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곧 어둠과 빛의 경계가 다시 섰다. 인간은 빛으로 가득 찬 숲을 걸으며 나직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휴는 무시하고 발을 굴러 우거진 나무길을 열었다. 푸르게 뚝뚝 떨어지는 녹음 아래 말갛게 고여 흐르는 냇물을 발견한 인간은 아까보다 더 크게 감탄했다.
“멋지네요.”
“곧 죽을 것을 알면서 용케도 떠드는군.”
높낮이 변화가 없는 말투로 내뱉은 휴가 무감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인간이 또 한차례 배시시 웃었다.
“제가 눈치가 좀 없나 봅니다. 그래서 혼절도 아니했나? 아무튼 그래도 보이는 게 죄다 어여쁘고 좋은 걸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나 계집의 눈동자는 말과 달리 마냥 가볍지 않았다. 휴는 또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누르며 새빨간 입꼬리를 당겼다.
“그도 잠시일 테니. 눈요기 마쳤으면 예서 씻어라.”
“아침나절 내내 욕통에 잠겨 있었는걸요.”
항의에도 아랑곳 않고 그만 따르라는 뜻으로 휴가 눈을 부라렸다. 마지못해 품에 꼭 안았던 보퉁이를 내린 인간이 옷고름 하나 잡고 바르작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깨끗한데 뭣 하러 귀찮…… 으악!”
그 말을 들은 휴가 그대로 자그마한 목덜미를 낚아채 물속에 던져 넣었다. 졸지에 차가운 물에 젖은 작은 것이 푸덕거렸다.
“여기는 너희들이 말하는 신의 영역이다. 인간의 냄새를 좋아하는 별스러운 것들이 많지. 씻어 내지 않는다면 곤란한 건 네 쪽일 게다.”
말을 마친 휴는 뒤돌아섰다. 볼 것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지만 보기가 싫어서였다. 허여멀건 작은 것의 알몸 따위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래 놓고 충동적으로 여기까지 끌고 와 버렸다. 그 부분에서 스스로도 납득할 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휴는 귀를 바짝 세우고 돌진하는 요상한 생물을 탁 밟아 납작하게 만들었다. 역시 씻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그도 처음 보는 독특한 이형에게선 지나치게 달콤하고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신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주제의 계집에게서 신의 숲과 흡사한 향이 났다. 산과 들, 바다와 강, 바람과 소리, 불과 물이 담겨 그립게도 또는 간절하게도 만드는 그런.
주제넘은 인간이군. 휴가 불쾌함을 담아 미간을 구겼다. 제힘에도 계집이 혼절치 않은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축약하자면 감히 저 계집이 자신과 파장이 맞는 셈이다. 미약한 주제에 신의 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어긋나 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이형들이 껍데기만 신에 가까운 것과 비교하자면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 흔치 않은 예를 들어 이형이란 것들이 신의 균열을 막아 준다고들 떠들어 댔다.
퍽이나. 휴는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술로 웃었다. 저것을 그대로 두면 신을 탐하는 삿된 것들에 의해 여린 살이 갈가리 찢기고 뼈마저 씹혀 사라지고 말 터였다.
필시 재밌을 것이다. 희고 보드라운 살갗이 피에 물들고 맹랑한 눈동자가 공포와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제법 빠르게 뛰었다. 휴는 잇새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얕게 숨을 뱉었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편이 좋겠다. 그래야 무료와 공허를 짧게라도 잊을 수 있을 거다. 휴는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이 선 이상 저 작은 인간 계집에게 표식을 남겨야 했다.
“계집.”
“명서요.”
목욕을 마친 명서가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앞에 와 섰다. 휴는 눈만 움직여 제 공간에 있는 낯선 인간을 바라보았다. 굴리면 소리라도 날 것처럼 맑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마주했으나 아까처럼 웃지는 않았다. 제법 오래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뭐든, 일단…….”
휴는 명서의 좁은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부터 빠르게 물이 말라 금세 옷이 말끔해졌다. 거리가 좁아지자 명서라는 인간 계집에게서 선선한 물의 향이 났다. 그것은 그 요상한 눈동자만큼이나 말갛고 다정했다.
“드시게요?”
명서가 그를 보며 겁 하나 먹지 않고 그리 물었다. 기가 막힌 휴가 짧게 실소했다. 그런 운명일 거라고 설명을 들었을 테고 정황상 믿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억울하고 기분이 나빴다. 덕분에 고약한 심보가 어김없이 발동됐다.
“여태 순순히 따라온 것이 이제야 억울하고 겁이 나? 이형을 먹어야 사신의 변이를 막을 수 있다더군. 인간들이 그 때문에 눈길만 닿아도 죽어 버리는 이형을 지치지도 않고 제단에 올리는 거라지. 시험을 해 보고 싶어도 살아서 여기 들어온 것이 있었어야 말이다. 네가 처음이니 신선할 때 먹고 효과를 확인해 볼 참이다만.”
“그렇지요. 그러시겠지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린 명서가 손바닥을 맞대고 빌다시피 말했다.
“그런데요.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말씀드리지만 절대 도망 안 가요. 갈 곳도 없고. 그냥…… 하루만 아무 눈치 안 보고 지내보고 싶어서요. 안 들어주셔도 할 수 없지만 들어주시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게 맞다. 인간이 신의 경계를 멋대로 넘을 수 없으니까. 거기다 하루, 고작 하루의 삶을 벌겠다고 비굴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기분이 뒤틀렸다. 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빨간 입술을 열었다.
“싫다.”
“역시.”
즉각 뇌까린 명서가 더 조르지 않고 주변을 쓰윽 둘러보았다. 가능한 많은 것을 담으려는 듯 눈동자가 쉼 없이 굴렀다. 휴가 부러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더하자 눈을 꼭 감았다가 뜨며 아까처럼 또 씽긋 웃었다.
“자, 준비됐어요.”
나름의 비장한 각오에 하마터면 비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애써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한 휴가 정말 식욕이 돋은 것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다. 명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휴는 부러질 것같이 가는 목덜미를 쓸고 허연 뺨도 툭툭 쳤다. 긴장한 것인지 명서의 어깨가 한껏 굳어졌다.
사납게 치켜떴던 휴의 눈동자가 슬쩍 아래로 움직였다. 울거나 소리치거나 떠밀고 도망치는 상황을 상상했는데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휴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위협하듯 속삭였다.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지 그래.”
“싫습니다. 그래 봤자 입맛만 돋우겠죠.”
딱 부러지게 말한 명서가 도전적으로 휴를 올려다보았다. 휴가 냉랭히 시선을 맞춘 채 비식 웃었다.
“네가 정말 체념했다고 믿게 만들어 뭔가를 노리고 싶었다면 말이다.”
그의 손이 명서의 가슴 앞섶으로 불쑥 들어갔다.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어오른 명서가 손마디 두 개 정도 크기의 단도를 떨어트렸다. 앙다문 입술로 노려보는 눈매가 제법 매서웠다.
생긴 건 심심한 주제에 반응이 꽤 재미있단 말이지. 휴는 천연덕스럽게 목덜미와 입술을 건드리다 핏줄이 다 들여다보이는 명서의 손목을 살짝 핥았다.
“으악! 그래요. 이렇게 죽기는 싫습니다. 아무치도 않게 죽는 거 못 한다고요.”
바르작거리다 엉덩방아까지 찧은 명서의 손목은 여전히 휴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그러나 냉정하게 명서를 내려다보았다.
“설치지 마라. 심사가 뒤틀리면 너는 물론, 널 여기로 보낸 인간들까지 멸해 버릴 테니.”
“그래 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러고 싶지만…… 정말 그러실 것 같으니까…… 하아.”
반항을 멈춘 명서의 손목을 휴가 지그시 깨물었다. 통증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명서는 실눈을 뜬 채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얀 살결 위로 스며 나온 빨간 핏방울이 요사스러울 정도로 탐스러웠다.
그래 봤자 인간, 허여멀건 생김새처럼 피 맛도 딱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휴의 눈동자가 세로로 좁아졌다. 속을 뒤트는 역한 냄새라고는 없었다. 그저 한없이 달고 강렬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휴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살의와 환희, 갈망과 독점욕이 뒤섞여 소름 돋게 윤이 났다. 이대로 작은 인간 계집을 들이마셔 버리고 싶었다. 그러라고 제게 보내진 존재다. 망설일 필요 따위 없었다.
“씨이, 빨아 먹지 말고 한 번에, 한 번에 좀 해치우시라고요!”
그때 명서가 머리통으로 힘껏 그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비로소 휴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손목을 감싸고 다시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 명서를 응시했다. 성깔을 부려 댄 것치고는 안색이 파리했다.
“아니면 아껴 뒀다 다음에 자시든가요. 꼭 식량이 아니래도 쓸모가 많거든요, 저. 손도 빠르고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닙니다.”
능청스럽게 말하고 웃는 명서의 낯이 파리했다. 제법 많은 피를 흘렸을 거다. 휴는 입술에 남은 온기를 삐딱하게 내려 보다 공중에 무언가를 써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말 증명할 기회를 주지. 표식을 남겼으니 영역 안에서 함부로 덤비는 것들은 없을 것이다.”
“우와아아아! 살려 주시는 겁니까? 진짜? 참말? 아니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고맙습니다! 보기와 달리 세상 둘도 없이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셨군요. 저요, 무엇을 시키셔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놀란 얼굴로 히죽거리다 비명까지 지르며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이 딱 ‘개’ 같았다. 휴는 부산스러운 명서에게서 멀어져 옷깃의 먼지를 탁탁 털어 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는 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먹다니, 인간을. 말도 안 된다. 물론 아주 잠깐 자신도 처음 느끼는 충동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확인할 것이 있어 영역 안에 들였고 무료를 조금 달랠 수도 있을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그러다 만약 질리고 성가셔진다면…….
휴는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날아오르며 섬섬히 고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2장
분주하다. 정신 사납다. 시끄럽다. 느닷없이 웃는다. 감상을 끝낸 휴는 턱을 괸 채로 명서를 바라보았다.
숲에 두고 왔어야 해. 후회해도 늦었다. 제집인 양 자리 잡고 쓸고 닦고 부산을 떨고 있는 명서를 보노라니 심심치는 않았다. 기실 처소까지 발 들이게 할 작정은 아니었다. 하여 명서가 부르면 달려올 거리 운운할 때만 해도 콧방귀를 뀌었으나 훌쩍거리는 콧소리와 딱딱 부딪치는 이 소리가 몹시도 거슬렸다.
물에 빠지고 피를 빨리고, 저 보잘것없이 작고 약한 인간에게는 제법 치명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이 밤은 아량을 베풀자 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조르르 달려와 해실거리는 꼴이 꼭 두어 달 된 강아지 딱 그 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꼬리가 축 처진 댕그랗고 커다란 눈도 그렇고 부스스하게 날리는 머리카락도 ‘개’ 맞았다.
“참, 뭐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분주하게 움직이던 명서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도통 이쪽에서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던지 명서가 죽 말을 이어 갔다.
“주인님? 가주님? 신님? 어둠님? 흐음, 아니면 스승님? 오오, 이거 괜찮네요.”
“처지를 똑바로 알아라. 넌 언제 죽게 될지 모를 내 소유물이고 난 네게 뭔가를 가르쳐 줄 마음 따위 없거늘.”
“압니다, 알아요. 그래도 부를 말이 있어야 대화가 쉽지 않겠습니까. 혹시 누군가에게 소개하더라도 절 비상식량이라고 하는 것보다 제자다, 그러시는 편이 격조 있어 보이고…….”
“하아.”
지금 고작 인간 따위가 신의 품위를 염려한단 말인가. 휴는 딱딱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는 않으나 저 인간의 말마따나 존재 자체를 설명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었다.
연람을 떠올린 휴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사신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연장자인 그는 여러모로 짜증 나고 성가셨다.
“그런데요.”
또 묻는다. 휴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잠시 움찔거리는가 싶던 명서가 또 반짝 웃었다.
곧 어둠과 빛의 경계가 다시 섰다. 인간은 빛으로 가득 찬 숲을 걸으며 나직하게 탄성을 내질렀다. 휴는 무시하고 발을 굴러 우거진 나무길을 열었다. 푸르게 뚝뚝 떨어지는 녹음 아래 말갛게 고여 흐르는 냇물을 발견한 인간은 아까보다 더 크게 감탄했다.
“멋지네요.”
“곧 죽을 것을 알면서 용케도 떠드는군.”
높낮이 변화가 없는 말투로 내뱉은 휴가 무감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인간이 또 한차례 배시시 웃었다.
“제가 눈치가 좀 없나 봅니다. 그래서 혼절도 아니했나? 아무튼 그래도 보이는 게 죄다 어여쁘고 좋은 걸 어떡하겠습니까.”
그러나 계집의 눈동자는 말과 달리 마냥 가볍지 않았다. 휴는 또 울렁거리는 속을 꾹 누르며 새빨간 입꼬리를 당겼다.
“그도 잠시일 테니. 눈요기 마쳤으면 예서 씻어라.”
“아침나절 내내 욕통에 잠겨 있었는걸요.”
항의에도 아랑곳 않고 그만 따르라는 뜻으로 휴가 눈을 부라렸다. 마지못해 품에 꼭 안았던 보퉁이를 내린 인간이 옷고름 하나 잡고 바르작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깨끗한데 뭣 하러 귀찮…… 으악!”
그 말을 들은 휴가 그대로 자그마한 목덜미를 낚아채 물속에 던져 넣었다. 졸지에 차가운 물에 젖은 작은 것이 푸덕거렸다.
“여기는 너희들이 말하는 신의 영역이다. 인간의 냄새를 좋아하는 별스러운 것들이 많지. 씻어 내지 않는다면 곤란한 건 네 쪽일 게다.”
말을 마친 휴는 뒤돌아섰다. 볼 것도 없고 보고 싶지도 않지만 보기가 싫어서였다. 허여멀건 작은 것의 알몸 따위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
그래 놓고 충동적으로 여기까지 끌고 와 버렸다. 그 부분에서 스스로도 납득할 만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휴는 귀를 바짝 세우고 돌진하는 요상한 생물을 탁 밟아 납작하게 만들었다. 역시 씻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다.
그도 처음 보는 독특한 이형에게선 지나치게 달콤하고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신력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주제의 계집에게서 신의 숲과 흡사한 향이 났다. 산과 들, 바다와 강, 바람과 소리, 불과 물이 담겨 그립게도 또는 간절하게도 만드는 그런.
주제넘은 인간이군. 휴가 불쾌함을 담아 미간을 구겼다. 제힘에도 계집이 혼절치 않은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축약하자면 감히 저 계집이 자신과 파장이 맞는 셈이다. 미약한 주제에 신의 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니 어긋나 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이형들이 껍데기만 신에 가까운 것과 비교하자면 몹시 드문 일이었다. 그 흔치 않은 예를 들어 이형이란 것들이 신의 균열을 막아 준다고들 떠들어 댔다.
퍽이나. 휴는 삐뚜름하게 올라간 입술로 웃었다. 저것을 그대로 두면 신을 탐하는 삿된 것들에 의해 여린 살이 갈가리 찢기고 뼈마저 씹혀 사라지고 말 터였다.
필시 재밌을 것이다. 희고 보드라운 살갗이 피에 물들고 맹랑한 눈동자가 공포와 절망으로 물드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제법 빠르게 뛰었다. 휴는 잇새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얕게 숨을 뱉었다.
아니, 그것보다 조금 더 오래 즐길 수 있는 편이 좋겠다. 그래야 무료와 공허를 짧게라도 잊을 수 있을 거다. 휴는 냉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결심이 선 이상 저 작은 인간 계집에게 표식을 남겨야 했다.
“계집.”
“명서요.”
목욕을 마친 명서가 물이 뚝뚝 흐르는 채로 앞에 와 섰다. 휴는 눈만 움직여 제 공간에 있는 낯선 인간을 바라보았다. 굴리면 소리라도 날 것처럼 맑은 눈동자가 똑바로 그를 마주했으나 아까처럼 웃지는 않았다. 제법 오래 둘의 시선이 맞닿았다.
“뭐든, 일단…….”
휴는 명서의 좁은 어깨를 짚었다. 그의 손이 닿은 곳부터 빠르게 물이 말라 금세 옷이 말끔해졌다. 거리가 좁아지자 명서라는 인간 계집에게서 선선한 물의 향이 났다. 그것은 그 요상한 눈동자만큼이나 말갛고 다정했다.
“드시게요?”
명서가 그를 보며 겁 하나 먹지 않고 그리 물었다. 기가 막힌 휴가 짧게 실소했다. 그런 운명일 거라고 설명을 들었을 테고 정황상 믿지 않을 수도 없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억울하고 기분이 나빴다. 덕분에 고약한 심보가 어김없이 발동됐다.
“여태 순순히 따라온 것이 이제야 억울하고 겁이 나? 이형을 먹어야 사신의 변이를 막을 수 있다더군. 인간들이 그 때문에 눈길만 닿아도 죽어 버리는 이형을 지치지도 않고 제단에 올리는 거라지. 시험을 해 보고 싶어도 살아서 여기 들어온 것이 있었어야 말이다. 네가 처음이니 신선할 때 먹고 효과를 확인해 볼 참이다만.”
“그렇지요. 그러시겠지요.”
순순히 고개를 끄덕거린 명서가 손바닥을 맞대고 빌다시피 말했다.
“그런데요. 하루만 시간을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말씀드리지만 절대 도망 안 가요. 갈 곳도 없고. 그냥…… 하루만 아무 눈치 안 보고 지내보고 싶어서요. 안 들어주셔도 할 수 없지만 들어주시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안 가는 게 아니라 못 가는 게 맞다. 인간이 신의 경계를 멋대로 넘을 수 없으니까. 거기다 하루, 고작 하루의 삶을 벌겠다고 비굴한 표정을 짓는 걸 보니 기분이 뒤틀렸다. 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빨간 입술을 열었다.
“싫다.”
“역시.”
즉각 뇌까린 명서가 더 조르지 않고 주변을 쓰윽 둘러보았다. 가능한 많은 것을 담으려는 듯 눈동자가 쉼 없이 굴렀다. 휴가 부러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더하자 눈을 꼭 감았다가 뜨며 아까처럼 또 씽긋 웃었다.
“자, 준비됐어요.”
나름의 비장한 각오에 하마터면 비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애써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한 휴가 정말 식욕이 돋은 것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다. 명서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휴는 부러질 것같이 가는 목덜미를 쓸고 허연 뺨도 툭툭 쳤다. 긴장한 것인지 명서의 어깨가 한껏 굳어졌다.
사납게 치켜떴던 휴의 눈동자가 슬쩍 아래로 움직였다. 울거나 소리치거나 떠밀고 도망치는 상황을 상상했는데 조금도 미동이 없었다. 휴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위협하듯 속삭였다.
“살려 달라고 애원해 보지 그래.”
“싫습니다. 그래 봤자 입맛만 돋우겠죠.”
딱 부러지게 말한 명서가 도전적으로 휴를 올려다보았다. 휴가 냉랭히 시선을 맞춘 채 비식 웃었다.
“네가 정말 체념했다고 믿게 만들어 뭔가를 노리고 싶었다면 말이다.”
그의 손이 명서의 가슴 앞섶으로 불쑥 들어갔다. 소스라치게 놀라 펄쩍 뛰어오른 명서가 손마디 두 개 정도 크기의 단도를 떨어트렸다. 앙다문 입술로 노려보는 눈매가 제법 매서웠다.
생긴 건 심심한 주제에 반응이 꽤 재미있단 말이지. 휴는 천연덕스럽게 목덜미와 입술을 건드리다 핏줄이 다 들여다보이는 명서의 손목을 살짝 핥았다.
“으악! 그래요. 이렇게 죽기는 싫습니다. 아무치도 않게 죽는 거 못 한다고요.”
바르작거리다 엉덩방아까지 찧은 명서의 손목은 여전히 휴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는 여유롭게 그러나 냉정하게 명서를 내려다보았다.
“설치지 마라. 심사가 뒤틀리면 너는 물론, 널 여기로 보낸 인간들까지 멸해 버릴 테니.”
“그래 버렸으면 좋겠지만! 그러고 싶지만…… 정말 그러실 것 같으니까…… 하아.”
반항을 멈춘 명서의 손목을 휴가 지그시 깨물었다. 통증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명서는 실눈을 뜬 채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하얀 살결 위로 스며 나온 빨간 핏방울이 요사스러울 정도로 탐스러웠다.
그래 봤자 인간, 허여멀건 생김새처럼 피 맛도 딱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웬걸……. 휴의 눈동자가 세로로 좁아졌다. 속을 뒤트는 역한 냄새라고는 없었다. 그저 한없이 달고 강렬해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휴의 눈에 광채가 돌았다. 살의와 환희, 갈망과 독점욕이 뒤섞여 소름 돋게 윤이 났다. 이대로 작은 인간 계집을 들이마셔 버리고 싶었다. 그러라고 제게 보내진 존재다. 망설일 필요 따위 없었다.
“씨이, 빨아 먹지 말고 한 번에, 한 번에 좀 해치우시라고요!”
그때 명서가 머리통으로 힘껏 그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비로소 휴의 눈동자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는 손목을 감싸고 다시 털썩 바닥에 주저앉는 명서를 응시했다. 성깔을 부려 댄 것치고는 안색이 파리했다.
“아니면 아껴 뒀다 다음에 자시든가요. 꼭 식량이 아니래도 쓸모가 많거든요, 저. 손도 빠르고 눈치가 없는 편도 아닙니다.”
능청스럽게 말하고 웃는 명서의 낯이 파리했다. 제법 많은 피를 흘렸을 거다. 휴는 입술에 남은 온기를 삐딱하게 내려 보다 공중에 무언가를 써서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 말 증명할 기회를 주지. 표식을 남겼으니 영역 안에서 함부로 덤비는 것들은 없을 것이다.”
“우와아아아! 살려 주시는 겁니까? 진짜? 참말? 아니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고맙습니다! 보기와 달리 세상 둘도 없이 은혜롭고 자비로운 분이셨군요. 저요, 무엇을 시키셔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놀란 얼굴로 히죽거리다 비명까지 지르며 펄쩍 뛰어오르는 모습이 딱 ‘개’ 같았다. 휴는 부산스러운 명서에게서 멀어져 옷깃의 먼지를 탁탁 털어 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다는 건 말하지 않기로 했다.
먹다니, 인간을. 말도 안 된다. 물론 아주 잠깐 자신도 처음 느끼는 충동이 들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거나 확인할 것이 있어 영역 안에 들였고 무료를 조금 달랠 수도 있을 것 같아 흥미로웠다. 그러다 만약 질리고 성가셔진다면…….
휴는 입술 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날아오르며 섬섬히 고운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2장
분주하다. 정신 사납다. 시끄럽다. 느닷없이 웃는다. 감상을 끝낸 휴는 턱을 괸 채로 명서를 바라보았다.
숲에 두고 왔어야 해. 후회해도 늦었다. 제집인 양 자리 잡고 쓸고 닦고 부산을 떨고 있는 명서를 보노라니 심심치는 않았다. 기실 처소까지 발 들이게 할 작정은 아니었다. 하여 명서가 부르면 달려올 거리 운운할 때만 해도 콧방귀를 뀌었으나 훌쩍거리는 콧소리와 딱딱 부딪치는 이 소리가 몹시도 거슬렸다.
물에 빠지고 피를 빨리고, 저 보잘것없이 작고 약한 인간에게는 제법 치명적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일단 이 밤은 아량을 베풀자 했다.
허락이 떨어지자 조르르 달려와 해실거리는 꼴이 꼭 두어 달 된 강아지 딱 그 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꼬리가 축 처진 댕그랗고 커다란 눈도 그렇고 부스스하게 날리는 머리카락도 ‘개’ 맞았다.
“참, 뭐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분주하게 움직이던 명서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도통 이쪽에서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던지 명서가 죽 말을 이어 갔다.
“주인님? 가주님? 신님? 어둠님? 흐음, 아니면 스승님? 오오, 이거 괜찮네요.”
“처지를 똑바로 알아라. 넌 언제 죽게 될지 모를 내 소유물이고 난 네게 뭔가를 가르쳐 줄 마음 따위 없거늘.”
“압니다, 알아요. 그래도 부를 말이 있어야 대화가 쉽지 않겠습니까. 혹시 누군가에게 소개하더라도 절 비상식량이라고 하는 것보다 제자다, 그러시는 편이 격조 있어 보이고…….”
“하아.”
지금 고작 인간 따위가 신의 품위를 염려한단 말인가. 휴는 딱딱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상상하고 싶지는 않으나 저 인간의 말마따나 존재 자체를 설명해야 할 때가 올 수도 있었다.
연람을 떠올린 휴는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사신 가운데 하나이자 가장 연장자인 그는 여러모로 짜증 나고 성가셨다.
“그런데요.”
또 묻는다. 휴가 날카롭게 쏘아보자 잠시 움찔거리는가 싶던 명서가 또 반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