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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최현도와 왜 이렇게 잘 엮이는 걸까. 영화 감상부는 분명 인기가 많아서 가위바위보라도 해야 될 줄 알았는데 순탄히 잘 넘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이제 보니 바로 최현도 때문이었다. 그녀와 민지가 이름을 적은 다음 바로 그가 이름을 적은 것 같았다.

최현도라는 이름 석 자가 떡하니 적혀 있으니 아무도 감히 끼어들지 못한 거겠지. 화또와 사이좋게 가위바위보를 하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것이고, 화또와 부 활동을 같이 하고 싶은 사람도 아마 없을 테니까.

생각보다는 괜찮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영화 감상만 하다 올 거고 담당 선생님도 늘 계실 테다. 민지와는 1학년 때부터 줄곧 2학년이 되면 꼭 영화 감상부에 들자고 약속했었기에 시간을 돌려 다른 부에 이름을 적기도 좀 그랬다.

게다가 다른 부에 들었는데 혹시나, 만에 하나 화또가 따라오면? 무심히 창밖을 보는 화또의 저 순정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얼굴을 보면 시연의 이런 생각이 도끼병 같았지만 그간의 행동들을 보면 이상하리만큼 화또는 그녀에게 집착했다. 이성 간의 그렇고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시선이 늘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왔다는 것이다.

창가에서 두 번째 분단에 앉은 시연은 그녀보다 두 줄 앞 창가 자리에 앉은 최현도의 단정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앞으로 화또보다 두어 줄 뒤에 앉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녀를 볼 수 없으니까.

“으아…….”

순간 화또가 뒤돌아 빤히 바라보는 것을 상상한 시연이 팔에 돋은 소름을 쓱쓱 문질렀다.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이 될 것 같았다.

시연이 이렇게 마음 편하게 최현도를 관찰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시연을 노려보지 않을 때는 공부를 하거나―화또는 의외로 정말 성실했다―턱을 괴고 한 곳만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에 빠지는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끔 그의 시선에 운 나쁘게 걸린 애들은 식은땀을 흘려 대지만 그가 그 애들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딱 지금처럼 저렇게 턱을 괴고 창밖을 보고 있는 화또는 당분간은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따뜻한 실내라 창에 김이 서려 창밖이 잘 보이지도 않는데 몇 분째 창밖을 보는 최현도는 다른 세상 사람처럼 동떨어져 보였다. 한마디로 여고생들의 마음을 깊이 파고드는 정석 같은 모습이었다.

실제로 우리 반에도 ‘화또 괜찮지 않아?’ 하고 말하는 애들이 한둘씩 생기고 있었다. 장난이나 쳐 대고 땀 냄새를 풀풀 풍기는 다른 남자애들과 최현도는 확실히 달랐으니까.

그런 반면 1학년 때 그와 같은 반이었던 애들 몇몇은 화또가 이상해졌다고, 화를 내지 않는다고 울먹거렸다. 그들은 화또가 화를 참다가 터뜨리면 더 큰 재앙이 덮칠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화또가 화를 내지 않으니 여자애들 사이에서 화또의 이야기가 조금씩 나왔다. 애초에 저 얼굴인데 여자애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시연은 여자애들이 여태까지는 감정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저건 화또야. 화또. 아주 무서운 놈이라고. 정신 차려.’ 이렇게.

“한시연? ……3반에 한시연 안 왔어?”

“와, 와, 와써요!”

화또의 허울 좋은 겉모습에 흔들리고 있을 여자애들에게 애도를 표하다 시연이 다급하게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렇게 말을 더듬을 건 또 뭐람.

깜박―

“한시연?”

“네!”

이번엔 제대로, 여유 있게 손을 번쩍 들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현도를 관찰하던 것을 계속하려 고개를 돌렸을 때 뜻밖에도 그는 뒤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까 상상했던 것만큼 무섭지는 않았다. 그의 묘한 표정이 평소와 같이 그녀에게 화가 난 것처럼 느껴지진 않았기 때문이다.

“최현도?”

네. 현도가 단정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그는 창밖을 보는 대신 부 활동에 대해 설명하는 선생님을 보았다.

“1주에서 2주 동안 영화 1편을 볼 거고, 영화를 보고 나면 토론할 거야. 그리고 발표도 두어 번쯤 있을 거고.”

“아아아아아― 발표 싫어요.”

“자자, 쉿. 영화관으로 현장 체험도 나갈 건데 싫으면 다른 부로 옮기던가.”

아이들의 야유가 뚝 멎었다. 시연은 민지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영화 감상부는 옳은 선택이었다.

불이 꺼지고 블라인드를 내려 교실이 어두워지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외국 코믹 영화였는데 가볍게 보기는 딱 좋았다. 그녀의 웃음 코드에도 맞아서 시연도 몇 번이나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화또에게로 고개를 돌렸을 때, 시연은 멍하게 입을 벌렸다.

화또가, 웃고 있었다. 그녀의 시야에서는 콧대가 아주 살짝만 보이는 옆모습이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턱을 괴고 고개를 살짝 숙인 화또는 분명히 웃고 있었다.



―화또가 다른 애들처럼 똑같이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



그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애가, 아니, 잠깐. ‘예쁘게’는 삭제하자. 화또가 예쁘게 웃는다니. 화또의 겉모습에 넘어가면 안 된다. 다른 여자애들은 모를지라도 시연은 화또의 괴상한 성격을 이미 여러 번 경험해 봤다.

그러니까…… 웃을 수 있는 애가 평소에는 왜 그렇게 무섭게 구는 걸까. 게다가 생각보다 화또가 얌전하다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왜 그녀한테만 그렇게 적의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다른 애들한테는 딱히 정상이 아닌 것처럼 군 적도 없고 특별히 위협하거나 그런 적도 없었다. 화를 내지도 않았고 또라이도 아니었다. 아직 애들은 화또라는 타이틀 때문에 경계하고 있어서 눈치를 못 채는 것 같긴 하지만.

시연은 최현도를 생각하기만 해도 몸에 힘이 쭉쭉 빠지고 한없이 우울해졌다. 전에 그 쓰레기통 사건은 없던 일이 되긴 했어도 또 그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 몰랐다. 마치 일진한테 괴롭힘을 당하는 왕따가 된 것 같았다.

“어휴, 내 팔자야.”

시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화또에 대해 생각하느라 전엔 무섭게 느껴졌던 아파트 입구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차라리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물어볼까? 설마 진짜로 때리기야 하겠어. 어쩌면 물어봐 주길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르잖아. 보통 사람이라면 이유를 물어봐 달라고 그렇게 며칠을 노려보진 않겠지만 최현도는 화또다. 범인을 뛰어넘은 사람이라고.

“어엇! 잠깐만요!”

시연은 스르륵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우다다다― 달려갔다. 다행히도 고마우신 분이 기다려 줘서 시연은 무사히 엘리베이터에 탈 수 있었다. 뭐, 굳이 집에 빨리 가야 할 이유는 없지만 닫히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보면 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 문이 닫힙니다.

“헉헉…… 감사합니…… 꺅!”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돌아 인사를 하던 시연은 돌연 짧은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화또가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서 있었다. 잠깐 그를 응시하다가 시연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어머, 이건 돌려야 해.

깜박―

― 문이 닫힙니다.

기계음과 함께 시연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순간으로 돌아왔다.

뒤돌아보지 말자.

시연은 엘리베이터 문에 코를 박을 것처럼 붙어 서서 가쁜 숨을 골랐다. 반질반질한 스테인리스 문에 시연이 내뱉는 숨으로 뿌연 김이 불규칙적으로 서렸다 사라졌다. 최현도 역시 시연이 못마땅할 테니 굳이 말을 걸지 않을 테다.

“뭐 하냐.”

시연의 예상을 짓밟고 짜증을 담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어, 어?”

정말로 못 들은 척하고 싶었지만 화또의 말을 씹었다가 이 밀폐된 공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으므로 삐걱거리는 목을 돌리며 대답했다. 정말 맹해 보였을 것이다. 돌아본 그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아니, 왜 갑자기 말을 거냐고. 여태까지처럼 무시하면 되잖아. 한 번도 말 건 적 없잖…….

아, 생각해 보니 억울해졌다. 말을 제대로 섞어 본 적도 없으면서 사람을 이렇게까지 싫어하냐. 싫은 것을 보는 저 눈빛.

쓰레기가 나뒹구는 복도 바닥에 넘어져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 눈빛이 다시 떠올랐다.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야. 내가 뭐 너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어?”

“잘못한 거? 잘못한 거라…….”

그가 서늘한 눈으로 시연을 응시하며 뜸을 들이다 이내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약간의 침묵 뒤에 나타난 그 미소가 어찌나 소름 돋던지 시연은 그냥 이 엘리베이터를 안 타는 것을 택했다.

깜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