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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007년 초여름.
올해 들어 하위권을 전전하던 서울 베이스 팀이 승승장구하면서 야구장을 찾는 팬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났다. 새로운 구단주의 재력에 힘입어 두터워진 선수층과 한 단계 성장한 신인들의 기세에 일찌감치 플레이오프 진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응원의 열기가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덕분에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은 올스타 스타디움 정문에 위치한 편의점이 활기를 띠었다. 프로야구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매장 안은 야구장을 찾은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기장 내로는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서인지, 간식거리와 음료를 손에 든 손님들이 계산대 뒤로 길게 줄을 늘어섰다.
두 대의 계산대에서는 바코드 찍어 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앳된 얼굴의 직원 한 명이 간간이 계산대 한쪽 구석에 올려놓은 영어 단어장에 눈길을 주었다.
“13,700원 나왔습니다.”
다온은 기계적으로 지불해야 할 금액을 말하고 과자와 음료수를 봉투에 담았다. 손님이 지폐를 내밀자,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솜씨로 영수증과 함께 잔돈을 건넸다. 계산을 마친 손님이 영수증과 잔돈을 지갑에 챙겨 넣고, 다음 손님이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놓기까지 몇 초의 여유가 있었다. 그 잠깐의 짬을 이용해 영어 단어장의 페이지를 넘기려던 다온은 매장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흠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태율아, 칫솔이 어디에 있었지?”
“왼쪽에서 첫 번째 열, 중간에서 세 번째 칸.”
“찾았다. 버터구이 오징어는?”
“왼쪽에서 두 번째 열, 뒤쪽 맨 아래 칸.”
귀찮은 듯 필요한 것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아는 사람인가 해서 긴장했던 다온은 금세 평정심이 돌아와 기계적으로 상품의 바코드를 스캐너에 찍었다. 태율이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 이름이 대한민국에서 강태율 혼자만의 소유는 아니겠지.
삑삑삑.
“7,200원 나왔습니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괜찮지?”
계산대 위로 슬그머니 칫솔, 버터구이 오징어, 캔커피가 올라왔다. 태율이라 불렸던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지갑에서 여유분의 현금을 꺼냈다. 같이 계산해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 다온은 나머지 물건들을 하나씩 스캔했다.
“귀신같은 자식. 처음 와 봤다면서……. 학교 다닐 때 전교 등수에서 밀릴 때는 열받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네 사진 같은 기억력이 편할 때가 있다니까.”
“헛소리 집어치워라.”
“아, 미안. 알면서도 가끔은 신기해서…….”
손님의 대화를 무심코 듣고 있던 다온은 다시 귀가 쫑긋 섰다. 한 번 보고 물건이 진열된 위치를 정확하게 집어냈다고? 단순하게 단골손님이라 물건의 위치를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한 번 본 것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기억력을 가졌다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다온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강태율…… 오빠?”
무심한 눈빛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다온이 이름을 부르자, 옆에 서 있던 곱슬머리 남자가 오히려 당황했다.
“뭐야, 너랑 아는 사람이야? 젠장! 그럼 내가 크게 실수한 거네?”
“너, 코찔찔?”
다온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흑역사라 할 수 있는 꼬꼬마 시절의 별명을 입에 담는 것을 보니 그녀가 알고 있는 엄마 친구 아들 강태율이 확실했다. 하필 여기서 그를 만나다니. 망할 놈의 호기심.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너, 아직 고등학생이지?”
영어 단어장을 힐끗 내려다본 태율은 확신에 찬 질문을 던졌다. 아니라고 잡아떼 봤자, 전화 한 통이면 밝혀질 거짓말이었다. 다온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이 시간이면 학교나 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너희 집에서도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셔?”
“네? 아……. 그게…… 그러니까…….”
태율이 알 만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었다.
“오늘은 몇 시에 끝나?”
“저, 아직 15분 정도 남았어요.”
“그럼 끝나고 밖으로 나와. 할 말 있으니까.”
계산을 끝마친 태율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게 문을 나섰다. 다온의 대답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학원 빼먹고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은 절대 비밀인데……. 집에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던 다온은 말을 꺼낼 기회조차 놓쳐 버렸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손님이 바구니에 가득 채운 물건을 계산대 위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같이 온 곱슬머리 친구만 뭔가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계산대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폼이 딱히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뭐, 일단은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태율을 믿어 보기로 한 다온은 빠른 손놀림으로 상품의 바코드를 계산대에서 스캔해 나갔다.
태율이 가게를 나가고 정확히 45분 후. 다온은 편의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약속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어 버렸다. 손님들이 갑자기 몰리는 바람에 뭉텅이로 한꺼번에 빠져나간 물건들을 진열해 달라는 매니저 언니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늦었다고 설마 가 버린 것은 아니겠지. 걱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다행히 태율은 편의점 앞에 놓아둔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휴우, 살았다. 다온은 불안으로 울렁대던 심장을 다독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년 만인가. 다온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한 번도 못 봤으니 아마 흘러간 시간이 그 정도쯤 된 것 같았다.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았으니, 이제 스물두 살이 된 건가. 태율은 못 본 사이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기억했던 모습보다 키도 훨씬 크고, 어깨도 넓어지고, 늠름한 남자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엄마의 수다를 통해 그의 소식은 꾸준히 듣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밥상의 주요 화제로 떠오르는 인물이 엄마 친구 아들인 강태율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더라, 우리나라 최고 명문이라 불리는 한림대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변호사인 아버지와 형을 따라 유서 깊은 유림대 법대에 수석으로 들어갔다더라. 운동 신경까지 타고나서 대학 들어가자마자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더라 등등.
길 가다 마주쳤으면 아마도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갔을까. 아니다. 잘생긴 외모에 이끌려 한 번쯤은 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인물 하나는 타고났다. 웬만한 여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두상이 작은데, 그 작은 얼굴 안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가 꽉 들어차 있었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었다.
붓으로 그리듯 진한 눈썹과 누군가 손으로 빚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곧게 뻗은 콧날은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얼굴 전체의 균형을 잘 잡아 주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으로 강조된 수려한 눈매는 예전에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그 안에서 별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다갈색 눈동자. 어린 다온은 예쁘게 반짝거리는 태율의 눈을 가장 좋아했었다.
반면 그 초롱초롱한 눈이 그녀를 볼 때면 짜증으로 자주 찌푸려졌던 기억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 다온이 차마 태율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북적대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거리는 꽤 한산했다. 햇볕이 뜨겁지 않으면서 바람은 시원한 날. 야구 경기를 관람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스타디움 입구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지켜보던 태율이 그녀를 발견했다. 그가 거만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다온은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매니저 언니를 도와 물건 정리 좀 하느라고 늦었어요.”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너 무슨 사고 쳤어?”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네는 다온에게 태율은 다짜고짜 심문하듯 다그쳤다. 한여름 태양 볕처럼 이글대는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쇠라도 녹일 듯한 기세에 기가 눌린 다온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력도 없었다.
“별건 아니고요…… 학교 주차장에 처음 보는 오토바이가 있었는데……. 경은이라는 친구가 무게가 궁금하다고 해서…… 그냥 대충 무게만 재 본다는 게…….”
“그래서?”
“생각보다 무거워서…… 넘어지는 바람에 살짝 긁히기는 했는데…….”
“그래서?”
탁탁. 흰색 플라스틱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조바심이 엿보였다.
“수입 오토바이라고…… 수리하는 데, 단가가 좀 세게 나와서…….”
“그게 얼만데?”
“100만 원이요. 친구랑 각각 50만 원씩 내기로 했어요.”
“100만 원? 그게 별게 아냐? 부모님한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렇게 꽉 막히신 분들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말할까 생각도 했는데……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다시는 용돈 안 준다고…….”
날카로운 눈빛에 기가 죽은 다온은 말까지 더듬었다.
“알 만하다. 컸어도 사고 치고 다니는 것은 여전하구나……. 그렇다고 고등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이런 데서 시간 낭비하면 돼? 너희 엄마는 네 성적이 자꾸 떨어진다고, 과외 알바생 구하시던데?”
“저…… 그래서 말인데요. 집에다 여기서 저 봤다는 것은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딱 한 달만 하려고 했어요.”
“아까는 어디까지 들었어?”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다온은 일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엥? 내가 무슨 말을 들었나? 질문을 곱씹어 보던 다온은 찰싹하고 이마에 손바닥을 내리쳤다. 한쪽 눈썹을 치켜뜨는 신경질적인 모습에 편의점 안에서 그가 친구와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맞다, 아까 오빠 친구가 했던 말. 딱 한 번 보고도 사진을 보는 것처럼 정확하게…….”
“못 들은 걸로 해.”
서둘러 말허리를 자르는 태율을 보며 다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다시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거 포토그래픽 메모리 맞죠? 진짜 신기하다. 현미 이모는 왜 그런 얘기를 안 해 줬을까? 우리 엄마 같으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제기랄. 못 들은 걸로 하랬지?”
버럭 내지른 소리에 다온은 화들짝 놀랐다. 왜 화는 내고 그래. 새삼 죄인 취급을 당하는 것이 억울했다. 다온은 전투 자세를 취하듯 허리에 주먹을 올리고 미간을 구겼다.
“들려서 들은 것을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요? 내가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저절로 들린 건데.”
“그건 현성이가 네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태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윽박지르기가 안 통하자 타이르는 방향으로 작전을 선회하고 있었다.
“맞아.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기억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야. 그렇다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정도는 아니야. 순간 기억력을 끌어내는 능력이 일반 사람보다 탁월한 정도야. 부탁인데, 그냥 모른 체해 줘. 우리 가족들도 모르는 일이야. 당장 이유를 설명하기는 좀 그렇고…… 암튼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특히 너희 엄마한테. 나도 네 비밀 지켜 줄게.”
다른 건 둘째 치고, 엄마한테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잔뜩 구겨지던 다온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초초, 걱정, 분노, 안도. 시시각각 다채로운 감정의 변화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 변화무쌍한 과정을 태율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진짜죠? 나 여기서 알바했다고 우리 엄마한테 절대 안 이를 거죠? 약속하는 거죠?”
“약속해.”
“휴, 다행이다. 저도 오빠 비밀은 반드시 지킬게요. 걱정 안 하셔도 되는 게, 저 입 진짜 무거워요.”
“그럼 다행인데…….”
불신이 담긴 말투였지만, 다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걱정거리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동안은 다시 볼 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관대해지기까지 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오빠가 유림대학교 다닌다는 것은 엄마한테 들었어요.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오빠처럼 유림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꿈이에요. 신문방송학 공부해서 졸업하면 신문 기자가 될 거거든요.”
듣기 좋은 칭찬이 태율의 마음을 녹일 것이라고 생각한 다온은 유림대 입학은 그녀가 아닌 엄마의 꿈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그때 야구장 출입구 근처에 서 있던 곱슬머리 남자가 팔을 높게 흔들었다. 손에 야구장 입장권 두 장을 들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곧 본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야구 경기 시작하려나 봐요. 빨리 가 보셔야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오빠, 안녕.”
태율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원래도 저에게는 무뚝뚝한 편이었으니까. 다온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무안함을 털어 버렸다. 곱슬머리 남자가 빨리 오라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빨리’라는 외침에 미간을 찌푸리는 태율을 뒤로하고 다온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을 내느라 뒤늦게 흘러나온 태율의 인사말은 미처 듣지 못했다.
“그래, 곧 또 보자.”
* * *
“학원 다녀왔습니다. 박 여사, 나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점심도 못 먹었어.”
다온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주방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질렀다.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던 책가방은 거실을 향해 대충 던져 버렸다. 현관 바닥에 철퍼덕하고 주저앉아 발목까지 올라오는 운동화 끈을 푸는데, 한껏 멋을 부린 박여진 여사가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수고했어, 우리 딸. 점심을 못 먹었어? 어떡해, 얼굴 핼쑥한 것 좀 봐. 엄마가 샌드위치 만들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엥? 박 여사, 뭐 잘못 먹었어? 그리고 집에서 웬 화장? 저녁 먹고 어디 가?”
“어머, 얘는 짓궂게 엄마한테 박 여사가 뭐니…….”
콧소리로도 모자라 심하게 비음을 섞은 엄마의 말투에 다온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정이 많아서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타고난 왈가닥 기질에 하기 싫은 일 앞에는 불평 한마디를 꼭 곁들이는 엄마였다.
“엄마답지 않게 오늘따라 왜 그래? 내가 이 집 식모냐, 오자마자 밥 타령이게? 등짝 스매시를 맞아야 니가 정신을 차리지? 이래야 엄마잖아.”
“어머, 어머. 얘는 내가 언제 그랬다고……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짓궂어. 호호호…….”
“호호호.”
평상시의 투덜대는 말투를 흉내 내는 다온을 보며 여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호호 하며 따라 하던 다온은 계단을 내려오는 낯선 그림자에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러다 허벅지 위까지 올라간 교복 치마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마침 태율이도 내려왔네. 태율이 우리 다온이 오랜만에 보지? 그러고 보니 태율이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처음이지, 아마. 우리가 주로 너희 집에 놀러 갔으니까.”
“네. 다온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오랜만이라니. 분명 어제도 봤으면서.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그를 보며 다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다온 뭐 해?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다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래를 향한 시선에 기다란 사이즈의 컨버스 한 켤레가 현관 입구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이 들어왔다. 성인 남자의 표준 사이즈에 해당하는 아빠 신발보다 훨씬 커 보였다. 이걸 왜 못 봤지. 봤더라면 그런 촐싹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다온은 매사 건성인 자신의 성격을 새삼스레 한탄했다.
“전에 엄마가 태율이 학교 다닐 때 반에서 1등을 놓친 적 없다고 말했던 것 기억나지? 대학 들어가면서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 과외 청탁이 끝이 없었거든. 군대 다녀오고,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거절만 하더니, 황송하게도 이번에 네 과외를 직접 해 주기로 했지 뭐니.”
“뭐? 과외 선생님 이미 구했다면서?”
“사실은 엄마가 태율이한테 부탁했다가 퇴짜 맞고 친구를 소개받았었거든.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학교에서 큰 프로젝트를 내 주는 바람에 시간을 못 낸다나……. 덕분에 태율이가 이렇게 와 준 거야.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엄마 친구들이 너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혼자만의 감격에 겨운 나머지 여진은 다채롭게 변해 가는 다온의 표정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놀랐다, 실망했다, 경악에 이르는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태율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세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정말 책임감이 느껴지는데요. 최선을 다해 성적을 올려 보겠습니다. 다온아, 올라가자.”
“아유, 내 정신 봐. 바쁜 태율이 시간을 너무 뺏고 있었네. 뭐 해, 안 따라가고. 오빠가 한참 기다렸어. 너는 과외 선생님 기다리는데 뭐 하느라 이제 와. 나중에 아빠한테 혼날 줄 알아. 오빠랑 올라가서 공부하고 있어. 공부 열심히 하면 엄마가 아빠한테 잘 말해 볼게. 우선은 간식부터 챙겨야겠다.”
여진은 주방으로 다급하게 들어갔다. 정식 과외는 다음 주부터였다. 과외 선생이 올 거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다온은 늦었다는 책망이 억울했다.
“따라와.”
태율은 달랑 한마디를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편의점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명령조의 말투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약점 좀 잡았다고, 내가 무조건 복종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일걸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반항심에 다온은 느긋하게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는 현관 입구에 대충 놓인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참, 김다온. 너 엊그제 받은 용돈은 어디다 쓰고, 점심 사 먹을 돈도 없어? 경은이는? 경은이한테라도 빌리지 그랬어.”
여진이 가자미눈을 하고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다온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위험하다. 같이 사고 친 경은이도 오토바이 수리비에 용돈을 다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뭔가 대답이 엉성하다 싶으면 끝까지 캐묻는 엄마의 성격을 알기에 다온은 정리하던 신발은 제쳐 두고 황급히 계단을 향해 뛰었다.
“돈이 없기는 왜 없어. 내가 깜박하고 지갑을 안 가져가서 그렇지. 과외 선생님 기다리겠다. 나 올라간다.”
“그러게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다음에는 친구한테라도 빌려서 사 먹어.”
“네.”
2층에 도착한 다온은 아래층을 향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엄마의 질문이 잔소리로 바뀌었다는 것은 의심이 사라졌다는 증거였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잘한다. 입 무겁다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
2007년 초여름.
올해 들어 하위권을 전전하던 서울 베이스 팀이 승승장구하면서 야구장을 찾는 팬들의 발길이 부쩍 늘어났다. 새로운 구단주의 재력에 힘입어 두터워진 선수층과 한 단계 성장한 신인들의 기세에 일찌감치 플레이오프 진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응원의 열기가 어느 해보다 뜨거웠다.
덕분에 야구 경기가 있는 날은 올스타 스타디움 정문에 위치한 편의점이 활기를 띠었다. 프로야구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매장 안은 야구장을 찾은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기장 내로는 음식물 반입이 금지되어 있어서인지, 간식거리와 음료를 손에 든 손님들이 계산대 뒤로 길게 줄을 늘어섰다.
두 대의 계산대에서는 바코드 찍어 내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앳된 얼굴의 직원 한 명이 간간이 계산대 한쪽 구석에 올려놓은 영어 단어장에 눈길을 주었다.
“13,700원 나왔습니다.”
다온은 기계적으로 지불해야 할 금액을 말하고 과자와 음료수를 봉투에 담았다. 손님이 지폐를 내밀자,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솜씨로 영수증과 함께 잔돈을 건넸다. 계산을 마친 손님이 영수증과 잔돈을 지갑에 챙겨 넣고, 다음 손님이 물건을 계산대에 올려놓기까지 몇 초의 여유가 있었다. 그 잠깐의 짬을 이용해 영어 단어장의 페이지를 넘기려던 다온은 매장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에 흠칫하며 동작을 멈추었다.
“태율아, 칫솔이 어디에 있었지?”
“왼쪽에서 첫 번째 열, 중간에서 세 번째 칸.”
“찾았다. 버터구이 오징어는?”
“왼쪽에서 두 번째 열, 뒤쪽 맨 아래 칸.”
귀찮은 듯 필요한 것만 대답하는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듣는 음성이었다. 아는 사람인가 해서 긴장했던 다온은 금세 평정심이 돌아와 기계적으로 상품의 바코드를 스캐너에 찍었다. 태율이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 이름이 대한민국에서 강태율 혼자만의 소유는 아니겠지.
삑삑삑.
“7,200원 나왔습니다.”
“이것도 같이 계산해 주세요. 괜찮지?”
계산대 위로 슬그머니 칫솔, 버터구이 오징어, 캔커피가 올라왔다. 태율이라 불렸던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지갑에서 여유분의 현금을 꺼냈다. 같이 계산해도 된다는 의미로 해석한 다온은 나머지 물건들을 하나씩 스캔했다.
“귀신같은 자식. 처음 와 봤다면서……. 학교 다닐 때 전교 등수에서 밀릴 때는 열받았지만, 가끔은 이렇게 네 사진 같은 기억력이 편할 때가 있다니까.”
“헛소리 집어치워라.”
“아, 미안. 알면서도 가끔은 신기해서…….”
손님의 대화를 무심코 듣고 있던 다온은 다시 귀가 쫑긋 섰다. 한 번 보고 물건이 진열된 위치를 정확하게 집어냈다고? 단순하게 단골손님이라 물건의 위치를 잘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사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한 번 본 것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는 포토그래픽 메모리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기억력을 가졌다는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다온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강태율…… 오빠?”
무심한 눈빛과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화들짝 놀란 다온이 이름을 부르자, 옆에 서 있던 곱슬머리 남자가 오히려 당황했다.
“뭐야, 너랑 아는 사람이야? 젠장! 그럼 내가 크게 실수한 거네?”
“너, 코찔찔?”
다온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흑역사라 할 수 있는 꼬꼬마 시절의 별명을 입에 담는 것을 보니 그녀가 알고 있는 엄마 친구 아들 강태율이 확실했다. 하필 여기서 그를 만나다니. 망할 놈의 호기심. 그놈의 호기심 때문에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
“너, 아직 고등학생이지?”
영어 단어장을 힐끗 내려다본 태율은 확신에 찬 질문을 던졌다. 아니라고 잡아떼 봤자, 전화 한 통이면 밝혀질 거짓말이었다. 다온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이 시간이면 학교나 학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닌가? 너희 집에서도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아셔?”
“네? 아……. 그게…… 그러니까…….”
태율이 알 만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대답이었다.
“오늘은 몇 시에 끝나?”
“저, 아직 15분 정도 남았어요.”
“그럼 끝나고 밖으로 나와. 할 말 있으니까.”
계산을 끝마친 태율은 뒤도 안 돌아보고 가게 문을 나섰다. 다온의 대답 따위는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학원 빼먹고 여기서 아르바이트하는 것은 절대 비밀인데……. 집에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던 다온은 말을 꺼낼 기회조차 놓쳐 버렸다.
지금이라도 쫓아가야 하나. 망설이는 사이, 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손님이 바구니에 가득 채운 물건을 계산대 위로 쏟아 내기 시작했다. 같이 온 곱슬머리 친구만 뭔가 미련이 남은 표정으로 계산대 옆을 서성이고 있었다.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는 폼이 딱히 해결책을 제시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뭐, 일단은 기다린다고 했으니까. 태율을 믿어 보기로 한 다온은 빠른 손놀림으로 상품의 바코드를 계산대에서 스캔해 나갔다.
태율이 가게를 나가고 정확히 45분 후. 다온은 편의점 문을 박차고 나왔다. 약속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어 버렸다. 손님들이 갑자기 몰리는 바람에 뭉텅이로 한꺼번에 빠져나간 물건들을 진열해 달라는 매니저 언니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늦었다고 설마 가 버린 것은 아니겠지. 걱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다행히 태율은 편의점 앞에 놓아둔 흰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휴우, 살았다. 다온은 불안으로 울렁대던 심장을 다독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5년 만인가. 다온이 중학교에 입학하고 한 번도 못 봤으니 아마 흘러간 시간이 그 정도쯤 된 것 같았다.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았으니, 이제 스물두 살이 된 건가. 태율은 못 본 사이 확연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녀가 기억했던 모습보다 키도 훨씬 크고, 어깨도 넓어지고, 늠름한 남자 어른이 되어 있었다.
직접 만날 기회는 없었지만, 엄마의 수다를 통해 그의 소식은 꾸준히 듣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밥상의 주요 화제로 떠오르는 인물이 엄마 친구 아들인 강태율이었다. 고등학교 내내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더라, 우리나라 최고 명문이라 불리는 한림대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변호사인 아버지와 형을 따라 유서 깊은 유림대 법대에 수석으로 들어갔다더라. 운동 신경까지 타고나서 대학 들어가자마자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더라 등등.
길 가다 마주쳤으면 아마도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갔을까. 아니다. 잘생긴 외모에 이끌려 한 번쯤은 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도 느꼈던 거지만 인물 하나는 타고났다. 웬만한 여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두상이 작은데, 그 작은 얼굴 안에 선이 굵은 이목구비가 꽉 들어차 있었다. 감탄을 자아낼 정도로, 어느 한 군데 흠잡을 데가 없었다.
붓으로 그리듯 진한 눈썹과 누군가 손으로 빚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곧게 뻗은 콧날은 이국적인 분위기와 함께 얼굴 전체의 균형을 잘 잡아 주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으로 강조된 수려한 눈매는 예전에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그 안에서 별을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다갈색 눈동자. 어린 다온은 예쁘게 반짝거리는 태율의 눈을 가장 좋아했었다.
반면 그 초롱초롱한 눈이 그녀를 볼 때면 짜증으로 자주 찌푸려졌던 기억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지금 다온이 차마 태율의 곁으로 성큼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북적대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거리는 꽤 한산했다. 햇볕이 뜨겁지 않으면서 바람은 시원한 날. 야구 경기를 관람하기에 딱 좋은 날이었다. 스타디움 입구에 길게 늘어선 행렬을 지켜보던 태율이 그녀를 발견했다. 그가 거만하게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다온은 잰걸음으로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매니저 언니를 도와 물건 정리 좀 하느라고 늦었어요.”
“사과할 것까지는 없고…… 너 무슨 사고 쳤어?”
조심스럽게 사과를 건네는 다온에게 태율은 다짜고짜 심문하듯 다그쳤다. 한여름 태양 볕처럼 이글대는 눈동자가 그녀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쇠라도 녹일 듯한 기세에 기가 눌린 다온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력도 없었다.
“별건 아니고요…… 학교 주차장에 처음 보는 오토바이가 있었는데……. 경은이라는 친구가 무게가 궁금하다고 해서…… 그냥 대충 무게만 재 본다는 게…….”
“그래서?”
“생각보다 무거워서…… 넘어지는 바람에 살짝 긁히기는 했는데…….”
“그래서?”
탁탁. 흰색 플라스틱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리는 손가락에 조바심이 엿보였다.
“수입 오토바이라고…… 수리하는 데, 단가가 좀 세게 나와서…….”
“그게 얼만데?”
“100만 원이요. 친구랑 각각 50만 원씩 내기로 했어요.”
“100만 원? 그게 별게 아냐? 부모님한테 사실대로 말할 생각은 안 해 봤어? 그렇게 꽉 막히신 분들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게…… 말할까 생각도 했는데…… 한 번만 더 사고 치면 다시는 용돈 안 준다고…….”
날카로운 눈빛에 기가 죽은 다온은 말까지 더듬었다.
“알 만하다. 컸어도 사고 치고 다니는 것은 여전하구나……. 그렇다고 고등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이런 데서 시간 낭비하면 돼? 너희 엄마는 네 성적이 자꾸 떨어진다고, 과외 알바생 구하시던데?”
“저…… 그래서 말인데요. 집에다 여기서 저 봤다는 것은 비밀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딱 한 달만 하려고 했어요.”
“아까는 어디까지 들었어?”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던 다온은 일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엥? 내가 무슨 말을 들었나? 질문을 곱씹어 보던 다온은 찰싹하고 이마에 손바닥을 내리쳤다. 한쪽 눈썹을 치켜뜨는 신경질적인 모습에 편의점 안에서 그가 친구와 나누던 대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맞다, 아까 오빠 친구가 했던 말. 딱 한 번 보고도 사진을 보는 것처럼 정확하게…….”
“못 들은 걸로 해.”
서둘러 말허리를 자르는 태율을 보며 다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다시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거 포토그래픽 메모리 맞죠? 진짜 신기하다. 현미 이모는 왜 그런 얘기를 안 해 줬을까? 우리 엄마 같으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제기랄. 못 들은 걸로 하랬지?”
버럭 내지른 소리에 다온은 화들짝 놀랐다. 왜 화는 내고 그래. 새삼 죄인 취급을 당하는 것이 억울했다. 다온은 전투 자세를 취하듯 허리에 주먹을 올리고 미간을 구겼다.
“들려서 들은 것을 어떻게 못 들은 걸로 해요? 내가 일부러 들으려고 한 것도 아니고, 저절로 들린 건데.”
“그건 현성이가 네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요.”
태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윽박지르기가 안 통하자 타이르는 방향으로 작전을 선회하고 있었다.
“맞아.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기억력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은 사실이야. 그렇다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정도는 아니야. 순간 기억력을 끌어내는 능력이 일반 사람보다 탁월한 정도야. 부탁인데, 그냥 모른 체해 줘. 우리 가족들도 모르는 일이야. 당장 이유를 설명하기는 좀 그렇고…… 암튼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말아 줘. 특히 너희 엄마한테. 나도 네 비밀 지켜 줄게.”
다른 건 둘째 치고, 엄마한테 비밀을 지켜 주겠다는 말 한마디에 잔뜩 구겨지던 다온의 미간이 서서히 펴졌다. 초초, 걱정, 분노, 안도. 시시각각 다채로운 감정의 변화가 그녀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라졌다. 그 변화무쌍한 과정을 태율은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진짜죠? 나 여기서 알바했다고 우리 엄마한테 절대 안 이를 거죠? 약속하는 거죠?”
“약속해.”
“휴, 다행이다. 저도 오빠 비밀은 반드시 지킬게요. 걱정 안 하셔도 되는 게, 저 입 진짜 무거워요.”
“그럼 다행인데…….”
불신이 담긴 말투였지만, 다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걱정거리가 사라졌다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동안은 다시 볼 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관대해지기까지 했다.
“다시 만나서 반가웠어요. 오빠가 유림대학교 다닌다는 것은 엄마한테 들었어요. 나도 공부 열심히 해서 오빠처럼 유림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꿈이에요. 신문방송학 공부해서 졸업하면 신문 기자가 될 거거든요.”
듣기 좋은 칭찬이 태율의 마음을 녹일 것이라고 생각한 다온은 유림대 입학은 그녀가 아닌 엄마의 꿈이라는 말은 생략했다. 그때 야구장 출입구 근처에 서 있던 곱슬머리 남자가 팔을 높게 흔들었다. 손에 야구장 입장권 두 장을 들고 있었다. 노랫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곧 본게임이 시작될 것이다.
“야구 경기 시작하려나 봐요. 빨리 가 보셔야죠. 만나서 반가웠어요. 언젠가 기회가 되면 또 봐요. 오빠, 안녕.”
태율은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원래도 저에게는 무뚝뚝한 편이었으니까. 다온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무안함을 털어 버렸다. 곱슬머리 남자가 빨리 오라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빨리’라는 외침에 미간을 찌푸리는 태율을 뒤로하고 다온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전속력을 내느라 뒤늦게 흘러나온 태율의 인사말은 미처 듣지 못했다.
“그래, 곧 또 보자.”
* * *
“학원 다녀왔습니다. 박 여사, 나 배고파서 쓰러질 것 같아. 점심도 못 먹었어.”
다온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주방을 향해 힘껏 소리를 질렀다.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던 책가방은 거실을 향해 대충 던져 버렸다. 현관 바닥에 철퍼덕하고 주저앉아 발목까지 올라오는 운동화 끈을 푸는데, 한껏 멋을 부린 박여진 여사가 주방에서 걸어 나왔다.
“수고했어, 우리 딸. 점심을 못 먹었어? 어떡해, 얼굴 핼쑥한 것 좀 봐. 엄마가 샌드위치 만들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엥? 박 여사, 뭐 잘못 먹었어? 그리고 집에서 웬 화장? 저녁 먹고 어디 가?”
“어머, 얘는 짓궂게 엄마한테 박 여사가 뭐니…….”
콧소리로도 모자라 심하게 비음을 섞은 엄마의 말투에 다온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정이 많아서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타고난 왈가닥 기질에 하기 싫은 일 앞에는 불평 한마디를 꼭 곁들이는 엄마였다.
“엄마답지 않게 오늘따라 왜 그래? 내가 이 집 식모냐, 오자마자 밥 타령이게? 등짝 스매시를 맞아야 니가 정신을 차리지? 이래야 엄마잖아.”
“어머, 어머. 얘는 내가 언제 그랬다고……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짓궂어. 호호호…….”
“호호호.”
평상시의 투덜대는 말투를 흉내 내는 다온을 보며 여진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 호호 하며 따라 하던 다온은 계단을 내려오는 낯선 그림자에 그대로 얼어 버렸다. 그러다 허벅지 위까지 올라간 교복 치마를 발견하고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 마침 태율이도 내려왔네. 태율이 우리 다온이 오랜만에 보지? 그러고 보니 태율이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처음이지, 아마. 우리가 주로 너희 집에 놀러 갔으니까.”
“네. 다온아,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오랜만이라니. 분명 어제도 봤으면서.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그를 보며 다온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다온 뭐 해? 오빠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다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래를 향한 시선에 기다란 사이즈의 컨버스 한 켤레가 현관 입구에 얌전하게 놓여 있는 것이 들어왔다. 성인 남자의 표준 사이즈에 해당하는 아빠 신발보다 훨씬 커 보였다. 이걸 왜 못 봤지. 봤더라면 그런 촐싹대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텐데. 다온은 매사 건성인 자신의 성격을 새삼스레 한탄했다.
“전에 엄마가 태율이 학교 다닐 때 반에서 1등을 놓친 적 없다고 말했던 것 기억나지? 대학 들어가면서 엄마 친구들 사이에서 과외 청탁이 끝이 없었거든. 군대 다녀오고, 공부하느라 바쁘다고 거절만 하더니, 황송하게도 이번에 네 과외를 직접 해 주기로 했지 뭐니.”
“뭐? 과외 선생님 이미 구했다면서?”
“사실은 엄마가 태율이한테 부탁했다가 퇴짜 맞고 친구를 소개받았었거든.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학교에서 큰 프로젝트를 내 주는 바람에 시간을 못 낸다나……. 덕분에 태율이가 이렇게 와 준 거야. 너는 상상도 못 할 거다. 엄마 친구들이 너를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혼자만의 감격에 겨운 나머지 여진은 다채롭게 변해 가는 다온의 표정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놀랐다, 실망했다, 경악에 이르는 표정 변화를 지켜보던 태율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세요.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정말 책임감이 느껴지는데요. 최선을 다해 성적을 올려 보겠습니다. 다온아, 올라가자.”
“아유, 내 정신 봐. 바쁜 태율이 시간을 너무 뺏고 있었네. 뭐 해, 안 따라가고. 오빠가 한참 기다렸어. 너는 과외 선생님 기다리는데 뭐 하느라 이제 와. 나중에 아빠한테 혼날 줄 알아. 오빠랑 올라가서 공부하고 있어. 공부 열심히 하면 엄마가 아빠한테 잘 말해 볼게. 우선은 간식부터 챙겨야겠다.”
여진은 주방으로 다급하게 들어갔다. 정식 과외는 다음 주부터였다. 과외 선생이 올 거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다온은 늦었다는 책망이 억울했다.
“따라와.”
태율은 달랑 한마디를 남기고 계단을 올라갔다. 편의점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명령조의 말투가 영 마음에 안 들었다. 약점 좀 잡았다고, 내가 무조건 복종할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일걸요. 무럭무럭 자라나는 반항심에 다온은 느긋하게 신발을 벗었다. 그러고는 현관 입구에 대충 놓인 신발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참, 김다온. 너 엊그제 받은 용돈은 어디다 쓰고, 점심 사 먹을 돈도 없어? 경은이는? 경은이한테라도 빌리지 그랬어.”
여진이 가자미눈을 하고 주방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다온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위험하다. 같이 사고 친 경은이도 오토바이 수리비에 용돈을 다 털어 넣었다는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뭔가 대답이 엉성하다 싶으면 끝까지 캐묻는 엄마의 성격을 알기에 다온은 정리하던 신발은 제쳐 두고 황급히 계단을 향해 뛰었다.
“돈이 없기는 왜 없어. 내가 깜박하고 지갑을 안 가져가서 그렇지. 과외 선생님 기다리겠다. 나 올라간다.”
“그러게 정신을 어디다 팔고 다니는 거야. 한두 번도 아니고……. 다음에는 친구한테라도 빌려서 사 먹어.”
“네.”
2층에 도착한 다온은 아래층을 향해 큰 소리로 대답했다. 엄마의 질문이 잔소리로 바뀌었다는 것은 의심이 사라졌다는 증거였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잘한다. 입 무겁다고 큰소리 뻥뻥 치더니.”