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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끈이 풀려……?

믿을 수 없는 한 마디에 보미는 커다란 두 눈만 깜박거렸다.

뭐 이런 상황이 다 있나, 하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의 말대로 끊어진 비키니는 가슴 위로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으니까.

보미는 우선 빠르게 두 손으로 가슴을 사수했다. 어쩐지 내려오자마자 후련하다 싶었는데 그게 꼭 기분 탓은 아니었나 보다.

‘자, 침착하자.’

그녀는 최대한 상황에 적응하려 애쓰며 머리를 굴렸다.

섣불리 일어나자니 가슴 위로 부착한 누드 브라가 빠져나올 것 같고, 가만히 누워 있자니 쪽팔려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관 속에 누워 있는 시체 같은 모습을 계속 보일 순 없지 않은가.

보미는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데 이놈의 저주받은 몸뚱이는 근력이 제로였다.

두 손이 가슴에 고정돼 있으니 바닥을 짚을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좀 도와줄까요?”

한동안 짠한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신환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지금 상황이 퍽 웃겼지만 고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입가에 미소를 애써 지운 상태였다.

끄덕끄덕. 그녀가 긍정의 신호를 보내자 신환이 기꺼이 자세를 낮춰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깐 실례.”

남자다운 목소리만큼이나 묵직한 손길이 보미의 어깨 위로 닿았다. 보미는 차라리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처음 본 남자에게 비키니가 터지는 모습을 보인 것은 물론, 병자처럼 부축까지 받았으니 창피함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었다.

‘쪽팔려, 쪽팔려, 쪽팔려!’

차라리 이 육신이 멀리 흩어졌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땅을 밟고 일어선 보미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이리 선 채로 마주하고 있으니 그제야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다른 안전 요원들과는 다르게 그의 피부는 꽤 하얀 편이었다. 하지만 피부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꽃 같은 미모였다.

꽃. 정말 딱 꽃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그렇다고 여자처럼 예쁘장하게 생긴 건 아니었다.

살짝 각이 진 굵은 턱 선과 미운 구석 하나 없이 정연한 이목구비는 남자답기만 하다.

그렇다면 뭐 때문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머지않아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웃을 때마다 양쪽 뺨에 깊게 팬 보조개 때문이었다.

보조개를 띠우며 웃고 있노라면 꼭 순수한 소년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다.

애인이 있는 사람도 눈을 떼지 못할 만큼 잘났다, 이 남자.

“…….”

“…….”

뚫어져라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머지않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가 싱긋 웃어 보인다.

남자가 저렇게 예쁘게 웃을 수도 있구나, 잠시 그런 생각에 빠지다가 보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여전히 두 손으로 가슴을 꼭 가린 보미의 목소리가 살짝 울먹였다.

“저 좀 도와주세요. 새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싶지만 현재 다 품절이구요. 휴대폰 없어서 연락도 못 하구요. 라커 룸까지 가야 하는데 이러고 갈 순 없구요. 일단 제 친구를 좀 찾아야 할 것 같아요.”

도와주실 거죠……? 일렁이는 보미의 눈동자가 애원했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신환이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그가 상의를 탈의한 건 순식간이었다.

동시에 탄탄하고 균열 없는 근육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

보미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난데없이 이 무슨 해괴망측한 행동이란 말인가.

그녀는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때아닌 몸매 자랑을 감상해 줄 여유 따윈 없단 말이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일단 이거라도 입어요.”

방금까지만 해도 신환의 몸을 감싸던 유니폼이 그녀의 몸에 쏙 들어갔다. 신환은 미간을 한껏 찡그리고 있는 보미를 향해 옅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친구는 내가 못 찾아 줘요. 보다시피 나도 자리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 친구 찾으면 유니폼은 프런트에 맡겨요. 마음 같아선 주고 싶지만 내 옷이 아니라.”

마지막을 농담으로 장식한 신환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었다.

보미는 그제야 그가 몸매 자랑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작은 배려였을 뿐. 그녀의 얼굴이 한층 부드러워졌다.

“아, 감사합니다.”

인사를 꾸벅 마치고 나비를 찾아 나서려던 때였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그대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눈앞이 슬로우 모션으로 돌아가며 몸이 서서히 기울었다.

“어, 어……!”

뻔히 보이는 결과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뜨자마자 단단한 가슴팍이 눈에 들어온다. 볼 위로 매끄러운 살의 촉감이 느껴진다.

상황을 판단하자마자 보미의 눈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지금 그녀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안긴 거다.

그것도 아주 야하게.

실오라기 하나 없는 상체가 자신을 끌어안았다 생각하니 보미는 저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멈췄다.

머리 위로 울리는 음성이 장난스럽다.

“꽤 덤벙거리는 편이네요. 끈도 풀리고 다리도 풀리고.”

보미의 눈동자가 도르르 위로 올라갔다. 유려하게 휘는 그의 눈꼬리를 보고 있자니 여자 꽤나 울렸을 거란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닿은 눈동자가 꽤 길게 마주친다.

몇 초간의 정적.

보미는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기. 이것 좀.”

“아아.”

그의 품에서 벗어나고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쿵. 쿵. 어느새 심장은 가파르게 뛰고 있다.

남자에게 처음 안겨 본 건 아니었지만, 이리도 근사한 남자와의 포옹은 처음이었다.

엄한 감정은 아니었다.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듯. 지극히 본성에 의한 떨림이었다.

보미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얼굴은 소년의 것인데 다부진 육체는 남성미를 가득 머금고 있다. 무척이나 대조적인 광경에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눈길이 갔다.

“평보미! 너 거기서 뭐 해?”

“한나비?”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선을 옮기자 나비가 다소 과장스러운 동작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보미가 오지 않자 나비는 직접 그녀를 찾아 나서던 길이었다.

그래, 찾은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대체 뭐란 말인가.

어느새 두 사람과 거리를 좁힌 나비는 신환을 가까이서 보자마자 입을 크게 벌렸다.

“헐. 대박.”

진심으로 우러러 나오는 감탄사였다. 굳이 자세히 뜯어보지 않아도 외모는 수려했고, 미세하게 움직이는 흉곽은 조각 그 자체였다. 그렇다. 이것이 바로 눈호강이다.



저 몸매 실화냐. 저 외모 실화냐. 벌어진 나비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신환 PM님. 교대하러 왔습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군요.”

다른 안전 요원의 등장으로 나비의 눈요기는 그쯤에서 그쳐야 했다. 안전 요원의 특성상 교대를 빨리 해 줘야 쉬는 시간도 길어졌기에 신환은 주저할 것 없이 다음 근무지로 이동해야 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친구 찾아서 다행이에요. 그럼.”

“아, 네. 감사했습니다.”

나비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 내는 신환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오롯이 보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가벼운 묵례와 함께 꽃 미소를 날리며 사라지는 신환의 뒷모습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나비는 감탄을 멈추지 않았다.

어찌나 존잘을 남발하던지 괜히 머쓱해진 보미가 재빨리 그녀를 끌고 그곳을 벗어났다.

“…….”

“…….”

한동안 두 여자는 서로 다른 의미로 벙쪄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일이 생겨 그런지 정신이 없는 보미와 달리, 나비는 신환의 비주얼에 맛이 간 뒤였다.

나비가 고개를 홱 돌려 제 친구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뭐야. 저 남자 누구야? 왜 껴안고 있었어?”

“껴안다니. 오버는.”

“말 돌리지 말고. 저 남자 뭐냐니까?”

“뭐긴 뭐야. 안전 요원이지.”

“그게 다야? 정말 그 뿐이야?”

“그럼 뭐가 더 있으려고?”

“너 솔직히 말해.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렇게 딱 붙어 있어? 잠깐만, 너 옷이 왜 그 모양이야? 내 수영복은?”

참 빨리도 물어본다.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보미는 그간의 상황을 대략 설명했다.

푸하하! 나비의 입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한바탕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간신히 웃음을 추스른 나비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톡톡 닦아냈다.

“아 대박. 어떻게 딱 그 순간에 비키니가 터져 버리냐. 미안하다 친구. 사실 그거 10년도 더 된 거다.”

어쩐지 후크가 잘 안 채워진다 했어. 순간적으로 울컥한 보미가 주먹을 질끈 쥐었다.

“아깝다. 그 장면을 봤어야 하는 건데. 어떻게, 우리 한 번 더 타러 갈까?”

“얘가 미쳤나 봐.”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나머지 보미는 고개를 저으며 앞장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못내 아쉬운 듯 살짝 뒤돌아섰다.

“…….”

여운을 깊이 남기는 남자의 외모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의 배려 덕분이었을까.

어쩐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꾸역꾸역 옮겼다.

이러나저러나 상관없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니까.

“아, 몰라몰라.”

보미는 고개를 내저으며 잡념을 떨쳐 냈다.

버젓이 남자 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를 생각하다니 자신의 경솔함을 곧바로 반성했다. 머릿속의 비워진 공간으로 영하를 생각하려 애썼다.

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본 게 언제였더라…….

“…….”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 생각마저도 떨쳐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