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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다음 날, 시연은 더 큰 재앙을 발견했다.
“……왜지? 이 이름이 왜 여기 있지? 이거 화또 이름 맞는 거지…….”
게시판에 붙은 청소 구역 명단을 보며 중얼거리는 시연의 등을 민지가 가볍게 토닥거렸다.
쓰레기 분리수거 : 한시연, 최현도.
이제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벽에 쿵쿵 머리를 박는 시연을 보며 민지도 안타까움에 울상을 지었다. 화또가 이상하리만큼 시연을 쳐다본다는 것은 민지도 알고 있었다.
보통 소설이나 만화 같은 데서 보면 사건은 전부 한적한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일어나던데……. 헐, 내가 무슨 생각을. 얼른 불길한 상상을 걷어 낸 민지는 그녀의 친구를 이 암담한 상황에서 구할 묘책을 궁리했다.
“아! 시연아! 그냥 하루하루 번갈아 가면서 하자고 그래! 혼자 저걸 다 들려면 좀 힘들긴 하겠지만 화또랑 사이좋게 나눠 드는 것보단 낫잖아!”
“아, 그럼 되겠다!”
시연이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어찌 됐든 최현도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만 한 학기 내내 청소 시간마다 같이 오순도순 분리수거를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래서 시연은 용기를 내어 화또의 책상 앞에 섰다. 단어장을 보고 있던 화또가 고개를 들어 그의 책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이를 확인했다. 그의 단정한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마주 보는 시선만으로도 심장이 쑥 꺼지는 것 같았지만 시연은 용기를 냈다.
“우리…… 분리수거 담당이잖아…….”
“그런데?”
최현도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아무래도 다시 해야 될 것 같다. 지레 겁을 먹은 시연이 생각했다.
깜박―
“분리수거 얘기로 긴히 할 말이 있어.”
허.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 뭔진 모르겠지만 심기에 거슬렸나 보다.
그럼 다시―
깜박―
“우리가 분리수거를 같이 해야 하는 상황인데 내가 좋은 생각이 있어서…….”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럼 다, 다시―
“우리가 정말 기쁘게도 분리수거를 같이 하게 되었어.”
“……죽을래 진짜?”
으악, 엄마야.
시연은 울상을 지었다. 화또의 얼굴이 더 구겨질 수도 없을 만큼 와락 구겨졌다. 그의 음산한 목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내가 뭘 했다고……. 시연은 정말 억울했다.
다, 다시.
깜박―
“부, 분리수거는 날마다 돌아가면서 하면 좋겠어!”
시연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제발, 제발. 어쩌다 보니 화또에겐 앞뒤 잘라먹고 용건만 말한 것이 되어 버렸겠지만 화또에게 맞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양손을 턱 밑에 꼭 쥔 시연이 부들부들 떨었다. 가드를 어떻게 올리는 거더라.
최현도가 화를 참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든가.”
그, 그럼 오늘은 내가 할게! 소리치고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가 화또가 귀찮다는 듯이 손짓을 하자 교실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멋있었어, 시연아!”
뒤따라 나온 민지가 큰일을 해냈다며 등을 토닥였다.
“와…….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화또가 ‘죽을래’라고 중얼거릴 때는 진짜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화또 생각보다는 멀쩡한데. 그냥 알았다고 했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민지의 순진한 표정을 보며 그녀는 입을 벙긋벙긋하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래, 그런 걸로 하자.
대망의 청소 시간이 다가와 시연은 홀로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뒷문 옆에 있는 분리수거 통은 서랍식이었다. 각 칸에 붙은 분류대로 쓰레기를 잘 버려 주기만 한다면 분리수거 당번은 쓰레기를 비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겠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섬세할 리 없었다. 시연은 집게로 뒤적이며 쓰레기를 제대로 분류했다.
모든 칸이 가득 차서 전부 비워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캔과 유리는 포기하고 시연은 종이 칸 위에 비닐 칸을 포개 올려놓았다. 그리고 일반 쓰레기통을 비운 검은 비닐봉지를 꽉 묶어 비닐 칸 위에 올려놓았다. 개학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게 처음이라 쓰레기가 넘쳐 났다. 역시 혼자 하는 건 좀 무리였나. 시연은 묵직한 쓰레기 더미를 툭 차며 생각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아플 정도였다.
내가 이걸 들 수 있을까.
“들어야지 뭐.”
시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허리를 굽혀 쓰레기 더미를 안아 올리려 했다.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 시연은 낑낑 소리를 냈지만 어찌 들어 올리는 것은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앞이 안 보였다. 시연은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고개를 쭉 빼고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비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툭― 가볍게 엉덩이가 부딪쳤다. 그러나 시연은 무거운 걸 들고 있는 데다가 자세도 엉거주춤해서 그만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쿵―
시연이 힘들게 안고 있던 플라스틱 서랍이 떨어져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묶었던 비닐봉지가 충격으로 풀어져 쓰레기가 복도 밖으로 쏟아졌다. 시연은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치켜든 상태였다. 팔꿈치와 무릎에서 징― 하고 아린 고통이 올라왔지만 그것보단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아야…….”
시연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그녀가 넘어진 원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최현도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너…….”
시연이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함에도 그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더럽게 진짜.”
그가 복도에 쏟아진 쓰레기를 보고 중얼거렸다. 시연은 제 귀를 의심하며 최현도를 올려다보았다.
“헐, 한시연 너 괜찮아?”
“시연아! 괜찮아?”
교실을 청소하던 몇몇이 나와 시연에게 다가왔다. 복도에도 구경하는 시선이 늘었다. 우뚝 서 있는 최현도와 쓰레기로 지저분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시연을 보며 저마다 수군거렸다. 시연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로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최현도는 시연에게 한 번 더 눈길을 준 다음 긴 다리로 쓰레기 더미를 넘어 자리를 떴다.
시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쓰레기들과 빨개진 무릎, 점점 더 몰려오는 아이들. 시연은 최현도의 빳빳한 뒷모습을 보며 시간을 돌렸다.
깜박―
복도에 쏟아졌던 쓰레기도, 호기심 가득 찬 구경하는 시선들도, 넘어진 시연도 전부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연은 차곡차곡 포개진 서랍들과 그 위에 놓인 검은 쓰레기 봉지에 흘깃 시선을 던지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민지야, 저거 좀 같이 들어 주면 안 돼? 매점 쏠게.”
“그래, 그래!”
민지와 나눠서 드니 훨씬 나았다. 복도를 걷는 중에도 아까 넘어졌던 게 자꾸 생각나서 발을 쿵쾅거리며 걸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 순간만큼은 화또에 대한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컸다.
“근데 화또는 보기만 하지 말고 좀 도와주지.”
“뭐?”
“화또 저기서 계속 보고 있는데?”
시연은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정말 최현도는 뒷문 쪽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혼자 드는 게 신경 쓰이긴 했나 봐. 화또 의외로 괜찮은데?”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시연이 제법 확신하는 말투로 말했다.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아까 넘어졌을 때 손이라도 내밀어 줬겠지.
이번 일로 시연은 확실히 깨달았다. 최현도는 정말로 그녀를 싫어한다는 것을.
***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나자 분노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커졌다. 도대체, 왜, 그토록 그녀를 싫어한다는 말인가. 짐작 가는 이유가 단 하나도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최현도는 1학년 때 들었던 소문과는 달랐다. 1학년 땐 며칠에 한 번씩은 꼭 사고를 쳤고 늘 화를 달고 살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문만 아니었다면 그저 조용한 남학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다만, 시연에 한해서라면 그는 소문과 꽤 비슷했다. 겨우 일주일을 넘긴 시점이긴 하지만 시연을 보는 그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저를 반장으로 뽑아 주신다면…… 뽑아 주신다면…….”
지금 시연은 반장 후보로서 3반 아이들 앞에서 각오를 말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반장이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시연은 그래도 꽤 열심히 연설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앞에 나와서 스물여덟 쌍의 눈이 그녀에게 향하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쩌면 저 뒷자리에서 최현도가 그녀를 샅샅이 파헤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다시.
깜박―
“저를 반장으로 뽑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3반에 봉사하겠습니다. 저는 반장을 할 때마다……”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는 건지 참 답답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시간을 돌린 다음에야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믿음직한 반장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을 마치자마자 시연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현도에게 향했다. 이젠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최현도는 아니나 다를까,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연설은 흠잡을 곳이 없이 완벽했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부분도 없었다.
투표를 마친 뒤 개표는 임시 반장인 최현도가 맡게 되었다.
“한시연 한 표.”
별로 하고 싶어서 나온 반장 선거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조금 욕심이 생겨서 시연은 그가 여러 번 접어진 투표용지를 펴서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조마조마하게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신철민 한 표.”
칠판에 적힌 신철민 이름 옆에 그은 이번 한 획으로 시연과 철민의 표수가 똑같아졌다. 시연은 두근두근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교탁 위에 있는 남은 표들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3개.
“이태형. 한 표.”
시연의 이 쿵쾅거리는 심장과 전혀 관계없는 현도는 일정한 빠르기로 개표를 진행했다. 이제 두 표 남았다. 이태형은 부반장이 확실했고 나머지 저 두 표로 결정이 나는 것이었다.
“한시연. 한 표.”
예스! 한 표만 더!
현도는 시연의 이름 옆에 한 획을 더 긋고는 용지를 펼치려다 멈칫했다.
“이 표가 신철민이면 투표 한 번 더 하는 겁니까?”
“그렇지. 완전 스릴 넘치겠는데?”
아니요, 선생님.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습니다.
최현도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쩐지 느릿느릿 투표용지를 펼쳤다. 그래서 시연이 이건 또 신종 괴롭힘인가 하고 고민하던 찰나에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그 ‘화또’에게 빨리 읽으라고 독촉을 할 수는 없는 다른 아이들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최현도는 시연을, 다른 아이들은 시연을 바라보는 최현도를 바라보았다. 왜 그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태형.”
마지막 투표용지를 펼쳐 읽으면서도 그는 계속 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시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관찰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와아아아! 대박 스릴 넘쳤음.”
“철민이 진짜 아깝다.”
흥분한 아이들이 점점 시끄러워질 때 즈음에서야 그는 시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때마침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이 나간 후 최현도도 교실을 나가자 시연은 책상 위로 무너지듯 엎드렸다.
“꺄악, 시연아, 진짜 축하해! 반장, 반장!”
민지와 몇몇 여자애들이 호들갑을 떨며 시연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고마워.”
“긴장했지……”
시연의 힘 빠진 목소리에 민지가 등을 토닥여 왔다. 반장 선거 때문에 긴장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현도가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면 이상한 공기가 둘 사이에 맴돌았다. 그녀를 짓누르는 무겁고, 무서운 공기였다. 최현도의 소문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소문 따위를 다 떠나서 그가 그녀를 바라보면 이상한 긴장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며칠 전의 그 사건 이후로 긴장감은 더 심해졌다.
“갑시다, 반장!”
“응? 어딜?”
“C.A 시간이잖아. 보자, 우리는 9반으로 가야 되는데?”
민지는 어딘가 멍한 시연을 일으켜 세우고 9반으로 가 적당한 자리에 앉혀 주기까지 했다. 그녀의 친구는 오늘 반장 선거 때문에 정신이 없는 듯 멍했지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시연이 이러는 건 처음이고 평소와 달리 멍한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민지가 넋이 빠진 시연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나서 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소한 얼굴들도 많이 보이고……
시연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왜?”
민지도 시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다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목 위로 차분히 내려앉은 저 그림 같은 소년은 최현도였다.
다음 날, 시연은 더 큰 재앙을 발견했다.
“……왜지? 이 이름이 왜 여기 있지? 이거 화또 이름 맞는 거지…….”
게시판에 붙은 청소 구역 명단을 보며 중얼거리는 시연의 등을 민지가 가볍게 토닥거렸다.
쓰레기 분리수거 : 한시연, 최현도.
이제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벽에 쿵쿵 머리를 박는 시연을 보며 민지도 안타까움에 울상을 지었다. 화또가 이상하리만큼 시연을 쳐다본다는 것은 민지도 알고 있었다.
보통 소설이나 만화 같은 데서 보면 사건은 전부 한적한 쓰레기 분리수거장에서 일어나던데……. 헐, 내가 무슨 생각을. 얼른 불길한 상상을 걷어 낸 민지는 그녀의 친구를 이 암담한 상황에서 구할 묘책을 궁리했다.
“아! 시연아! 그냥 하루하루 번갈아 가면서 하자고 그래! 혼자 저걸 다 들려면 좀 힘들긴 하겠지만 화또랑 사이좋게 나눠 드는 것보단 낫잖아!”
“아, 그럼 되겠다!”
시연이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어찌 됐든 최현도에게 말을 걸어야 하는 것이지만 한 학기 내내 청소 시간마다 같이 오순도순 분리수거를 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래서 시연은 용기를 내어 화또의 책상 앞에 섰다. 단어장을 보고 있던 화또가 고개를 들어 그의 책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이를 확인했다. 그의 단정한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마주 보는 시선만으로도 심장이 쑥 꺼지는 것 같았지만 시연은 용기를 냈다.
“우리…… 분리수거 담당이잖아…….”
“그런데?”
최현도가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이며 물었다. 아무래도 다시 해야 될 것 같다. 지레 겁을 먹은 시연이 생각했다.
깜박―
“분리수거 얘기로 긴히 할 말이 있어.”
허.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 뭔진 모르겠지만 심기에 거슬렸나 보다.
그럼 다시―
깜박―
“우리가 분리수거를 같이 해야 하는 상황인데 내가 좋은 생각이 있어서…….”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그럼 다, 다시―
“우리가 정말 기쁘게도 분리수거를 같이 하게 되었어.”
“……죽을래 진짜?”
으악, 엄마야.
시연은 울상을 지었다. 화또의 얼굴이 더 구겨질 수도 없을 만큼 와락 구겨졌다. 그의 음산한 목소리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내가 뭘 했다고……. 시연은 정말 억울했다.
다, 다시.
깜박―
“부, 분리수거는 날마다 돌아가면서 하면 좋겠어!”
시연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제발, 제발. 어쩌다 보니 화또에겐 앞뒤 잘라먹고 용건만 말한 것이 되어 버렸겠지만 화또에게 맞지 않을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양손을 턱 밑에 꼭 쥔 시연이 부들부들 떨었다. 가드를 어떻게 올리는 거더라.
최현도가 화를 참는 듯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든가.”
그, 그럼 오늘은 내가 할게! 소리치고는 슬슬 뒷걸음질을 치다가 화또가 귀찮다는 듯이 손짓을 하자 교실 밖으로 도망치듯 뛰쳐나왔다.
“멋있었어, 시연아!”
뒤따라 나온 민지가 큰일을 해냈다며 등을 토닥였다.
“와……. 나 진짜 죽는 줄 알았어.”
화또가 ‘죽을래’라고 중얼거릴 때는 진짜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화또 생각보다는 멀쩡한데. 그냥 알았다고 했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민지의 순진한 표정을 보며 그녀는 입을 벙긋벙긋하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래, 그런 걸로 하자.
대망의 청소 시간이 다가와 시연은 홀로 분리수거를 시작했다. 뒷문 옆에 있는 분리수거 통은 서랍식이었다. 각 칸에 붙은 분류대로 쓰레기를 잘 버려 주기만 한다면 분리수거 당번은 쓰레기를 비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겠지만 아이들이 그렇게 섬세할 리 없었다. 시연은 집게로 뒤적이며 쓰레기를 제대로 분류했다.
모든 칸이 가득 차서 전부 비워야 했지만 현실적으로 캔과 유리는 포기하고 시연은 종이 칸 위에 비닐 칸을 포개 올려놓았다. 그리고 일반 쓰레기통을 비운 검은 비닐봉지를 꽉 묶어 비닐 칸 위에 올려놓았다. 개학하고 쓰레기통을 비우는 게 처음이라 쓰레기가 넘쳐 났다. 역시 혼자 하는 건 좀 무리였나. 시연은 묵직한 쓰레기 더미를 툭 차며 생각했다. 슬리퍼를 신은 발이 아플 정도였다.
내가 이걸 들 수 있을까.
“들어야지 뭐.”
시연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곤 허리를 굽혀 쓰레기 더미를 안아 올리려 했다. 상상 이상으로 무겁다. 시연은 낑낑 소리를 냈지만 어찌 들어 올리는 것은 성공했다. 그런데 문제는 앞이 안 보였다. 시연은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고개를 쭉 빼고 시야를 확보하려 애썼다.
“비켜.”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고 툭― 가볍게 엉덩이가 부딪쳤다. 그러나 시연은 무거운 걸 들고 있는 데다가 자세도 엉거주춤해서 그만 앞으로 고꾸라져 버렸다.
쿵―
시연이 힘들게 안고 있던 플라스틱 서랍이 떨어져 큰 소리가 남과 동시에, 묶었던 비닐봉지가 충격으로 풀어져 쓰레기가 복도 밖으로 쏟아졌다. 시연은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치켜든 상태였다. 팔꿈치와 무릎에서 징― 하고 아린 고통이 올라왔지만 그것보단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아야…….”
시연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으며 그녀가 넘어진 원인을 향해 눈을 돌렸다. 최현도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기색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너…….”
시연이 분노로 말을 잇지 못함에도 그는 전혀 동요가 없었다.
“더럽게 진짜.”
그가 복도에 쏟아진 쓰레기를 보고 중얼거렸다. 시연은 제 귀를 의심하며 최현도를 올려다보았다.
“헐, 한시연 너 괜찮아?”
“시연아! 괜찮아?”
교실을 청소하던 몇몇이 나와 시연에게 다가왔다. 복도에도 구경하는 시선이 늘었다. 우뚝 서 있는 최현도와 쓰레기로 지저분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시연을 보며 저마다 수군거렸다. 시연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로 그의 무표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나 굴욕적인 순간이었다.
최현도는 시연에게 한 번 더 눈길을 준 다음 긴 다리로 쓰레기 더미를 넘어 자리를 떴다.
시연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나뒹구는 쓰레기들과 빨개진 무릎, 점점 더 몰려오는 아이들. 시연은 최현도의 빳빳한 뒷모습을 보며 시간을 돌렸다.
깜박―
복도에 쏟아졌던 쓰레기도, 호기심 가득 찬 구경하는 시선들도, 넘어진 시연도 전부 제자리로 돌아갔다.
시연은 차곡차곡 포개진 서랍들과 그 위에 놓인 검은 쓰레기 봉지에 흘깃 시선을 던지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민지야, 저거 좀 같이 들어 주면 안 돼? 매점 쏠게.”
“그래, 그래!”
민지와 나눠서 드니 훨씬 나았다. 복도를 걷는 중에도 아까 넘어졌던 게 자꾸 생각나서 발을 쿵쾅거리며 걸었다.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그 순간만큼은 화또에 대한 두려움보다 분노가 더 컸다.
“근데 화또는 보기만 하지 말고 좀 도와주지.”
“뭐?”
“화또 저기서 계속 보고 있는데?”
시연은 고개를 살짝 뒤로 돌렸다. 정말 최현도는 뒷문 쪽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혼자 드는 게 신경 쓰이긴 했나 봐. 화또 의외로 괜찮은데?”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시연이 제법 확신하는 말투로 말했다. 도와줄 생각이었다면 아까 넘어졌을 때 손이라도 내밀어 줬겠지.
이번 일로 시연은 확실히 깨달았다. 최현도는 정말로 그녀를 싫어한다는 것을.
***
그날 이후 며칠이 지나자 분노보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커졌다. 도대체, 왜, 그토록 그녀를 싫어한다는 말인가. 짐작 가는 이유가 단 하나도 없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최현도는 1학년 때 들었던 소문과는 달랐다. 1학년 땐 며칠에 한 번씩은 꼭 사고를 쳤고 늘 화를 달고 살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문만 아니었다면 그저 조용한 남학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다만, 시연에 한해서라면 그는 소문과 꽤 비슷했다. 겨우 일주일을 넘긴 시점이긴 하지만 시연을 보는 그는 늘 화가 나 있었다.
“저를 반장으로 뽑아 주신다면…… 뽑아 주신다면…….”
지금 시연은 반장 후보로서 3반 아이들 앞에서 각오를 말하는 중이었다. 애초에 반장이 되고 싶지도 않았지만 시연은 그래도 꽤 열심히 연설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앞에 나와서 스물여덟 쌍의 눈이 그녀에게 향하니 머리가 새하얘졌다. 어쩌면 저 뒷자리에서 최현도가 그녀를 샅샅이 파헤치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다시.
깜박―
“저를 반장으로 뽑아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3반에 봉사하겠습니다. 저는 반장을 할 때마다……”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나는 건지 참 답답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시간을 돌린 다음에야 전부 기억할 수 있었다.
“……믿음직한 반장이 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연설을 마치자마자 시연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현도에게 향했다. 이젠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최현도는 아니나 다를까, 잔뜩 인상을 쓴 채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연설은 흠잡을 곳이 없이 완벽했었다.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부분도 없었다.
투표를 마친 뒤 개표는 임시 반장인 최현도가 맡게 되었다.
“한시연 한 표.”
별로 하고 싶어서 나온 반장 선거는 아니었지만 어쩐지 조금 욕심이 생겨서 시연은 그가 여러 번 접어진 투표용지를 펴서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조마조마하게 그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신철민 한 표.”
칠판에 적힌 신철민 이름 옆에 그은 이번 한 획으로 시연과 철민의 표수가 똑같아졌다. 시연은 두근두근하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교탁 위에 있는 남은 표들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3개.
“이태형. 한 표.”
시연의 이 쿵쾅거리는 심장과 전혀 관계없는 현도는 일정한 빠르기로 개표를 진행했다. 이제 두 표 남았다. 이태형은 부반장이 확실했고 나머지 저 두 표로 결정이 나는 것이었다.
“한시연. 한 표.”
예스! 한 표만 더!
현도는 시연의 이름 옆에 한 획을 더 긋고는 용지를 펼치려다 멈칫했다.
“이 표가 신철민이면 투표 한 번 더 하는 겁니까?”
“그렇지. 완전 스릴 넘치겠는데?”
아니요, 선생님.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습니다.
최현도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어쩐지 느릿느릿 투표용지를 펼쳤다. 그래서 시연이 이건 또 신종 괴롭힘인가 하고 고민하던 찰나에 그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차마 그 ‘화또’에게 빨리 읽으라고 독촉을 할 수는 없는 다른 아이들이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최현도는 시연을, 다른 아이들은 시연을 바라보는 최현도를 바라보았다. 왜 그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이태형.”
마지막 투표용지를 펼쳐 읽으면서도 그는 계속 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는 시연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관찰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우와아아아! 대박 스릴 넘쳤음.”
“철민이 진짜 아깝다.”
흥분한 아이들이 점점 시끄러워질 때 즈음에서야 그는 시연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때마침 종소리가 울리고 선생님이 나간 후 최현도도 교실을 나가자 시연은 책상 위로 무너지듯 엎드렸다.
“꺄악, 시연아, 진짜 축하해! 반장, 반장!”
민지와 몇몇 여자애들이 호들갑을 떨며 시연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고마워.”
“긴장했지……”
시연의 힘 빠진 목소리에 민지가 등을 토닥여 왔다. 반장 선거 때문에 긴장한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최현도가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도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면 이상한 공기가 둘 사이에 맴돌았다. 그녀를 짓누르는 무겁고, 무서운 공기였다. 최현도의 소문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다. 소문 따위를 다 떠나서 그가 그녀를 바라보면 이상한 긴장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며칠 전의 그 사건 이후로 긴장감은 더 심해졌다.
“갑시다, 반장!”
“응? 어딜?”
“C.A 시간이잖아. 보자, 우리는 9반으로 가야 되는데?”
민지는 어딘가 멍한 시연을 일으켜 세우고 9반으로 가 적당한 자리에 앉혀 주기까지 했다. 그녀의 친구는 오늘 반장 선거 때문에 정신이 없는 듯 멍했지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시연이 이러는 건 처음이고 평소와 달리 멍한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민지가 넋이 빠진 시연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나서 시연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생소한 얼굴들도 많이 보이고……
시연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서 멈췄다.
“왜?”
민지도 시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가다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짙은 고동색 머리카락이 목 위로 차분히 내려앉은 저 그림 같은 소년은 최현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