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화
1장. 운명의 실타래
2016년 가을.
아침저녁으로 제법 기온 차가 났다. 쌀쌀한 새벽 기온에 대비해 두터운 스웨터를 걸치고 나온 다온은 어깨를 움츠린 채 으쓱한 골목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이 어깨를 마주 대고 걸어야 할 정도로 협소한 길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낮은 담장과 낡은 대문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골목길은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동네가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80년대 정취를 풍기는 곳이었다. 담벼락 위로 솟은 녹슨 철조망과 ‘체냅니다’라고 써진 낡은 간판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홍경은, 꼭두새벽부터 꼭 이래야겠냐?”
“새벽 아니다. 해 떴다. 원래 점빨은 이른 아침부터 맑은 정기를 마셔야 잘 들어서는 법이라고 했다.”
“누가?”
“천신녀 덕에 대박 난 우리 큰이모가.”
“좋아, 그렇다 쳐. 그렇게 잘나간다는 점쟁이가 왜 아직도 이런 후미진 곳에 사는데? 대기업 사모님도 단골이라며?”
다온은 불신이 가득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결에 억지로 끌려 나와 저조한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모르는 소리. 천신녀가 모시는 분이 이 동네를 떠나기 싫다고 하신다잖냐.”
“그렇다고 날 꼭 이 시간에 끌고 나왔어야 했냐. 오늘 새벽에 간신히 마지막 원고 넘겼어. 밤 꼴딱 새우고, 겨우 두 시간 잤다고.”
“알았으니, 그만 좀 쫑알거려. 난 정정당당하게 물심양면 쿠폰 쓴 거다. 돈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우겠다던 눈물 어린 우정을 벌써 잊은 거야? 쿠폰으로 우리 사촌 오빠와의 소개팅 자리에 끌고 나가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
물심양면 쿠폰과 소개팅이라는 말에 불평이 쏙 들어갔다. 취업 준비생으로 가난했던 시절. 선물 사 줄 돈이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며 주었던 쿠폰이 3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소개팅은 절대 안 돼. 아들 사랑이 끔찍하시다는 큰이모의 활약상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들에 관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신다며 경은의 엄마조차 혀를 내둘렀었다. 엿강정같이 끈끈한 모자 사이에 끼어들어 구박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깨를 부딪치며 경은이 낡은 초록색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쪽지에 적힌 주소와 대문에 적힌 주소가 일치했다. 담벼락 위로 기다랗게 솟은 대나무 깃대만 봐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경은이 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가자는 설득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다온은 작은 한숨과 함께 친구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점집 특유의 음침한 인테리어와 소품이 꽤 인상적이었다. 독특한 향내가 흐르는 신당 안에는 이름도 모르는 신들이 정성스럽게 모셔져 있었다. 화려한 컬러로 도색이 된 신상들이 대부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반면 벽면 전체는 호랑이가 그려진 액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든 액자에 기하학적으로 커다랗게 그려진 호랑이 눈들이 마치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호기롭게 호랑이 액자를 힐끗거리는 그녀를 경은이 팔꿈치로 냅다 찔렀다.
“아야!”
“왜 자꾸 꼼지락거려? 못 들었어? 복 나간다잖아.”
“누가 뭐래? 황금같이 귀한 마감 다음 날 아침에 이게 진짜 잘하는 짓인가 싶어서…….”
“지금 늦잠이 문제냐. 바리스타 학원에 등록을 할지 말지, 내 미래가 걸린 일인데. 너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네 인생에서 떼어 내고 싶다며? 온 김에, 어떻게 해야 강태율을…….”
다온은 서둘러 경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야! 여기서 그 인간 이름을 말하면 어떡해?”
“이봐, 이봐. 네가 홍길동이냐? 그 인간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게……. 너랑 나랑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굴려 봐도 그 인간 머리 하나는 못 당해. 큰이모가 그러는데 여기 천신녀 입이 심하게 거시기 하기는 한데, 대신에 그렇게 용하다잖냐. 우리 이모부 과거를 좔좔 꿰더래. 덕분에 여자 사람 친구입네 하며 드립 치는 것들을 한 방에 정리해 버렸잖아.”
“그거랑 나랑은 케이스가 다르잖아. 부적 한 방에 떼어 낼 인연이었으면 고등학교 졸업장, 아니, 대학교 졸업장과 동시에 진작 떨어져 나갔겠지.”
“창시 빠진 년들, 여기가 어디라고 시끄럽게 떠들어?”
거침없는 욕설에 다온은 흐트러진 자세를 꼿꼿이 했다. 오방색이 물들여진 화려한 무복을 입은 천신녀가 한 손에 팥이 담긴 놋그릇을 들고 신당 안으로 들어왔다. 점괘를 보다 말고 어디를 가나 했더니 팥을 가지러 간 모양이었다. 상석에 앉은 천신녀는 붉은 팥을 손에 쥐고 몇 번 흔들고 주문을 외우더니 다온의 머리를 향해 거침없이 뿌렸다.
“엄마야, 뭐 하시는 거예요?”
“여엄병. 도망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당장은 이렇게라도 기를 불어넣어 주는 거여. 너는 기가 너무 약해. 여자가 기가 너무 약해도, 팔자가 꼬이는 법이여. 그 팔자 때문에 전생의 꼬인 인연이 현생에까지 들러붙어서 안 떨어지는 거여.”
“전생이요? 얘한테 뭐가 보여요? 그 꼬인 인연이 어떻게 생겼어요?”
경은의 질문에 천신녀는 놋그릇을 내려놓고, 구슬을 들었다. 그녀가 모신다던 동자승을 부르는지 구슬을 흔드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다온은 경은이 했던 그대로 팔꿈치로 친구의 옆구리를 찌르고, 입으로는 “죽는다.”라며 협박을 날렸다. 알고 보니 경은이 본인 사주를 넣으면서, 허락도 없이 다온의 사주까지 함께 집어넣었다.
“저것이 머다냐. 인물이 훤칠하네. 약관을 훌쩍 넘긴 나이에, 키가 육 척이나 되고, 눈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한눈에 구만리 앞길을 바라보는 신기한 재주를 타고난 남자로구나.”
구슬이 강렬하게 흔들릴수록, 천신녀의 눈이 뒤집혀 흰자가 보이고 말소리는 주문을 외우듯 격정적으로 변했다. 그 모습에 격앙된 경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려 왔다.
“맞아요, 맞아. 키 크고 훤칠한 남자. 얘 인생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남자도 딱 그렇게 생겼거든요.”
“전쟁터를 누비는지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손에는 커다란 칼을 들었구나. 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허허벌판이 핏자국으로 핏빛 바다를 이루는구나.”
“맞아요, 맞아. 현생에서는 손에 칼 대신 펜을 들었는데, 그 남자가 쓴 기사 한 줄에 처참하게 떨어져 나간……. 읍읍!”
다온은 부리나케 생각 없이 주절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으니 절대 이름이나 직업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더 이상은 친구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발로 멀찍이 밀어 냈다.
“그럼 그 꼬인 인연을 어떻게 해야 한 번에 풀어낼 수 있나요?”
“오백 년을 거슬러 온 인연인디, 한 번에 풀어질 인연이면 현세까지 따라왔겄어?”
“오백 년이나요?”
“쳔 년이든 백 년이든, 이제는 끊어 내야제. 이 생에서 그 고리를 확실하게 못 끊으면 다음 생애까지 악연으로 얽힐 운명이여. 쉽사리 끊어질 연줄이 아니다, 이 말이여.”
“그렇게나 질겨요?”
“질기다 뿐이여.”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천신녀는 의심에 쐐기를 박듯 구슬을 쥔 주먹으로 상을 꽝 하고 내리쳤다.
“글 쓰는 것 좋아하지? 글로 벌어먹고 살 팔자여. 너는 부모복은 있으나, 형제복은 없는 팔자를 타고났어. 허한 마음을 글로 대신 푸는 거지.”
다온은 냉큼 상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동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사주에 그런 것까지 나와요? 제 직업이 글 쓰는 것이거든요. 또 어려서는 형제가 없어서 외로움을 많이 탔어요. 그럼 이제 어떡해요?”
“용한 부적을 두 개 써 줄 테니, 네가 베고 자는 베개에 한 장 넣고, 한 장은 그 남자 베개에 넣어 둬. 꽉 막힌 귀부터 트여 줄 거여. 한번 맺은 인연이 무처럼 싹둑 한 번에 잘려 나가기야 하겄어. 약점이라도 잡아서 기선을 제압해야지. 우선은 의인부터 찾아봐.”
“의인이요?”
“니 인생을 쥐고 흔드는 남자면 너보다는 위에 있다는 말이니……. 그 남자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찾아. 꼬인 인연을 풀어 줄 고마운 사람이여. 잘만 풀어 주면, 아가씨 인생은 꽃길이여.”
다온은 천신녀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속에 곱씹었다. 처음에 경은의 손에 끌려왔을 때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두 사람의 직업과 가족사를 줄줄이 꿰는 것을 보며 점괘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풀리지 않던 실마리가 하나둘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묘하게 엮어 들어가는 태율과의 인연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전생부터 꼬인 인연이라 이거지.
“효험 있는 부적은 값이 좀 나가는디……. 어쩔 거여?”
다채롭게 변해 가는 다온의 표정을 살피던 천신녀가 슬쩍 부적 얘기로 주의를 끌었다.
“값이 좀 나간다는 것은 얼마를?”
부적 한 장에 얼마나 하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다온은 다음에 들리는 숫자에 움찔했다.
“50.”
“50?”
“말도 안 돼. 무슨 부적 한 장에 50씩이나 해요?”
옆으로 물러나 있던 경은도 액수에 깜짝 놀라는 반응이었다.
하고많은 숫자 중에 하필 재수 없게 50이람. 그때도 딱 50만 원 때문에 얽힌 인연이었는데……. 아니지. 이 모든 게 운명이 꼬여서 그런 거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
“여엄병. 아가씨들이 곱게만 자라서 세상 물정을 영 모른갑네. 대충 휘갈겨 쓴다고 부적이다냐? 정성스럽게 기도와 치성을 드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부적이라야 영험함을 갖는 거제. 한쪽에서만 정성을 드린다고 효험이 있간디? 염병할 소리 하려거든 그냥 가. 재수 옴 붙으면 하루 종일 될 일도 안 돼.”
돈도 돈이지만, 부적을 태율의 베개 속에 집어넣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취업과 동시에 독립했다는 아파트는 물론이거니와 얼마 전에 새로 이사했다는 오피스텔 근처에는 가 본 적도 없었다. 행여나 실수로 발이라도 들여서 잡심부름까지 하게 될까, 노파심에 절대 그의 집만큼은 발걸음을 하고 싶지 않았다.
“꼭 날마다 베고 자는 베개에 넣어야 하나요? 책상 밑이나 뭐 이런 곳은 안 되나요?”
“안 돼. 반드시 날마다 대그빡이 닿는 부위라야 혀.”
“대그빡이요?”
“사람의 기는 다 요 대그빡에서 나오는 법이여. 평생 글로 벌어먹고 살 팔잔디, 눈과 귀가 침침하니 글발이 서겄어?”
잡지사 기자니 평생 글로 벌어먹고 살 팔자라는 게 맞는 말이었다.
“한동안은 니 대그빡에 물 묻힐 생각 하지 마. 내가 던진 팥이 그냥 팥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여. 그 팥이 침침한 눈을 뜨게 해 줄 테니, 꼬인 전생을 풀어 낼 의인부터 찾아봐.”
“아무리 그래도, 날마다 출근해야 하는데 머리에 물을 묻히지 말라시면…….”
“여엄병. 언제까지 질질 끌려다니고만 있을 거야? 전생에 소박맞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생에서도 그렇게 남자 없이 혼자 청승 떨다 늙어 죽을 거야?”
천신녀의 호통에 다온은 또다시 움찔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전생에 소박을 맞았다니. 어쩐지 스물일곱이나 먹도록 지지리도 남자복이 없더라니.
전생부터 배배 꼬인 인연이 옆에 붙어 있으니 오죽했을까. 전생의 그 남자가 구만리를 내다본다는 말에 설득력이 확 와닿았다. 남들과 다른 뭔가를 갖고 태어난 것은 확실했으니까. 진짜 오백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몰라도, 미래가 마냥 장밋빛일 거라 착각하던 철없던 시절에 맺은 약속으로 인생이 꼬인 것은 확실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을 주고서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그만큼 다온은 절박했다.
원수 같은 태율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지내 온 세월이 자그마치 9년이었다. 태율이 정해 준 족집게 같은 문제집을 풀다 보니 상위권에만 겨우 머물던 성적은 어느새 최상위권이 되었고, 박여진 여사의 소원이라는 유림대에 떡하니 합격하게 되었다.
태율은 그 당시 대학교 3학년 복학생이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끝날 줄 알았던 그와의 인연은 어쩌다 보니 학교 학보사로 이어졌다. 꼬박 2년을 사수와 부사수로 시달렸었다. 태율이 졸업하면 가는 길이 달라질 거라는 희망에 버텼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법대에 갔으니, 당연히 법계로 진출할 줄 알았던 태율이 시청률 탑을 달리는 공중파 방송국 보도국의 잘나가는 사회부 기자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에서조차 1지망 수석합격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남들은 잠잘 시간도 없다는 수습 기간 동안에도 태율은 여유를 부리며 그녀의 대학 생활을 꼬치꼬치 간섭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권유를 가장한 반협박으로 언론고시 준비를 종용했다. 그녀에게는 행인지, 불행인지 졸업 후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언론사 시험에 매번 탈락이라는 쓴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인지 매거진 월간스톰에 정식으로 입사했을 때 세상의 자유를 다 가진 것만큼 행복했다.
방송국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굵직한 특종을 내고, 뉴스 시간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하면서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차세대 메인 뉴스의 앵커 후보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잘나가던 태율이 보도국 국장과 맞장을 뜨고 런던으로 파견 근무를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꽃길만 있을 줄 알았다.
하루하루 그가 한국을 떠날 날만을 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그가 월간스톰에 편집장이라는 직책으로 나타났을 때의 절망감이란. 그게 딱 석 달 전 오늘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태율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사다 나를 때마다, 외부 약속이 없는 날은 그와 단둘이 점심 식사를 할 때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남자복이 없나요?”
“네 사주팔자에 결혼 운은 딱 2번이여. 스물여덟 살에 한 번, 스물아홉 살에 한 번. 두 번의 기회를 놓치면 평생 혼자 살 팔자여.”
“그럼 안 되죠. 내 꿈이 착한 남자랑 결혼해서 토끼 같은 애들 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 건데.”
그나마 두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에 다온은 귀를 쫑긋했다. 의미 없는 썸 타기만 무한 반복 중이었다. 초반에 썸은 잘 타는데 이렇다 할 결과가 없었다. 오죽하면 이번 생에 남자는 없나 보다라며 자포자기로 가는 도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다 못해 넘사벽이라는 강태율이 옆에서 얼쩡거리니, 양다리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딱 좋았다. 오죽하면 한번은 경은이 심각하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혹시 강태율이 김다온을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옆에 끼고 있으려는 게 아닐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경은은 태율이 자기 엄마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못 봐서 하는 말이었다. 어찌나 사근사근하고 입 안의 혀처럼 굴던지……. 다온을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냉탕과 온탕의 극명한 온도 차이라고나 할까. 자기 엄마한테 대하는 것에 반만 다정하게 대해 줘도 평범한 여자들은 살살 녹아날 것이 분명했다.
태율은 그저 자신을 숨기지 않고 손쉽게 부려 먹을 수 있는 아랫사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거야말로 진짜 염병할 일이었다. 내 인생은 생각지도 않고, 편하게 부려 먹으려고 옆에 끼고 있다니. 더 이상은 안 돼. 더 늙기 전에 나도 남들처럼 연애도 하고, 사람답게 살아 보자.
다온은 지갑을 열었다. 비상금으로 지갑 안쪽에 30만 원을 가지고 다니긴 했었다. 부족한 20만 원을 채우기 위해 그녀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왜?”
“몰라서 물어? 네가 오토바이 무게로 내 호기심만 부추기지 않았어도 편의점에서 알바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럼 현성 오빠가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리는 걸 듣지도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잘난 엄마 친구 아들로만 기억되던 강태율이 그 오빠, 그 선배, 그 편집장님이라는 호칭의 변천사를 겪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은 누구보다 경은이 잘 알고 있었다. 빠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굳게 다물린 어금니 사이를 뚫고 나왔다. 경은은 재빨리 핸드백을 뒤졌다.
“여기 50만 원이에요. 천지신명님께 우리 친구 잘 좀 봐 달라고 부탁드려 주세요.”
부적과 함께 점집을 나오자, 고즈넉한 골목길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잘게 부서지던 아침 햇살은 진한 회색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을 따라 낡은 초록색 대문 밖으로 날아갔다. 은행잎을 따라가는 다온의 표정에도 진한 회색 구름이 끼었다. 올해는 기상청에서 겨울이 빨리 찾아올 거라고 예고했었다.
“얼굴 펴, 김다온. 내년에 결혼 운이 있다잖아.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우리 사촌 오빠한테 시집와. 우리 오빠 능력 있는 거 알지? 강남 사는 건물주 외아들이다. 그걸로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해. 내가 식사 자리 한번 마련해 볼게.”
“이모네 건물 1층에 커피숍 차리겠다는 야망은 포기해라.”
“야, 너는 나를 뭘로 보고. 우리 오빠 진짜 괜찮다니까.”
“됐다 그래. 너희 이모가 아들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물어뜯는다며……. 그래서 별명이 강남 옥수수라며.”
“어머, 야. 우리 이모 늙어서 이빨 다 빠졌어야. 요즘에는 갈비도 잘 못 뜯어. 오빠만 놓고 봐서는, 진짜 남 주기 아까워서 그래.”
“너희 이모랑 맞장 뜰 배짱 없다. 거기다 너희 오빠도 머리 좋다고 소문난 사람이잖아. 극성맞은 너희 이모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다니셔서, 너도 학교 다닐 때 스트레스 꽤나 받았잖아. 내 인생에서 머리 좋다는 사람은 강태율 하나로 족하다. 평생 기죽어 살기 싫다.”
“왜? 너도 머리 좋아. 칠칠치 못하게 뭘 자꾸 까먹고, 흘리고 다녀서…….”
“죽을래?”
다온이 눈을 한쪽으로 흘겨 떴다. 누군가에게 허구한 날 듣는 협박인데, 막상 써먹어 보니 다온의 말투에는 별로 권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 내가 잘못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점심은 먹고 죽자, 친구야. 속 쓰려 죽겠다.”
다행히 바로 꼬리를 내리며 기를 세워 주는 친구의 볼을 다온이 잡아당겼다. 종합병원 산부인과 병동 간호사로 근무 중인 경은은 업무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있었다.
“으이그, 이 술고래. 그래도 내 기 살려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탄력 있게 늘어난 볼을 잡은 손등에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회색 구름이 기어이 비를 몰고 온 모양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다온의 얼굴이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쯧쯧쯧. 기가 잔뜩 죽어서는……. 어쩌다 천하의 김다온이 이렇게 됐냐. 거기서 그 인간만 안 만났어도…….”
“그러게. 거기서 그 인간만 안 만났어도……. 우선은 뭐라도 좀 먹자. 대그빡에 기를 불어넣다 보면, 언젠가는 그 인간한테 맞짱 뜨는 날이 오겠지.”
다온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수백 번도 더 상상해 보았다. 과연 그날, 거기서 강태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 운명이 꼬이기 시작한 그날을 떠올리는 다온의 얼굴에 진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1장. 운명의 실타래
2016년 가을.
아침저녁으로 제법 기온 차가 났다. 쌀쌀한 새벽 기온에 대비해 두터운 스웨터를 걸치고 나온 다온은 어깨를 움츠린 채 으쓱한 골목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이 어깨를 마주 대고 걸어야 할 정도로 협소한 길이 굽이굽이 이어져 있었다.
낮은 담장과 낡은 대문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골목길은 서울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동네가 남아 있었나 싶을 정도로 80년대 정취를 풍기는 곳이었다. 담벼락 위로 솟은 녹슨 철조망과 ‘체냅니다’라고 써진 낡은 간판은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홍경은, 꼭두새벽부터 꼭 이래야겠냐?”
“새벽 아니다. 해 떴다. 원래 점빨은 이른 아침부터 맑은 정기를 마셔야 잘 들어서는 법이라고 했다.”
“누가?”
“천신녀 덕에 대박 난 우리 큰이모가.”
“좋아, 그렇다 쳐. 그렇게 잘나간다는 점쟁이가 왜 아직도 이런 후미진 곳에 사는데? 대기업 사모님도 단골이라며?”
다온은 불신이 가득한 눈초리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잠결에 억지로 끌려 나와 저조한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모르는 소리. 천신녀가 모시는 분이 이 동네를 떠나기 싫다고 하신다잖냐.”
“그렇다고 날 꼭 이 시간에 끌고 나왔어야 했냐. 오늘 새벽에 간신히 마지막 원고 넘겼어. 밤 꼴딱 새우고, 겨우 두 시간 잤다고.”
“알았으니, 그만 좀 쫑알거려. 난 정정당당하게 물심양면 쿠폰 쓴 거다. 돈 없으면 몸으로라도 때우겠다던 눈물 어린 우정을 벌써 잊은 거야? 쿠폰으로 우리 사촌 오빠와의 소개팅 자리에 끌고 나가지 않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
물심양면 쿠폰과 소개팅이라는 말에 불평이 쏙 들어갔다. 취업 준비생으로 가난했던 시절. 선물 사 줄 돈이 없으니 몸으로 때우겠다며 주었던 쿠폰이 3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은 몰랐다.
소개팅은 절대 안 돼. 아들 사랑이 끔찍하시다는 큰이모의 활약상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아들에 관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신다며 경은의 엄마조차 혀를 내둘렀었다. 엿강정같이 끈끈한 모자 사이에 끼어들어 구박받는 며느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깨를 부딪치며 경은이 낡은 초록색 대문 앞에서 멈춰 섰다. 쪽지에 적힌 주소와 대문에 적힌 주소가 일치했다. 담벼락 위로 기다랗게 솟은 대나무 깃대만 봐도 제대로 찾아온 것 같았다.
“실례합니다.”
경은이 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가자는 설득은 먹힐 것 같지 않았다. 다온은 작은 한숨과 함께 친구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점집 특유의 음침한 인테리어와 소품이 꽤 인상적이었다. 독특한 향내가 흐르는 신당 안에는 이름도 모르는 신들이 정성스럽게 모셔져 있었다. 화려한 컬러로 도색이 된 신상들이 대부분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반면 벽면 전체는 호랑이가 그려진 액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모든 액자에 기하학적으로 커다랗게 그려진 호랑이 눈들이 마치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호기롭게 호랑이 액자를 힐끗거리는 그녀를 경은이 팔꿈치로 냅다 찔렀다.
“아야!”
“왜 자꾸 꼼지락거려? 못 들었어? 복 나간다잖아.”
“누가 뭐래? 황금같이 귀한 마감 다음 날 아침에 이게 진짜 잘하는 짓인가 싶어서…….”
“지금 늦잠이 문제냐. 바리스타 학원에 등록을 할지 말지, 내 미래가 걸린 일인데. 너도 그 인간을 어떻게든 네 인생에서 떼어 내고 싶다며? 온 김에, 어떻게 해야 강태율을…….”
다온은 서둘러 경은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야! 여기서 그 인간 이름을 말하면 어떡해?”
“이봐, 이봐. 네가 홍길동이냐? 그 인간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게……. 너랑 나랑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굴려 봐도 그 인간 머리 하나는 못 당해. 큰이모가 그러는데 여기 천신녀 입이 심하게 거시기 하기는 한데, 대신에 그렇게 용하다잖냐. 우리 이모부 과거를 좔좔 꿰더래. 덕분에 여자 사람 친구입네 하며 드립 치는 것들을 한 방에 정리해 버렸잖아.”
“그거랑 나랑은 케이스가 다르잖아. 부적 한 방에 떼어 낼 인연이었으면 고등학교 졸업장, 아니, 대학교 졸업장과 동시에 진작 떨어져 나갔겠지.”
“창시 빠진 년들, 여기가 어디라고 시끄럽게 떠들어?”
거침없는 욕설에 다온은 흐트러진 자세를 꼿꼿이 했다. 오방색이 물들여진 화려한 무복을 입은 천신녀가 한 손에 팥이 담긴 놋그릇을 들고 신당 안으로 들어왔다. 점괘를 보다 말고 어디를 가나 했더니 팥을 가지러 간 모양이었다. 상석에 앉은 천신녀는 붉은 팥을 손에 쥐고 몇 번 흔들고 주문을 외우더니 다온의 머리를 향해 거침없이 뿌렸다.
“엄마야, 뭐 하시는 거예요?”
“여엄병. 도망가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당장은 이렇게라도 기를 불어넣어 주는 거여. 너는 기가 너무 약해. 여자가 기가 너무 약해도, 팔자가 꼬이는 법이여. 그 팔자 때문에 전생의 꼬인 인연이 현생에까지 들러붙어서 안 떨어지는 거여.”
“전생이요? 얘한테 뭐가 보여요? 그 꼬인 인연이 어떻게 생겼어요?”
경은의 질문에 천신녀는 놋그릇을 내려놓고, 구슬을 들었다. 그녀가 모신다던 동자승을 부르는지 구슬을 흔드는 손놀림이 빨라졌다. 다온은 경은이 했던 그대로 팔꿈치로 친구의 옆구리를 찌르고, 입으로는 “죽는다.”라며 협박을 날렸다. 알고 보니 경은이 본인 사주를 넣으면서, 허락도 없이 다온의 사주까지 함께 집어넣었다.
“저것이 머다냐. 인물이 훤칠하네. 약관을 훌쩍 넘긴 나이에, 키가 육 척이나 되고, 눈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 한눈에 구만리 앞길을 바라보는 신기한 재주를 타고난 남자로구나.”
구슬이 강렬하게 흔들릴수록, 천신녀의 눈이 뒤집혀 흰자가 보이고 말소리는 주문을 외우듯 격정적으로 변했다. 그 모습에 격앙된 경은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려 왔다.
“맞아요, 맞아. 키 크고 훤칠한 남자. 얘 인생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남자도 딱 그렇게 생겼거든요.”
“전쟁터를 누비는지 온몸에 갑옷을 두르고 손에는 커다란 칼을 들었구나. 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허허벌판이 핏자국으로 핏빛 바다를 이루는구나.”
“맞아요, 맞아. 현생에서는 손에 칼 대신 펜을 들었는데, 그 남자가 쓴 기사 한 줄에 처참하게 떨어져 나간……. 읍읍!”
다온은 부리나케 생각 없이 주절대는 입을 손으로 막았다. 그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으니 절대 이름이나 직업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건만……. 더 이상은 친구가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 못하게 발로 멀찍이 밀어 냈다.
“그럼 그 꼬인 인연을 어떻게 해야 한 번에 풀어낼 수 있나요?”
“오백 년을 거슬러 온 인연인디, 한 번에 풀어질 인연이면 현세까지 따라왔겄어?”
“오백 년이나요?”
“쳔 년이든 백 년이든, 이제는 끊어 내야제. 이 생에서 그 고리를 확실하게 못 끊으면 다음 생애까지 악연으로 얽힐 운명이여. 쉽사리 끊어질 연줄이 아니다, 이 말이여.”
“그렇게나 질겨요?”
“질기다 뿐이여.”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천신녀는 의심에 쐐기를 박듯 구슬을 쥔 주먹으로 상을 꽝 하고 내리쳤다.
“글 쓰는 것 좋아하지? 글로 벌어먹고 살 팔자여. 너는 부모복은 있으나, 형제복은 없는 팔자를 타고났어. 허한 마음을 글로 대신 푸는 거지.”
다온은 냉큼 상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반신반의했던 마음이 동하는 쪽으로 돌아서는 순간이었다.
“사주에 그런 것까지 나와요? 제 직업이 글 쓰는 것이거든요. 또 어려서는 형제가 없어서 외로움을 많이 탔어요. 그럼 이제 어떡해요?”
“용한 부적을 두 개 써 줄 테니, 네가 베고 자는 베개에 한 장 넣고, 한 장은 그 남자 베개에 넣어 둬. 꽉 막힌 귀부터 트여 줄 거여. 한번 맺은 인연이 무처럼 싹둑 한 번에 잘려 나가기야 하겄어. 약점이라도 잡아서 기선을 제압해야지. 우선은 의인부터 찾아봐.”
“의인이요?”
“니 인생을 쥐고 흔드는 남자면 너보다는 위에 있다는 말이니……. 그 남자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을 찾아. 꼬인 인연을 풀어 줄 고마운 사람이여. 잘만 풀어 주면, 아가씨 인생은 꽃길이여.”
다온은 천신녀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마음속에 곱씹었다. 처음에 경은의 손에 끌려왔을 때는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두 사람의 직업과 가족사를 줄줄이 꿰는 것을 보며 점괘에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마침내 풀리지 않던 실마리가 하나둘씩 풀리는 기분이었다. 묘하게 엮어 들어가는 태율과의 인연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전생부터 꼬인 인연이라 이거지.
“효험 있는 부적은 값이 좀 나가는디……. 어쩔 거여?”
다채롭게 변해 가는 다온의 표정을 살피던 천신녀가 슬쩍 부적 얘기로 주의를 끌었다.
“값이 좀 나간다는 것은 얼마를?”
부적 한 장에 얼마나 하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다온은 다음에 들리는 숫자에 움찔했다.
“50.”
“50?”
“말도 안 돼. 무슨 부적 한 장에 50씩이나 해요?”
옆으로 물러나 있던 경은도 액수에 깜짝 놀라는 반응이었다.
하고많은 숫자 중에 하필 재수 없게 50이람. 그때도 딱 50만 원 때문에 얽힌 인연이었는데……. 아니지. 이 모든 게 운명이 꼬여서 그런 거라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지.
“여엄병. 아가씨들이 곱게만 자라서 세상 물정을 영 모른갑네. 대충 휘갈겨 쓴다고 부적이다냐? 정성스럽게 기도와 치성을 드려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부적이라야 영험함을 갖는 거제. 한쪽에서만 정성을 드린다고 효험이 있간디? 염병할 소리 하려거든 그냥 가. 재수 옴 붙으면 하루 종일 될 일도 안 돼.”
돈도 돈이지만, 부적을 태율의 베개 속에 집어넣는 것 자체가 모험이었다. 취업과 동시에 독립했다는 아파트는 물론이거니와 얼마 전에 새로 이사했다는 오피스텔 근처에는 가 본 적도 없었다. 행여나 실수로 발이라도 들여서 잡심부름까지 하게 될까, 노파심에 절대 그의 집만큼은 발걸음을 하고 싶지 않았다.
“꼭 날마다 베고 자는 베개에 넣어야 하나요? 책상 밑이나 뭐 이런 곳은 안 되나요?”
“안 돼. 반드시 날마다 대그빡이 닿는 부위라야 혀.”
“대그빡이요?”
“사람의 기는 다 요 대그빡에서 나오는 법이여. 평생 글로 벌어먹고 살 팔잔디, 눈과 귀가 침침하니 글발이 서겄어?”
잡지사 기자니 평생 글로 벌어먹고 살 팔자라는 게 맞는 말이었다.
“한동안은 니 대그빡에 물 묻힐 생각 하지 마. 내가 던진 팥이 그냥 팥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여. 그 팥이 침침한 눈을 뜨게 해 줄 테니, 꼬인 전생을 풀어 낼 의인부터 찾아봐.”
“아무리 그래도, 날마다 출근해야 하는데 머리에 물을 묻히지 말라시면…….”
“여엄병. 언제까지 질질 끌려다니고만 있을 거야? 전생에 소박맞은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생에서도 그렇게 남자 없이 혼자 청승 떨다 늙어 죽을 거야?”
천신녀의 호통에 다온은 또다시 움찔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전생에 소박을 맞았다니. 어쩐지 스물일곱이나 먹도록 지지리도 남자복이 없더라니.
전생부터 배배 꼬인 인연이 옆에 붙어 있으니 오죽했을까. 전생의 그 남자가 구만리를 내다본다는 말에 설득력이 확 와닿았다. 남들과 다른 뭔가를 갖고 태어난 것은 확실했으니까. 진짜 오백 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지는 몰라도, 미래가 마냥 장밋빛일 거라 착각하던 철없던 시절에 맺은 약속으로 인생이 꼬인 것은 확실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녀가 가진 전 재산을 주고서라도 되돌리고 싶었다. 그만큼 다온은 절박했다.
원수 같은 태율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하고 지내 온 세월이 자그마치 9년이었다. 태율이 정해 준 족집게 같은 문제집을 풀다 보니 상위권에만 겨우 머물던 성적은 어느새 최상위권이 되었고, 박여진 여사의 소원이라는 유림대에 떡하니 합격하게 되었다.
태율은 그 당시 대학교 3학년 복학생이었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끝날 줄 알았던 그와의 인연은 어쩌다 보니 학교 학보사로 이어졌다. 꼬박 2년을 사수와 부사수로 시달렸었다. 태율이 졸업하면 가는 길이 달라질 거라는 희망에 버텼다.
아버지와 형을 따라 법대에 갔으니, 당연히 법계로 진출할 줄 알았던 태율이 시청률 탑을 달리는 공중파 방송국 보도국의 잘나가는 사회부 기자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그 어렵다는 언론고시에서조차 1지망 수석합격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남들은 잠잘 시간도 없다는 수습 기간 동안에도 태율은 여유를 부리며 그녀의 대학 생활을 꼬치꼬치 간섭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권유를 가장한 반협박으로 언론고시 준비를 종용했다. 그녀에게는 행인지, 불행인지 졸업 후 2년이라는 기간 동안 언론사 시험에 매번 탈락이라는 쓴 고배를 마셨다. 그래서인지 매거진 월간스톰에 정식으로 입사했을 때 세상의 자유를 다 가진 것만큼 행복했다.
방송국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굵직한 특종을 내고, 뉴스 시간에 얼굴을 비치기 시작하면서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차세대 메인 뉴스의 앵커 후보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잘나가던 태율이 보도국 국장과 맞장을 뜨고 런던으로 파견 근무를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꽃길만 있을 줄 알았다.
하루하루 그가 한국을 떠날 날만을 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예고도 없이 그가 월간스톰에 편집장이라는 직책으로 나타났을 때의 절망감이란. 그게 딱 석 달 전 오늘이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 태율의 취향에 맞는 커피를 사다 나를 때마다, 외부 약속이 없는 날은 그와 단둘이 점심 식사를 할 때마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남자복이 없나요?”
“네 사주팔자에 결혼 운은 딱 2번이여. 스물여덟 살에 한 번, 스물아홉 살에 한 번. 두 번의 기회를 놓치면 평생 혼자 살 팔자여.”
“그럼 안 되죠. 내 꿈이 착한 남자랑 결혼해서 토끼 같은 애들 낳고 알콩달콩 잘 사는 건데.”
그나마 두 번의 기회가 온다는 말에 다온은 귀를 쫑긋했다. 의미 없는 썸 타기만 무한 반복 중이었다. 초반에 썸은 잘 타는데 이렇다 할 결과가 없었다. 오죽하면 이번 생에 남자는 없나 보다라며 자포자기로 가는 도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다 못해 넘사벽이라는 강태율이 옆에서 얼쩡거리니, 양다리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딱 좋았다. 오죽하면 한번은 경은이 심각하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혹시 강태율이 김다온을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옆에 끼고 있으려는 게 아닐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었다. 경은은 태율이 자기 엄마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못 봐서 하는 말이었다. 어찌나 사근사근하고 입 안의 혀처럼 굴던지……. 다온을 대할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냉탕과 온탕의 극명한 온도 차이라고나 할까. 자기 엄마한테 대하는 것에 반만 다정하게 대해 줘도 평범한 여자들은 살살 녹아날 것이 분명했다.
태율은 그저 자신을 숨기지 않고 손쉽게 부려 먹을 수 있는 아랫사람이 필요할 뿐이었다. 그거야말로 진짜 염병할 일이었다. 내 인생은 생각지도 않고, 편하게 부려 먹으려고 옆에 끼고 있다니. 더 이상은 안 돼. 더 늙기 전에 나도 남들처럼 연애도 하고, 사람답게 살아 보자.
다온은 지갑을 열었다. 비상금으로 지갑 안쪽에 30만 원을 가지고 다니긴 했었다. 부족한 20만 원을 채우기 위해 그녀는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왜?”
“몰라서 물어? 네가 오토바이 무게로 내 호기심만 부추기지 않았어도 편의점에서 알바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럼 현성 오빠가 이상한 소리를 주절거리는 걸 듣지도 않았을 테고, 그랬더라면…….”
그랬더라면 잘난 엄마 친구 아들로만 기억되던 강태율이 그 오빠, 그 선배, 그 편집장님이라는 호칭의 변천사를 겪지도 않았을 거라는 것은 누구보다 경은이 잘 알고 있었다. 빠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굳게 다물린 어금니 사이를 뚫고 나왔다. 경은은 재빨리 핸드백을 뒤졌다.
“여기 50만 원이에요. 천지신명님께 우리 친구 잘 좀 봐 달라고 부탁드려 주세요.”
부적과 함께 점집을 나오자, 고즈넉한 골목길에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잘게 부서지던 아침 햇살은 진한 회색 구름 뒤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노란 은행잎이 바람을 따라 낡은 초록색 대문 밖으로 날아갔다. 은행잎을 따라가는 다온의 표정에도 진한 회색 구름이 끼었다. 올해는 기상청에서 겨울이 빨리 찾아올 거라고 예고했었다.
“얼굴 펴, 김다온. 내년에 결혼 운이 있다잖아. 그러지 말고 이번 기회에 우리 사촌 오빠한테 시집와. 우리 오빠 능력 있는 거 알지? 강남 사는 건물주 외아들이다. 그걸로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해. 내가 식사 자리 한번 마련해 볼게.”
“이모네 건물 1층에 커피숍 차리겠다는 야망은 포기해라.”
“야, 너는 나를 뭘로 보고. 우리 오빠 진짜 괜찮다니까.”
“됐다 그래. 너희 이모가 아들 일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물어뜯는다며……. 그래서 별명이 강남 옥수수라며.”
“어머, 야. 우리 이모 늙어서 이빨 다 빠졌어야. 요즘에는 갈비도 잘 못 뜯어. 오빠만 놓고 봐서는, 진짜 남 주기 아까워서 그래.”
“너희 이모랑 맞장 뜰 배짱 없다. 거기다 너희 오빠도 머리 좋다고 소문난 사람이잖아. 극성맞은 너희 이모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하고 다니셔서, 너도 학교 다닐 때 스트레스 꽤나 받았잖아. 내 인생에서 머리 좋다는 사람은 강태율 하나로 족하다. 평생 기죽어 살기 싫다.”
“왜? 너도 머리 좋아. 칠칠치 못하게 뭘 자꾸 까먹고, 흘리고 다녀서…….”
“죽을래?”
다온이 눈을 한쪽으로 흘겨 떴다. 누군가에게 허구한 날 듣는 협박인데, 막상 써먹어 보니 다온의 말투에는 별로 권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미안, 내가 잘못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점심은 먹고 죽자, 친구야. 속 쓰려 죽겠다.”
다행히 바로 꼬리를 내리며 기를 세워 주는 친구의 볼을 다온이 잡아당겼다. 종합병원 산부인과 병동 간호사로 근무 중인 경은은 업무 스트레스를 술로 풀고 있었다.
“으이그, 이 술고래. 그래도 내 기 살려 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다.”
탄력 있게 늘어난 볼을 잡은 손등에 차가운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회색 구름이 기어이 비를 몰고 온 모양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다온의 얼굴이 한없이 처량해 보였다.
“쯧쯧쯧. 기가 잔뜩 죽어서는……. 어쩌다 천하의 김다온이 이렇게 됐냐. 거기서 그 인간만 안 만났어도…….”
“그러게. 거기서 그 인간만 안 만났어도……. 우선은 뭐라도 좀 먹자. 대그빡에 기를 불어넣다 보면, 언젠가는 그 인간한테 맞짱 뜨는 날이 오겠지.”
다온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수백 번도 더 상상해 보았다. 과연 그날, 거기서 강태율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은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 운명이 꼬이기 시작한 그날을 떠올리는 다온의 얼굴에 진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