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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먼저, 돌아가고 싶은 시간대를 생각한다. 그 뒤의 일도 비교적 간단하다.

눈동자는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5초쯤 한 곳만 뚫어지게 쳐다보면 세상이 온통 하얗고, 노랗게 변한다. 그럼 이제, 그 하얗고 노란 세상에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되는 것이다. 여러 번 깜박일 필요도 없이, 딱 한 번만.

깜박―

“밥 먹자, 시연아!”

미소를 걸친 중년의 남자가 밥상을 들고 슬리퍼를 질질 끌면서 나왔다.

“아빠, 내가 들게.”

시연이 벌떡 일어서 내려가 상을 받아 들려고 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어우, 이 아가씨는 추운데 왜 밖에서 먹자고.”

평상 위에 밥상을 탁― 내려놓은 아빠가 정겹게 투덜거렸다. 우리 딸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가만있어 봐, 아빠가 담요 가져올게. 벌써 세 번째 듣는 말이고, 맨발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몸을 움츠리며 집 안으로 들어가는 저 키 작은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는 것도 벌써 세 번째지만 여전히 자꾸 웃음이 났다.

소시지를 넣은 계란말이, 고추장 멸치볶음, 가지볶음, 갈비찜, 열무김치. 밥상 위에는 전부 시연이 좋아하는 것들뿐이었다. 시연은 돌아앉아 밥상에 가까이 앉았다. 그리고 밥상 밑으로 손을 넣어 덜 펴진 상다리를 완전히 폈다. 상 끝에 아슬아슬하게 위치한 물컵을 안으로 살짝 밀어 옮기는데 별안간 등 뒤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진짜 괜찮겠어? 추운데.”

아빠가 걱정스러운 눈을 하고 시연의 몸 위로 덮은 담요가 흘러내리지 않게 잘 여며 주었다.

“괜찮다니까. 아빠나 좀 신경 써.”

시연이 미리 챙겨 놓은 수면 양말을 건네자 아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건 언제 챙겼데.”

그녀가 말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밥 먹고 산책할까, 우리?”

“좋아. 와, 아빠 오늘 된장찌개 비주얼 진짜 대박.”

뚝배기 뚜껑을 열자 훅 빠져나온 하얀 김 사이로 보글보글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보였다. 어째 국물보다는 건더기가 더 많은 것 같다. 특히, 시연이 좋아하는 고기가.

한 숟갈만 떠도 고기가 서너 개는 나왔었지.

“얼른 먹어, 딸.”

“네, 잘 먹겠습니다.”

시연이 경쾌하게 인사를 한 다음 된장찌개로 숟가락을 찔러 넣었다. 역시 고기가 서너 개는 딸려 나온다.

“……우리 공주 좋아하는 고기 들어간 된장찌개 이제 못 먹어서 어쩌나.”

그녀가 입 안 가득 들어찬 고기를 우물우물 씹다가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그러게. 우리 아빠 된장찌개 못 먹어서 진짜 어떡하지. 이거 먹고 싶어서라도 방학하자마자 내려와야겠다.”

“그래. 서울에서 친구 사귀면 친구들이랑 같이 놀러 와.”

응. 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시지를 넣은 계란말이를 입 안에 구겨 넣었다. 아까는 ‘엄마한테 된장찌개에 고기 넣어 달라고 하면 되지.’라고 무심코 말했다가 얼마나 진땀을 흘렸던지.

“평상에서 밥 먹는 것도 우리 공주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멸치볶음을 뒤적이는 아빠의 젓가락질이 점점 느려졌다. 그걸 보는 나는 또다시 슬퍼졌고.

“……그러니까 평상 관리 잘 해 놔. 방학 때 쓸 거니까.”

목이 메어 왔지만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덤덤한 척 말했다.

“응. 그때 되면 여름이니까 평상에서 밥 먹긴 훨씬 좋겠다.”

이 추운 날씨에 이게 뭐냐, 이게. 아빠가 시연의 볼을 꼬집으며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춥긴 하지만 담요를 덮고 있으니 그럭저럭 견딜 만하고, 까만 하늘에 별도 총총 예쁘게 박혀 있고, 문제없는데 뭐. 시연이 콧물을 훌쩍거리며 마당을 둘러보았다. 여섯 살 땐가 아빠가 나무에 직접 매달다 허리를 삐끗했던 나무 그네, 그 나무 그네 옆 3년 전에 설치한 대형 스크린, 그녀와 아빠가 파란색으로 색칠한 차고, 여름이 되면 다시 푸르게 변할 갈색의 죽은 잔디까지. 전부 너무나 그리울 테다.

“우리 산책 갔다 와서 여기서 영화도 볼까?”

“어우, 이 아가씨야. 진짜 감기 걸려.”

아까도 했던 말이었지만 저 따뜻한 타박이 또 듣고 싶었다. 이제 아빠는 ‘거실에서 영화 보자. 아빠가 팝콘 사 놨어.’라고 행여나 시연이 서운해할까 슬쩍 눈치를 보며 말하겠지.

“거실에서 영화 보자. 아빠가 팝콘 사 놨어.”

“오, 팝콘! 역시 우리 아빠 센스 봐. 그래, 겨울엔 따뜻하게 실내에 있는 게 최고지.”

“그렇지. 얼른 먹어. 아, 아니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벌써 세 번째 듣는 말인데도 울컥 속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서 시연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크게 한 숟갈 떠 입으로 넣었다.

오늘은, 그러니까, 아빠와 사는 마지막 날이었다. 방학 때는 여기 제주에서 머물 테지만 말 그대로 머무는 것이지 여기서 사는 것은 아니다.

3년 전 부모님이 이혼하셨다. 엄마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갔고, 그녀는 여기 제주에 남아 아빠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이제 그녀가 열일곱 살이 되었으니 고등학교는 서울에서 다니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게 엄마의 의견이었다. 엄마가 서울에서 자리 잡으면 엄마랑 같이 살기로 하기도 했었고. 아무튼 이러한 이유로 내일 시연은 서울로 간다. 제주에 아빠를 두고서.



“이야, 달 밝다.”

응. 진짜 밝네. 시연이 아빠에게 팔짱을 끼며 맞장구를 쳤다. 제주도의 밤은 화려하지 않다. 드물게 놓인 가로등 불빛보다는 달빛이 은은하게 길을 밝혔다. 시연은 제주도의 고즈넉한 밤 풍경 대신 아빠를 눈에 담았다. 너무나 그리울 것이다. 엄마랑 살게 되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아빠랑 헤어진다는 슬픔이 더 컸다.

부스럭―

산책길 옆의 풀숲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으아아악― ”

아빠가 소리를 지르며 시연의 팔을 붙잡고 뒷걸음질 쳤다. 갑자기 숲에서 튀어나온 남자 때문이었다. 시연은 이번엔 놀라지 않았지만 처음엔 아빠보다 더 오버했었다.

“뭐, 뭡니까!”

“아, 제가 밤눈이 어두워서……. 실례지만 제주 교회 쪽으로 나가려면 어디로 가야 되죠?”

남자가 민망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크흠, 저기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아빠도 민망한지 남자를 잘 쳐다보지 못했다. 시연이 감사합니다, 하고 작게 인사하는 남자를 보며 살짝 목례를 했다. 저 아저씨도 나왔으니까 이제 다시 돌아가 볼까. 아, 그러니까 나도 영화에서처럼 시간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거면 좀 좋아. 시연이 속으로 불평을 토해 내다가 저 멀리 사라지는 남자를 응시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눈동자는 절대 흔들리지 않도록. 그렇게 5초쯤 한 곳만 뚫어지게 쳐다보면 세상이 온통 하얗고, 노랗게 변한다. 그럼 이제, 그 하얗고 노란 세상에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되는 것이다. 여러 번 깜박일 필요도 없이, 딱 한 번만.

깜박―

“밥 먹자, 시연아!”



시연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그녀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



“일찍 올라와서 학교 갈 준비도 하고 그러면 좀 좋아. 입학식이 내일인데 오늘 와서는 적응이나 제대로 하겠어?”

“할 수 있다니까.”

시연은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건성으로 대답했다. 엄마는 내일이 입학식인데 제주에서 오늘에서야 올라왔다고 내내 불만이었다. 그녀로서는 제주에 아빠가 혼자 있으니 어쩔 수 없었다. 아빠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고 싶기도 했고.

“너 내 말을 듣고 있긴 하니?”

날이 선 목소리가 귀를 때리자 시연은 천장을 또렷이 응시했다. 역시 엄마랑은 잘 안 맞아. 노랗게 변하는 천장을 보며 그녀가 생각했다.

깜박―

“일찍 올라와서 학교 갈 준비도 하고 그러면 좀 좋아. 입학식이 내일인데 오늘 와서는 적응이나 제대로 하겠니.”

시연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의 얼굴에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아까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친구들이랑 약속이 있어서…… 어차피 방학마다 와서 이 동네 잘 알잖아.”

시연이 애교를 섞어 말하자 엄마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아니, 그래도 3일 전에는 올라왔어야지. 어, 교복도 입어 보고 맞추고.”

“아, 맞다. 교복! 지금 입어 볼까?”

엄마가 미리 사 둔 교복은 시연의 몸에 딱 맞았다. 엄마는 시연이 교복을 입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패션쇼를 하는 것이 귀여운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근데 너무 딱 맞는 거 아니니? 고등학교 때는 살 많이 찐다던데.”

“아니야. 난 살 안 찔 거야. 절대.”

엄마가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고3 되면 왜 이렇게 많이 먹었을까…… 하면서 작아진 교복 보고 후회한다니까.”

이번엔 시연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글쎄, 그녀는 단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을 돌리면 되니까. 엄마가 시연의 미소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지만 시연은 조금 더 진하게 미소 지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점심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 나 오랜만에 엄마가 해 주는 비빔국수 먹고 싶어.”

“이 겨울에?”

엄마는 조금 미간을 찌푸렸지만 방으로 들어가더니 겉옷을 걸치고 나왔다. 정말 귀찮게 한다고 중얼거렸지만 입가에 옅은 미소가 생긴 걸 보면 오랜만에 만난 딸이 엄마가 만든 음식이 먹고 싶다고 조르는 것이 퍽 기쁜 모양이었다.

“오이랑 국수 사 와야겠다.”

“엄마! 나도 같이 가.”

“왜, 밖에 추워. 혼자 갔다 올게.”

“같이 가자.”

응? 기다려요! 시연이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패딩 점퍼를 입었다. 일주일 전에 미리 보낸 짐은 원래 이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잘 정돈되어 있었다. 엄마 솜씨였다.

“갑시다!”

시연이 애교스럽게 웃으며 엄마의 팔짱을 끼자 엄마도 피식 웃었다.

엄마와 아빤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 엄마는 세련되고 조금은 까칠한 도시 사람이었고 아빠는 정 많고 약간은 허술한 섬사람이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것 자체가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달랐으니까.

두 사람은 시연을 두고서도 많이 싸웠는데 대부분 사소하지만 절대 굽힐 수는 없는 것들이 그 이유였다. 예를 들어 음식에 관한 것들. 엄마는 유기농 음식만 고집했고 과자 같은 것은 허용하지 않았다. 아빠는 너무 그렇게 가려서 먹이면 애가 허약해진다며 시연이 조금만 조르면 뭐든 다 입에 물렸다. 엄마는 노발대발했고 금세 두 사람 사이에 고성방가가 오갔었지.

“나 진짜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그래.”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이럴 사람이 아닌데.

“아싸. 엄마도 먹을래?”

“아니. 근데 이 겨울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감기 걸리지 않겠니?”

“어차피 집에서 먹을……”

시연이 아이스크림을 고르다 고개를 들어 엄마를 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엄마의 얼굴에 ‘못마땅함’이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크흠, TV에서 봤는데 생크림으로 아이스크림을 만들 수 있대. 아까 보니까 집에 딸기 있던데 그걸로 만들면 되겠다.”

“그렇지? 그럼 생크림만 사면 되지? 집에 얼린 망고도 있어.”

유제품 코너로 가는 엄마의 가벼운 발걸음을 보며 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 미워할 수 없다니까.

하나하나 꼼꼼하게 다 따져 보고 사는 엄마 덕분에 장 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졌다. 벌써 시곗바늘이 3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침 일찍 집에 도착해서 시리얼 한 그릇 먹고 나서는 쭉 아무것도 못 먹은 터라 무척 배가 고팠다.

“배고프지? 그냥 시켜 먹을 걸 그랬나.”

“시켜 먹는 거 싫어하면서 빈말은.”

“왜, 니가 시켜 달라고 하면 시켜 줬을 거야.”

“아빠도 아니고, 엄마가?”

“…….”

어이쿠. 엄마 앞에서 아빠 얘기는 금긴데. 실수했다. 시연은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우뚝 멈춰 섰다.

“시연아?”

잠깐만 엄마. 딱 5초만. 시연이 속으로 말했다.

깜박―

“배고프지? 그냥 시켜 먹을 걸 그랬나.”

“아냐, 엄마가 해 주는 비빔국수가 먹고 싶은 거야, 난.”

엄마의 입꼬리가 씰룩거리자 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줘, 엄마. 내가 들게.”

“됐어, 엄마가 들게.”

“아, 내가 든다니까?”

“시연 엄마?”

“어머, 현도 엄마.”

장바구니를 두고 실랑이를 하고 있던 모녀는 고개를 돌렸다. 엄마를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런데 시연 엄마라니. 시연과 같이 살지 않는데도 스스로를 시연 엄마라고 소개했을 엄마의 모습이 그려지자 조금 울컥해져서 주위를 둘러보는 척 딴청을 부렸다. 그러다 멈칫 시선이 고정되었다.

“……헐.”

시연은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아줌마 뒤에 아이돌 가수를 해도 될 것 같은 남자애가 서 있었다. 이 동네와 저 미모는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았다. 저번 방학에 왔을 땐 못 봤는데. 그 남자애는 무심히 그런 시연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맙소사, 웃는 것도 완전 내 스타일.

“딸 왔다면서 딸 얼굴도 안 보여 주고.”

시연이 제 얘기가 나오는 것 같아 정신 줄을 붙잡고는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어, 그래. 어이구, 예뻐라. 우리 현도랑 같은 학교에 입학한다면서? 현도랑 사이좋게 잘 지내. 우리 애가 무뚝뚝해서 걱정이네.”

“현도 같은 앨 걱정하면 다른 엄마들은 어떡해요.”

“호호호, 그런가?”

시연은 정말로 서울에 올라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빠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저런 애랑 같은 학교라니. 같은 반이면 좋겠다. 제발.

아냐,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엄마들끼리 아는 사이니까 잘하면 뭔가가 될지도 몰라! 게다가 바로 위층에 산다니. 이건 정말 운명이야. 시연은 엘리베이터 안 거울을 통해 눈을 반짝이며 흘깃흘깃 현도를 훔쳐보았다. 그러다 딱― 눈이 마주쳐 버렸다.

꺅, 어떡해. 거울로 점점 볼이 빨개지는 제 모습이 보여서 더 부끄러워졌다.

“너, 너도 8반이야?”

“……응?”

현도가 시연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결이 좋아 보이는 검은 머리가 조금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 모양마저 완벽했다.

아무래도 그는 뜬금없는 말이라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 바보, 바보! ‘몇 반이야?’도 아니고 ‘너도 8반이야?’라니.

― 17층입니다.

아, 첫사랑이 될지도 모르는 남자에게 이런 첫인상을 심어 줄 순 없다. 시연은 눈썹을 조금 올리고 다음 말을 기다리는 현도의 잘생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얘는 이 시간의 틈에서도 잘생겼구나. 색이라곤 노란색과 하얀색뿐인데 이렇게 잘생겼다니.

깜박―

눈을 깜박이고 나서 시연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택했다.

휙― 현도가 고개를 돌려 눈을 내리깔고 있는 시연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빤히 보는 시선에 고개를 들 법도 한데 시연은 꿋꿋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 17층입니다.

“시연 엄마 잘 들어가요.”

“네, 현도 엄마도요.”

― 문이 닫힙니다.

“엄마, 엄마, 쟤 이름이 뭐라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시연은 엄마를 붙잡고 물었다. 들뜬 음성이었다.

“현도. 최현도. 관심 있어?”

아, 최현도.

이름조차 멋있다. 시연이 탄식 같은 한숨을 푹 쉬자 엄마가 얼씨구, 하고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시연은 옆에 있는 엄마가 뭐라고 하든 들리지 않을 만큼 푹 빠져 있었다. 아까 시연이 앞뒤 잘라먹은 말을 했을 때도 그 애는 쭉 다정한 표정이었다. 훈훈한 주제에 그렇게 다정하기까지 하다니. 분홍색 설렘이 가슴속에서부터 몽실몽실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