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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워터파크 입구를 빠져 나왔다. 지금 그녀들이 있는 장소는 <일산파크>로 생긴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이다.
<일산파크>는 테마파크와 쇼핑몰, 스포츠클럽을 합쳐 놓은 복합 상업시설로 한 장소에서 놀이와 식사는 물론 운동까지 할 수 있는 똑똑한 공간이었다.
보미와 나비는 한동안 이 스마트한 곳에서 정신없는 아이쇼핑을 이어갔다. 그때 나비가 제게 온 문자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봄.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보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나비의 목소리가 축 쳐진 것이 언뜻 보면 미안해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왜. 네 사랑 철수 씨가 만나재?”
“어머, 어머. 하여튼 기지배 귀신이라니까. 너 이러는 거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매번 소름이야. 소오오오름!”
보미는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남들보다 관찰력이 뛰어났다.
딱히 사연이 담겨 있는 건 아니고 타고난 천성이다. 사람의 표정 변화를 누구보다 잘 읽어 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과 대면할 때 전체적인 표정을 보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눈꼬리의 미세한 움직임부터 눈동자의 떨림, 경련하는 입술, 살짝 말아 쥐는 손가락까지 폭 넓게 관찰하곤 했다.
티 없이 맑은 보미의 눈동자는 사람의 속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매번 적중률 90%이상인 보미를 나비는 맹신했다.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돗자리를 깔아 보라고 하기까지 했으니까.
“어? 전화 온다. 잠깐만.”
이번엔 아예 대놓고 받는 나비였다.
“어, 자기.”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친구를 보며 보미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좀 다르나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미의 휴대폰도 울렸다. 수신인에 ‘유댕’이라고 뜬 걸 확인하자마자 통화버튼을 눌렀다.
유정은 나비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대학 동기이자 막역한 사이였다. 셋 중 유일한 직장인이기도 했고.
오랜만의 연락이라 의식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떴다.
“오, 유댕. 어쩐 일이야.”
한동안 수화기 너머로 적막만이 가득했다. 끊긴 건가 싶어 미간을 좁히자 그제야 목소리가 돌아왔다.
― 봄. 뭐 해. 통화 괜찮아?
“그럼. 백수가 남아도는 게 시간이지 뭐.”
― 아아…….
나비 못지않게 화끈한 유정은 할 말은 곧잘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서론이 길다.
― 되게 시끄럽네. 밖이야?
“응. 나비랑 워터파크 왔어. 시설도 깨끗하고 나쁘지 않더라.”
― 그렇구나.
적막.
이쯤 되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실까. 한유정 답지 않게 질질 끌으시고.”
이번에도 대답은 한 번에 돌아오지 않았다. 몇 초간의 정적이 더 흐른 뒤 유정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보미야. 나 방금 영하 봤어.
“영하?”
보미는 중요한 주제인 만큼 통화 볼륨을 높였다.
― 응. 백화점에서 나오는 길에 만났어. 어떤 여자랑 같이 있더라. 혹시 알고 있나 해서.
“…….”
― 오지랖 떠는 것 같아서 모른 척하려고 했거든? 근데 그건 안 되겠더라. 두 사람.
꽤 다정해 보였거든.
쿵. 마지막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하지만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에이, 네가 잘못 본 거겠지.”
― 내가 설마 구영하도 못 알아볼까 봐? 네 6년 남친이듯 나한테도 6년 친구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달싹이던 입술이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 응. 처음 본 여자였어. 자세히는 못 봤는데 언뜻 봐도 되게 예뻤…….
아차, 싶었는지 유정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 내가 오해한 걸 수도 있어. 영하가 얼굴은 좀 생겼어도 이성 문제는 깨끗하잖아. 제3자보다는 네가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거야.
“……알았어.”
통화를 어떻게 마친 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꺼진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비의 입 모양과 목소리가 느리게 다가왔다.
“봄, 무슨 생각을 하길래 답이 없어?”
아마 여러 번 부른 모양이었다.
“……어? 어, 그게……영하가…….”
“철수 지금 우리 집 앞이래. 같이 만나서 저녁먹자. 괜찮지?”
보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런데 지금 멘탈로는 곤란할 것 같았다. 어쩌면, 정신없고 시끄러운 현재가 나을지도.
“아니 먼저 가. 난 구경 좀 더 하다 갈게.”
“그럴래, 그럼?”
보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비는 쏜살같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나비를 따라 힘껏 손을 흔들어 던 보미는 힘없이 팔을 내렸다. 그러고는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어떤 여자랑 같이 있더라. 자세히는 못 봤는데 언뜻 봐도 되게 예뻤…….’
유정의 음성이 쉼 없이 귓전을 울린다. 되감기를 누른 것도 아닌데 정확히 그 구간만 미친 듯이 반복된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영하는 지금 회사에 있어야 했다.
“하아.”
걷기를 포기하고 근처 파라솔에 걸터앉자마자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몇 번이고 영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라는 기계음만 반복됐다.
“지금 필요한 건 뭐? 술.”
혼자 묻고 답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보미는 고개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소주 두 병에 종이컵까지 계산하고 나왔다.
지금 상황에선 안주 따윈 사치라 오로지 강소주를 마실 심산이었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오늘따라 유독 거리에 커플들이 많이 보였다. 보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종이컵 가득 소주를 채웠다. 그리고는 단번에 비워 냈다.
“크으으…….”
쓴 내가 고스란히 차올랐다.
✧ ✦ ✧
쏴아아. 샤워부스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는 신환의 모습에 요원들은 그를 힐끔거렸다.
안전 요원의 명성답게 그들 역시 몸이 좋은 편이었지만 신환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몸이야 운동을 해서 그렇다 치고, 올백을 했는데도 굴욕하나 없는 미모는 반칙이 아닌가.
그동안 딱히 사회에 불만을 품지 않았지만 신환을 보자마자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외모지상주의의 최대 수혜자인 신환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라커 룸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잇새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과 몇 시간 전 벌어졌던 비키니 사건이 떠올라서였다.
비키니로 시작된 생각은 자연스레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그런 얼굴이 있다. 딱히 화려하진 않지만 뇌리 어딘가에 깊숙이 각인되는. 아마 그 여자가 그런 류일 것이라고 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연신 입꼬리를 늘인 신환이 휴대폰을 들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대다수가 신환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오 비서였다.
“네. 오 비서님.”
사춘기부터 눈부신 청춘, 광고업계의 어엿한 대표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엔 오 비서가 함께였다.
오 비서는 단순히 신환의 비서가 아닌 든든한 지원군이자 조력자였다.
― 대표님. 연락이 안 된지 정확히 8시간 하고도 30분째입니다.
“나 걱정했다는 말을 에둘러서 하는 거죠?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그래요. 사람 설레게.”
능글능글한 신환의 대답에 오 비서의 한숨 소리가 짙어졌다.
― 제 전화를 아예 안 받으시는 걸 보니 오늘 하루 제대로 사고를 치신 모양인데, 맞나요?
“사고는 아니고요. 활발한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신환이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가 무섭게 오 비서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 어……어디서 뭐를 하셨다고요? 대표니임!
으으.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아 신환이 휴대폰을 귀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이래서 아침부터 전화기 꺼 놓은 거다. 잔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칠 게 뻔하니까.
― 제발 자중하세요. 그러다 중요한 사람들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직원들은요. 워터파크에서 일하는 대표님이라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명백하다는 듯, 신환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는 며칠 전, 대학 시절 같은 수영 동아리 출신이던 동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오늘 하루만 내 대신 대타를 뛰어 줄 수 있겠냐고.
워낙 막역한 사이기도 했고, 이어지는 동구의 말을 듣자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곧 있으면 출산일이야. 첫 애 때도 같이 못 있어 줘서 이번만큼은 꼭 아내 옆에 있어 주고 싶다.’
성수기인데다 인력이 딸리는 상황이라 동구는 휴무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대신할 사람을 찾던 중 신환에게까지 연락을 취했다.
워낙에 자유분방하고, 제 사람 하나는 끔찍하게 여기는 신환이라 더 이상 듣지도 않고 승낙했다.
마침 일본 바이어와의 미팅이 잘 마무리돼 하루 일찍 귀국하던 차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훈훈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오 비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격양되어 있었다.
― 혹시 회장님이라도 아시는 날엔……!
아차, 싶었는지 오 비서가 그쯤 말을 멈췄다.
신환에게 강 회장 이야기가 금기어와 가깝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신환의 부친이자 재벌 2세로도 불리는 강 회장은 신환에게 그런 존재였다.
상종하고 싶지 않은, 숨소리조차 섞이고 싶지 않은 기피 대상 1호.
신환은 오 비서의 실수를 애써 모른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뭐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오 비서님 부재중만 스무 건이 넘습니다. 하마터면 제 휴대폰이 탈 뻔했어요.”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는 걸 보니, 못 들은 모양이구나 하고 오 비서는 안도했다.
그와 동시에 폭풍 잔소리를 쏟아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이런 식으로라면 회사의 기강이……! 제 입장도 생각을 좀……!
귀가 따가워질 쯤에야 오 비서의 잔소리가 멎었다. 어느새 뜨거워진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신환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듣기 싫은 잔소리도 그답게 유쾌하게 해석해 버리며 워터파크 입구를 나섰다.
오늘 하루 온 종일 서서 근무를 해서 였는지 금세 허기가 졌다. 그는 급한 대로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멀리 편의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익숙한 여자.
“저 여자는……?”
비록 옆모습이지만 누군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금세 잊어버리기엔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기억이었으니까.
성큼성큼. 신환은 구면이기도 한 그녀에게 아는 척이라도 할 겸, 천천히 다가갔다.
“…….”
하지만 머지않아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여자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가녀린 어깨를 들썩인다.
굳이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지금 울고 있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워터파크 입구를 빠져 나왔다. 지금 그녀들이 있는 장소는 <일산파크>로 생긴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이다.
<일산파크>는 테마파크와 쇼핑몰, 스포츠클럽을 합쳐 놓은 복합 상업시설로 한 장소에서 놀이와 식사는 물론 운동까지 할 수 있는 똑똑한 공간이었다.
보미와 나비는 한동안 이 스마트한 곳에서 정신없는 아이쇼핑을 이어갔다. 그때 나비가 제게 온 문자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봄.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보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췄다.
나비의 목소리가 축 쳐진 것이 언뜻 보면 미안해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왜. 네 사랑 철수 씨가 만나재?”
“어머, 어머. 하여튼 기지배 귀신이라니까. 너 이러는 거 하루 이틀은 아니지만 매번 소름이야. 소오오오름!”
보미는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는 남들보다 관찰력이 뛰어났다.
딱히 사연이 담겨 있는 건 아니고 타고난 천성이다. 사람의 표정 변화를 누구보다 잘 읽어 냈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과 대면할 때 전체적인 표정을 보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눈꼬리의 미세한 움직임부터 눈동자의 떨림, 경련하는 입술, 살짝 말아 쥐는 손가락까지 폭 넓게 관찰하곤 했다.
티 없이 맑은 보미의 눈동자는 사람의 속을 꿰뚫는 것만 같았다.
매번 적중률 90%이상인 보미를 나비는 맹신했다.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돗자리를 깔아 보라고 하기까지 했으니까.
“어? 전화 온다. 잠깐만.”
이번엔 아예 대놓고 받는 나비였다.
“어, 자기.”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친구를 보며 보미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좀 다르나 싶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보미의 휴대폰도 울렸다. 수신인에 ‘유댕’이라고 뜬 걸 확인하자마자 통화버튼을 눌렀다.
유정은 나비와 마찬가지로 그녀의 대학 동기이자 막역한 사이였다. 셋 중 유일한 직장인이기도 했고.
오랜만의 연락이라 의식하지 않은 목소리가 들떴다.
“오, 유댕. 어쩐 일이야.”
한동안 수화기 너머로 적막만이 가득했다. 끊긴 건가 싶어 미간을 좁히자 그제야 목소리가 돌아왔다.
― 봄. 뭐 해. 통화 괜찮아?
“그럼. 백수가 남아도는 게 시간이지 뭐.”
― 아아…….
나비 못지않게 화끈한 유정은 할 말은 곧잘 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서론이 길다.
― 되게 시끄럽네. 밖이야?
“응. 나비랑 워터파크 왔어. 시설도 깨끗하고 나쁘지 않더라.”
― 그렇구나.
적막.
이쯤 되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실까. 한유정 답지 않게 질질 끌으시고.”
이번에도 대답은 한 번에 돌아오지 않았다. 몇 초간의 정적이 더 흐른 뒤 유정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보미야. 나 방금 영하 봤어.
“영하?”
보미는 중요한 주제인 만큼 통화 볼륨을 높였다.
― 응. 백화점에서 나오는 길에 만났어. 어떤 여자랑 같이 있더라. 혹시 알고 있나 해서.
“…….”
― 오지랖 떠는 것 같아서 모른 척하려고 했거든? 근데 그건 안 되겠더라. 두 사람.
꽤 다정해 보였거든.
쿵. 마지막 한마디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다. 하지만 애써 목을 가다듬었다.
“에이, 네가 잘못 본 거겠지.”
― 내가 설마 구영하도 못 알아볼까 봐? 네 6년 남친이듯 나한테도 6년 친구야.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달싹이던 입술이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겠고?”
― 응. 처음 본 여자였어. 자세히는 못 봤는데 언뜻 봐도 되게 예뻤…….
아차, 싶었는지 유정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 내가 오해한 걸 수도 있어. 영하가 얼굴은 좀 생겼어도 이성 문제는 깨끗하잖아. 제3자보다는 네가 직접 물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알려 주는 거야.
“……알았어.”
통화를 어떻게 마친 지도 모르겠다. 멍하니 꺼진 휴대폰 액정만 바라보고 있는데, 나비의 입 모양과 목소리가 느리게 다가왔다.
“봄, 무슨 생각을 하길래 답이 없어?”
아마 여러 번 부른 모양이었다.
“……어? 어, 그게……영하가…….”
“철수 지금 우리 집 앞이래. 같이 만나서 저녁먹자. 괜찮지?”
보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런데 지금 멘탈로는 곤란할 것 같았다. 어쩌면, 정신없고 시끄러운 현재가 나을지도.
“아니 먼저 가. 난 구경 좀 더 하다 갈게.”
“그럴래, 그럼?”
보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비는 쏜살같이 시야에서 멀어졌다.
나비를 따라 힘껏 손을 흔들어 던 보미는 힘없이 팔을 내렸다. 그러고는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어떤 여자랑 같이 있더라. 자세히는 못 봤는데 언뜻 봐도 되게 예뻤…….’
유정의 음성이 쉼 없이 귓전을 울린다. 되감기를 누른 것도 아닌데 정확히 그 구간만 미친 듯이 반복된다.
그녀의 기억대로라면 영하는 지금 회사에 있어야 했다.
“하아.”
걷기를 포기하고 근처 파라솔에 걸터앉자마자 엷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몇 번이고 영하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통화 중이라는 기계음만 반복됐다.
“지금 필요한 건 뭐? 술.”
혼자 묻고 답하는 걸 보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보미는 고개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소주 두 병에 종이컵까지 계산하고 나왔다.
지금 상황에선 안주 따윈 사치라 오로지 강소주를 마실 심산이었다.
“……다들 행복해 보이네.”
오늘따라 유독 거리에 커플들이 많이 보였다. 보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종이컵 가득 소주를 채웠다. 그리고는 단번에 비워 냈다.
“크으으…….”
쓴 내가 고스란히 차올랐다.
✧ ✦ ✧
쏴아아. 샤워부스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는 신환의 모습에 요원들은 그를 힐끔거렸다.
안전 요원의 명성답게 그들 역시 몸이 좋은 편이었지만 신환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몸이야 운동을 해서 그렇다 치고, 올백을 했는데도 굴욕하나 없는 미모는 반칙이 아닌가.
그동안 딱히 사회에 불만을 품지 않았지만 신환을 보자마자 완전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외모지상주의의 최대 수혜자인 신환이 머리카락의 물기를 털고 라커 룸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잇새로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불과 몇 시간 전 벌어졌던 비키니 사건이 떠올라서였다.
비키니로 시작된 생각은 자연스레 여자에게로 옮겨졌다.
그런 얼굴이 있다. 딱히 화려하진 않지만 뇌리 어딘가에 깊숙이 각인되는. 아마 그 여자가 그런 류일 것이라고 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연신 입꼬리를 늘인 신환이 휴대폰을 들어 부재중 전화를 확인했다. 대다수가 신환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인 오 비서였다.
“네. 오 비서님.”
사춘기부터 눈부신 청춘, 광고업계의 어엿한 대표가 되기까지 모든 과정엔 오 비서가 함께였다.
오 비서는 단순히 신환의 비서가 아닌 든든한 지원군이자 조력자였다.
― 대표님. 연락이 안 된지 정확히 8시간 하고도 30분째입니다.
“나 걱정했다는 말을 에둘러서 하는 거죠? 별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그래요. 사람 설레게.”
능글능글한 신환의 대답에 오 비서의 한숨 소리가 짙어졌다.
― 제 전화를 아예 안 받으시는 걸 보니 오늘 하루 제대로 사고를 치신 모양인데, 맞나요?
“사고는 아니고요. 활발한 경제활동을 했습니다.”
신환이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가 무섭게 오 비서의 음성이 미세하게 떨렸다.
― 어……어디서 뭐를 하셨다고요? 대표니임!
으으. 고막이 터질 것만 같아 신환이 휴대폰을 귀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이래서 아침부터 전화기 꺼 놓은 거다. 잔소리가 폭풍처럼 몰아칠 게 뻔하니까.
― 제발 자중하세요. 그러다 중요한 사람들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직원들은요. 워터파크에서 일하는 대표님이라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명백하다는 듯, 신환은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는 며칠 전, 대학 시절 같은 수영 동아리 출신이던 동구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오늘 하루만 내 대신 대타를 뛰어 줄 수 있겠냐고.
워낙 막역한 사이기도 했고, 이어지는 동구의 말을 듣자니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곧 있으면 출산일이야. 첫 애 때도 같이 못 있어 줘서 이번만큼은 꼭 아내 옆에 있어 주고 싶다.’
성수기인데다 인력이 딸리는 상황이라 동구는 휴무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대신할 사람을 찾던 중 신환에게까지 연락을 취했다.
워낙에 자유분방하고, 제 사람 하나는 끔찍하게 여기는 신환이라 더 이상 듣지도 않고 승낙했다.
마침 일본 바이어와의 미팅이 잘 마무리돼 하루 일찍 귀국하던 차였으니까.
하지만 이런 훈훈한 사정을 알 리 없는 오 비서의 목소리는 여전히 격양되어 있었다.
― 혹시 회장님이라도 아시는 날엔……!
아차, 싶었는지 오 비서가 그쯤 말을 멈췄다.
신환에게 강 회장 이야기가 금기어와 가깝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신환의 부친이자 재벌 2세로도 불리는 강 회장은 신환에게 그런 존재였다.
상종하고 싶지 않은, 숨소리조차 섞이고 싶지 않은 기피 대상 1호.
신환은 오 비서의 실수를 애써 모른 척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뭐 급한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오 비서님 부재중만 스무 건이 넘습니다. 하마터면 제 휴대폰이 탈 뻔했어요.”
평소처럼 농담을 건네는 걸 보니, 못 들은 모양이구나 하고 오 비서는 안도했다.
그와 동시에 폭풍 잔소리를 쏟아붓는 것도 잊지 않았다.
― 이런 식으로라면 회사의 기강이……! 제 입장도 생각을 좀……!
귀가 따가워질 쯤에야 오 비서의 잔소리가 멎었다. 어느새 뜨거워진 휴대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신환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날 너무 좋아한다니까.”
듣기 싫은 잔소리도 그답게 유쾌하게 해석해 버리며 워터파크 입구를 나섰다.
오늘 하루 온 종일 서서 근무를 해서 였는지 금세 허기가 졌다. 그는 급한 대로 편의점을 찾아 나섰다.
얼마쯤 걸었을까, 저 멀리 편의점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있는 익숙한 여자.
“저 여자는……?”
비록 옆모습이지만 누군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금세 잊어버리기엔 어이없을 정도로 황당한 기억이었으니까.
성큼성큼. 신환은 구면이기도 한 그녀에게 아는 척이라도 할 겸, 천천히 다가갔다.
“…….”
하지만 머지않아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방금 전까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여자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다. 가녀린 어깨를 들썩인다.
굳이 가까이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여자, 지금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