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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꺄악!”

“왜, 민지야. 왜!”

반 편성 명단을 보기 위해 몰린 인파를 뚫고 들어간 민지가 비명을 질렀다. 시연도 힘겹게 인파를 뚫고 들어가 민지의 옆에 섰다.

“왜, 우리 다른 반이야?”

“아니.”

민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대박. 그럼 우리 같은 반이야?”

민지의 떨리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2―3반 명단에서 강민지와 한시연의 이름을 확인한 시연의 얼굴에 미소가 한가득 번졌다.

“와, 진짜 너무 좋다. 그럼 우리 수학여행 가서도 같이 놀 수 있겠다!”

“진짜진짜 좋은데…… 너무 좋은데…… 밑을 봐.”

“응? 와, 전정재 얘도 같은 반이네. 그리고……”

“우리…… 우리…… 화또랑 같은 반이다?”

명단을 쭉쭉 훑어 내려가던 시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다시 보고, 눈을 비비고 또다시 봐도 그 이름이 맞았다.

“망했다.”

말이 저절로 툭 튀어나왔다. 7반 아이들에게 무수히 들은 화또의 일화가 머리가 아릴 정도로 떠올랐다.

“우리…… 화또랑 같이 수학여행 간다?”

“으아악. 말도 안 돼. 평생에 한 번뿐인 수학여행인데…….”

시연은 머리를 헝클이며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화또랑 같이 수학여행도 가고, 수업도 듣고, 체육 대회도 하고, 축제도 하고…….

시연과 민지는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며 터덜터덜 배정받은 교실로 향했다.

다른 반은 설렘과 반가움으로 시끌벅적한데 2학년 3반 교실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다들 화또가 같은 반이라는 것을 아는 게 분명했다. 작년 1학년 7반 아이들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의 반은 언제나 폭풍 전야 같았다고 한다.

아니면― 폭풍이거나.

사실에 가까운 소문을 익히 알기에 2학년 3반은 조용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들도 있지만 시연은 반 아이들이 거대한 적에 함께 맞설 전우들처럼 느껴졌다.

드르륵―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화또가 교실에 들어서자 교실은 숨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불행히도, 뒷문이 열리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린 시연은 그와 눈이 딱 마주쳐 버렸다. 더 불행한 것은 그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다는 것이다. 화또에게 그녀는 지나가는 학생 23 혹은 같은 동네 주민 38 정도로 기억되길 바랐는데.

지금이라도 아까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아예 그 복도를 지나가지 말까― 시연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시간을 되돌렸다.

깜박―

시점은 콜라를 사서 매점을 나올 때로 정했다. 민지에게는 굳이 먼 반대쪽 계단으로 올라가자고 졸랐다. 화또에게 콜라를 쏟은 그 시간, 그 복도를 지나지 않기 위함이었다. 최현도와 마주치는 일 없이 무사히 교실에 착석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드르륵―

그리고 이제 화또가 들어오겠지. 그가 그녀에게 눈길을 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를 만났던 것 자체가 없는 일이 돼 버렸으니까. 화또가 잡았던 팔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시연은 무심히 혹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화또가 인상을 쓰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도 인상을 쓰고 있었던가. 시연은 책상에 코를 박을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 생각했다.

다행히도 재빨리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 것은 시연뿐만이 아니었다. 반 아이들 대부분이 뒷문으로 들어오는 화또를 보자마자 행여나 눈이 마주칠까 고개를 휙― 돌렸다. 등장만으로 모두를 긴장하게 만든 최현도였지만 그 자신은 전혀 모르는 듯 태연히 근처에 있는 빈자리에 앉아 단어장을 꺼내 들었다.

드르륵―

이번엔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아이들이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화또도 사회적 인간인지라 선생님이 있는 곳에서 미친 짓을 한 적은 드물었다. 그 말인즉, 선생님이 있는 동안은 화또가 폭발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쉿, 조용. 내가 그렇게 반갑니?”

선생님은 열화와 같은 환영에 당황스러워했지만 기분은 좋아 보였다.

“네―!”

“다들 잘 알겠지만 선생님 이름은 강지영. 담당은 국어. 앞으로 2학년 3반 담임을 맞게 됐어요. 앞으로 잘 해 봅시다.”

30대 초반의 강지영 선생님은 수업 방식이 자유롭고 재밌어서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었다. 담임 선생님으론 어떨지 몰라도.

“자, 선생님도 자기소개 했으니까 너희도 당연히 해야겠지?”

“아아아! 그게 뭐예요.”

“초등학생도 아니고.”

아이들의 야유와 징징거림을 깔끔하게 무시한 선생이 출석부를 펼쳐 들고 이름을 불렀다.

“강민지! 민지 나와서 자기소개 한번 해 보자. 이름이랑 뭐 좋아하는 거나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나 어떤 말이든 해도 좋아.”

강씨의 비애를 온 얼굴로 표현하는 민지가 앞으로 나가 꾸역꾸역 자기소개를 마쳤다. 어색한 상황이 몇 번 이어지고 시연의 차례가 금방 다가왔다. 이런 건 어색해하는 모습이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워지므로 뻔뻔하게 해치워야 한다.

“아, 안녕? 내 이름은 한시연이야. 너희랑 같은 반이 돼서 참 좋아…… 아, 이건 안 되겠다.”

오글거리게 이게 무슨.

시연은 무심코 시간을 돌렸다.

깜박―

“내 이름은 한시연이야. 1년 동안 잘 지내 보자.”

탁―

화또가 손가락으로 돌리던 볼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는 소리가 그녀에게는 꽤 크게 들렸다. 그녀가 두 번째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점점 일그러지는 화또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화또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첫 번째 자기소개 때는 그럭저럭 무심하던 그 얼굴이 왜 지금은 잔뜩 구겨져 있는 건지 모르겠다. 보통은 같은 반응이어야 하는데. 1년 동안 잘 지내 보자는 말이 마음에 안 든 걸까.

자리에 앉아서 다른 아이들의 자기소개를 듣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흉흉한 시선에 옆얼굴이 따갑다 못해 쑤시는 것 같았다. 행여나 실수로라도 눈이 마주칠까 봐 정면으로 빳빳이 든 고개로 인해 목이 뻐근했다. 시연은 그 바보 같았던 첫 번째 자기소개를 다시 반복해야 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최현도.”

“네.”

옆에서 그가 일어서는 기척이 느껴졌다. 칠판 앞에 선 그의 시선이 흘깃 와 닿자 그녀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최현도라고 한다. 잘 지내 보자.”

덤덤하게 자기소개를 마친 최현도가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잠깐. 우리 반 임시 반장은 현도가 하자.”

“예에에에?”

놀람을 숨기지 못한 한 친구가 저도 모르게 질색하다가 찔끔 눈치를 살피고는 입을 닫았다.

“불만 있는 사람?”

화또가 보는 앞에서 감히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 그는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네, 알겠습니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세상에나, 이런 비극이 일어나다니. 옆에 앉은 민지의 표정과 대다수 아이들의 표정에서도 그들이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반의 시한폭탄이 임시 반장을 맡다니.

임시 반장은 보통 가장 성적이 좋은 애가 맡게 된다는 것을 떠올려 볼 때 화또가 공부를 잘한다는 소문은 진짜인 것 같았다. 그것도 무척이나 잘하나 보다. 화또가 똑똑하기까지 한 것은 어쩐지 더 무서워서 반 아이들은 그와 혹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자리로 돌아온 최현도는 시연을 노려보는 일을 계속했다. 어쩌면 선생님이 나가시고 나면 그녀의 자리로 와서 주먹을 날려 댈지도 몰랐다. 이유야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었지만.

선생님이 나가실 때 같이 나갈까? 아니면 낌새가 보이면 바로 시간을 돌리는 거야. 그녀가 머릿속으로 여러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동안에도 그는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 2교시는 10분 뒤에 시작하니까 화장실 다녀와. 이따 종례 시간에 보자.”

“네∼”

아까보다는 풀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지만 시연은 마음 편히 잡담을 할 수가 없었다. 온 신경이 오른편에 있는 화또에게로 쏠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화또가 그녀에게 선방을 날리는 일은 없었다.



하필 화또가 뒷문 근처에 앉아 버려서 시연은 굳이 교실을 뺑 둘러 앞문으로 다녀야 했지만 화또를 피할 수 있다면 그 어떤 불편함도 감수할 수 있었다. 특히 복도에서 화또의 그 이상 행동을 봤기에 더욱 경계를 풀 수 없었다. 위안이 되는 것은 다른 아이들도 주로 앞문을 이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뒷문은 한적한데 앞문만 붐볐다.

아직은 고요한 화또지만 다들 가까이 가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



개학 날은 조금 일찍 마쳐 주면 좋을 텐데 고2는 중요한 시기라는 둥 너희가 초등학생이냐는 둥의 이유로 정상 수업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업은 전부 자습이라서 이럴 거면 일찍 마치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래도 이왕 자습 시간이 주어졌으니 시연은 문제집을 꺼내 열심히 풀었다. 다른 아이들도 대부분 충실하게 자습을 했다. 아마 학기 초라 그렇겠지. 한 달만 지나도 금방 풀어질 테다.

“시연아, 이거 어떻게 해석해?”

옆자리에 앉은 민지가 영어 문제집을 시연의 책상으로 밀며 의자를 조금 당겨 왔다.

“보자.”

민지도 공부를 하다니. 우리가 정말 2학년이 되긴 했나 보다.

‘마치고 매점 콜?’

여백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적혀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변하지 않았다. 시연은 웃음을 눌러 참고 설명을 하는 척 영어 문장에 밑줄을 몇 번 긋다가 여백에 글을 적었다.

‘콜!!!!!!!’

시연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열정적으로 느낌표를 그리자 민지가 작게 킥킥 웃었다.

‘공부 좀 해.’

‘하고 있거든!’

“거기! 뭐 해!”

선생님의 지적에 멋쩍게 웃으며 의자를 원위치 시키고 각자의 문제집으로 눈을 고정했다. 그리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려는데 샤프가 없어졌다. 분명히 아까 책상 위에 놔뒀는데. 아, 그거 비싼 건데.

시연은 보통 이런 사소한 상황에도 시간을 돌리곤 했다. 그러니 오늘도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샤프를 책상 위에 두었던 시점으로 돌렸다. 한 15초쯤 전으로.

눈을 깜박였을 때 민지가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고 샤프는 그녀가 놓은 대로 책상 위에 아직 잘 있었다.

“쌤이 쳐다본다.”

시연이 샤프를 손에 쥐며 속삭이자 민지가 문제집을 들고 가며 의자를 고쳐 앉았다.

안경을 낀 나이 많은 선생님은 마침 딱 지적하려던 찰나였는지 의자에서 일어나시려다 헛기침을 하며 다시 앉으셨다.

예! 나이스 타이밍. 뿌듯한 표정을 짓던 시연은 멈칫했다. 조용히 자습을 하고 있던 화또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선생님과 그의 손목시계를 스치고 이내 시연에게로 고정되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를 볼 때 미간이 찌푸려져 있는 걸 보면 시연에게는 좋지 않은 이유임이 분명했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화또에게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정말 억울했다. 가끔 마주쳐도 무시하던 애가 같은 반이 되자마자 왜 그녀에게 적의를 띠는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콜라를 쏟긴 했지만 그건 이제 없던 일이 되어 버렸고 그의 기억 속에선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었다.



개학 첫날은 그렇게 긴장 속에서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