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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왜 아니 나가시고?”
“내 처소니라.”
“아니 그러니까 방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 길게 누운 휴가 성가신 듯 손을 휘저었다.
“설마 이곳이 구중궁궐이라도 된다 생각했던 것이냐. 잘 곳은 이뿐이니 싫다면 나가거라.”
비로소 상황을 납득한 듯 명서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는 명서가 나무 바닥 언저리에 자리를 잡자 입김으로 온 집 안의 등불을 껐다. 그러면서 툭 침금을 발로 차 던졌다. 불을 끄는 순간 공간을 열어 낮에 받은 제물 중에 대충 골라낸 거였다.
마침 머리통에 맞았는지 ‘어이구’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고맙습니다’를 뇌까린다. 덩치가 조그만 탓에 소리도 작은가, 아니면 기운이 없어 쓰러……. 벌떡 일어난 휴가 손가락을 튕기자 일순 집 안의 온 등불이 켜졌다.
“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명서를 향해 휴는 아까의 공간에서 집어낸 먹을거리를 잔뜩 쏟아 냈다. 명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그대로 늘어트리며 맑게 웃었다.
“우와, 이걸 다 저 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사양 않고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아니 드세요?”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저 계집의 웃는 낯이 싫다. 두려운 것, 추운 것, 불편한 것, 배고픈 것, 뭐 하나 제대로 불평 않는 주제에 속없이 잘도 웃어 대는 게 거슬렸다.
휴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명서가 더는 묻지 않고 그가 준 음식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달칵이며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휴는 신경질적으로 등불을 꺼트리고 억지 잠을 청했다.
* * *
휴가 말한 표식 어쩌고가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명서는 저만치서 저를 뚫어질듯 쳐다보는 무시무시한 형상의 이름 모를 것을 피해 앉아 육포 한 조각을 우물거렸다.
달이 그득한 뜰에 나오니 시꺼멓고 괴이한 것이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덩치가 크고 생김이 몹시 날카롭다는 것만 빼면 큰 개 같기도 했다. 다행히 그것은 손이 닿지도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결코 다가오지는 못했다.
명서는 손목에서 빛나는 선명한 잇자국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쨌거나 살아 있으니까.”
무턱대고 싱긋 웃었다. 그렇게 해 두면 일단 울지는 않게 된다. 이건 오랜 시간 쫓기고 뺏기고 협박당하며 생긴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이형으로 태어나 자랐어도 어린 시절의 명서는 또래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고서부터 포기와 체념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렸다.
곡식 한 줌 뿌려 멀건 풀죽을 쑤어 먹어도, 시도 때도 없이 거처를 옮겨야 할 때도, 어머니와 함께라면 아니 서럽고 아니 외로웠다. 그러나 혼자가 되어 도망치고 붙들리고 다시 도망치는 가운데 마음은 점차 바싹 말라 갔다.
기름진 얼굴의 부자에게 팔려 겁탈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고, 굶어 기절한 저를 거두는 척하다 팔다리를 자르려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난 일도 허다했다. 잡아다 물건처럼 전시해 두고 값을 흥정하는 노예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는 마음에 맺히는 것이 그저 슬픔이라 왜 사나 싶었다.
어머니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힘겹게 열어 남긴 유언이 아니었다면 몇백 번이고 삶을 놓았을 것이다.
‘살아 다오, 행복하게……. 내 아가.’
당신께서는 저를 낳고 한시도 편히 사시지 못하였으면서 네가 있어 지극히 행복했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러니 이 목숨 어찌 헛되이 할까. 명서는 노예상이 하루 한 번 철창 안으로 던져 주는 주먹밥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모래알 같은 것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더랬다.
그리고 결심하였다. 여전히 슬프고 억울하고 아프지만 그래도 웃겠다. 행복해지는 법은 모르지만 눈물 대신 웃기로, 마음에 고인 감정은 내뱉고 순간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방긋거리며 잘도 웃었다. 제물로 수 상단에 팔려 가면서도 이제 더 나쁠 일은 없다고 웃어 버렸다.
정말이지 더 나빠질 일도 없지. 명서는 입술을 늘인 채로 손목을 쓱 쓰다듬었다. 그리고 맛나 보이는 음식 몇 가지를 골라 저만치 가져다 놓았다. 이름 모를 것에게 저 말고 이것이나 실컷 먹으라는 뜻이었다. 음식을 준 스승님도 그래 주면 고맙겠고.
“다행이다. 그렇지요?”
명서의 눈길이 밤하늘로 향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이 진짜라면 어머니도 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시리라. 희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다부지게 움켜쥔 명서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러고는 인사라도 하듯 하늘 높이 손을 치켜들었다가 이내 어둠 속을 되짚어갔다. 등불 하나 없는데도 걸음이 단정했다. 오랜 시간 캄캄한 곳에 갇혀 지냈다 보니 어둠이 그리 불편치는 않아진 것이다.
“뭐든 쓸모가 있네, 있어.”
명서가 혼자 신나게 맞장구를 치고 방으로 들어섰다. 침상이 제 알던 것보다 배는 큰데 스승이란 남정네가 참말 길쭉하기도 하다. 게다가 생기기는 또 얼마나 잘생겼는지. 살다 살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수려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명서는 어둠을 방패 삼아 휴의 잠든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부른 배로 무릎 끌어안고 눈 호강을 하고 있으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저런 일은 많았지만 금일 밤은 꿈에도 눈이 훤할 것 같았다.
새 침금은 비단이라 손끝만 스쳐도 좌르륵 윤이 났다. 베개도 어찌나 보드랍고 폭신한지 구름 같았다. 그럼에도 명서는 꾀죄죄한 보따리를 풀어 둘둘 말린 천으로 만든 제 베개를 꺼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어 주신 옷으로 만든 것이었다. 낡아서 바스락거릴 지경이지만 그 하나면 마음이 평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서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휴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한쪽은 세상 편히 잠들고 또 다른 한쪽은 전에 없이 잠을 설치는 밤인 모양이다.
* * *
새벽빛이 촘촘할 무렵 명서는 폭신한 이불 사이로 손만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몸은 아직 노곤한데 어스름한 빛 때문인지 정신이 깨어 버렸다.
여전히 눈은 꼭 감은 명서가 이제부터 예서 살아야 한다고 되뇌었다. 딱히 비장할 건 없었다.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나아질 것 없지 않은가. 다만 낯설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는진다. 좌우지간 일단 스승님께 쓸모를 인정받아야 명줄만큼은 살 테지만.
명서는 이불 안에서 깜박깜박 눈을 떴다 감았다.
“으다다다.”
개미 소리만 하기는 해도 나름 필살의 기합을 담아 이불을 걷어차 날리고 일어났다. 그러다 후다닥 이불을 주워 들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일, 일어나셨어요?”
“아니 잤다.”
“아, 불면증.”
툭 하고 내뱉은 명서가 바로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소리 나게 쳤다. 공연히 아는 체를 한 모양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내가 서릿발 같은 눈으로 건너다보는데 머리칼이 다 쭈뼛거릴 지경이었다.
“너처럼 무디질 못할 뿐.”
“그러시구나.”
명서는 잠자코 대답하며 들키지 않게 입을 삐쭉거렸다. 그러게 누가 한방에서 자자고 했나. 과년한 처자의 혼삿길이 걱정이지 손짓 하나면 사람 애간장 녹이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 양반이 무슨.
그사이 미끈한 어깨의 절반을 드러낸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휴가 빤히 보자 명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이부자리는 곧 정리를 마칠 참이고…… 그렇지! 아침 준비를 할까요? 아니면 마당 쓸기? 뭐 시키실 일이 있어 그리 보시는 거라면 콕 집어 말씀을 좀…….”
“쓸데없는 짓 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 두도록 해라.”
휴가 매끈한 종이 한 장을 손등으로 쳐 냈다.
“우왓!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환한 웃음이었다. 종이를 갈무리한 명서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창을 열어 환기를 하고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그사이 휴가 사라지자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렀다.
“이래저래 해도 상냥한 분이시구나.”
더불어 덜컥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아름답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그래 봤자 그림의 떡이지만. 명서는 제 설렘이 우스운 듯 키득거렸다. 평탄치 않은 삶을 살면서 욕심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충 방 소제를 하고 나서던 명서가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마저 낮췄다. 크고 너른 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 누운 휴를 발견한 것이다. 요사스럽게 예쁜 것은 고사하고 정말 밤새 잠을 설쳤구나 싶어 미안해졌다.
명서는 살금살금 방으로 돌아가 얇은 이불 하나를 챙겨 나무로 갔다. 그러고는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휴의 얼굴에 비치는 해를 가려 주었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햇빛은 부드럽고도 따사로웠다. 명서는 푸르게 흩날리는 잎사귀를 조심스럽게 쫓았다.
굽이친 빛과 녹음, 드문드문한 빛 가운데서 휴는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명서는 감탄 또 감탄하며 입맛을 다셨다. 배 속이 찌르르하면서 속이 헛헛해졌다.
밥때가 되어서인가. 괜히 민망해진 명서는 시선을 돌리고 가림막 한 팔을 조금 더 높이 올렸다.
보드라운 천이 바람에 부풀어 날개처럼 휘날렸다. 명서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열심히 파닥이면 그대로 날아오를 것도 같았던 것이다.
“인간은 날지 못해.”
그때 현실을 일깨우는 낮고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명서는 팔을 내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휴를 보았다.
“압니다. 그러시는 스승님은요?”
“못 할 것이 있겠느냐, 이 내가. 왜, 부러우냐?”
“예. 솔직히 말하자면 좀 재수가 없다고 할까요. 생긴 것도 현혹될 만큼 미려해, 못 하는 것 없어, 거기다 세상 모두가 떠받들어.”
“쯧쯧 버릇없기는. 그래도 대책 없이 솔직하다는 점만은 인정하마.”
휴가 까만 눈만 굴려 명서를 응시했다. 비아냥거리고는 있지만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명서는 그쯤에서 대거리를 멈추기로 했다. 딱 한마디만 더 하고.
“질투가 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스승님이 마냥 부럽지는 않습니다.”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이는 휴를 향해 명서가 생긋 웃어 보였다.
“그 연유는 차차 말씀드릴 것입니다. 뭔가 제게 궁금한 것이 있으셔야 살려도 주고 가르쳐도 주실 것 아닙니까.”
머리 굴리는 티가 날 바에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게 낫지 싶었다. 명서가 그리 말하자 휴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일어났다.
“너는…….”
그때서야 가림막을 거둔 명서가 푸른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딴청을 피우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하늘빛이 고왔다.
“여기처럼 예쁘고 맑은 하늘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 볕 아래 도망치지 않고 선 것은 여섯 해 만에 처음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스승이고 다른 이유가 있어 살려 둔 것마저도 짐작은 하는데, 이런 풍경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에만은 순수하게 감사했다.
명서는 벌써 저만치 가 버린 휴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와 달리 다 가진 존재였다. 그럼에도 한쪽 어깨에 위태롭게 걸린 옷자락이 눈에 밟히고 요사스럽게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여 가슴이 따끔하였다.
“스승님! 같이 가요.”
명서는 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휴를 불렀다. 잠시 돌아만 보았을 뿐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사내, 명서는 가림막으로 썼던 얇은 이불을 길게 늘어뜨려 나풀거리며 달려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뒤로 해가 반짝반짝 굽이치고 있었다.
“왜 아니 나가시고?”
“내 처소니라.”
“아니 그러니까 방으로 돌아가셔서 편히…….”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침상에 길게 누운 휴가 성가신 듯 손을 휘저었다.
“설마 이곳이 구중궁궐이라도 된다 생각했던 것이냐. 잘 곳은 이뿐이니 싫다면 나가거라.”
비로소 상황을 납득한 듯 명서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휴는 명서가 나무 바닥 언저리에 자리를 잡자 입김으로 온 집 안의 등불을 껐다. 그러면서 툭 침금을 발로 차 던졌다. 불을 끄는 순간 공간을 열어 낮에 받은 제물 중에 대충 골라낸 거였다.
마침 머리통에 맞았는지 ‘어이구’ 하는 작은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고맙습니다’를 뇌까린다. 덩치가 조그만 탓에 소리도 작은가, 아니면 기운이 없어 쓰러……. 벌떡 일어난 휴가 손가락을 튕기자 일순 집 안의 온 등불이 켜졌다.
“어?”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명서를 향해 휴는 아까의 공간에서 집어낸 먹을거리를 잔뜩 쏟아 냈다. 명서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그대로 늘어트리며 맑게 웃었다.
“우와, 이걸 다 저 주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사양 않고 잘 먹겠습니다. 그런데 스승님은 아니 드세요?”
처음부터 느꼈던 거지만 저 계집의 웃는 낯이 싫다. 두려운 것, 추운 것, 불편한 것, 배고픈 것, 뭐 하나 제대로 불평 않는 주제에 속없이 잘도 웃어 대는 게 거슬렸다.
휴는 불쾌함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찌푸렸다. 명서가 더는 묻지 않고 그가 준 음식을 주섬주섬 챙겨 들었다. 달칵이며 열린 문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다. 휴는 신경질적으로 등불을 꺼트리고 억지 잠을 청했다.
* * *
휴가 말한 표식 어쩌고가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명서는 저만치서 저를 뚫어질듯 쳐다보는 무시무시한 형상의 이름 모를 것을 피해 앉아 육포 한 조각을 우물거렸다.
달이 그득한 뜰에 나오니 시꺼멓고 괴이한 것이 주변을 빙빙 맴돌았다. 덩치가 크고 생김이 몹시 날카롭다는 것만 빼면 큰 개 같기도 했다. 다행히 그것은 손이 닿지도 않을 만큼 먼 거리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결코 다가오지는 못했다.
명서는 손목에서 빛나는 선명한 잇자국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쨌거나 살아 있으니까.”
무턱대고 싱긋 웃었다. 그렇게 해 두면 일단 울지는 않게 된다. 이건 오랜 시간 쫓기고 뺏기고 협박당하며 생긴 버릇 가운데 하나였다.
이형으로 태어나 자랐어도 어린 시절의 명서는 또래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잃고서부터 포기와 체념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버렸다.
곡식 한 줌 뿌려 멀건 풀죽을 쑤어 먹어도, 시도 때도 없이 거처를 옮겨야 할 때도, 어머니와 함께라면 아니 서럽고 아니 외로웠다. 그러나 혼자가 되어 도망치고 붙들리고 다시 도망치는 가운데 마음은 점차 바싹 말라 갔다.
기름진 얼굴의 부자에게 팔려 겁탈을 당할 뻔한 적도 있었고, 굶어 기절한 저를 거두는 척하다 팔다리를 자르려는 사람들을 피해 달아난 일도 허다했다. 잡아다 물건처럼 전시해 두고 값을 흥정하는 노예상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는 마음에 맺히는 것이 그저 슬픔이라 왜 사나 싶었다.
어머니가 파랗게 질린 입술을 힘겹게 열어 남긴 유언이 아니었다면 몇백 번이고 삶을 놓았을 것이다.
‘살아 다오, 행복하게……. 내 아가.’
당신께서는 저를 낳고 한시도 편히 사시지 못하였으면서 네가 있어 지극히 행복했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그러니 이 목숨 어찌 헛되이 할까. 명서는 노예상이 하루 한 번 철창 안으로 던져 주는 주먹밥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모래알 같은 것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더랬다.
그리고 결심하였다. 여전히 슬프고 억울하고 아프지만 그래도 웃겠다. 행복해지는 법은 모르지만 눈물 대신 웃기로, 마음에 고인 감정은 내뱉고 순간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방긋거리며 잘도 웃었다. 제물로 수 상단에 팔려 가면서도 이제 더 나쁠 일은 없다고 웃어 버렸다.
정말이지 더 나빠질 일도 없지. 명서는 입술을 늘인 채로 손목을 쓱 쓰다듬었다. 그리고 맛나 보이는 음식 몇 가지를 골라 저만치 가져다 놓았다. 이름 모를 것에게 저 말고 이것이나 실컷 먹으라는 뜻이었다. 음식을 준 스승님도 그래 주면 고맙겠고.
“다행이다. 그렇지요?”
명서의 눈길이 밤하늘로 향했다.
사람이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이 진짜라면 어머니도 저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계시리라. 희게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다부지게 움켜쥔 명서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났다. 그러고는 인사라도 하듯 하늘 높이 손을 치켜들었다가 이내 어둠 속을 되짚어갔다. 등불 하나 없는데도 걸음이 단정했다. 오랜 시간 캄캄한 곳에 갇혀 지냈다 보니 어둠이 그리 불편치는 않아진 것이다.
“뭐든 쓸모가 있네, 있어.”
명서가 혼자 신나게 맞장구를 치고 방으로 들어섰다. 침상이 제 알던 것보다 배는 큰데 스승이란 남정네가 참말 길쭉하기도 하다. 게다가 생기기는 또 얼마나 잘생겼는지. 살다 살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수려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명서는 어둠을 방패 삼아 휴의 잠든 얼굴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부른 배로 무릎 끌어안고 눈 호강을 하고 있으니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런저런 일은 많았지만 금일 밤은 꿈에도 눈이 훤할 것 같았다.
새 침금은 비단이라 손끝만 스쳐도 좌르륵 윤이 났다. 베개도 어찌나 보드랍고 폭신한지 구름 같았다. 그럼에도 명서는 꾀죄죄한 보따리를 풀어 둘둘 말린 천으로 만든 제 베개를 꺼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지어 주신 옷으로 만든 것이었다. 낡아서 바스락거릴 지경이지만 그 하나면 마음이 평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서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었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휴가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렸다. 한쪽은 세상 편히 잠들고 또 다른 한쪽은 전에 없이 잠을 설치는 밤인 모양이다.
* * *
새벽빛이 촘촘할 무렵 명서는 폭신한 이불 사이로 손만 쭉 뻗어 기지개를 폈다. 몸은 아직 노곤한데 어스름한 빛 때문인지 정신이 깨어 버렸다.
여전히 눈은 꼭 감은 명서가 이제부터 예서 살아야 한다고 되뇌었다. 딱히 비장할 건 없었다. 고민하고 걱정한다고 나아질 것 없지 않은가. 다만 낯설음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살아는진다. 좌우지간 일단 스승님께 쓸모를 인정받아야 명줄만큼은 살 테지만.
명서는 이불 안에서 깜박깜박 눈을 떴다 감았다.
“으다다다.”
개미 소리만 하기는 해도 나름 필살의 기합을 담아 이불을 걷어차 날리고 일어났다. 그러다 후다닥 이불을 주워 들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일, 일어나셨어요?”
“아니 잤다.”
“아, 불면증.”
툭 하고 내뱉은 명서가 바로 제 입술을 손바닥으로 소리 나게 쳤다. 공연히 아는 체를 한 모양이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사내가 서릿발 같은 눈으로 건너다보는데 머리칼이 다 쭈뼛거릴 지경이었다.
“너처럼 무디질 못할 뿐.”
“그러시구나.”
명서는 잠자코 대답하며 들키지 않게 입을 삐쭉거렸다. 그러게 누가 한방에서 자자고 했나. 과년한 처자의 혼삿길이 걱정이지 손짓 하나면 사람 애간장 녹이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 양반이 무슨.
그사이 미끈한 어깨의 절반을 드러낸 그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휴가 빤히 보자 명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이부자리는 곧 정리를 마칠 참이고…… 그렇지! 아침 준비를 할까요? 아니면 마당 쓸기? 뭐 시키실 일이 있어 그리 보시는 거라면 콕 집어 말씀을 좀…….”
“쓸데없는 짓 말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써 두도록 해라.”
휴가 매끈한 종이 한 장을 손등으로 쳐 냈다.
“우왓! 감사합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달리 환한 웃음이었다. 종이를 갈무리한 명서는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이고 날다람쥐처럼 재빠르게 창을 열어 환기를 하고 이부자리를 정돈했다. 그사이 휴가 사라지자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렀다.
“이래저래 해도 상냥한 분이시구나.”
더불어 덜컥 심장이 내려앉을 만큼 아름답기도 하고 말이다. 물론 그래 봤자 그림의 떡이지만. 명서는 제 설렘이 우스운 듯 키득거렸다. 평탄치 않은 삶을 살면서 욕심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대충 방 소제를 하고 나서던 명서가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마저 낮췄다. 크고 너른 나무 그늘 아래 비스듬히 누운 휴를 발견한 것이다. 요사스럽게 예쁜 것은 고사하고 정말 밤새 잠을 설쳤구나 싶어 미안해졌다.
명서는 살금살금 방으로 돌아가 얇은 이불 하나를 챙겨 나무로 갔다. 그러고는 뒤꿈치를 들고 조용히 휴의 얼굴에 비치는 해를 가려 주었다. 목덜미를 간질이는 햇빛은 부드럽고도 따사로웠다. 명서는 푸르게 흩날리는 잎사귀를 조심스럽게 쫓았다.
굽이친 빛과 녹음, 드문드문한 빛 가운데서 휴는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명서는 감탄 또 감탄하며 입맛을 다셨다. 배 속이 찌르르하면서 속이 헛헛해졌다.
밥때가 되어서인가. 괜히 민망해진 명서는 시선을 돌리고 가림막 한 팔을 조금 더 높이 올렸다.
보드라운 천이 바람에 부풀어 날개처럼 휘날렸다. 명서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열심히 파닥이면 그대로 날아오를 것도 같았던 것이다.
“인간은 날지 못해.”
그때 현실을 일깨우는 낮고 딱딱한 음성이 들려왔다. 명서는 팔을 내리지 않고 고개를 돌려 휴를 보았다.
“압니다. 그러시는 스승님은요?”
“못 할 것이 있겠느냐, 이 내가. 왜, 부러우냐?”
“예. 솔직히 말하자면 좀 재수가 없다고 할까요. 생긴 것도 현혹될 만큼 미려해, 못 하는 것 없어, 거기다 세상 모두가 떠받들어.”
“쯧쯧 버릇없기는. 그래도 대책 없이 솔직하다는 점만은 인정하마.”
휴가 까만 눈만 굴려 명서를 응시했다. 비아냥거리고는 있지만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명서는 그쯤에서 대거리를 멈추기로 했다. 딱 한마디만 더 하고.
“질투가 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스승님이 마냥 부럽지는 않습니다.”
더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까딱이는 휴를 향해 명서가 생긋 웃어 보였다.
“그 연유는 차차 말씀드릴 것입니다. 뭔가 제게 궁금한 것이 있으셔야 살려도 주고 가르쳐도 주실 것 아닙니까.”
머리 굴리는 티가 날 바에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게 낫지 싶었다. 명서가 그리 말하자 휴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일어났다.
“너는…….”
그때서야 가림막을 거둔 명서가 푸른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딴청을 피우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깜짝 놀랄 만큼 하늘빛이 고왔다.
“여기처럼 예쁘고 맑은 하늘은 본 적이 없습니다.”
아침 볕 아래 도망치지 않고 선 것은 여섯 해 만에 처음이었다. 그걸 알 리 없는 스승이고 다른 이유가 있어 살려 둔 것마저도 짐작은 하는데, 이런 풍경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에만은 순수하게 감사했다.
명서는 벌써 저만치 가 버린 휴의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저와 달리 다 가진 존재였다. 그럼에도 한쪽 어깨에 위태롭게 걸린 옷자락이 눈에 밟히고 요사스럽게 휘날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딘가 모르게 쓸쓸하여 가슴이 따끔하였다.
“스승님! 같이 가요.”
명서는 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휴를 불렀다. 잠시 돌아만 보았을 뿐 멈추지 않고 걸어가는 사내, 명서는 가림막으로 썼던 얇은 이불을 길게 늘어뜨려 나풀거리며 달려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뒤로 해가 반짝반짝 굽이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