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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신환은 여전히 자리에서 굳어 있었지만 머릿속만큼은 비상하게 돌아갔다. 그는 사업가답게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다.

테이블 위엔 텅텅 빈 술병이 놓여 있고, 지금 그녀는 한눈에 봐도 술에 잔뜩 취해 있다.

개방된 공간에서 여자 혼자 술을 마신 걸 보면 예삿일은 아닐 터.

‘무슨 일일까. 시련이라도 당한 건가. 빚더미라도 앉은 건가.’

그가 막연하게 상황을 유추하고 있을 때였다. 제법 껄렁해 보이는 무리들이 보미의 맞은 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와 동시에 보미가 의자를 뒤로 끌었다. 비틀비틀하며 일어난 그녀가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만 중심을 잃고 넘어져 버렸다.

하필 맞은편에 있는 남자들의 무리 쪽이었다.

와장창!

보미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정면으로 피해를 많이 본 남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 미쳤어?”

짙은 커피 자국이 남자의 흰 셔츠 위로 새겨졌다. 쓰러진 그녀를 향해 손찌검이라도 할 것처럼 기세가 험악했다.

남자는 다시금 보미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어이, 거기. 내 말 안 들려? 야. 야!”

신환이 다가선 건 그때였다.

“그만하시죠.”

“넌 또 하는 새낀데 참견…….”

당장이라도 육두문자를 날릴 기세는 어디 가고, 남자는 말끝을 흐렸다.

그보다 한 뼘 반이나 더 큰 것 같은 키, 웃고 있지만 더없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기운.

압도적인 신환의 기세에 남자는 잔뜩 졸아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 있었다. 무리들이 흥미로운 눈길을 보내자 남자는 애써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었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너 이게 얼마짜린지 알아?”

신환은 백 마디 말 대신 행동으로 보였다. 그가 지갑을 열어 수표 다섯 장을 척 하고 건넸다.

이만하면 됐나? 눈웃음 뒤로 또 한 번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던 남자는 마지못해 돈을 받아들였다. 자존심 때문에 거절할 만큼 만만한 액수가 아니었다.

“일행인 것 같은데 앞으로 조, 조심하라고 해. 흠흠.”

“야, 가자!”

조폭의 우두머리라도 되는 모양인지, 남자의 한마디에 무리들이 우르르 그 뒤를 따랐다.

그제야 신환은 주저앉아 있는 보미를 향해 다가섰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게 잠을 자는 것 같기도, 생각을 하는 사람 같기도 하다.

툭. 툭. 신환이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봐요. 이제 그만 일어나요.”

“……혹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게 어떤 건지 알아요?”

갑작스러운 한마디. 그 순간 촘촘히 마주친 눈동자.

일순간 기묘한 감정이 신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꿈에서 깨어나듯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난……알아요.”

……나도 압니다. 텅 빈 눈동자가 자신을 주시하자 신환은 하마터면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던 신환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것으로 현실로 돌아왔다.

“일단 일어납시다. 나 누군지 기억하죠?”

“……어어?”

비틀비틀 거리는 손가락이 저를 향하자 신환이 싱긋 웃어 보였다.

“아까 물에 빠질 거 구해 줬던, 생명의 은인.”

“몸짱이다.”

“몸짱?”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신환이 손을 건네자 보미는 선뜻 잡고 일어섰다.

발그레해진 얼굴로 배시시 웃어 보이는 게 한눈에 봐도 술에 취한 여자의 행태였다.

“네, 몸짱이요. 몸 되게 좋은 남자.”

엄지를 치켜 든 것도 모자라 자꾸만 가슴으로 향하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술김이라도 자신이 한 발언이 수줍었는지 입을 가리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신환이 픽, 하고 웃었다.

“같이 온 친구는 어디 있어요. 아니, 그 친구 번호 좀 압시다.”

“딸기 우유 먹고 싶다. 오늘 못 먹었는데…….”

이 여자는 동문서답하는 게 술버릇인가. 이번에도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것 같자 신환은 순순히 맞춰줬다.

“사 주면 말 듣나?”

“딸기 우유…….”

졌다, 졌어.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 그녀를 보다 못한 신환이 이마를 짚었다.

드르륵 의자를 끌어 그녀를 앉히고는 자세를 낮춰 흐릿한 눈을 정면으로 마주 봤다.

“사 줄 테니까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요.”

“아니요. 제가 살 거예요.”

말은 자기가 산다고 해 놓고, 뻔뻔스레 내미는 이 손은 뭘까.

그 모습이 꼭 어릴 적 어른들에게 ‘세뱃돈 주세요.’라고 하는 모양새와 같았다.

“주세요.”

“뭘 말입니까?”

“돈이요.”

“…….”

기가 차다고 느끼기엔 이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도 두 손바닥이 제대로 붙어 있지 못하고 어긋나고 있었으니까.

신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카드를 슥 내밀었다.

보미는 순식간에 카드를 낚아챘다. 그녀는 편의점으로 향하는 대신 벌떡 일어나 신환을 향해 팔을 쭉 내밀었다.

그리고는 그의 트레이닝복 지퍼를 따라 쭉 그어 내려갔다.

“딸기 우유가 결제되었습니다.”

끄하핫!

이미 그녀의 뇌는 반 이상이 알코올에 잠겨 있었다.

허니 지금 제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도, 얼마나 미친 사람 같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했다.

“딸기 우유가 결제되었습니다! 영수증 필요하세요오?”

그녀의 행동이 반복될수록 신환의 몸만 달아올랐다.

가슴 중앙선을 따라 결제를 하는 것까진 좋았다. 그런데 그 위치가 왜 자꾸 내려가는 건지.

복부의 아래를 긋고 내려가는 카드의 감촉에 신환의 목울대가 뜨겁게 울렸다.

왜 하필 긁어도 거길 긁어서는.

이대로는 위험하겠다 싶어 신환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럴수록 다가오는 그녀의 보폭이 커졌다.

“딸기 우유가 결제되었습니다. 딸기 우유가 결제되었습니다. 딸기 우유가……. 영수증 필요하세요……. 영수증…….”

하나둘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게 느껴진다.

이러다 한도 초과가 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한 결제가 이어진다.

“워워.”

결국 신환은 최대한 그녀와의 거리를 넓게 벌렸다.

슬금슬금 물러나는 그 모양새가 꼭 사냥개에게 물리기 직전인 먹잇감처럼 아찔했다.

신환은 커다란 손바닥을 쫙 편 채 포식자를 달래듯 말했다.

“워, 워.”



✧ ✦ ✧



“아이고.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얘가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술만 먹으면 개가 돼요 개가.”

나비는 고개를 조아리며 신환에게 사과했다. 웬 남자의 연락을 받고 달려가 보니, 보미는 광경은 가관도 아니었다.

되지도 않는 곳에 결제를 하는 친구 하며, 그걸 받아 주는 남자 하며.

저런 걸 보고 직업병이라 하는 건가.

방금 전 상황은 생각만 해도 기가 찬 나머지 나비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 와중에도 참으로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워터파크에서 본 안전 요원을 여기서 만나다니. 그것도 이렇게 황당한 시추에이션으로.

뭐, 잘난 얼굴을 더 감상할 수 있어서 나쁘진 않았다.

두 사람이 합세하자 무사히 보미를 나비의 차에 태울 수 있었다. 손바닥을 탁탁 털어 낸 나비가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깨어나면 제가 따끔하게 한마디 할게요.”

“괜찮습니다. 다행히 한도 초과는 아니니까.”

신환이 문제의 그 카드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나비가 하도 미안해하니 그가 장난처럼 건넨 농담이었다.

다소 짜증스러울 수 있는 상황인데도 신환은 유쾌하고 긍정적이었다. 이는 신환의 오래된 강박이자, 습관이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오늘 제 친구 받아 주느라 고생 하셨어요. 원래 얘가 이런 애는 아니거든요. 평소엔 되게 얌전하고 여성스러워요. 근데 술만 먹으면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린답니다.”

평소에는 신중하고 차분하기 그지없는데 알코올만 들어가면 이 난리였다. 4차원을 넘어선 5차원 세계로 들어서기.

사례는 다양했다.

마구잡이로 옆 테이블의 안주를 집어 먹기도 했고, 같이 술을 먹던 일행의 소지품을 모조리 숨겨 영원히 찾지 못한 적도 있었다.

보미는 제 술버릇을 깨달은 이후로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적어도 나비가 보기엔 그랬다.

그런데 오늘은 왜 그랬을까. 여태 혼자서 몰래 마셨던 걸까.

나비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운전석으로 향했다. 차 문을 연 그녀가 막 몸을 실으려는데 붙잡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만요.”

“네?”

보미가 왜 오늘 이렇게 술을 진탕 마신건지, 그 이유를 물으려다 신환은 관뒀다. 대신 해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장 잘 시켜 줘요. 위로도 좀 건네주고.”

아아. 그가 사뭇 심각한 어조로 덧붙였다.

“문제의 그 딸기 우유는 꼭 사 주고.”

“아……. 네…….”

볼 때마다 홀릴 것 같은 신환의 미소를 보며 나비는 말끝을 흐렸다.

평소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신환의 번호를 물었을 것이다.

그러고는 제 친구와 이어 주려 사랑의 징검다리 역할을 자처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미의 옆엔 버젓이 남자 친구가 버티고 있었다. 나비는 그저 따라 웃어 주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기지배. 대체 무슨 일인거야.”

운전석을 차지한 나비는 고개를 살짝 돌려 고른 숨결을 뱉으며 잠들어 있는 보미를 바라보았다.

“하여간, 일어만 나 봐.”

말투는 퉁명스러웠지만 나비의 눈동자는 다정스럽기 그지없었다.

보미에게 닿았던 나비의 시선이 백미러로 향했다.

가만히 서 있는 모습조차도 화보 같은 남자를 보며 나비가 운전대를 탁 쳤다.

“크. 아깝다. 아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