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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연아, 얼른 나가자. 안 늦니?”
“잠시만요.”
시연은 현관 앞 거울에서 요리조리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도 묶었다 풀었다 했다가 결국 풀기로 결정하고는 손으로 빗질을 했다.
“어유, 예쁘다니까.”
거울로 보이는 엄마에게 배시시 웃고는 현관을 열고 종종 걸어 나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바로 위층인 18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다가 내려왔다.
“엄마, 엘리베이터 왔어요!”
“잠깐, 지금 나갈게!”
나한테 그렇게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시더니 참.
― 17층입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거기엔 아침에도 여전히 잘생긴 최현도가 있었다. 아침부터 운이 너무 좋은데?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
엄마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얘랑 같은 엘리베이터 타고 싶다고! 시연이 엄마를 부르러 열린 현관문으로 다가가자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휙 뒤를 돌아보니 닫히는 문 틈새로 무료한 표정을 한 최현도가 시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 문이 닫힙니다.
“뭐야…… 지금 일부러 닫은 거?”
시연이 입을 떡 벌리고 중얼거렸다. 엄마가 막 현관문을 닫고 나와 물었다.
“엘리베이터 내려갔어?”
“그러게.”
이제야 만난 제 이상형이…… 아냐,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시연은 엘리베이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색만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 17층입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거기엔 두 번 봐도 잘생긴 현도가 있었다. 시연은 현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엄마, 빨리 나와요!”
엄마가 후다닥 올라타자 그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아, 현도구나. 학교 가니? 아줌마가 태워 줄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시연은 휙 고개를 돌려 현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엄마가 무안할 것 같아 오히려 시연이 안절부절못했다.
― 띵― 1층입니다.
“엄마, 가자. 첫날이니까 빨리 가야지.”
“어어? 아, 현도야, 그럼 다음에 보자.”
엄마의 말에도 그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쟤 뭐야, 엄마. 원래 저래?”
“아니야. 원래 되게 예의 바른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시연은 엄마의 말이 믿기지 않아 흘깃 뒤를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폰을 보는 것도 아니고, 신발 끈을 묶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이상형은 아무래도 조금 이상한 것 같다.
강당에 애 티가 나는 신입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물론 시연도 그중 하나였고. 학생 주임 선생님이신지 배 나온 아저씨 선생님이 강단에 올라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이들이 꾸물거리며 각자의 반 앞으로 대충 줄을 섰다.
한 선생님이 1―8반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두 줄! 두 줄! 하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미리 통지받은 그녀의 반이었다. 아마 저 선생님은 그녀의 담임 선생님이시겠지. 시연은 줄을 선 채로 반 아이들을 관찰했다. 어제 최현도를 보고 나서 서울 애들은 전부 잘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큰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눈에 들어오는 외모가 없는 걸 보면 오직 최현도뿐인 듯했다.
다른 반들도 정돈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래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새로운 풍경을 눈 안에 담았다. 갈색 나무 벽과 높은 천장을 보며 고등학교 강당도 나쁘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그녀의 시선이 순간 멈췄다.
최현도였다. 1―7반, 바로 옆 반이었다.
톡톡―
“응?”
“안녕.”
뒤로 돌자 단발머리의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 민지야.”
시연이 명찰을 쓱― 보고 인사를 했다. 낯선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색함이 금방 사라졌다.
“근데 너 최현도 보고 있었어?”
“최현도?”
“저기 7반에 잘생기고 키 큰 애.”
보고 있었던 것은 맞으니까 그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도는 사교성이 나쁘지 않은 듯 남자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쟤 진짜 잘생겨서 중학교 때부터 이 근방에서는 진짜 유명했는데. 너 몰라?”
“나 이사 온 거라서 잘 몰라.”
“아아. 그래서 모르는구나.”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쟤 성격 진짜 더럽대.”
그런 소문까지 돌다니, 그녀의 이상형은 오늘 아침 느낀 것보다 훨씬 더 성격이 나쁜가 보다.
***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연에게 친구를 사귀는 일은 무척 쉬웠고 마음을 얻는 일은 더더욱 쉬웠다. 친구가 좋아하게끔 말을 하면 되니까.
“시연아, 넌 어떤 가수 좋아해?”
“음, 글쎄…….”
“방탄? 엑소? 슈퍼주니어?”
“방탄도 괜찮고, 요즘 김희철도 좋더라.”
“그치, 그치! 난 초등학교 때부터 슈퍼주니어 좋아했어.”
사실 시연은 요즘 누가 슈퍼주니어를 좋아하냐고 했다가 점점 굳어 가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 시간을 돌린 참이었다.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도 할 수 있는 친구였어. 시연은 소녀다운 표정을 짓는 친구와 하이 파이브를 하며 생각했다.
“자, 거기 학생들 자리로 좀 가시죠.”
“네―”
안경을 쓴 남자 선생님이 들어와 교탁을 탁탁 두드리자 시연의 자리 앞에 모여 있던 여학생들이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과학 시간이지?”
선생님이 안경을 올리며 물었다.
“네!”
시연이 또랑또랑하게 대답하자 선생님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선생님은 과학을 맡았고 이름은…… 김진수라고 한다.”
칠판에 이름을 쓴 선생님이 뒤돌며 소개를 마쳤다.
“음, 이 반에 멀리서 온 친구도 있다고 들었는데……”
누구지?
누구야?
아이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리둥절해했다.
“뭐야, 몰라? 제주도에서 온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 누구야?”
“저예요.”
시연이 손을 들자 민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말 안 해 줬어.’
‘이사 왔다고 했잖아.’
민지에게 입 모양으로 대답하는 시연에게 오오오오― 하고 아이들이, 특히 남자아이들이 바람을 잡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사투리 해 봐.”
“사투리, 사투리!”
사투리, 사투리!
아. 난감한 상황. 이런 건 시간을 돌려도 해결되지 않아서 시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씁, 조용! 격 떨어지게 왜 이러니. 제주도 사람은 다 표준말 써, 그치?”
“넵!”
과학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자 시연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과학 수업은 첫날이라 동영상을 보는 걸로 대체되었다. 대부분이 꾸벅꾸벅 졸았지만 시연 홀로 눈을 반짝였다. 수업이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매점에 가는 길에 시연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앞으로 과학 쌤한테 빠질 것 같아.”
원래 여고생은 쉽게 사랑에 빠지는 법이다.
“과학 쌤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한 2주도 안 됐어.”
“뭐? 니가 어떻게 알아?”
왜 그녀의 사랑은 늘 이리도 빨리 끝난단 말인가.
“우리 언니도 이 학교 다니잖아. 과학 쌤 결혼할 때 언니 친구들 몇 명은 진짜로 울었대.”
“푸하하하하― 그게 뭐야.”
“진짜야.”
“아, 맞다, 과학 쌤 반에 완전 잘생긴 애 있잖아!”
“아아, 옆 반에?”
“엇, 나도 알아!”
지나가던 여자아이들이 매점 앞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너도나도 끼어들었다.
“최현도 맞지?”
아, 최현도.
왜 계속 그 이름이 들리는 걸까. 입학하고 며칠이 지났는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이름을 들은 것 같다. 입학식 날 아침 말고도 몇 번 더 마주쳤지만 이웃이니 눈인사라도 할 법한데 그는 마주쳐도 못 본 척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재수 없는 자식.
사실은 인사를 했는데 씹힌 적이 있어서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호감은 전부 사라졌고, 앙금만 남은 상태였다. 물론, 시간을 돌려서 씹혔다는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긴 했지만 시연에게는 그게 없던 일이 되지 않아 분하고 또 분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가끔 최현도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더라도 꿋꿋이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분노로 끝난 시연의 첫사랑은 윗집에 사는 데다가 바로 옆 반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최현도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여자애들은 모였다 하면 최현도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쭉 최현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중학생이었던 작년 여름 방학 때는 어떤 여자애가 준 선물을 눈앞에서 던졌고, 또 시내에서 패싸움을 했는데 17대 1로 이겼다나 뭐라나.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많았다.
―그리고 고1, 1년 내내 최현도에 대한 소문은 더 흉흉해졌다.
“야, 이번엔 준현이가 자기한테 물 쏟았다고 때렸대. 일부러 쏟은 것도 아니고 실수로 쏟은 건데 진짜 너무하지 않냐.”
“그 성격 좋은 준현이한테?”
“어제는 민정이가 말 걸었다고 버럭버럭 화냈단다. 말 걸지 말라고. 하여간 진짜 또라이야.”
최현도는 알고 보니 정말 이상한 애였다. 아이들로부터 화또, 풀어서 말하자면 화내는 또라이라 불릴 만큼.
최현도는 바로 옆 반이고 바로 윗집에 살아 가끔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그의 소문이 점점 흉흉해지자 시연 스스로 그와 마주치는 상황을 일부러 피했기 때문에 최현도는 이제 시연에게 그저 소문 속 인물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뭣도 모르고 노려봤던 것을 그가 기억하고 있을까 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무서운 앤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관심도 안 가졌을 것이다. 엄마는 가끔 ‘현도는 어때? 잘 지내?’ 하고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같은 반 아니라서 잘 몰라.’ 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랐다.
“우리 또 같은 반 되면 좋겠다.”
“그러니까.”
시연은 민지와 함께 반 편성 명단이 붙은 2학년 학년부실 앞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2학년 첫날이라 무척 들떴다. 그래서 민지와 손을 잡고 요란을 떤다고 제대로 앞을 보지 못했다. 제 잘못이었다. 게다가 손에는 콜라 캔을 들고 있었던 게 더 큰 잘못이었겠지.
툭―
민지만 보고 얘기하다가 앞사람과 살짝 부딪히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이 콜라 때문에 축축해졌다.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간 시선이 젖은 바지 앞섶을 발견했다. 바지가 저 꼴인 것은 오줌을 지렸을 리는 없겠고, 그녀가 콜라를 쏟은 것이 분명했다.
“으앗,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사과와 함께 고개를 들자마자 시연의 얼굴이 쩌적― 굳었다. 마치 오줌 싼 것처럼 축축해진 바지의 주인공은 바로 그 유명한 최현도, 즉 화또였다. 화또의 여러 일화들을 들은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최현도는 민망한 부위가 젖은 바지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은 한숨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화내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는 것으로 보여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괜찮아.”
맙소사. 화내지 않는 화또라니. 더 무서웠다. 이웃 주민이라고 봐주는 건가? 아니야, 때릴 거니까 괜찮다는 말일지도. 화또가 여자도 때리던가?
10, 10초만 돌려야겠다.
―시연은 눈을 깜박였다.
“그나저나 우리 또 같은 반 되면 좋겠다.”
어어. 민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화또가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캔을 절대 쏟지 않도록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은 시연이 그제야 민지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옆으로 화또가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나,
탁―
뒤에서 강한 힘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콜라 캔이 바닥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흘러나온 콜라가 최현도의 하얀 실내화와 바지 끝자락을 적셨다.
“너.”
그녀의 팔을 아플 정도로 움켜쥔 그가 주위를 휙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시연이 봤을 때 그는 화를 내고 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왜 이래.”
잡힌 팔을 빼 보려고 해도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은 시큰시큰 아팠고, 최현도의 시선은 무거웠다. 꼭 그녀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에게 팔을 잡힌 시연이 겁에 질려 시간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최현도가 그녀의 팔을 휙― 놓았다.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그녀는 잠깐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잡아 둔 적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흘깃 본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혼잡했던 복도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다.
그가 꽉 움켜쥐었던 팔이 아린 것이 아마 멍이 든 것 같았다. 시연은 팔을 주무르며 이상한 행동을 한 최현도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화또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거 처음이야.”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민지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는 민지의 호들갑을 들으며 시연은 생각했다. 최현도에게 또라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고.
“근데 화또가 시비도 잘 걸었었나?”
민지가 여태껏 들은 소문을 샅샅이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시연은 최현도에 대해 생각하느라 민지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본래도 이상했지만, 방금 전 그는 정말 이상했다. 무서운 눈을 하고 주위를 살피는 최현도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거지? 그는 뭘 찾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다가 바닥에 처참히 나뒹구는 콜라 캔과 그의 젖은 실내화를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실내화가 젖은 것을 이유로 해코지를 하려나 싶어 정말 무서웠다.
길을 잘 가고 있는 그녀의 팔을 낚아챈 것은 그쪽이면서. 당황할 사람은 오히려 제 쪽이지 않은가.
어쨌든 정말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시연아, 얼른 나가자. 안 늦니?”
“잠시만요.”
시연은 현관 앞 거울에서 요리조리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가슴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도 묶었다 풀었다 했다가 결국 풀기로 결정하고는 손으로 빗질을 했다.
“어유, 예쁘다니까.”
거울로 보이는 엄마에게 배시시 웃고는 현관을 열고 종종 걸어 나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바로 위층인 18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춰 있다가 내려왔다.
“엄마, 엘리베이터 왔어요!”
“잠깐, 지금 나갈게!”
나한테 그렇게 빨리 나가라고 재촉하시더니 참.
― 17층입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거기엔 아침에도 여전히 잘생긴 최현도가 있었다. 아침부터 운이 너무 좋은데?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줘.”
엄마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얘랑 같은 엘리베이터 타고 싶다고! 시연이 엄마를 부르러 열린 현관문으로 다가가자 뒤에서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소리가 났다. 휙 뒤를 돌아보니 닫히는 문 틈새로 무료한 표정을 한 최현도가 시연을 쳐다보고 있었다.
― 문이 닫힙니다.
“뭐야…… 지금 일부러 닫은 거?”
시연이 입을 떡 벌리고 중얼거렸다. 엄마가 막 현관문을 닫고 나와 물었다.
“엘리베이터 내려갔어?”
“그러게.”
이제야 만난 제 이상형이…… 아냐, 설마 일부러 그랬겠어?
시연은 엘리베이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색만이 존재하게 되었을 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 17층입니다.
문이 스르륵 열리고 거기엔 두 번 봐도 잘생긴 현도가 있었다. 시연은 현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열림 버튼을 꾹 눌렀다.
“엄마, 빨리 나와요!”
엄마가 후다닥 올라타자 그가 닫힘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아, 현도구나. 학교 가니? 아줌마가 태워 줄까?”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시연은 휙 고개를 돌려 현도를 바라보았다. 그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엄마가 무안할 것 같아 오히려 시연이 안절부절못했다.
― 띵― 1층입니다.
“엄마, 가자. 첫날이니까 빨리 가야지.”
“어어? 아, 현도야, 그럼 다음에 보자.”
엄마의 말에도 그는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이었다.
“쟤 뭐야, 엄마. 원래 저래?”
“아니야. 원래 되게 예의 바른데 오늘은 무슨 일이 있나 보다.”
시연은 엄마의 말이 믿기지 않아 흘깃 뒤를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다. 폰을 보는 것도 아니고, 신발 끈을 묶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녀의 이상형은 아무래도 조금 이상한 것 같다.
강당에 애 티가 나는 신입생들이 바글바글했다. 물론 시연도 그중 하나였고. 학생 주임 선생님이신지 배 나온 아저씨 선생님이 강단에 올라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이들이 꾸물거리며 각자의 반 앞으로 대충 줄을 섰다.
한 선생님이 1―8반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두 줄! 두 줄! 하고 소리를 치고 있었다. 미리 통지받은 그녀의 반이었다. 아마 저 선생님은 그녀의 담임 선생님이시겠지. 시연은 줄을 선 채로 반 아이들을 관찰했다. 어제 최현도를 보고 나서 서울 애들은 전부 잘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큰 오해를 했던 모양이다. 눈에 들어오는 외모가 없는 걸 보면 오직 최현도뿐인 듯했다.
다른 반들도 정돈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래서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새로운 풍경을 눈 안에 담았다. 갈색 나무 벽과 높은 천장을 보며 고등학교 강당도 나쁘지 않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그녀의 시선이 순간 멈췄다.
최현도였다. 1―7반, 바로 옆 반이었다.
톡톡―
“응?”
“안녕.”
뒤로 돌자 단발머리의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안녕, 민지야.”
시연이 명찰을 쓱― 보고 인사를 했다. 낯선 학교와 선생님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색함이 금방 사라졌다.
“근데 너 최현도 보고 있었어?”
“최현도?”
“저기 7반에 잘생기고 키 큰 애.”
보고 있었던 것은 맞으니까 그녀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도는 사교성이 나쁘지 않은 듯 남자아이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쟤 진짜 잘생겨서 중학교 때부터 이 근방에서는 진짜 유명했는데. 너 몰라?”
“나 이사 온 거라서 잘 몰라.”
“아아. 그래서 모르는구나.”
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쟤 성격 진짜 더럽대.”
그런 소문까지 돌다니, 그녀의 이상형은 오늘 아침 느낀 것보다 훨씬 더 성격이 나쁜가 보다.
***
고등학생이 되었다고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시연에게 친구를 사귀는 일은 무척 쉬웠고 마음을 얻는 일은 더더욱 쉬웠다. 친구가 좋아하게끔 말을 하면 되니까.
“시연아, 넌 어떤 가수 좋아해?”
“음, 글쎄…….”
“방탄? 엑소? 슈퍼주니어?”
“방탄도 괜찮고, 요즘 김희철도 좋더라.”
“그치, 그치! 난 초등학교 때부터 슈퍼주니어 좋아했어.”
사실 시연은 요즘 누가 슈퍼주니어를 좋아하냐고 했다가 점점 굳어 가는 친구의 표정을 보고 시간을 돌린 참이었다. 이렇게 초롱초롱한 눈도 할 수 있는 친구였어. 시연은 소녀다운 표정을 짓는 친구와 하이 파이브를 하며 생각했다.
“자, 거기 학생들 자리로 좀 가시죠.”
“네―”
안경을 쓴 남자 선생님이 들어와 교탁을 탁탁 두드리자 시연의 자리 앞에 모여 있던 여학생들이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과학 시간이지?”
선생님이 안경을 올리며 물었다.
“네!”
시연이 또랑또랑하게 대답하자 선생님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 선생님은 과학을 맡았고 이름은…… 김진수라고 한다.”
칠판에 이름을 쓴 선생님이 뒤돌며 소개를 마쳤다.
“음, 이 반에 멀리서 온 친구도 있다고 들었는데……”
누구지?
누구야?
아이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어리둥절해했다.
“뭐야, 몰라? 제주도에서 온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 누구야?”
“저예요.”
시연이 손을 들자 민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말 안 해 줬어.’
‘이사 왔다고 했잖아.’
민지에게 입 모양으로 대답하는 시연에게 오오오오― 하고 아이들이, 특히 남자아이들이 바람을 잡자 그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사투리 해 봐.”
“사투리, 사투리!”
사투리, 사투리!
아. 난감한 상황. 이런 건 시간을 돌려도 해결되지 않아서 시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씁, 조용! 격 떨어지게 왜 이러니. 제주도 사람은 다 표준말 써, 그치?”
“넵!”
과학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하자 시연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과학 수업은 첫날이라 동영상을 보는 걸로 대체되었다. 대부분이 꾸벅꾸벅 졸았지만 시연 홀로 눈을 반짝였다. 수업이 끝나고 삼삼오오 모여 매점에 가는 길에 시연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앞으로 과학 쌤한테 빠질 것 같아.”
원래 여고생은 쉽게 사랑에 빠지는 법이다.
“과학 쌤 얼마 전에 결혼했는데. 한 2주도 안 됐어.”
“뭐? 니가 어떻게 알아?”
왜 그녀의 사랑은 늘 이리도 빨리 끝난단 말인가.
“우리 언니도 이 학교 다니잖아. 과학 쌤 결혼할 때 언니 친구들 몇 명은 진짜로 울었대.”
“푸하하하하― 그게 뭐야.”
“진짜야.”
“아, 맞다, 과학 쌤 반에 완전 잘생긴 애 있잖아!”
“아아, 옆 반에?”
“엇, 나도 알아!”
지나가던 여자아이들이 매점 앞 테이블에 걸터앉으며 너도나도 끼어들었다.
“최현도 맞지?”
아, 최현도.
왜 계속 그 이름이 들리는 걸까. 입학하고 며칠이 지났는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 이름을 들은 것 같다. 입학식 날 아침 말고도 몇 번 더 마주쳤지만 이웃이니 눈인사라도 할 법한데 그는 마주쳐도 못 본 척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재수 없는 자식.
사실은 인사를 했는데 씹힌 적이 있어서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호감은 전부 사라졌고, 앙금만 남은 상태였다. 물론, 시간을 돌려서 씹혔다는 사실을 없던 일로 만들긴 했지만 시연에게는 그게 없던 일이 되지 않아 분하고 또 분했다. 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절대 아는 척하지 않았다. 가끔 최현도가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지더라도 꿋꿋이 정면을 응시했다.
그러나 분노로 끝난 시연의 첫사랑은 윗집에 사는 데다가 바로 옆 반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최현도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조금 과장하자면 여자애들은 모였다 하면 최현도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쭉 최현도에 대한 소문을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중학생이었던 작년 여름 방학 때는 어떤 여자애가 준 선물을 눈앞에서 던졌고, 또 시내에서 패싸움을 했는데 17대 1로 이겼다나 뭐라나. 어쨌든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많았다.
―그리고 고1, 1년 내내 최현도에 대한 소문은 더 흉흉해졌다.
“야, 이번엔 준현이가 자기한테 물 쏟았다고 때렸대. 일부러 쏟은 것도 아니고 실수로 쏟은 건데 진짜 너무하지 않냐.”
“그 성격 좋은 준현이한테?”
“어제는 민정이가 말 걸었다고 버럭버럭 화냈단다. 말 걸지 말라고. 하여간 진짜 또라이야.”
최현도는 알고 보니 정말 이상한 애였다. 아이들로부터 화또, 풀어서 말하자면 화내는 또라이라 불릴 만큼.
최현도는 바로 옆 반이고 바로 윗집에 살아 가끔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그의 소문이 점점 흉흉해지자 시연 스스로 그와 마주치는 상황을 일부러 피했기 때문에 최현도는 이제 시연에게 그저 소문 속 인물이었다.
그녀는 예전에 뭣도 모르고 노려봤던 것을 그가 기억하고 있을까 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렇게 무서운 앤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관심도 안 가졌을 것이다. 엄마는 가끔 ‘현도는 어때? 잘 지내?’ 하고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같은 반 아니라서 잘 몰라.’ 하고 대답하곤 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길 바랐다.
“우리 또 같은 반 되면 좋겠다.”
“그러니까.”
시연은 민지와 함께 반 편성 명단이 붙은 2학년 학년부실 앞으로 걸어가는 중이었다. 2학년 첫날이라 무척 들떴다. 그래서 민지와 손을 잡고 요란을 떤다고 제대로 앞을 보지 못했다. 제 잘못이었다. 게다가 손에는 콜라 캔을 들고 있었던 게 더 큰 잘못이었겠지.
툭―
민지만 보고 얘기하다가 앞사람과 살짝 부딪히는 바람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손이 콜라 때문에 축축해졌다. 자연스럽게 밑으로 내려간 시선이 젖은 바지 앞섶을 발견했다. 바지가 저 꼴인 것은 오줌을 지렸을 리는 없겠고, 그녀가 콜라를 쏟은 것이 분명했다.
“으앗,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사과와 함께 고개를 들자마자 시연의 얼굴이 쩌적― 굳었다. 마치 오줌 싼 것처럼 축축해진 바지의 주인공은 바로 그 유명한 최현도, 즉 화또였다. 화또의 여러 일화들을 들은 이후로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최현도는 민망한 부위가 젖은 바지를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은 한숨이었지만 그녀에게는 화내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는 것으로 보여서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괜찮아.”
맙소사. 화내지 않는 화또라니. 더 무서웠다. 이웃 주민이라고 봐주는 건가? 아니야, 때릴 거니까 괜찮다는 말일지도. 화또가 여자도 때리던가?
10, 10초만 돌려야겠다.
―시연은 눈을 깜박였다.
“그나저나 우리 또 같은 반 되면 좋겠다.”
어어. 민지에게는 미안하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화또가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 든 캔을 절대 쏟지 않도록 품 안에 소중히 끌어안은 시연이 그제야 민지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그녀의 옆으로 화또가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나,
탁―
뒤에서 강한 힘이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다. 콜라 캔이 바닥으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흘러나온 콜라가 최현도의 하얀 실내화와 바지 끝자락을 적셨다.
“너.”
그녀의 팔을 아플 정도로 움켜쥔 그가 주위를 휙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했고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시연이 봤을 때 그는 화를 내고 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왜 이래.”
잡힌 팔을 빼 보려고 해도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은 시큰시큰 아팠고, 최현도의 시선은 무거웠다. 꼭 그녀를 잡아먹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에게 팔을 잡힌 시연이 겁에 질려 시간을 돌려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최현도가 그녀의 팔을 휙― 놓았다. 배려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그녀는 잠깐 휘청거렸다.
그리고 그는 마치 잡아 둔 적 없었던 것처럼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흘깃 본 그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혼잡했던 복도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열렸다.
그가 꽉 움켜쥐었던 팔이 아린 것이 아마 멍이 든 것 같았다. 시연은 팔을 주무르며 이상한 행동을 한 최현도가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화또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거 처음이야.”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민지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는 민지의 호들갑을 들으며 시연은 생각했다. 최현도에게 또라이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고.
“근데 화또가 시비도 잘 걸었었나?”
민지가 여태껏 들은 소문을 샅샅이 회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나 시연은 최현도에 대해 생각하느라 민지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본래도 이상했지만, 방금 전 그는 정말 이상했다. 무서운 눈을 하고 주위를 살피는 최현도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 왜 그렇게 혼란스러운 얼굴을 한 거지? 그는 뭘 찾는 것처럼 주변을 살피다가 바닥에 처참히 나뒹구는 콜라 캔과 그의 젖은 실내화를 빤히 바라보기도 했다. 실내화가 젖은 것을 이유로 해코지를 하려나 싶어 정말 무서웠다.
길을 잘 가고 있는 그녀의 팔을 낚아챈 것은 그쪽이면서. 당황할 사람은 오히려 제 쪽이지 않은가.
어쨌든 정말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