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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 *
불의 속성을 가진 연람은 사신들 가운데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것을 가장 즐기는 사내였다. 여자들이 쓰는 장신구도 마다치 않았고 색감이 화려하고 자수가 독특한 옷만 걸쳤다. 말투는 상냥하고 나긋했으며 손짓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고혹미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질만은 딱 불, 그대로라 한번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면 걷잡을 수 없어 주변 모든 것을 활활 태우다 못해 재로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다른 신들은 그를 ‘미치광이 공주’라고 불렀다.
그 미치광이 공주와 가장 반대인 것이 휴였다. 본래 메마르고 차가운 데다 직설적인 말도 서슴지 않아 매번 부딪치곤 했다. 그런데도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연람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이 휴의 영역이었다.
연람은 여느 때처럼 흉측하고 괴이한 문양으로 검게 늘어진 휴의 경계를 노려보았다. 아무튼지 무신경하고 미심(迷心)이라고는 없는 녀석. 혀를 찬 연람이 방문을 알리는 종을 쳤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영롱한 소리가 울리고 순식간에 검고 사악한 기운이 응집해 그를 감쌌다.
“짜증스럽게 굴지 말고 문 열어. 이 칙칙한 곳에 오는 이가 나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문으로 안내하는 수증기를 야멸차게 떨쳐 낸 연람이 결 고운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쓸어 넘겼다. 귀에 건 오색찬란한 귀걸이가 차랑차랑 소리를 내었다. 그에 기분이 풀린 연람이 허리에 찬 술병을 은근히 데웠다. 휴를 보자마자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다.
“뭘 하고…….”
있느라 잔도 챙겨 놓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연람은 입술을 앙다물고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눈을 깜박거렸다. 허여멀겋게 생긴 인간이 오동나무 쟁반을 든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 안녕하세요. 명서라고 합니다. 금번 제물식 때부터 이곳에서 스승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연람은 이형이 분명한 명서와 맞은편에 태연히 앉아 술병을 빼앗아 가는 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묘한 눈빛으로 돌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네가……. 헌데 이 강파른 녀석이 무엇을 가르쳐 준다던?”
“시끄럽다.”
“정해진 것은 없지만 뭐라도 가르쳐 주시면 고맙게 배우려고요.”
살벌하게 대꾸하는 휴와 달리 명서는 생긋 웃으며 두 사람 앞에 잔을 놓았다. 휴가 매섭게 그런 명서를 바라보았고 연람은 흥미가 동해 턱을 괴고 물었다.
“인간, 이름이 뭐라고?”
“명서요.”
“똘똘하네.”
휴와 자신을 앞두고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일단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연람은 곱게 기른 손톱으로 잔의 주둥이를 훑어 내렸다. 명서는 주섬주섬 나머지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딱히 써먹을 데는 없었지만.”
“호오. 말 재미도 있고.”
“과찬이십니다.”
“몇 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가 끼어들었다. 손끝으로 행동의 주어를 딱 구분 지어 짚어 냈다.
“넌 닥치고 넌 가 봐.”
그 말에 쟁반을 챙겨 든 명서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원, 하고 다니는 꼴만큼 성질도 흉포해서는. 그래, 명서야 앞으로 우리 자주 보자꾸나.”
손까지 흔들어 명서를 배웅한 연람은 저를 보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연람은 예쁘게 볼우물을 지었다.
“파장이 맞는 게로구나, 명서는 신과. 알겠지만 이형 중에 그런 존재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야. 아무튼 그래서 잡아먹으려고 거뒀구나? 신과 파장이 같은 이형을 먹으면 균열이 막아진다는 시답잖은 말, 네 녀석이 가장 비웃었으면서.”
“어찌하든 알 바 아닐 텐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건조한 휴의 대답에 연람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단칼에 잘라 말 붙일 여지도 주지 않을 줄은 알았다만 예서 포기하면 연람이 아니었다.
“그럼 그냥 나 줘. 진지하게 한번 먹어 볼까 했었거든. 요즘 들어 피부도 거칠고 목소리도 산뜻하지 못한 것이……. 난 상냥해서 저 귀여운 아이를 아프게는 안 죽일 거야.”
“내 제자라 하였다.”
“그걸 믿으라?”
연람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식신마저 곁에 두질 못하는 저 성질머리에 제자라니. 그의 물음에 휴가 느긋하게 턱을 까딱거렸다. 그러다 돌연 딱딱해진 눈으로 경고하듯 읊조렸다.
“연람, 함부로 굴지 마. 네놈이 아무리 탐내도 그 아이는 내 것이야.”
그 말에 처음으로 연람의 눈동자가 불쾌감을 담아 이지러졌다. 연람은 매끄럽고 촉촉한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그렇지, 공물이었으니까. 마침 네 차례였고.”
적당히 둥글려 수긍하는 척했으나 속에 담긴 가시는 감추지 않았다.
연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휴는 술만 연거푸 비워 내고 있었다. 약이 오른 연람이 탁자를 태워 버렸지만 휴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잔과 접시를 들어 올렸다. 명서가 안주 삼아 가져온 열매가 접시 위에 덩그마니 남아 있었다. 작고 새빨간 버찌 몇 알이었다. 급한 대로 뒷마당에서 주웠던 모양이다.
연람은 꽃대를 꺾어 작은 탁자를 만들고 휴에게서 잔과 접시를 가로채 올렸다. 그가 길게 기른 손톱으로 버찌의 부드러운 속살을 짓이겼다.
“인간들 말이야. 동족을 팔아 무사 안녕을 빌다니 참으로 저속하고 뻔뻔해. 그것도 평소에는 같은 사람으로 취급도 안 하던 이형을. 불쌍한 명서, 그 험한 곳을 벗어나 끌려온 것이 이곳이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박복하기도 하지. 쯧쯧. 만에 하나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인간이 어둠의 신을 택하겠어. 가엾네, 가엾어.”
은근한 목소리로 부추기고는 머리 손질하는 체하던 연람이 일자로 굳게 다물린 휴의 입술을 보았다. 얄밉도록 예쁘고 강인한 선이 언제나처럼 부럽고 또 밉고 그랬다. 그가 제 말에 신경이나 쓸까마는 실컷 비꼬고 나니 속은 후련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휴가 흔들려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것 같다. 항상 불안해하며 확인하고 싶어 하는 자신과 달리 그는 도통 들노는 법이 없었다. 그런 휴의 생이 요동질 치고 혼란스러워 발버둥 치고 괴로워한다면 그만한 구경거리가 또 있을까.
연람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작은 불꽃을 틔워 사방에 둥둥 날려 보냈다.
* * *
휴는 설거지통에 허여멀건 손을 담그고 이상한 가락을 흥얼거리는 명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고작 웅크리고 앉아 구정물에 허드렛일하면서 목소리며 표정이 죄다 참 해맑았다.
겁이라. 둔감한 편은 아닌데 저 아이가 제게 그런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확신했다. 그게 흥미로워 첫 시선을 던졌었고.
그러니까 연람의 말 따위 헛소리였다는 걸 안다. 아는데 마음 한구석이 모가 난 듯 불편했다. 보기보다 요령 좋고 어리석지 않은 계집이 별 저항도 없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 이유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왜?”
그리만 물었는데 명서가 살짝 이쪽을 보다 말고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야무지게 답했다.
“귀찮아도 지금 해 둬야 내일이 편하지요. 도와주실 참이세요? 그러면 환영이고요.”
대뜸 자리를 내주며 웃는 녀석 덕분에 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곁에 섰다. 막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채였지만 말이다. 명서는 그런 휴를 보고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말갛게 웃으며 물었다.
“끼니때마다 먹어야 하고 치워야 하니 종종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일 꽤 즐거운데…… 신은 어떤가요? 부족한 것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행복한가요?”
가벼이 던진 물음을 듣고 휴의 표정이 삭막하게 굳었다. 쉬이 대답하지 못함으로 답을 대신했다. 명서가 재빠르게 손에 물기를 털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들떠 그만……. 주제넘었다면 죄송…….”
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서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모졌을 삶에도 때 하나 남지 않은 말간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뱃속 깊이 뭔가가 우그르르 몰려들어 잔인하게 뒤틀렸다.
“말 같지도 않게 스승과 제자라 하였느냐. 그래, 받아들이마.”
“예?”
뭔가 엄청난 꾸중을 예상하였던지 명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휴는 언제나처럼 제게서 돋아나 서늘하게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것이 명서의 발목 주변을 어지러이 노닐었다. 흠칫거리던 계집이 가만가만 그림자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번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빙그레 웃어 보였다.
휴가 입술을 뒤틀었다. 응당 절망하고 망가져야 할 것이 마냥 싱그럽고 씩씩했다. 그건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이라 흥미로웠지만 더불어 짜증스러웠다. 고작 이따위 존재가 균열을 막아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연람, 그리고 제 안의 숨은 감정이 가소로웠다.
지금껏 어찌 지탱해 살았는지 모르지만 어둠과 파괴의 신인 제 곁에서 더는 그리 살진 못할 것이다. 다른 모든 산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 결국 뼈저리게 깨우치게 될 것이다. 저 작은 인간도 또 저도 모다 부질없는 조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계집이 죽음을 애원하게 된다면…… 순순히 목숨 거둬 줄 아량은 베풀어야겠지. 휴가 새빨간 입술을 당겨 미소를 지었다.
경계 안의 오랜 공기가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3장
집을 짓기로 했다. 스승인 휴에게 부탁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제 일이고 제 살 집이라 구상도 재료를 모으는 것도 서툰 도끼질도 전부 스스로 했다.
명서는 까이고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도 기분만은 좋아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휴가 느닷없이 제자로 인정했을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좋기는 한데 뭔가 께름칙한 기분도 들었다. 웃고 계셔도 눈빛이 너무 살벌해 마냥 기뻐해도 괜찮을까 싶었다.
뭐, 우선은 살아갈 날을 번 셈이니 좋은 일이라 생각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자연 잠자리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몇 달, 몇 년, 운이 좋으면 평생 저도 그렇지만 스승님께 불편을 드릴 수는 없었다.
집을 짓고 나면 밭도 좀 일궈 볼까 했다. 공물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스승님께 받아먹는 것도 염치가 없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도 새로 몇 벌 지을까 했으나 바느질 솜씨가 영 젬병이라 아까운 천만 버리지 싶었다. 결국 보따리에서 낡은 옷 한 벌 꺼내 단을 내리고 이어 붙여 일할 때 입는 의복을 마련했다.
명서는 색 바랜 소매를 쓱 걷어붙이고 다시 도끼질을 시작했다. 말씀은 제자로 받아 주시겠다고 해도 아직 뭔가를 요구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으니 마음 한편이 내내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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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속성을 가진 연람은 사신들 가운데 외모를 가꾸고 치장하는 것을 가장 즐기는 사내였다. 여자들이 쓰는 장신구도 마다치 않았고 색감이 화려하고 자수가 독특한 옷만 걸쳤다. 말투는 상냥하고 나긋했으며 손짓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고혹미의 절정이었다.
그러나 타고난 성질만은 딱 불, 그대로라 한번 화가 치밀어 오르게 되면 걷잡을 수 없어 주변 모든 것을 활활 태우다 못해 재로 만들어 버렸다. 때문에 다른 신들은 그를 ‘미치광이 공주’라고 불렀다.
그 미치광이 공주와 가장 반대인 것이 휴였다. 본래 메마르고 차가운 데다 직설적인 말도 서슴지 않아 매번 부딪치곤 했다. 그런데도 돌아다니기 좋아하는 연람이 가장 많이 들르는 곳이 휴의 영역이었다.
연람은 여느 때처럼 흉측하고 괴이한 문양으로 검게 늘어진 휴의 경계를 노려보았다. 아무튼지 무신경하고 미심(迷心)이라고는 없는 녀석. 혀를 찬 연람이 방문을 알리는 종을 쳤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영롱한 소리가 울리고 순식간에 검고 사악한 기운이 응집해 그를 감쌌다.
“짜증스럽게 굴지 말고 문 열어. 이 칙칙한 곳에 오는 이가 나 말고 또 누가 있다고.”
문으로 안내하는 수증기를 야멸차게 떨쳐 낸 연람이 결 고운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쓸어 넘겼다. 귀에 건 오색찬란한 귀걸이가 차랑차랑 소리를 내었다. 그에 기분이 풀린 연람이 허리에 찬 술병을 은근히 데웠다. 휴를 보자마자 술이나 마실 생각이었다.
“뭘 하고…….”
있느라 잔도 챙겨 놓지 않았느냐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연람은 입술을 앙다물고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눈을 깜박거렸다. 허여멀겋게 생긴 인간이 오동나무 쟁반을 든 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오…… 안녕하세요. 명서라고 합니다. 금번 제물식 때부터 이곳에서 스승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연람은 이형이 분명한 명서와 맞은편에 태연히 앉아 술병을 빼앗아 가는 휴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묘한 눈빛으로 돌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래. 네가……. 헌데 이 강파른 녀석이 무엇을 가르쳐 준다던?”
“시끄럽다.”
“정해진 것은 없지만 뭐라도 가르쳐 주시면 고맙게 배우려고요.”
살벌하게 대꾸하는 휴와 달리 명서는 생긋 웃으며 두 사람 앞에 잔을 놓았다. 휴가 매섭게 그런 명서를 바라보았고 연람은 흥미가 동해 턱을 괴고 물었다.
“인간, 이름이 뭐라고?”
“명서요.”
“똘똘하네.”
휴와 자신을 앞두고 조금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일단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연람은 곱게 기른 손톱으로 잔의 주둥이를 훑어 내렸다. 명서는 주섬주섬 나머지 그릇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종종 들었습니다. 딱히 써먹을 데는 없었지만.”
“호오. 말 재미도 있고.”
“과찬이십니다.”
“몇 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휴가 끼어들었다. 손끝으로 행동의 주어를 딱 구분 지어 짚어 냈다.
“넌 닥치고 넌 가 봐.”
그 말에 쟁반을 챙겨 든 명서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그럼, 이만.”
“원, 하고 다니는 꼴만큼 성질도 흉포해서는. 그래, 명서야 앞으로 우리 자주 보자꾸나.”
손까지 흔들어 명서를 배웅한 연람은 저를 보는 까만 눈동자를 마주했다. 연람은 예쁘게 볼우물을 지었다.
“파장이 맞는 게로구나, 명서는 신과. 알겠지만 이형 중에 그런 존재는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야. 아무튼 그래서 잡아먹으려고 거뒀구나? 신과 파장이 같은 이형을 먹으면 균열이 막아진다는 시답잖은 말, 네 녀석이 가장 비웃었으면서.”
“어찌하든 알 바 아닐 텐데.”
무시무시할 정도로 건조한 휴의 대답에 연람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단칼에 잘라 말 붙일 여지도 주지 않을 줄은 알았다만 예서 포기하면 연람이 아니었다.
“그럼 그냥 나 줘. 진지하게 한번 먹어 볼까 했었거든. 요즘 들어 피부도 거칠고 목소리도 산뜻하지 못한 것이……. 난 상냥해서 저 귀여운 아이를 아프게는 안 죽일 거야.”
“내 제자라 하였다.”
“그걸 믿으라?”
연람이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식신마저 곁에 두질 못하는 저 성질머리에 제자라니. 그의 물음에 휴가 느긋하게 턱을 까딱거렸다. 그러다 돌연 딱딱해진 눈으로 경고하듯 읊조렸다.
“연람, 함부로 굴지 마. 네놈이 아무리 탐내도 그 아이는 내 것이야.”
그 말에 처음으로 연람의 눈동자가 불쾌감을 담아 이지러졌다. 연람은 매끄럽고 촉촉한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그렇지, 공물이었으니까. 마침 네 차례였고.”
적당히 둥글려 수긍하는 척했으나 속에 담긴 가시는 감추지 않았다.
연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휴는 술만 연거푸 비워 내고 있었다. 약이 오른 연람이 탁자를 태워 버렸지만 휴가 눈 하나 깜짝 않고 잔과 접시를 들어 올렸다. 명서가 안주 삼아 가져온 열매가 접시 위에 덩그마니 남아 있었다. 작고 새빨간 버찌 몇 알이었다. 급한 대로 뒷마당에서 주웠던 모양이다.
연람은 꽃대를 꺾어 작은 탁자를 만들고 휴에게서 잔과 접시를 가로채 올렸다. 그가 길게 기른 손톱으로 버찌의 부드러운 속살을 짓이겼다.
“인간들 말이야. 동족을 팔아 무사 안녕을 빌다니 참으로 저속하고 뻔뻔해. 그것도 평소에는 같은 사람으로 취급도 안 하던 이형을. 불쌍한 명서, 그 험한 곳을 벗어나 끌려온 것이 이곳이라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박복하기도 하지. 쯧쯧. 만에 하나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인간이 어둠의 신을 택하겠어. 가엾네, 가엾어.”
은근한 목소리로 부추기고는 머리 손질하는 체하던 연람이 일자로 굳게 다물린 휴의 입술을 보았다. 얄밉도록 예쁘고 강인한 선이 언제나처럼 부럽고 또 밉고 그랬다. 그가 제 말에 신경이나 쓸까마는 실컷 비꼬고 나니 속은 후련했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 휴가 흔들려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것 같다. 항상 불안해하며 확인하고 싶어 하는 자신과 달리 그는 도통 들노는 법이 없었다. 그런 휴의 생이 요동질 치고 혼란스러워 발버둥 치고 괴로워한다면 그만한 구경거리가 또 있을까.
연람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작은 불꽃을 틔워 사방에 둥둥 날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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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는 설거지통에 허여멀건 손을 담그고 이상한 가락을 흥얼거리는 명서를 물끄러미 보았다. 고작 웅크리고 앉아 구정물에 허드렛일하면서 목소리며 표정이 죄다 참 해맑았다.
겁이라. 둔감한 편은 아닌데 저 아이가 제게 그런 감정을 품지는 않았다 확신했다. 그게 흥미로워 첫 시선을 던졌었고.
그러니까 연람의 말 따위 헛소리였다는 걸 안다. 아는데 마음 한구석이 모가 난 듯 불편했다. 보기보다 요령 좋고 어리석지 않은 계집이 별 저항도 없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인 이유가 불현듯 궁금해졌다.
“왜?”
그리만 물었는데 명서가 살짝 이쪽을 보다 말고 생긋 웃었다. 그러고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며 야무지게 답했다.
“귀찮아도 지금 해 둬야 내일이 편하지요. 도와주실 참이세요? 그러면 환영이고요.”
대뜸 자리를 내주며 웃는 녀석 덕분에 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곁에 섰다. 막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채였지만 말이다. 명서는 그런 휴를 보고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말갛게 웃으며 물었다.
“끼니때마다 먹어야 하고 치워야 하니 종종 귀찮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이런 일 꽤 즐거운데…… 신은 어떤가요? 부족한 것 없는 삶은 그 자체로 완성되어 행복한가요?”
가벼이 던진 물음을 듣고 휴의 표정이 삭막하게 굳었다. 쉬이 대답하지 못함으로 답을 대신했다. 명서가 재빠르게 손에 물기를 털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제가 너무 들떠 그만……. 주제넘었다면 죄송…….”
휴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명서의 턱을 거칠게 들어 올렸다. 모졌을 삶에도 때 하나 남지 않은 말간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뱃속 깊이 뭔가가 우그르르 몰려들어 잔인하게 뒤틀렸다.
“말 같지도 않게 스승과 제자라 하였느냐. 그래, 받아들이마.”
“예?”
뭔가 엄청난 꾸중을 예상하였던지 명서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휴는 언제나처럼 제게서 돋아나 서늘하게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그것이 명서의 발목 주변을 어지러이 노닐었다. 흠칫거리던 계집이 가만가만 그림자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이번에도 겁을 먹기는커녕 빙그레 웃어 보였다.
휴가 입술을 뒤틀었다. 응당 절망하고 망가져야 할 것이 마냥 싱그럽고 씩씩했다. 그건 제가 가지지 못한 것이라 흥미로웠지만 더불어 짜증스러웠다. 고작 이따위 존재가 균열을 막아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연람, 그리고 제 안의 숨은 감정이 가소로웠다.
지금껏 어찌 지탱해 살았는지 모르지만 어둠과 파괴의 신인 제 곁에서 더는 그리 살진 못할 것이다. 다른 모든 산 것과 마찬가지로…….
그래, 결국 뼈저리게 깨우치게 될 것이다. 저 작은 인간도 또 저도 모다 부질없는 조각이라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계집이 죽음을 애원하게 된다면…… 순순히 목숨 거둬 줄 아량은 베풀어야겠지. 휴가 새빨간 입술을 당겨 미소를 지었다.
경계 안의 오랜 공기가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3장
집을 짓기로 했다. 스승인 휴에게 부탁할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제 일이고 제 살 집이라 구상도 재료를 모으는 것도 서툰 도끼질도 전부 스스로 했다.
명서는 까이고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도 기분만은 좋아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휴가 느닷없이 제자로 인정했을 때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좋기는 한데 뭔가 께름칙한 기분도 들었다. 웃고 계셔도 눈빛이 너무 살벌해 마냥 기뻐해도 괜찮을까 싶었다.
뭐, 우선은 살아갈 날을 번 셈이니 좋은 일이라 생각기로 했다. 그러고 나니 자연 잠자리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몇 달, 몇 년, 운이 좋으면 평생 저도 그렇지만 스승님께 불편을 드릴 수는 없었다.
집을 짓고 나면 밭도 좀 일궈 볼까 했다. 공물이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지만 언제까지고 스승님께 받아먹는 것도 염치가 없었다.
움직이기 편한 옷도 새로 몇 벌 지을까 했으나 바느질 솜씨가 영 젬병이라 아까운 천만 버리지 싶었다. 결국 보따리에서 낡은 옷 한 벌 꺼내 단을 내리고 이어 붙여 일할 때 입는 의복을 마련했다.
명서는 색 바랜 소매를 쓱 걷어붙이고 다시 도끼질을 시작했다. 말씀은 제자로 받아 주시겠다고 해도 아직 뭔가를 요구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으니 마음 한편이 내내 불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