 앞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은 더없이 냉랭했다.

“비켜.”

최현도가 싸늘하게 말하고는 매점 안으로 들어왔다. 스쳐 지나가며 어깨가 부딪쳐서 딸기 우유를 놓칠 뻔한 바람에 시연이 현도를 째려보았다. 그마저도 그가 살짝 눈길을 주니 후다닥 눈을 깔아 버렸지만.

“아, 진짜 또라이다, 또라이. 아침에 공항에서는 도와줬다가 지금은 또 저렇게 싸가지 없는 거 봐.”

시연이 딸기 우유를 전투적으로 입 안에 들이부으며 분노를 표현했다. 정말 진짜 당황스러울 정도로 최현도는 그녀를 싫어했다.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반응이 똑같은 사람은 처음이다. 아니, 반응이 더 안 좋아지는 것 같다.

“그러게. 쟨 왜 자꾸 널 째려보지? 화또가 그냥 째려보기만 할 애가 아닌데.”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좀 무서운데.”

“하하하하, 신경 쓰지 말자!”

민지가 어색하게 웃었다.

“확 쟤네 엄마한테 이를까 보다.”

아줌마와는 몇 주 사이 꽤 친해졌다. 아줌마는 자식이라고는 아들 둘뿐인데 둘 다 살갑지 않다고 애교를 부리는 시연을 퍽 귀여워했다.

“일렀다간 쟤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래도 지금은 휴화산이라고.”

니가 참아. 민지가 진지한 얼굴로 시연의 어깨를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