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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장
귀를 틀어막은 명서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이왕이면 오래 자야 덜 지루한 생활이라 중간에 잠이 깨면 곤욕이다.
“아, 진짜.”
명서가 베개로 쓰는 둘둘 말은 천 쪼가리 끝을 이로 지근거렸다. 두런두런 말소리에 왔다 갔다 발소리에, 평소 같으면 눈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면 사라졌을 소음이 반 시진째라 안 일어나고는 못 견딜 판이었다.
안 자고 만다, 내가. 발딱 몸을 일으킨 명서가 어둠 속을 더듬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물이 담긴 주발을 찾아 들이켜고 입가에 흐른 물방울은 손등으로 쓱 닦아 냈다.
천장에 매달리다시피 한 쪽창으로 실낱같은 빛과 바람 한 주먹이 들어왔다. 명서의 고개가 저절로 창을 향했다. 다른 건 참을 만해도 환한 해를 맘껏 쬐지 못하는 건 좀 서운했다.
나풀거리는 햇빛이 눈부셨던 어린 날은 이제 꿈만 같았다. 명서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감았다. 피부보다 흰 빛깔의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났다.
명서에게 희고 깨끗하다는 건 숙명인 동시에 저주였다. 티끌 하나 없는 피부와 은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까지.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팔자지.
그렇다고 믿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명서는 방금 전의 침울함을 싹 걷어 낸 듯 씩씩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참말 이상하긴 하다. 저, 소음 말이다. 끝없는 것으로도 모자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처는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곳이었다. 식사와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말 못 하는 어린 계집종과 이따금 상태를 확인하러 들르는 늙은 의원이 여기서 본 얼굴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였고 말이다.
“아…….”
때가 된 모양이다. 답을 찾은 명서가 아끼던 베개를 끌어안고 섰다. 곧 낯선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옷이 잘 어울리는 몹시 서늘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단정함과 차분함이 습인 듯 시선 하나, 손짓 하나에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가져가고픈 게 있으면 챙기도록 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단주님은 이만 가 보세요. 씻기고 치장하는 것까지 제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부탁해, 유모.”
수(水) 상단의 단주 뒤에서 인자한 낯의 중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주가 먼저 돌아가고 명서는 짐을 챙겨 좁고 습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반항도 없고 울음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각오했던 만큼 명서의 눈빛은 초연했다.
가져갈 짐이라고는 천 뭉치가 전부다. 명서는 유모라는 여인을 따라 타박타박 잘도 걸었다. 뒤돌아보아도 그곳이 고향은 아니라 아쉽거나 미련이 남을 리 없었다. 명서는 앞을 향해 걸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런, 눈이 부신가요? 잠깐만요.”
어떻게 알았는지 중년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창에 긴 유자를 드리우려 했다. 명서가 눈을 반짝 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두셔요. 또 한참은 못 볼지 모르잖아요.”
명서는 유모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어 보였다. 환한 햇살 아래 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희고 투명한 모습은 그 자체로 순수했다.
* * *
명서의 목욕과 단장이 끝나자 유모는 다반을 들고 옆방 문을 두드렸다. 단주인 사로가 날카로운 눈을 치켜떴다. 분명 기다리라고 지시를 내렸던 터였다.
“무슨 일이지?”
사로의 음성이 차가웠으나 방으로 들어선 유모는 태연했다. 그녀는 흩어진 의자를 바로 하고 먹다 남은 다과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단 음식을 줄이셔야 한다니까요. 머리가 아프면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고 잠시 눈을 감고 쉬도록 하셔야지 달콤한 것만 찾으시면……. 아이고, 이 접시는 어째 또 이가 나갔데요. 귀한 것이라고 조심히 다뤄 달라 말씀드렸는데.”
이어지는 잔소리가 멈출 것 같지 않아 사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많고 눈물 많은 유모는 친모와 다름없었다. 늘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로지만 그녀 앞에서만은 예외였다.
“왜?”
사로가 묻자 유모가 끙 하고 입술을 사려물었다. 따스한 마음 잃지 마시라 당부하면서도 사내들보다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상단을 이끄는 사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그녀였다. 하니 말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 함은 두 가지의 간극이 있는 문제일 터, 사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가엾어?”
“그것이…… 물론 아가씨가 거두지 않았다면 진즉에 험한 꼴을 당했을 테지만…… 그래도 뭔가…… 그 맑은 사람 탓은 암 것도 없는데…… 어린 나이에 참…….”
“이형(異形)이란 그렇지.”
온기 없는 대답에 유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사로가 손등을 다독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통이 길지는 않을 거야.”
비록 운 나쁘게 사신(四神) 가운데 가장 성질이 포악한 흑(黑)에 바쳐질 운명이라도,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사는 다른 이형들과 비교하면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로는 명서의 희고 말간 모든 것을 떠올렸다.
이형이 나타나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유전이나 병과 달리 예측되지 않는 순간과 공간에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불쑥, 재앙처럼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백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은 여아뿐이었다. 훗날 신관들이 이형을 사방신의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준 이유기도 했다. 세상의 균열 위에 터를 잡은 네 명의 신이 모두 남성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 줌의 신력도 없이 단지 신과 가까운 모습으로 태어난 이형은 저주와 농락의 대상이었다. 어려서는 신체 일부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여 사냥당하는 것이 일쑤였고, 자라서는 진귀한 물건처럼 팔려 다녔다.
이러한 사정이다 보니 스물이 넘지 않으면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순결한 상태의 이형을 찾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의식을 담당하는 순번이 오면 가장 먼저 준비하는 것이 그 부분이었다. 곧 스물이 된다는 명서는 거기 딱 맞았다.
제물식이 열리는 것은 백 년에 한 번, 사신이 차례로, 수 상단을 포함한 관리자 세 가문이 번갈아 준비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일을 맡은 사로 역시 조건에 맞는 이형을 찾기 위해 삼 년 전부터 힘을 써 겨우 다섯 달 전에야 명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유모는 말없이 다시 찻물을 끓였다. 옥빛 도자기 입구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성스럽게 내린 차를 건네받은 사로가 쟁반 위에 그것을 도로 올려놓았다.
“차라도 한 잔 가져다줘.”
사로는 유모의 쟁반 위에 다식까지 챙겨 올려 주었다. 어쨌거나 따스한 차 한 잔으로 뭔가 달래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공물에 찻잎도 넣어야겠어. 속말을 하며 천천히 잔을 비운 사로가 두 손을 맞잡았다.
* * *
사방이 눈부시게 환했다. 길게 넝쿨진 푸른 잎들마저 빛에 나부껴 투명했다. 바닥을 구르는 돌, 먼지를 일으키는 모래, 흩어지는 구름 한 조각까지 희고 깨끗한 공간. 그 가운데 온통 검은색의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길게 나부끼는 흑발과 사납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 탄탄한 몸을 휘감은 장식 없는 옷조차 새까맸다. 유일하게 입술만이 새빨갛게 도드라져 위압적인 동시에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다. 세상의 균열을 막는 네 명의 신 중 가장 늦게 깨어난 그의 이름은 휴(?)였다.
느릿하게 걸을 때마다 빛이 파르르 떨며 사라지고 묵직하고 까만 어둠이 돋아났다. 그의 손가락이 번져 가는 빛을 툭 쳐 올렸다. 서늘하고 무심한 눈에 조각나는 빛이 점점이 비쳤다. 휴의 입술이 삐딱하게 말려 올라갔다.
하여간 성가시지. 어둠에서 나고 자란 신은 혀를 날름거려 빛의 부스러기를 삼켰다. 주변을 파닥거리는 빛보다 더 성가신 것은 영역 밖에 모여 있는 산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함부로 공허와 어둠, 공포나 절망 따위로 그를 명명해 두려워하는 주제에 잘도 찾아왔다. 거기다 질리지도 않고 동족을 산 제물로 바치다니, 흉측하고 저질스러운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휴는 경계 밖의 것들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손짓 하나면 어둑하게 피워 낸 살기로 단숨에 끝장내 버릴 수 있을 테지만 현(絃) 우는 소리가 맹약을 일깨웠다.
‘지켜라.’
태어나는 순간 숨과 함께 삼켜진 짤막한 명은 무섭도록 절대적이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휴는 손톱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찢어 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를 보고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 중 제사장의 표식을 가진 자를 찾아낸 휴가 느릿하게 그쪽으로 향했다. 걸음에 맞추어 빛이 바스라지고 그를 호위하듯 아스라이 어둠이 몰려들었다.
어둠은 짙고 아득했으며 그만큼 두렵고 매혹적이었다. 독버섯처럼 찬란하면서도 위험한 기운에 노출된 이들이 차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윽고 휴가 제단 앞에 섰을 때, 깨어 있는 것은 가까스로 버티고 선 수 상단의 단주, 사로가 유일했다.
“…….”
문득 휴의 까맣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하얀 천으로 꽁꽁 싸맨 무언가에 멈추었다. 깨어 있는 산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손가락 하나에도 못 미치는 신력이지만 평범한 인간은 견디지 못할 힘을 개방해 둔 상태였다. 사신을 모시는 세 가문의 가주라면 어떻게든 참아 내겠지만 그도 아닌 주제에…….
호기심과 불쾌함이 뒤섞인 채, 휴가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비볐다. 손톱만큼의 힘을 더 보였을 뿐인데 쓰러진 인간들이 괴로운 듯 꿈틀거리고 사로마저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하얀 천의 그것은 멀뚱멀뚱 서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휴가 손바닥을 펼쳐 부러진 빛을 가득 움켜쥐고 허공에 뿌렸다. 촤아악.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스산스러웠다. 빛은 검처럼 날카롭게 하얀 천을 잘라 내고 단숨에 그 속에 든 것을 휴에게 내보였다.
흰 천이 사라졌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새하얀 모습이었다. 순백의 색 위에 깃든 어둠처럼 말간 회색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두려움 한 점 없이 곧은 눈이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건방지게도 생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순간 무언가 덜컥거렸다. 휴는 온통 하얀 소녀 뒤로 파스라진 제단의 귀퉁이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희열은 잔인한 생존 본능과 직결되었다.
부서지는 것이 이쪽인지 그쪽인지 시험해 보는 것도 재밌겠지. 묘한 미소가 휴의 입가에 걸렸다.
“따라와.”
요란하게 차려진 제물들은 순식간에 휴가 펼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고 작은 인간은 눈치 빠르게 사로를 살폈다.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한 듯 바로 몸을 돌려 따라 걸어왔다.
#1장
귀를 틀어막은 명서는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이왕이면 오래 자야 덜 지루한 생활이라 중간에 잠이 깨면 곤욕이다.
“아, 진짜.”
명서가 베개로 쓰는 둘둘 말은 천 쪼가리 끝을 이로 지근거렸다. 두런두런 말소리에 왔다 갔다 발소리에, 평소 같으면 눈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면 사라졌을 소음이 반 시진째라 안 일어나고는 못 견딜 판이었다.
안 자고 만다, 내가. 발딱 몸을 일으킨 명서가 어둠 속을 더듬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물이 담긴 주발을 찾아 들이켜고 입가에 흐른 물방울은 손등으로 쓱 닦아 냈다.
천장에 매달리다시피 한 쪽창으로 실낱같은 빛과 바람 한 주먹이 들어왔다. 명서의 고개가 저절로 창을 향했다. 다른 건 참을 만해도 환한 해를 맘껏 쬐지 못하는 건 좀 서운했다.
나풀거리는 햇빛이 눈부셨던 어린 날은 이제 꿈만 같았다. 명서는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빙빙 감았다. 피부보다 흰 빛깔의 머리카락이 어둠 속에서 환히 빛났다.
명서에게 희고 깨끗하다는 건 숙명인 동시에 저주였다. 티끌 하나 없는 피부와 은색으로 보이는 머리카락, 그리고 회색에 가까운 눈동자까지.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팔자지.
그렇다고 믿는 편이 여러모로 좋다. 명서는 방금 전의 침울함을 싹 걷어 낸 듯 씩씩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참말 이상하긴 하다. 저, 소음 말이다. 끝없는 것으로도 모자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거처는 출입이 엄격히 제한된 곳이었다. 식사와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던 말 못 하는 어린 계집종과 이따금 상태를 확인하러 들르는 늙은 의원이 여기서 본 얼굴의 전부였다. 그나마도 제대로 말 한마디 나누지 못하였고 말이다.
“아…….”
때가 된 모양이다. 답을 찾은 명서가 아끼던 베개를 끌어안고 섰다. 곧 낯선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 옷이 잘 어울리는 몹시 서늘한 느낌의 미인이었다. 단정함과 차분함이 습인 듯 시선 하나, 손짓 하나에서도 기품이 느껴졌다.
“가져가고픈 게 있으면 챙기도록 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고.”
“단주님은 이만 가 보세요. 씻기고 치장하는 것까지 제가 다 알아서 할 터이니.”
“부탁해, 유모.”
수(水) 상단의 단주 뒤에서 인자한 낯의 중년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주가 먼저 돌아가고 명서는 짐을 챙겨 좁고 습한 복도를 걸어 나갔다. 반항도 없고 울음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각오했던 만큼 명서의 눈빛은 초연했다.
가져갈 짐이라고는 천 뭉치가 전부다. 명서는 유모라는 여인을 따라 타박타박 잘도 걸었다. 뒤돌아보아도 그곳이 고향은 아니라 아쉽거나 미련이 남을 리 없었다. 명서는 앞을 향해 걸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저런, 눈이 부신가요? 잠깐만요.”
어떻게 알았는지 중년 여인이 걸음을 멈추고 창에 긴 유자를 드리우려 했다. 명서가 눈을 반짝 뜨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두셔요. 또 한참은 못 볼지 모르잖아요.”
명서는 유모와 눈이 마주치자 해맑게 웃어 보였다. 환한 햇살 아래 은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는 희고 투명한 모습은 그 자체로 순수했다.
* * *
명서의 목욕과 단장이 끝나자 유모는 다반을 들고 옆방 문을 두드렸다. 단주인 사로가 날카로운 눈을 치켜떴다. 분명 기다리라고 지시를 내렸던 터였다.
“무슨 일이지?”
사로의 음성이 차가웠으나 방으로 들어선 유모는 태연했다. 그녀는 흩어진 의자를 바로 하고 먹다 남은 다과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단 음식을 줄이셔야 한다니까요. 머리가 아프면 창을 열어 공기를 바꾸고 잠시 눈을 감고 쉬도록 하셔야지 달콤한 것만 찾으시면……. 아이고, 이 접시는 어째 또 이가 나갔데요. 귀한 것이라고 조심히 다뤄 달라 말씀드렸는데.”
이어지는 잔소리가 멈출 것 같지 않아 사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많고 눈물 많은 유모는 친모와 다름없었다. 늘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는 사로지만 그녀 앞에서만은 예외였다.
“왜?”
사로가 묻자 유모가 끙 하고 입술을 사려물었다. 따스한 마음 잃지 마시라 당부하면서도 사내들보다 더 철저하고 완벽하게 상단을 이끄는 사로를 자랑스러워하는 그녀였다. 하니 말하기 쉽지 않은 일이라 함은 두 가지의 간극이 있는 문제일 터, 사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가 가엾어?”
“그것이…… 물론 아가씨가 거두지 않았다면 진즉에 험한 꼴을 당했을 테지만…… 그래도 뭔가…… 그 맑은 사람 탓은 암 것도 없는데…… 어린 나이에 참…….”
“이형(異形)이란 그렇지.”
온기 없는 대답에 유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사로가 손등을 다독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통이 길지는 않을 거야.”
비록 운 나쁘게 사신(四神) 가운데 가장 성질이 포악한 흑(黑)에 바쳐질 운명이라도,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사는 다른 이형들과 비교하면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로는 명서의 희고 말간 모든 것을 떠올렸다.
이형이 나타나는 까닭은 알 수 없었다. 유전이나 병과 달리 예측되지 않는 순간과 공간에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불쑥, 재앙처럼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그렇게 순백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은 여아뿐이었다. 훗날 신관들이 이형을 사방신의 제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준 이유기도 했다. 세상의 균열 위에 터를 잡은 네 명의 신이 모두 남성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한 줌의 신력도 없이 단지 신과 가까운 모습으로 태어난 이형은 저주와 농락의 대상이었다. 어려서는 신체 일부를 먹으면 무병장수한다고 하여 사냥당하는 것이 일쑤였고, 자라서는 진귀한 물건처럼 팔려 다녔다.
이러한 사정이다 보니 스물이 넘지 않으면서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순결한 상태의 이형을 찾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의식을 담당하는 순번이 오면 가장 먼저 준비하는 것이 그 부분이었다. 곧 스물이 된다는 명서는 거기 딱 맞았다.
제물식이 열리는 것은 백 년에 한 번, 사신이 차례로, 수 상단을 포함한 관리자 세 가문이 번갈아 준비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 일을 맡은 사로 역시 조건에 맞는 이형을 찾기 위해 삼 년 전부터 힘을 써 겨우 다섯 달 전에야 명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유모는 말없이 다시 찻물을 끓였다. 옥빛 도자기 입구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정성스럽게 내린 차를 건네받은 사로가 쟁반 위에 그것을 도로 올려놓았다.
“차라도 한 잔 가져다줘.”
사로는 유모의 쟁반 위에 다식까지 챙겨 올려 주었다. 어쨌거나 따스한 차 한 잔으로 뭔가 달래질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공물에 찻잎도 넣어야겠어. 속말을 하며 천천히 잔을 비운 사로가 두 손을 맞잡았다.
* * *
사방이 눈부시게 환했다. 길게 넝쿨진 푸른 잎들마저 빛에 나부껴 투명했다. 바닥을 구르는 돌, 먼지를 일으키는 모래, 흩어지는 구름 한 조각까지 희고 깨끗한 공간. 그 가운데 온통 검은색의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길게 나부끼는 흑발과 사납고 또렷한 검은 눈동자, 탄탄한 몸을 휘감은 장식 없는 옷조차 새까맸다. 유일하게 입술만이 새빨갛게 도드라져 위압적인 동시에 퇴폐적인 느낌을 주었다. 세상의 균열을 막는 네 명의 신 중 가장 늦게 깨어난 그의 이름은 휴(?)였다.
느릿하게 걸을 때마다 빛이 파르르 떨며 사라지고 묵직하고 까만 어둠이 돋아났다. 그의 손가락이 번져 가는 빛을 툭 쳐 올렸다. 서늘하고 무심한 눈에 조각나는 빛이 점점이 비쳤다. 휴의 입술이 삐딱하게 말려 올라갔다.
하여간 성가시지. 어둠에서 나고 자란 신은 혀를 날름거려 빛의 부스러기를 삼켰다. 주변을 파닥거리는 빛보다 더 성가신 것은 영역 밖에 모여 있는 산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함부로 공허와 어둠, 공포나 절망 따위로 그를 명명해 두려워하는 주제에 잘도 찾아왔다. 거기다 질리지도 않고 동족을 산 제물로 바치다니, 흉측하고 저질스러운 것들이 아닐 수 없다.
휴는 경계 밖의 것들을 향해 혀를 끌끌 찼다. 손짓 하나면 어둑하게 피워 낸 살기로 단숨에 끝장내 버릴 수 있을 테지만 현(絃) 우는 소리가 맹약을 일깨웠다.
‘지켜라.’
태어나는 순간 숨과 함께 삼켜진 짤막한 명은 무섭도록 절대적이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휴는 손톱으로 어둠과 빛의 경계를 찢어 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를 보고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들 중 제사장의 표식을 가진 자를 찾아낸 휴가 느릿하게 그쪽으로 향했다. 걸음에 맞추어 빛이 바스라지고 그를 호위하듯 아스라이 어둠이 몰려들었다.
어둠은 짙고 아득했으며 그만큼 두렵고 매혹적이었다. 독버섯처럼 찬란하면서도 위험한 기운에 노출된 이들이 차례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이윽고 휴가 제단 앞에 섰을 때, 깨어 있는 것은 가까스로 버티고 선 수 상단의 단주, 사로가 유일했다.
“…….”
문득 휴의 까맣고 날카로운 눈동자가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하얀 천으로 꽁꽁 싸맨 무언가에 멈추었다. 깨어 있는 산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손가락 하나에도 못 미치는 신력이지만 평범한 인간은 견디지 못할 힘을 개방해 둔 상태였다. 사신을 모시는 세 가문의 가주라면 어떻게든 참아 내겠지만 그도 아닌 주제에…….
호기심과 불쾌함이 뒤섞인 채, 휴가 엄지와 검지를 가볍게 비볐다. 손톱만큼의 힘을 더 보였을 뿐인데 쓰러진 인간들이 괴로운 듯 꿈틀거리고 사로마저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하얀 천의 그것은 멀뚱멀뚱 서서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었다.
휴가 손바닥을 펼쳐 부러진 빛을 가득 움켜쥐고 허공에 뿌렸다. 촤아악.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스산스러웠다. 빛은 검처럼 날카롭게 하얀 천을 잘라 내고 단숨에 그 속에 든 것을 휴에게 내보였다.
흰 천이 사라졌음에도 그것은 여전히 새하얀 모습이었다. 순백의 색 위에 깃든 어둠처럼 말간 회색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두려움 한 점 없이 곧은 눈이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건방지게도 생긋 웃으며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순간 무언가 덜컥거렸다. 휴는 온통 하얀 소녀 뒤로 파스라진 제단의 귀퉁이를 응시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희열은 잔인한 생존 본능과 직결되었다.
부서지는 것이 이쪽인지 그쪽인지 시험해 보는 것도 재밌겠지. 묘한 미소가 휴의 입가에 걸렸다.
“따라와.”
요란하게 차려진 제물들은 순식간에 휴가 펼친 어둠 속으로 잠겨 들었고 작은 인간은 눈치 빠르게 사로를 살폈다. 그녀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한 듯 바로 몸을 돌려 따라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