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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자, 오늘 종례 시간까지 청소 구역 정해 놔. 여기 이 종이 임시 반장한테 줄 거니까 청소 구역 옆에 이름 쓰면 돼. 한 구역당 세 명 넘어가면 가위바위보 할 거니까 알아서 잘 정하고.”
임시 반장이면 최현도, 최현도면 화또. 결국 반 아이들 모두 화또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화또와 말도 섞어야 할지도 몰랐다.
“서, 선생님, 제가 하면 안 될까요?”
‘화또만 아니면 누구든 좋아’라는 반 전체의 바람에 따라 용기 있는 남자애 한 명이 총대를 멨다.
“임시 반장이 있는데 왜? 현도 잘할 수 있지? 쌤은 간다!”
강지영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현도의 소문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뒷문으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재빨리 나가는 지영은 난 모르겠다― 하는 마음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다닥 나간 담임 선생님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현도가 고개를 돌려 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용기 있었던, 남자애를 보며 ‘청소 구역’이라고 적힌 종이를 팔랑거렸다.
“왜. 내가 하는 게 싫어?”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고개가 떨어질 듯 흔들어 대는 가여운 그 남자애는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운 나쁘게 화또의 주변에 앉은 애들은 조금이라도 화또에게서 멀어지려 아주 조심스럽게 의자를 당겼다.
“니가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데.”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담담히 말했다. 화또의 소문을 몰랐다면 그냥 잘생긴 남학생이었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어우, 아니야. 그런 건 임시 반장인 니가 하는 게 딱 좋지! 나 따위가 뭘 하겠어.”
그, 그렇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동의를 구하는 말에 다른 아이들도 그렇지, 그렇지 하고 어색한 연기를 했다.
음. 화또가 낸 작은 소리에도 반 전체가 움찔했다.
“그래. 내가 할게.”
“가, 감사합니다!”
살려 주셔서.
화또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다행히도 그게 다였다.
종례 시간까지 저 종이에 이름을 써야 하는데 점심시간이 되도록 이름을 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의 자포자기 수준이 된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니까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라는 결론을 내렸다.
“야, 3반 농구 붙자!”
꾸물꾸물 수저통을 챙겨 식당으로 가려던 3반 아이들을 멈춰 세운 것은 5반의 임시 반장이었다.
“농구? 우리 반에 농구 좀 하는 애 없냐?”
“태형이랑 정태랑…… 현도.”
“현도? 그게 누군데?”
화.또.
알 듯 말 듯한 이름에 되물었다가 친구의 입 모양을 보곤 경악하는 표정을 했다.
“야, 미쳤냐.”
“그렇지? 근데 걔 농구 겁나 잘함.”
“그래도 안 돼, 새끼야. 야! 밥 먹고 나갈 테니까 딱 기다려!”
오키! 5반 임시 반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야, 3반 한대! 하고 소리치며 복도를 달려갔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반에는 남자애들은 서너 명뿐이고 거의 여자애들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서너 명 중에 화또가 있다는 것이지만. 교실 뒤쪽 사물함 앞에 몰려서 있는 여자애들은 자연스럽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양치하러 갈래?’
‘그래! 치약 있는 사람?’
‘나 있어.’
‘난 칫솔 사야 해.’
‘나 치약 있다니까?’
‘아니, 칫솔!!’
현정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더니 양치하는 시늉을 했다. 목소리를 크게 못 내니 온갖 보디랭귀지가 다 동원되는 것을 현도가 어이없다는 듯 보고 있었지만 감히 화또를 쳐다볼 사람은 없었으므로 그걸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와. 이제야 살 것 같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칫솔을 입에 문 민지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진짜 숨 막혀 죽을 뻔했어. 왜 남자애들은 다 나가 가지고 정말.”
“그러니까! 야, 근데……”
말을 하다 말고 뜸을 들였다.
“……화또 잘생겼다.”
응. 칫솔을 입에 문 여자애들이 모두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화또는 왜 화또인 거야. 얼굴이 아깝다 진짜. 그 얼굴로 또라이가 말이 되냐고.”
민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역시 신은 공평하다는 둥, 그래도 시한폭탄 같은 또라이는 조금 너무하지 않냐는 둥 열변을 토했다.
‘야, 야!’
맨 뒤에서 오고 있던 혜원이가 민지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왜…… 흐어어억.”
귀신보다도 무서운 것을 본 민지는 입을 떡 벌렸고 치약 범벅인 칫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우리라고 뭐 다른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1학년 때 화또와 같은 반이었던 현정이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까지 했다.
“아니, 아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민지의 입에서 몽글몽글 거품이 나오자 화또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민지의 턱을 타고 흐른 거품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바로 그녀가 영웅이 될 차례였다.
민지야, 걱정 마. 언니가 구해 줄게!
속을 알 수 없는 화또의 잘생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화또도, 복도도, 민지가 떨어뜨린 칫솔도 전부 노랗고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깜박―
눈을 감았다 뜨자, 복도 끝에 서 있던 시연은 복도 중간에 서 있었고 뒤를 보고 있던 그녀의 친구들은 전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한 표정 대신 가벼운 표정을 하고서.
“진짜 숨 막혀 죽을 뻔했어. 왜 남자애들은 다 나가 가지고 정말.”
“그러니까! 야, 근데…… 화……”
“화! 장실 빨리 가자. 너 입에서 거품 나온다.”
재앙의 불씨가 되었던 말을 타이밍 좋게 가로챈 시연이 애들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화장실에 들어가며 흘금 본 화또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 선 그가 미동도 않자 다들 알아서 그를 피해 갔다. 제대로 해결했는데 왜…… 그리고 왜 하필 나만 노려보는 걸까.
***
“혀, 현정아. 너 진짜 하게?”
“응.”
굳은 결심을 한 현정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
“괜찮을 거야. 걱정 마.”
아련한 미소를 보인 현정이 뒤돌아 저벅저벅 걸어갔다.
“괜찮겠지?”
“그래도 쟨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우리보단 잘 알겠지.”
“근데 화또 여자는 안 때리는 거 맞아?”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연은 더 불안해졌다. 화또가 여자를 때린다면 그 첫 주인공은 시연, 그녀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후아, 후아. 괜찮은 것 같아. 너희도 가서 빨리 해.”
현정이 후다닥 되돌아오며 숨을 몰아쉬었다. 해야 할 일을 끝낸 현정이의 개운한 얼굴로 부러움의 시선이 쏟아졌다.
“좋아, 그럼 다음은 나!”
“같이 가자!”
“나도!”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가 화또가 그의 옆자리에 놓은 종이에 너도나도 이름을 적었다. 화또는 별로 관심 없는 듯 칸 안에 잘 적고 있는지만 간간이 확인했다.
“여기.”
“어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화또의 목소리에 펜을 쥐고 이름을 적으려던 연지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여기 벌써 세 명이잖아. 가위바위보 해야 될 텐데.”
“미, 미안. 다른 데 적을게.”
“그게 아니라, 친구랑 같이 하려던 거 아니냐고.”
응? 긴장으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화또가, 화또가…… 그녀는 용기를 내서 화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웬 훈남이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나직하고 부드러웠던 것 같다.
“그, 그, 그러면 여기 적어야겠다.”
그러던가.
무심한 말투도 어쩐지 다정하게 들렸다. 연지는 생각했다. 화또가 더욱 위험한 이유는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새빨간 얼굴로 넋이 나간 듯 자리에 돌아와 앉은 연지를 마지막으로 모두 체크를 끝내고 이제 여자애들 중에서는 시연만 남았다. 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땀 냄새를 풍기며 우르르― 들어온 남자애들이 이름을 적어 내자 점심시간이 끝나 버렸다. 그 후로 쉬는 시간마다 시연은 화또가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종이를 향해 슬금슬금 가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가까이 가면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종례 바로 전에 화또가 종이를 보며 이름 개수를 세는 것 같았다.
“세 명 안 적었어. 빨리 와서 적어.”
으응! 시연을 제외한 두 명이 재빨리 일어나 화또의 명령(?)대로 이름을 적었다. 망했다. 이제는 진짜 시연만 남은 상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발을 질질 끌며 화또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그녀를 흘깃 보더니 종이를 살짝 밀었다.
최대한 빨리 쓰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빈자리가 어디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시연은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눈을 굴려야 했다. 긴장한 탓이었다.
톡톡―
그런 그녀가 답답했는지 화또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빈자리를 두드렸다.
“아.”
쓰레기 분리수거에는 쓰인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쓰레기 분리수거를 혼자 해야 하는 건가.
이름을 쓰는 와중에도 화또가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것이 느껴져서 마지막 자를 쓰자마자 펜을 얼른 놓고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수학여행 동의서, 동아리 가입 신청서, 야간 자율 학습 동의서 등등을 화또에게 내야 했으므로 그때마다 시연은 화또의 그 시선을 받아야 했다.
***
“다음 주 학급 회의 시간이 반장 선거 시간이니까 오늘은 얼른 후보만 정하고 종례 마칠게. 추천도 받으니까 아무나 해 봐. 아, 일단 현도는 임시 반장이니까 자연스럽게 후보로 올라간다?”
무심하게 칠판에 최현도 이름 석 자를 쓰는 담임의 등 뒤에서 3반 아이들의 표정이 흐려졌다.
“선생님! 제 생각으로는 현도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민이…… 너야말로 진짜 사내야. 남자애들이 감동받은 얼굴로 몰래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 그런가? 현도 할래?”
“아니요.”
음, 아쉽네. 담임이 지우개로 최현도 세 글자를 지우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화또가 반장이 된 3반의 미래는 아주 끔찍할 것이었다. 아, 다른 반에서 아무도 3반을 못 건들 테니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한시연을 추천합니다! 애가 꼼꼼하고 실수하는 일도 없어서 잘할 것 같아요! 그리고 1학년 때도 반장이었습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동준이 그녀를 보며 씩 웃자 시연은 야, 미쳤어?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작년에 7반 반장이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 가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심심찮게 반에서 사건 사고가 터지니 7반 반장은 할 일이 배로 많았던 것 같다. 시연은 절대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반장을 여러 번 해 봤으니 이 정도면 이제 충분한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후보는 총 세 명이었다. 즉, 시연은 반장 혹은 부반장을 맡게 될 것이었다. 반장 한 명에 부반장 두 명이니까.
“야. 이것도 다 추억이다? 너 나중에 어른 되면 나한테 고마워할걸?”
종례가 끝나고 동준이 시연의 옆에서 얼쩡거리며 실실 웃어 댔다. 그 얄미운 얼굴을 참을 수가 없어서 팔뚝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악, 악. 아프다고!”
“어쩌라고! 난 너 때매 다 망했는데!”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이 죽일 놈의 방정맞은 입을 다물게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몇 번이나 칠판에 제 이름이 적히는 것을 봐야 했다.
그리고 현도는 동준과 티격태격거리는 시연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자, 오늘 종례 시간까지 청소 구역 정해 놔. 여기 이 종이 임시 반장한테 줄 거니까 청소 구역 옆에 이름 쓰면 돼. 한 구역당 세 명 넘어가면 가위바위보 할 거니까 알아서 잘 정하고.”
임시 반장이면 최현도, 최현도면 화또. 결국 반 아이들 모두 화또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심지어 화또와 말도 섞어야 할지도 몰랐다.
“서, 선생님, 제가 하면 안 될까요?”
‘화또만 아니면 누구든 좋아’라는 반 전체의 바람에 따라 용기 있는 남자애 한 명이 총대를 멨다.
“임시 반장이 있는데 왜? 현도 잘할 수 있지? 쌤은 간다!”
강지영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현도의 소문을 떠올렸는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뒷문으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듯 재빨리 나가는 지영은 난 모르겠다― 하는 마음 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후다닥 나간 담임 선생님을 이상하게 바라보던 현도가 고개를 돌려 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용기 있었던, 남자애를 보며 ‘청소 구역’이라고 적힌 종이를 팔랑거렸다.
“왜. 내가 하는 게 싫어?”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고개가 떨어질 듯 흔들어 대는 가여운 그 남자애는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운 나쁘게 화또의 주변에 앉은 애들은 조금이라도 화또에게서 멀어지려 아주 조심스럽게 의자를 당겼다.
“니가 하고 싶으면 해도 되는데.”
그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담담히 말했다. 화또의 소문을 몰랐다면 그냥 잘생긴 남학생이었겠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어우, 아니야. 그런 건 임시 반장인 니가 하는 게 딱 좋지! 나 따위가 뭘 하겠어.”
그, 그렇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며 동의를 구하는 말에 다른 아이들도 그렇지, 그렇지 하고 어색한 연기를 했다.
음. 화또가 낸 작은 소리에도 반 전체가 움찔했다.
“그래. 내가 할게.”
“가, 감사합니다!”
살려 주셔서.
화또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지만 다행히도 그게 다였다.
종례 시간까지 저 종이에 이름을 써야 하는데 점심시간이 되도록 이름을 쓴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는 상황이었다. 거의 자포자기 수준이 된 아이들은 점심시간이니까 밥부터 먹고 생각하자, 라는 결론을 내렸다.
“야, 3반 농구 붙자!”
꾸물꾸물 수저통을 챙겨 식당으로 가려던 3반 아이들을 멈춰 세운 것은 5반의 임시 반장이었다.
“농구? 우리 반에 농구 좀 하는 애 없냐?”
“태형이랑 정태랑…… 현도.”
“현도? 그게 누군데?”
화.또.
알 듯 말 듯한 이름에 되물었다가 친구의 입 모양을 보곤 경악하는 표정을 했다.
“야, 미쳤냐.”
“그렇지? 근데 걔 농구 겁나 잘함.”
“그래도 안 돼, 새끼야. 야! 밥 먹고 나갈 테니까 딱 기다려!”
오키! 5반 임시 반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야, 3반 한대! 하고 소리치며 복도를 달려갔다.
점심을 먹고 교실로 돌아왔을 때 반에는 남자애들은 서너 명뿐이고 거의 여자애들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서너 명 중에 화또가 있다는 것이지만. 교실 뒤쪽 사물함 앞에 몰려서 있는 여자애들은 자연스럽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양치하러 갈래?’
‘그래! 치약 있는 사람?’
‘나 있어.’
‘난 칫솔 사야 해.’
‘나 치약 있다니까?’
‘아니, 칫솔!!’
현정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더니 양치하는 시늉을 했다. 목소리를 크게 못 내니 온갖 보디랭귀지가 다 동원되는 것을 현도가 어이없다는 듯 보고 있었지만 감히 화또를 쳐다볼 사람은 없었으므로 그걸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와. 이제야 살 것 같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칫솔을 입에 문 민지가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진짜 숨 막혀 죽을 뻔했어. 왜 남자애들은 다 나가 가지고 정말.”
“그러니까! 야, 근데……”
말을 하다 말고 뜸을 들였다.
“……화또 잘생겼다.”
응. 칫솔을 입에 문 여자애들이 모두 침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진짜. 화또는 왜 화또인 거야. 얼굴이 아깝다 진짜. 그 얼굴로 또라이가 말이 되냐고.”
민지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역시 신은 공평하다는 둥, 그래도 시한폭탄 같은 또라이는 조금 너무하지 않냐는 둥 열변을 토했다.
‘야, 야!’
맨 뒤에서 오고 있던 혜원이가 민지의 옷자락을 다급하게 잡아당겼다.
“왜…… 흐어어억.”
귀신보다도 무서운 것을 본 민지는 입을 떡 벌렸고 치약 범벅인 칫솔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우리라고 뭐 다른 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1학년 때 화또와 같은 반이었던 현정이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까지 했다.
“아니, 아니…….”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민지의 입에서 몽글몽글 거품이 나오자 화또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민지의 턱을 타고 흐른 거품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연은 직감적으로 느꼈다. 지금은 바로 그녀가 영웅이 될 차례였다.
민지야, 걱정 마. 언니가 구해 줄게!
속을 알 수 없는 화또의 잘생긴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자 화또도, 복도도, 민지가 떨어뜨린 칫솔도 전부 노랗고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깜박―
눈을 감았다 뜨자, 복도 끝에 서 있던 시연은 복도 중간에 서 있었고 뒤를 보고 있던 그녀의 친구들은 전부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경악한 표정 대신 가벼운 표정을 하고서.
“진짜 숨 막혀 죽을 뻔했어. 왜 남자애들은 다 나가 가지고 정말.”
“그러니까! 야, 근데…… 화……”
“화! 장실 빨리 가자. 너 입에서 거품 나온다.”
재앙의 불씨가 되었던 말을 타이밍 좋게 가로챈 시연이 애들의 등을 밀며 재촉했다. 화장실에 들어가며 흘금 본 화또는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복도 한가운데 선 그가 미동도 않자 다들 알아서 그를 피해 갔다. 제대로 해결했는데 왜…… 그리고 왜 하필 나만 노려보는 걸까.
***
“혀, 현정아. 너 진짜 하게?”
“응.”
굳은 결심을 한 현정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겠어?”
“괜찮을 거야. 걱정 마.”
아련한 미소를 보인 현정이 뒤돌아 저벅저벅 걸어갔다.
“괜찮겠지?”
“그래도 쟨 1학년 때 같은 반이었잖아. 우리보단 잘 알겠지.”
“근데 화또 여자는 안 때리는 거 맞아?”
시연이 조심스럽게 물은 말에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도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연은 더 불안해졌다. 화또가 여자를 때린다면 그 첫 주인공은 시연, 그녀가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후아, 후아. 괜찮은 것 같아. 너희도 가서 빨리 해.”
현정이 후다닥 되돌아오며 숨을 몰아쉬었다. 해야 할 일을 끝낸 현정이의 개운한 얼굴로 부러움의 시선이 쏟아졌다.
“좋아, 그럼 다음은 나!”
“같이 가자!”
“나도!”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가 화또가 그의 옆자리에 놓은 종이에 너도나도 이름을 적었다. 화또는 별로 관심 없는 듯 칸 안에 잘 적고 있는지만 간간이 확인했다.
“여기.”
“어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화또의 목소리에 펜을 쥐고 이름을 적으려던 연지가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여기 벌써 세 명이잖아. 가위바위보 해야 될 텐데.”
“미, 미안. 다른 데 적을게.”
“그게 아니라, 친구랑 같이 하려던 거 아니냐고.”
응? 긴장으로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던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화또가, 화또가…… 그녀는 용기를 내서 화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웬 훈남이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인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도 나직하고 부드러웠던 것 같다.
“그, 그, 그러면 여기 적어야겠다.”
그러던가.
무심한 말투도 어쩐지 다정하게 들렸다. 연지는 생각했다. 화또가 더욱 위험한 이유는 매력적이기 때문이라고.
새빨간 얼굴로 넋이 나간 듯 자리에 돌아와 앉은 연지를 마지막으로 모두 체크를 끝내고 이제 여자애들 중에서는 시연만 남았다. 갈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땀 냄새를 풍기며 우르르― 들어온 남자애들이 이름을 적어 내자 점심시간이 끝나 버렸다. 그 후로 쉬는 시간마다 시연은 화또가 그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종이를 향해 슬금슬금 가 보았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바람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가까이 가면 목덜미를 물어뜯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종례 바로 전에 화또가 종이를 보며 이름 개수를 세는 것 같았다.
“세 명 안 적었어. 빨리 와서 적어.”
으응! 시연을 제외한 두 명이 재빨리 일어나 화또의 명령(?)대로 이름을 적었다. 망했다. 이제는 진짜 시연만 남은 상황이라 울며 겨자 먹기로 발을 질질 끌며 화또에게로 다가갔다. 그가 그녀를 흘깃 보더니 종이를 살짝 밀었다.
최대한 빨리 쓰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빈자리가 어디 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시연은 몇 번이나 오르락내리락 눈을 굴려야 했다. 긴장한 탓이었다.
톡톡―
그런 그녀가 답답했는지 화또가 약간 신경질적으로 빈자리를 두드렸다.
“아.”
쓰레기 분리수거에는 쓰인 이름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쓰레기 분리수거를 혼자 해야 하는 건가.
이름을 쓰는 와중에도 화또가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것이 느껴져서 마지막 자를 쓰자마자 펜을 얼른 놓고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수학여행 동의서, 동아리 가입 신청서, 야간 자율 학습 동의서 등등을 화또에게 내야 했으므로 그때마다 시연은 화또의 그 시선을 받아야 했다.
***
“다음 주 학급 회의 시간이 반장 선거 시간이니까 오늘은 얼른 후보만 정하고 종례 마칠게. 추천도 받으니까 아무나 해 봐. 아, 일단 현도는 임시 반장이니까 자연스럽게 후보로 올라간다?”
무심하게 칠판에 최현도 이름 석 자를 쓰는 담임의 등 뒤에서 3반 아이들의 표정이 흐려졌다.
“선생님! 제 생각으로는 현도의 의사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민이…… 너야말로 진짜 사내야. 남자애들이 감동받은 얼굴로 몰래 엄지를 치켜세웠다.
“아, 그런가? 현도 할래?”
“아니요.”
음, 아쉽네. 담임이 지우개로 최현도 세 글자를 지우자 다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화또가 반장이 된 3반의 미래는 아주 끔찍할 것이었다. 아, 다른 반에서 아무도 3반을 못 건들 테니 어쩌면 좋을지도 모르겠다.
“선생님! 한시연을 추천합니다! 애가 꼼꼼하고 실수하는 일도 없어서 잘할 것 같아요! 그리고 1학년 때도 반장이었습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동준이 그녀를 보며 씩 웃자 시연은 야, 미쳤어?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작년에 7반 반장이 날이 갈수록 수척해져 가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심심찮게 반에서 사건 사고가 터지니 7반 반장은 할 일이 배로 많았던 것 같다. 시연은 절대 그렇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지금껏 반장을 여러 번 해 봤으니 이 정도면 이제 충분한 것 같다.
그러나 불행히도 후보는 총 세 명이었다. 즉, 시연은 반장 혹은 부반장을 맡게 될 것이었다. 반장 한 명에 부반장 두 명이니까.
“야. 이것도 다 추억이다? 너 나중에 어른 되면 나한테 고마워할걸?”
종례가 끝나고 동준이 시연의 옆에서 얼쩡거리며 실실 웃어 댔다. 그 얄미운 얼굴을 참을 수가 없어서 팔뚝을 퍽퍽 때리기 시작했다.
“악, 악. 아프다고!”
“어쩌라고! 난 너 때매 다 망했는데!”
아무리 시간을 돌려도 이 죽일 놈의 방정맞은 입을 다물게 할 수가 없어서 그녀는 몇 번이나 칠판에 제 이름이 적히는 것을 봐야 했다.
그리고 현도는 동준과 티격태격거리는 시연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