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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띡. 바코드를 찍자 POS기 위로 상품이 떠올랐다.

보미는 익숙한 듯 손님이 건네는 카드를 받아들고는 시원하게 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벌써 천 번도 더 한 듯한 멘트를 날렸다.

“결제 완료됐습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

“괜찮아요. 수고하세요.”

“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이 나가기가 무섭게 보미는 기지개를 한 번 쭉 켰다. 취업 준비를 위해 잠깐하고 말려던 편순이 생활이 벌써 2년 차였다.

그녀 역시 취업난에 허덕이는 흔한 청년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래도 틈틈이 이력서도 넣고 면접도 봤다. 지금 역시 1차 합격만을 눈 빠지게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 날씨 한번 좋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밝은 햇살에 눈을 찌푸리던 보미가 터벅터벅 음료 코너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딸기 우유를 하나 집어 들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딸기 우유를 마시면 가슴이 커진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부터 매일 챙겨 먹는 게 습관이 됐다.

뭐,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지만.

보미가 막 빨대를 집어 들려던 참이었다. 문이 요란하게 열리더니 익숙한 얼굴이 뿅 하고 튀어나왔다.

“봄! 나왔어!”

대학 동기이자 집세를 사이좋게 나눠 내는 룸메이트, 나비였다.

나비 역시 백수였지만 집이 워낙 잘 살아 놀고먹는 게 취미였다. 밖이 더운 모양인지 나비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나 이철수랑 헤어졌어.”

또 시작이다 또. 늘 반복되는 레퍼토리에 보미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또 왜 그러는데.”

“걔 여자 생긴 것 같아. 지 말로는 여사친이라는데 단둘이 술을 쳐 드셨다네? 이게 말이 되니?”

“뭘 그렇게 열을 내. 어차피 또 좋다고 달려갈 거면서.”

보미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비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쉽게 헤어지더니 다시 만나고, 다시 만나더니 또 쉽게 헤어지고. 변덕도 이런 변덕이 없었다.

더위가 가시질 않는지 연신 열을 내던 나비는 아예 보미의 딸기 우유를 집어 벌컥벌컥 마셨다.

“야, 그거 내 거야!”

보미가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딸기 우유는 이미 나비의 목구멍으로 클리어 된 뒤였다.

크아. 걸걸한 소리를 낸 나비가 훈계하듯 말했다.

“평보미, 너도 잘 들어. 남자가 절대 하면 안 되는 세 가지가 있어.”

“뭔데?”

“첫째, 노름. 둘째, 폭력. 셋째, 여자 질. 그러니까 너도 네 남친 단속 잘 해. 요즘 연락도 통 안 된다며.”

“그건 걱정 마. 영하는 내가 잘 아니까.”

보미의 대답은 깊은 신앙심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나비는 영 못마땅했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어.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 알지? 넌 자그마치 6년이야 6년.”

“쓸데없는 걱정이야. 영하는 안 변해. 나도 마찬가지고.”

“원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법이지.”

“한나비!”

아오. 저걸 친구라고! 보미가 발끈하자 나비는 혀를 쏙 내밀었다. 그리고는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늘은 조용히 집에 틀어박혀 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우리 떠나자.”

갑자기 이 무슨. 보미가 눈살을 찌푸렸다.

“떠나다니. 어딜?”

“어디긴. 워터파크지.”

“갑자기 워터파크?”

“나한테 티켓이 딱 두 장 있거든. 그 자식이랑 가려고 특가로 구매한 건데 이젠 무용지물이 됐잖아?”

“그래서?”

“티켓은 두 장. 너랑 나는 딱 두 명. 무슨 말이 더 필요해?”

하도 뻔뻔해서 하마터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나비와 워터파크 선약이 있었는 줄 알았다.

보미는 어이없다는 듯 픽 하고 웃었다.

“하여간 한나비. 참 막가지?”

“그게 내 매력 뽀인뜨라고 할 수 있지.”

나비는 한쪽 눈을 찡그리며 화답했다. 보미는 그런 나비가 얄밉기는커녕 부럽기까지 했다. 결핍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높은 자존감, 다소 무모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매사에 당당한 자세.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데라 시설도 깨끗할 거야. 무엇보다 거기 안전 요원들이 그렇게 잘생겼대. 오늘 안구 정화 제대로 해 보자. 흐흐흐.”

방금 남자 친구와 헤어진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음흉한 미소였다.

하지만 보미는 이런 게 나비의 이별을 대처하는 자세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렇게 곧잘 웃다가도 밤만 되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청승맞게 우는 걸 적지 않게 봐 왔으니까.

한동안 워터파크를 같이 갈지 말지 진지하게 고민하다 쿨하게 가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스물여섯의 파릇파릇한 나이에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 나가서 광합성이라도 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하며.

어차피 파트타임도 1시간 후면 마무리되니 시간도 딱 이었다.

“오케이 콜.”

보미는 흔쾌히 승낙했다. 앞으로 그녀의 앞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 ✦ ✧



개장한 지 한 달밖에 안 돼서 그런지 워터파크는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8월의 성수기에 방학 시즌까지 겹쳐서 그런지 인파가 북새통을 이뤘다.

야외부터 이용하기로 한 보미와 나비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야외 입구로 향했다.

“자. 그럼 놀아 볼까?”

잔뜩 신이나 앞질러 달려가는 나비와 다르게 보미는 안절부절못했다.

유년시절 이후로 워터파크는 처음이었다. 당연히 지금 입고 있는 비키니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나비에게 수영복을 빌린 게 화근이었다. 요즘 많이 입는다는 래시가드인 줄 알았건만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핑크색 비키니인 것이다.

안에 들어가서 다른 걸 구입할까도 했지만 늦은 오후 입장이라 그런지 전부 품절이었다.

보미는 하는 수 없이 적나라한 비키니 차림으로 쭈뼛쭈뼛 나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점차 지나자 훤한 노출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느새 창피함은 모두 잊고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몸이 노곤해질 때쯤, 이벤트 풀에서 신나는 음악과 함께 안전 요원의 멘트가 울리기 시작했다.

“저희 <썸머테마파크>를 이용해 주신 고객님들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썸머테마파크>만의 워터 슬라이드를 소개하겠습니다. 지상 50m를 자랑하는 스릴 만점! 고공 슬라이드!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들었어 들었어? 멘트가 끝나기가 무섭게 보미가 나비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하지만 안전 요원의 외모에 푹 빠진 나비는 영 딴소리를 했다.

“존잘.”

“스릴 만점이란다. 빨리 타러 가자.”

“존잘러.”

“야.”

보미가 정색을 하고서야 나비의 정신이 돌아왔다.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됐으니까 혼자 갔다 와. 난 여기서 저 남자 얼굴 감상하면서 기다릴 테니까.”

“후회 안 하지?”

“응. 슬슬 다리도 아파와. 그나저나, 여기 요원들은 왜 유니폼이 저따위야? 몸매를 볼 수가 없잖아.”

나비는 아쉬운 듯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그녀의 말대로 요원들은 반팔 차림의 유니폼을 입은 것도 모자라 쿨토시까지 더해 몸을 완전 무장한 상태였다.

탄탄한 복근을 보기를 내심 기대했던 나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럼, 나 다녀온다?”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비를 두고 보미는 슬라이드를 타기 위해 계단을 올랐다.

끝이 없을 것 같던 긴 줄을 기다리고 나서야 슬라이드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지상 50m에서 내려다 본 아래의 전경은 아찔하기만 했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자 요원의 안내가 시작됐다.

“가슴 앞으로 팔 교차하시고 다리는 쭉 펴세요. 시선은 정면, 중간에 다리를 굽힌다거나 몸을 움직이면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자, 그럼 출발!”

“꺅!”

입에서 터져 나오는 괴성과 함께 슬라이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치의 굽이짐 없이 일직선으로 내려가는 건 상상 이상으로 스릴이 넘쳤다. 어두운 슬라이드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와, 대박.”

어푸어푸하고 물을 뱉어 낸 그녀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짜릿한 나머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딱 한 번만 더 타기로 결심한 보미는 기운차게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잠깐, 그대로 있어요.”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남자의 목소리. 하도 단호해서 보미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뭐지? 하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안전 요원 복장을 한 남자가 코앞까지 다가온 건 순식간이었기에.

“일어나지 말아요.”

보미는 누운 자세 그대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의 긴 눈꼬리는 아래로 휘어지고 입술은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 남자, 지금 웃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보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한시라도 빨리 이 상황을 모면하려 복근에 힘을 줬지만 남자의 행동이 더 빨랐다.

덥석. 그녀의 어깨가 남자의 굵직한 손에 붙잡혔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도 소용없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힘의 강도가 점점 강해질 뿐.

“말 들어요. 지금 그쪽.”

풉. 뭐가 그리 재밌는지 남자의 입에서 기어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대로 보미의 표정은 점점 구겨지고 있었다. ……뭐야 이 남자?

“지금 그쪽, 끈 풀렸습니다.”

“…….”

뭐가 어쩌고 어째……?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요. 조금만 더 움직였다간…….”

……말 안 해도 알죠? 남자의 입매가 가늘게 늘어졌다.

이 남자, 지금 비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