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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행여나 마주칠까 시연은 느릿느릿 걸었다. 우편물도 확인해 보고 괜히 폰을 꺼내서 페이스북도 들어가 보고 아주 느릿느릿. 엘리베이터 문 앞에 멈춰 섰을 때 엘리베이터는 18층에 있었다.
즉, 최현도는 집으로 들어갔다는 얘기였다.
“와, 진짜 죽을 뻔했다.”
시연은 안도 섞인 혼잣말을 했다. 오늘 그녀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적어도 밀폐된 공간에서는 화또와 말을 섞지 말자.’ 왜 싫어하냐는 질문도 절대 금지. 시연은 거울로 어쩐지 조금 창백해 보이는 제 얼굴을 안쓰럽게 보면서 17층을 꾹― 눌렀다.
그래, 이렇게 평화롭게 올라갈 수 있는 걸 아깐 왜 굳이 폭풍 속으로 뛰어 들어갔냐고. 사람이 느리게 살아야 된댔어. 이제부턴 교실에서 한 10분 정도 늦게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
― 17층입니다.
시연은 한숨을 푹 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늘은 악몽을 꿀 것 같은 예감이다. 꿈에 화또가 나올 것 같다.
저기 저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는 화또가.
…….
“아아악!”
시연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복도에 설치된 조명등의 주황색 빛을 받아 더 음산해 보이는 최현도가 귀를 막으며 얼굴을 구겼다.
“넌 사람 보고 소리 지르는 게 취……”
“왜, 왜 왔어!”
시연은 감히 화또의 말을 끊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현도는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시연을 따갑게 노려보다가 검은 비닐봉지를 시연의 품으로 던졌다.
“악! 이, 이게 뭐야.”
묵직한 것으로 맞은 충격에 시연은 휘청했다. 차마 이 검은 봉지 안을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또라면 검은 봉지 안에 도대체 뭘 넣을까.
겁먹은 눈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는 시연을 한심하게 보던 현도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위층에서 문소리가 들리자 시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발로 봉지를 툭 차 보았다.
움직이진 않는 것 같다.
시연은 저 밑바닥에 있는 용기를 끄집어내어 집게손가락으로 비닐봉지를 살짝 들추어 보았다.
“허…….”
시연은 허탈하게 웃었다. 무시무시해 보였던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흙 묻은 고구마였다. 심부름이었구나.
갑자기 미칠 듯이 창피해졌다. 시연은 새빨개진 얼굴에 몇 번 손부채질을 한 다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던 시점으로 시간을 돌렸다.
깜박―
― 17층입니다.
시연이 태연한 척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최현도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야?”
말투는 도도하게.
“…….”
최현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약간 인상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저 정도에는 그럭저럭 면역이 되어서 가볍게 넘길 만했다.
그는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바로 주지 않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시연은 그가 생각은 집에 가서 하고 지금은 그냥 줄 것만 주고 빨리 사라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던 최현도가 갑자기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시연은 다시 주춤거리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가관이네.”
그가 중얼거리자 시연은 백 스텝을 밟던 발을 멈췄다. 현도는 그런 그녀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지고는 문고리에 비닐봉지를 걸고 뒤돌아 계단을 올라갔다. 시연은 위층에서 나는 문소리를 들은 다음 현관으로 가 봉지를 들었다.
음, 이 실한 고구마도 똑같고 그 한심하다는 시선도 똑같다. ‘저걸 진짜 죽일까? 됐다, 저 따위를 뭐.’라는 말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은 그런 시선이었다.
어쨌든 한심한 사람이 된 기분은 참 이상했다.
다음 날에도 시연은 현도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자신을 싫어하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가 지었던 미소가 오늘도 그의 입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딘가 뒤틀린 것 같은, 깊은 곳에 검붉은 분노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미소가.
시간을 돌려서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질문도, 그의 미소도 전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는데 그의 시선은 마치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반장? 반장!”
“네, 네!”
시연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지금 교탁 앞에 나와 있었다. 곧 있으면 떠날 수학여행을 주제로 학급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오늘따라 맹하네.”
“아…… 어떤 얘기를 하는 중이었죠?”
그녀가 느끼기에도 정말 멍청하게 물었다. 시연이 나사 빠진 것처럼 구는 것은 처음이라 담임 선생님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머리 위로 물음표만 띄운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다가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엔 어느 시점으로 돌려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다. 언제부터 멍하게 있었는지가 생각날 리 없으니까. 시연은 한숨을 푹 쉰 다음 학급 회의를 처음 시작하는 순간으로 결정했다.
깜박―
“다음 주에 수학여행 가는 건 다들 알지? 뭐 좌석 배치나 장기 자랑 등등 정할 게 많으니까 하나씩 정해.”
“네, 그럼 학급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손 들고 의견을 말해 주세요.”
시연이 정해야 할 목록이 적힌 노트를 보며 말했다.
“먼저 버스 좌석 배치는 어떻게 할까요?”
자유롭게 의견이 오고 갔다. 담임 선생님이 턱을 괴고 옆에 앉아 계셨지만 시연은 그녀가 지금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수업만 들을 때는 몰랐는데 젊은 선생님치고는 의욕이 없어서 반장인 시연이 할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자유로운 선생님 밑에 있다고 좋아했다.
그렇다고 시연이 선생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지영 선생님은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있지만 없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그런대로 공평하게 모든 사항들이 정해지고 딱 한 가지만 남았다.
“장기 자랑 나갈 사람?”
“너!”
동준이 손을 들고 그녀를 지목했지만 못 본 척 무시하며 다른 친구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반에서 한 팀 나가는 거야?”
“응. 반에서 한 팀이고 1등 하는 반한테는 상금 준다던데?”
15만 원. 시연이 덧붙이자 시큰둥하던 분위기가 돌변했다.
“야야, 우리 반에 춤 잘 추는 사람 있나?”
“춤만 하지 말고 노래도 하자.”
“정태 너 춤 잘 추잖아. 너 나가고.”
“아, 왜. 난 싫어.”
“야, 15만 원이라잖아. 우리를 위해서 춤 한 번 못 춰 주냐?”
“니가 나가던가, 새끼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연이 뒤돌아 칠판에 이름을 적었다.
오정태 : 춤.
“아, 반장! 나 안 한다니까!”
“이미 적었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그죠, 선생님?”
“……으응, 그렇지!”
담임 선생님이 졸지 않았던 척 턱을 괴던 손으로 책상을 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안타깝게도 턱을 괸 손을 떼는 바람에 입가에 흐른 침이 투명하게 빛났지만 시연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우리 반이 1등 하면…… 반장, 상금이 얼마라고 했지?”
“15만 원이요.”
“그럼 15 받고 15 더!”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급격히 소란스러워졌다.
“오오오오오오!! 선생님 제가 반을 위해서 한번 불태워 보겠습니다!”
“좋아. 그런 자세야, 경태야!”
“쌤…… 정태요.”
“……다 정해졌지?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쌤은 가 볼게.”
잠깐 굳어 있던 선생님은 태연한 척 얼굴색을 바꾸고 출석부를 들고 휭― 앞문으로 나갔다.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이름을……. 민감한 열여덟 살 소년 정태의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시연은 확신했다. 담임 선생님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태뿐만이 아닐 거라는 것을. 아마 시연의 이름도 몰라서 반장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 역시 아주 잠깐 했다.
“……자, 그럼 노래는 누가 하지? 우리 반에 노래 잘하는 사람 있어?”
“반장이 해!”
시연이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나 노래 진짜 못해.”
“에이, 반장은 못하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아냐, 진짜 못해.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최현도 노래 잘하는데.”
장난스럽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그 작은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린 것은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작은 목소리가 담은 그 이름 석 자 때문인지 교실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차마 상상하기도 힘든, 화또와 함께하는 장기 자랑이 그려졌다. 끔찍했다.
“음…… 최현도 노래할래?”
반 아이들이 경악한 채로 시연을 보았다. 그들 모두 눈으로 말을 전달하려 시연에게 부릅뜬 상태라 약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했으면 좋겠어?”
최현도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 그의 눈에 담긴 저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인지 적의인지, 그도 아니면 그녀를 놀리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을 보면 그녀의 밑바닥까지 전부 파헤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니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시연이 동요하지 않은 척 덤덤히 말했다. 의자에 단정히 앉은 최현도는 시연의 대답에도 가만히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시연의 미세한 표정 변화나 움직임까지 전부 다 담아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교탁에 가린 그녀의 주먹이 꾹 쥐어졌다.
“안 할래.”
최현도가 관심 없다는 듯이 의자에 기대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시연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는 현도를 잠깐 더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휴우. 몇몇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화또는 못 들은 것 같았다.
행여나 마주칠까 시연은 느릿느릿 걸었다. 우편물도 확인해 보고 괜히 폰을 꺼내서 페이스북도 들어가 보고 아주 느릿느릿. 엘리베이터 문 앞에 멈춰 섰을 때 엘리베이터는 18층에 있었다.
즉, 최현도는 집으로 들어갔다는 얘기였다.
“와, 진짜 죽을 뻔했다.”
시연은 안도 섞인 혼잣말을 했다. 오늘 그녀는 교훈을 하나 얻었다. ‘적어도 밀폐된 공간에서는 화또와 말을 섞지 말자.’ 왜 싫어하냐는 질문도 절대 금지. 시연은 거울로 어쩐지 조금 창백해 보이는 제 얼굴을 안쓰럽게 보면서 17층을 꾹― 눌렀다.
그래, 이렇게 평화롭게 올라갈 수 있는 걸 아깐 왜 굳이 폭풍 속으로 뛰어 들어갔냐고. 사람이 느리게 살아야 된댔어. 이제부턴 교실에서 한 10분 정도 늦게 나오는 게 좋을 것 같다.
― 17층입니다.
시연은 한숨을 푹 쉬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오늘은 악몽을 꿀 것 같은 예감이다. 꿈에 화또가 나올 것 같다.
저기 저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는 화또가.
…….
“아아악!”
시연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자 복도에 설치된 조명등의 주황색 빛을 받아 더 음산해 보이는 최현도가 귀를 막으며 얼굴을 구겼다.
“넌 사람 보고 소리 지르는 게 취……”
“왜, 왜 왔어!”
시연은 감히 화또의 말을 끊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현도는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는 눈빛으로 시연을 따갑게 노려보다가 검은 비닐봉지를 시연의 품으로 던졌다.
“악! 이, 이게 뭐야.”
묵직한 것으로 맞은 충격에 시연은 휘청했다. 차마 이 검은 봉지 안을 열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화또라면 검은 봉지 안에 도대체 뭘 넣을까.
겁먹은 눈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는 시연을 한심하게 보던 현도는 계단으로 사라졌다. 위층에서 문소리가 들리자 시연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발로 봉지를 툭 차 보았다.
움직이진 않는 것 같다.
시연은 저 밑바닥에 있는 용기를 끄집어내어 집게손가락으로 비닐봉지를 살짝 들추어 보았다.
“허…….”
시연은 허탈하게 웃었다. 무시무시해 보였던 검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흙 묻은 고구마였다. 심부름이었구나.
갑자기 미칠 듯이 창피해졌다. 시연은 새빨개진 얼굴에 몇 번 손부채질을 한 다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던 시점으로 시간을 돌렸다.
깜박―
― 17층입니다.
시연이 태연한 척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그리고 문 앞에 서 있는 최현도를 차분히 바라보았다.
“어쩐 일이야?”
말투는 도도하게.
“…….”
최현도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약간 인상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저 정도에는 그럭저럭 면역이 되어서 가볍게 넘길 만했다.
그는 비닐봉지를 그녀에게 바로 주지 않고 뭔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시연은 그가 생각은 집에 가서 하고 지금은 그냥 줄 것만 주고 빨리 사라졌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하.”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던 최현도가 갑자기 기가 차다는 듯이 웃었다. 이유를 알 수 없어서 시연은 다시 주춤거리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가관이네.”
그가 중얼거리자 시연은 백 스텝을 밟던 발을 멈췄다. 현도는 그런 그녀에게 한심하다는 시선을 던지고는 문고리에 비닐봉지를 걸고 뒤돌아 계단을 올라갔다. 시연은 위층에서 나는 문소리를 들은 다음 현관으로 가 봉지를 들었다.
음, 이 실한 고구마도 똑같고 그 한심하다는 시선도 똑같다. ‘저걸 진짜 죽일까? 됐다, 저 따위를 뭐.’라는 말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은 그런 시선이었다.
어쨌든 한심한 사람이 된 기분은 참 이상했다.
다음 날에도 시연은 현도의 눈치를 살폈다. 어제 엘리베이터 안에서 왜 자신을 싫어하냐고 질문을 던졌을 때 그가 지었던 미소가 오늘도 그의 입가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딘가 뒤틀린 것 같은, 깊은 곳에 검붉은 분노가 똬리를 틀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미소가.
시간을 돌려서 그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질문도, 그의 미소도 전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는데 그의 시선은 마치 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반장? 반장!”
“네, 네!”
시연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지금 교탁 앞에 나와 있었다. 곧 있으면 떠날 수학여행을 주제로 학급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오늘따라 맹하네.”
“아…… 어떤 얘기를 하는 중이었죠?”
그녀가 느끼기에도 정말 멍청하게 물었다. 시연이 나사 빠진 것처럼 구는 것은 처음이라 담임 선생님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
머리 위로 물음표만 띄운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다가 그녀가 머리를 긁적였다. 이번엔 어느 시점으로 돌려야 할지 정확히 모르겠다. 언제부터 멍하게 있었는지가 생각날 리 없으니까. 시연은 한숨을 푹 쉰 다음 학급 회의를 처음 시작하는 순간으로 결정했다.
깜박―
“다음 주에 수학여행 가는 건 다들 알지? 뭐 좌석 배치나 장기 자랑 등등 정할 게 많으니까 하나씩 정해.”
“네, 그럼 학급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손 들고 의견을 말해 주세요.”
시연이 정해야 할 목록이 적힌 노트를 보며 말했다.
“먼저 버스 좌석 배치는 어떻게 할까요?”
자유롭게 의견이 오고 갔다. 담임 선생님이 턱을 괴고 옆에 앉아 계셨지만 시연은 그녀가 지금 주무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수업만 들을 때는 몰랐는데 젊은 선생님치고는 의욕이 없어서 반장인 시연이 할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자유로운 선생님 밑에 있다고 좋아했다.
그렇다고 시연이 선생님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강지영 선생님은 어쩐지 미워할 수 없는 타입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있지만 없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그런대로 공평하게 모든 사항들이 정해지고 딱 한 가지만 남았다.
“장기 자랑 나갈 사람?”
“너!”
동준이 손을 들고 그녀를 지목했지만 못 본 척 무시하며 다른 친구에게 발언권을 넘겼다.
“반에서 한 팀 나가는 거야?”
“응. 반에서 한 팀이고 1등 하는 반한테는 상금 준다던데?”
15만 원. 시연이 덧붙이자 시큰둥하던 분위기가 돌변했다.
“야야, 우리 반에 춤 잘 추는 사람 있나?”
“춤만 하지 말고 노래도 하자.”
“정태 너 춤 잘 추잖아. 너 나가고.”
“아, 왜. 난 싫어.”
“야, 15만 원이라잖아. 우리를 위해서 춤 한 번 못 춰 주냐?”
“니가 나가던가, 새끼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연이 뒤돌아 칠판에 이름을 적었다.
오정태 : 춤.
“아, 반장! 나 안 한다니까!”
“이미 적었으면 무를 수 없습니다. 그죠, 선생님?”
“……으응, 그렇지!”
담임 선생님이 졸지 않았던 척 턱을 괴던 손으로 책상을 탁― 치며 맞장구를 쳤다. 안타깝게도 턱을 괸 손을 떼는 바람에 입가에 흐른 침이 투명하게 빛났지만 시연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우리 반이 1등 하면…… 반장, 상금이 얼마라고 했지?”
“15만 원이요.”
“그럼 15 받고 15 더!”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급격히 소란스러워졌다.
“오오오오오오!! 선생님 제가 반을 위해서 한번 불태워 보겠습니다!”
“좋아. 그런 자세야, 경태야!”
“쌤…… 정태요.”
“……다 정해졌지? 그럼 그런 걸로 알고 쌤은 가 볼게.”
잠깐 굳어 있던 선생님은 태연한 척 얼굴색을 바꾸고 출석부를 들고 휭― 앞문으로 나갔다. 2주가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이름을……. 민감한 열여덟 살 소년 정태의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시연은 확신했다. 담임 선생님이 이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정태뿐만이 아닐 거라는 것을. 아마 시연의 이름도 몰라서 반장이라고 부르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 역시 아주 잠깐 했다.
“……자, 그럼 노래는 누가 하지? 우리 반에 노래 잘하는 사람 있어?”
“반장이 해!”
시연이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나 노래 진짜 못해.”
“에이, 반장은 못하는 게 없을 것 같은데?”
아냐, 진짜 못해.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다.
“……최현도 노래 잘하는데.”
장난스럽고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그 작은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린 것은 정말 미스터리한 일이었다. 작은 목소리가 담은 그 이름 석 자 때문인지 교실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처럼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머릿속에서 차마 상상하기도 힘든, 화또와 함께하는 장기 자랑이 그려졌다. 끔찍했다.
“음…… 최현도 노래할래?”
반 아이들이 경악한 채로 시연을 보았다. 그들 모두 눈으로 말을 전달하려 시연에게 부릅뜬 상태라 약간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다.
“했으면 좋겠어?”
최현도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시연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 그의 눈에 담긴 저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호기심인지 적의인지, 그도 아니면 그녀를 놀리는 건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눈을 보면 그녀의 밑바닥까지 전부 파헤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니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시연이 동요하지 않은 척 덤덤히 말했다. 의자에 단정히 앉은 최현도는 시연의 대답에도 가만히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시연의 미세한 표정 변화나 움직임까지 전부 다 담아내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교탁에 가린 그녀의 주먹이 꾹 쥐어졌다.
“안 할래.”
최현도가 관심 없다는 듯이 의자에 기대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시연은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연은 창밖을 바라보는 현도를 잠깐 더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뒀다.
휴우. 몇몇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 화또는 못 들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